두산리 두산(斗山)마을
장수군청에서 차로 5분거리에 있는 장수군 장수읍 두산리의 두산마을로 향하였다. 논개사당도 두산리에 일부 포함되니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좌우에는 밭이 펼쳐져있고 농부들의 바쁜 일손이 부지런한 인상을 주었다.
나는 자꾸 마을 깊숙히 들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꽃을 보게 되었다. 담배꽃을 보았는데 봉숭아꽃과 비슷하여 호기심으로 따보았다. 그러나 봉숭아처럼 손톱에 물이 들지 않았다. 한참 가다보니 마을에 비석이 있었는데 6.25때 전사한 것인지 유공자 묘라고 쓰여 있고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고 새기었다.
동네입구에 있는 넓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팔각정에 올랐다. 앞에 걸어놓은 버스시간표를 보니 터미널에서 하루 5회 다니며 5분 걸린다고 쓰여 있다. 팔각정을 건립함에 있어 2002년 11월에 신귀룡씨가 1백5십만원을 희사하여 공로비를 세웠다.
팔각정 바로 아래에 귀룡위 선생 공적 기념비(貴龍爲 先生 功績 記念碑)가 있고 비 뒷면에는 申선생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제사를 생활하던 미풍양속 빈농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근검절약과 모범적인 분이라고 쓰여 있다. 옆에는 이 마을은 범죄 없는 마을이라 전주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고 쓰여 있다.
마침 허리가 굽은 어느 노인을 만나 두산마을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두산리는 마봉산(馬峯山)기슭에 자리 잡은 아담한 마을이다. 마을 뒤 마봉산에는 말이 달리는 형국이라는 말봉, 두구봉, 장군바위가 있어, 이마을을 말산(馬山)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 뒤 세월의 흐름을 따라 말(馬)과 말(斗)은 음이 같기 때문에 두산(斗山)으로 와전되었다는 이야기와 과(斗)는 태(泰)와 같은 크다는 뜻인데 마을 뒷산이 큰 산이기 때문에 두산(斗山)으로 불렀다는 설도 있다. 지금도 어른들은 말무, 말뫼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두산리앞에 논개공원에 말과 관련이 있는 한국마사회가 2001년 야외공연장을 지어주었다고 믿는다고 한다.
갓여시밧골, 고랫재, 당고개, 덥바우, 도무짓골이 있다. 그리고 장수리에 있는 들에 물을 대는 두산제가 있고 매화낙지혈(梅花落地穴)의 매산(梅山)들, 모사봉(謨士峯) 발방동, 삼만잇들, 새질재, 서낭댕이, 송장바우가 있다. 또한 십진번덕, 안장봉, 여시밧골, 역적골, 연바대, 염해제, 와룡쟁이, 운곡, 웅골들, 접골, 투구봉, 팔방골등의 이름이 전해오고 있다.
흙돌담집, 스레트집, 빨래터, 나뭇짐, 마늘을 새끼로 늘어뜨린 것, 소들이 노는 모습, 살구나무, 은행나무가 어우러진 이곳은 지금부터 30여년전 그 시절과 같다. 도회지에서 자란 자녀가 있다면 아빠도 예전에는 이런데서 살았다고 이야기해줄 수 있다. 냇가에 물은 하염없이 흘러가고 금방 송사리, 미꾸라지를 잡고 싶은 생각이 났다.
장수는 살고 싶다. 왜? 청정지역이니까. (장수 해병대전우회). 아까 본 프랑카드가 자꾸만 생각이 난다. 살구가 익어 담 밖으로 떨어져 주워
먹으면서 허기를 달랬다. 이집 저집을 쳐다보다가 한옥 집을 발견하였다. 숭의문(崇義門)이라고 대문에 써있었다. 義를 숭상하라는 뜻일 것이다. 안에는 동만재(東滿齋)라는 재실이 있었다.
고려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장군의 25세손인 석담과 26세손, 호의 묘제이다. 그러니까 평산신씨이다. 이 동네에서 이곳 두산리의 주민들이 근면 성실로 축재하여 조상을 흠모하는 자손의 교육을 위하여 묘재를 세웠다고 쓰여 있었다. 입구에서 보았던 신귀룡씨도 이곳 사람이라고 한다. 여기는 신씨, 빈씨 등이 많이 산다.
빈영숙, 신성철의 문패가 보였다. 실개천을 중심으로 12개의 작은 다리로 연결되어 좌우로 동네가 이루어져있다. 정미소라고 쓰여 있긴 하지만 쌀을 내리는 양철통만 조촐하게 자리 잡고 텅빈 마당만 있었다. 집집마다 바깥에 화장실이 2개씩 세워져 있는 것을 보니 수세식은 없나보다. 토담집에 나무토막을 때는 것을 보니 찜질방이 따로 없을 것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80세가 훨씬 넘았나보다. 몇 살이냐고 여쭈어보질 못했다. 마을을 지나 산쪽으로 올라가니 세멘트 도로로 제법 넓게 나 있다. 온 동네가 인삼밭으로 싸여 있어 대단하구나 느꼈다. 그 가운데 두 개의 묘를 보았는데 빈씨의 묘소였다.
묘비를 보니 학생 남원 빈공 덕엽(學生 南原 賓公 德燁) 배유인전주최씨(配孺人全州崔氏) 배유인밀양박씨(配孺人密陽朴氏)라고 되어있다.
아마 한 묘는 첫째부인과 합장을 한 것 같고 옆에 있는 묘는 둘째부인묘인 것 같다. 뒷면에는 두 아내의 이름이 적혀있어 다정하게 보였다.
2000년 4월이라고 된 것을 보니 따로 따로 있던 것을 자녀들이 함께 모신 것 같았다. 초가집을 헐어내고 스레트지붕으로 바꾸었던 30년 전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마을노래 방송은 지금 안하고 있지만 이장집에서는 오늘 민방위대상소집 안내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앞으로 논개생가에서 터널을 거쳐 두산마을을 가려면 30분거리라니 좋은 관광코스가 될 것이다. 말 전설이 깃든 명덕리와 두산리가 자매결연을 맺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한편 민속촌구경도 겸할 것이다. 민속촌이 따로 있나. 용인 민속촌은 인공적으로 만들었지만 이곳 장수두산마을은 자연그대로의 모습이라 한층 더 뜻있는 곳이다.
마지막으로 두산마을 팔방공에 대하여 내려오는 이야기가 재미있어 적어본다.
두산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조때 장수현의 통인으로 있던 구영록(具永綠)이 노하리 가짓재를 넘어가는데 길가에 늙은 중이 배가 고파서 쓰러져 있는 것을 마침 가지고 온 자기 도시락을 주어 구해주니 고맙다고 하면서 그 은혜로 명당자리를 알려주고 묘를 쓸 때 꼭 거꾸로 묻으라 하였다.
그 뒤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그중이 가르쳐 준 곧 향교뒷산 위에 묘를 쓰는데 차마 거꾸로 묻을 수 없어 바로 묻었는데 얼마 안 되어 갑자기 황소 같은 힘이 솟아나므로 그 자신 그 힘을 어찌할 수 없어, 남몰래 밤중에 이곳 산(모세봉)에 나와 보니
낮고 모래가 많아 무너뜨리기가 쉬울 것 같으므로 십진번덕 쪽으로 밀어대니 갑자기 광풍이 일면서 흩어진 모래가 수많은 군사로 변하므로 진을 치고 훈련을 하다가 날이 밝아오면 어디로 사라져 버리어 밤마다 계속 훈련을 하였다.
그런데 그 사실을 현감이 알게 되어 역적모의를 하는 것을 알고 전주감영으로 알려서 삼족을 멸하고 그의 선산을 파니 갑자기 김이 서려 마치 소의 형태를 그리다 말고 사라졌다. 세봉에서 모래를 뿌리고 안장봉에서 안장을 깔고 투구에서 투구를 쓰고 십진번덕에서 십전을 쳤다하여 십진번덕이라 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