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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성회복훈련원 원문보기 글쓴이: 양승식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에스라 3:12-13)” |
탁월한 적응력
인간은 고장난 것에 대한 탁월한 적응력을 갖고 있습니다. 망가진 것들을 처음 대하고 그것들이 자신의 삶에 관계될 때 인간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부자유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망가진 것들을 정상적인 상태로 돌려놓지 않고는 못 견딜 것처럼 씨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나면 탁월할 정도로 망가진 것들에 잘 적응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예전처럼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고 고장난 것들과 함께 잘 지냅니다. 오늘날과 같이 비정상적인 구조가 많고 결핍이 적지 않은 세상에서 어떻게 보면 이 같은 적응력을 축복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다루려고 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각성과 교회의 영광스러운 부흥을 고찰함에 있어서는 이러한 인간의 탁월한 적응력이 부흥의 커다란 장애가 됩니다. 인간의 그러한 적응력은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뒤틀린 기독교 신앙과 망가진 신앙 공동체에 탁월하게 적응하며 살아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적 각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불편을 못 느끼며 살아가던 자신과 교회의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 그 이상의 탁월한 삶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과 자신은 마땅히 그것을 누리며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전에 불편을 느끼지 못하던 자신의 신앙 생활에 대하여 고통을 느끼며 그럭저럭 이어가던 교회 생활의 결함에 대해 깊이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각성과 교회의 영광스러운 회복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느낌이 아니라 두 가지 기준 즉 성경말씀과 객관적인 교회의 경험, 곧 역사입니다.
성전 기공식장에서 있었던 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 이 본문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바벨론에 의해 그 화려했던 예루살렘 성전은 모두 파괴되고 급기야 성전의 제사까지도 그쳤습니다. 그러나 그후 칠십 년이 흘러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조국의 본토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사 성전을 재건토록 하셨던 것입니다.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낸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다시 지대가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성전의 기초공사는 그 옛적 솔로몬의 성전의 남은 기초와 비교하여 너무나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이 성정의 기초가 놓이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무리 가운데는 슬픔의 통곡소리와 기쁨의 환호성이 함께 섞여 성전 공사장을 메웠습니다. 왜 이러한 정경이 벌어졌을까요? 포로 시대 이후에 태어난 전후 세대들을 솔로몬에 의하여 건축된 첫 번째 성전을 본 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지금 오랫동안 그쳤던 제사가 다시 드려질수 있는 장소인 성전에 기초가 놓여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감격의 환호성을 지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쁨의 환호성과 함께 슬피 우는 통곡소리가 성전 기공식 현장에 메아리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옛날 솔로몬 성전의 영광스러움을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성전의 위엄과 영광스러움을 생각할 때 축소된 채 초라하게 놓여지는 두 번째 성전의 기초공사를 바라보자 그들은 가슴을 찢으며 슬피 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성전의 영광스러움이 어느 정도인지 역사 속에서 목격했던 사람들에게 재건되는 성전의 모습은 통곡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유일한 대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직하게 이 시대의 영적인 어두움의 밤이 어느경점을 지나고 있는 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세상 한 가운데 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점점 교회로부터 적게 영향을 받고 있으며,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세상은 더 커다란 영향을 교회에 끼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상이 교회 앞에 무릎을 꿇고 배우는 대신 교회가 부패한 세상과의 타협을 배우고 있습니다. 죄와 세상의 풍조를 따라 흘러가는 거대한 탁류를 거스려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들의 일어섬과 그러한 씨름 속에서 능히 영적인 싸움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는 원동력의 회복 없이는 교회도 소망이 없고 세상도 희망이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영적인 생활의 질적인 변화를 위한 원리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유사한 시대에 살았던 신앙의 선조들이 어떻게 이러한 영적인 위기를 넘기고, 메마른 심령을 안고 살아가던 상황에서 어떻게 다시금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려보냄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백성들로 회복되었는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한 현실인식과 진지한 고민, 그리고 거룩한 슬픔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과 슬픔이 단지 심리적인 불만의 표출로 그치지 아니하고 거룩한 갈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 갈망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여야합니다.
이 땅에 진정한 부흥을 주시도록...
2. 열조의 하나님을 찾아서
“아사왕 십 오년 삼월에 저희가 예루살렘에 모이고 그 날에 노략하여 온 물건 중에서 소 칠백과 양 칠천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무리가 큰 소리로 부르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하매 온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대하 15:10-15) |
본문의 배경
아사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대대적인 신앙 개혁을 시작하였습니다. 아사는 정치보다 신앙에 관심이 깊었던 사람입니다. 아사왕은 유다나라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고 경제적인 부강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백성들의 믿음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모든 경제적인 번영과 세상적인 부강함이 별유익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즉위하자마자 정치적, 외교적 문제가 아니라 궁중과 백성들의 신앙을 바로잡는 일에 먼저 손을 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솔로몬 말기부터 들어온 이방의 우상들이 온 땅에 가득하였고 어디서든지 이방신을 섬기는 제단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궁전안에서까지 우상을 섬기는 일이 행해지게 되었습니다. “아비야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 그 시대에 그 땅이 십년을 평안하니라 아사가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 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 상을 찍고 유다 사람을 명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하며 그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 상을 없이 하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얻으니라” (대하 14:1-5)
기도로 이긴 백만 대군
그런데 이와 같은 개혁이 진행되는 가운데 구스(에디오피아) 사람들이 군사와 병거를 이끌고 유다에 침공하였습니다. 군대가 백만이었고 병거가 삼백이었습니다.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라 유다 전역을 삼키고자 하는 이들과 대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때 아사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는 유다의 왕으로서 백만 대군의 침입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백만대군이 몰려온 위기에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하15:1) 아사는 영적인 인물이었고, 따라서 난국에 대처하는 방식도 신앙적이었습니다. 그는 적군과 마주하여 진쳤으나 자신을 도울이는 자신의 군대가 아니요 하나님이라고 굳게 믿었으며, 이 싸움은 유다와 구스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방 나라와의 싸움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전쟁은 아사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하나님이 구스의 백만 대군을 아사의 손에 붙이셨기 때문입니다.
변화된 사람을 통하여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신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였습니다. 아사 한 사람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추구하였지만,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았습니다. 물론 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국가적인 위기를 넘긴 것도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이었지만 그것은 부르짖는 아사의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아사와 그의 백성들은 왕의 신앙이 경건한 것과 원수들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얻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사 뿐만 아니라, 유다의 모든 백성들이 아사와 같은 마음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사만이 아니라 유다의 온 백성들, 나아가서 이스라엘의 온 백성들이 이처럼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함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유다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아사처럼 한결같이 하나님을 찾고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 아사랴의 예언을 듣고 아사가 깨달은 바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선지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의 개혁에 열중하고 있는 아사에게 새로운 각성을 안겨 주었습니다. 나라는 한창 잘나가고 있습니다. 이전에 일찍이 없었던 신앙적인 감격이 나라를 뒤덮고 있었고, 이길 수 없는 전쟁을 기도로 이겼으며, 온 땅에 개혁의 기운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말씀을 보내시어 아사와 유다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는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이스라엘에는 참 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은 지가 오래였으나, 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서 찾으매 저가 그들의 만난바가 되셨나니. 그때에 열국에 거한 모든 백성이 크게 요란하여 사람의 출입이 평안치 못하며, 이나라가 저나라와 서로 치고 이 성읍이 저 성읍과 또한 그러하여 피차 상한바 되었나니. 이는 하나님이 모든 고난으로 요란케 하셨음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 (대하15:2-7) 그들이 여호와와 함께하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만나기를 원하며 그렇게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의 이같은 예언은 아사에게 커다란 각성을 안겨 주었습니다.(대하15:8-9) 하나님은 아사를 통하여 아사와 그 모든 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받으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사는 폭풍 같은 개혁으로 이방 신상을 제거하고 구스의 군대를 이겼습니다.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를 볼 수 있었고,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는 은혜로운 종교적인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도움을 받으며 한번더 커다란 각성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성도의 공동체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는 영적이고, 신실한 지도자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각성과 부흥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지 지도자들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탁월한 지도자를 바라보며 존경과 감탄을 하며 그런 지도자를 주신 하나님께 단지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치 않으십니다.
영적 각성과 지체됨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그 지도자들을 통해 온 백성들이 함께 깨어나고 함께 여호와를 경외하는 교회, 그리고 그렇게 깨어난 교회를 통하여 세상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좀더 지체의식을 가지고 교회와 민족을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찌하든지 나만 잘 믿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초보적인 신앙의 단계에서 갖게 되는 견해입니다. 신앙은 개인적인 것인 동시에 피할 수 없이 공동체적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복음전도자 John Wesel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혼자 믿는 종교에 대하여 성경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크게 각성하고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처럼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교회와 역사를 전망하였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애끓는 탄원으로 중보기도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같은 지체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아사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사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그 모든 일을 열심히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유다가 그와 같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보시지만 또한 교회를 보시는 것입니다. 나 한사람이 하나님을 찾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추구하는 것은 꼭 필요하고, 또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아무런 관심도 없고, 안타까운 마음도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진실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찾는 우리의 마음이 정도에 있어서 충분치 않거나 방향에 있어서 올바르지 않다는 예기입니다.
온 백성과 함께한 맹세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사람들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전심으로 자기와 같이 하나님을 찾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아사가 행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제일 먼저 행한 일은 하나님 앞에 제사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선지자의 예언을 듣고 각성하여 마음이 불타오르던 아사 왕은 먼저 소 칠백과 양 칠천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칠천칠백 마리의 가축이 번제로 드려지는 현장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은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헌신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단 앞에 선 아사는 곧 하나님 앞에 선 것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개혁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를 원했습니다. 아사는 이처럼 하나님 앞에 커다란 제사를 드리며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 후에 아사와 온 백성들은 결심하였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였던 것입니다.
이상한 결정
이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새삼스럽게 무슨 하나님을 또 찾는다는 말입니까? 실로 오랜만에 유다 역사에 신앙의 새벽이 열렸습니다. 왕은 경건하고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은 아사의 나라와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계셨기 때문에 백만 대군을 격퇴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유다 민족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 나라에 샛별과 같은 신앙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할 군주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같이 하셨기에 오뎃의 아들 아사랴와 같은 신령한 선지자를 보내셔서 예언을 주셨습니다. 어디를 보든지 유다 온 땅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증거는 가득하였습니다. 그 암흑의 사사시대는 이제 막이 내리고 신령한 선지자가 있고, 경건한 왕이 있고, 구스와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이 모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은총의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하나님을 또 찾는다는 말입니까?
열조의 하나님
이들이 누구를 찾기로 결심하였다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호와가 아닙니다. 단순히 주님이 아닙니다. 그들은 ‘열조의 하나님’을 찾기로 언약하였습니다. 아사와 유다 백성들은 깊이 깨달았습니다.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가 있고 은총의 표징이 분명히 있었지만, 열조 시대의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상고하였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에 볼 수 있는 은총의 증거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열조들이 하나님과 함께하심을 누렸던 그 위대한 역사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거의 하나님이 안계신 것과 다름없는 가난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아사와 그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시대에 대적들을 물리쳐 승리하게 하시고,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해 주시며, 경건한 왕을 주셔서 신앙의 개혁을 도모하게 하시는 은혜를 누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아사와 그 백성들은 생각하였습니다. 열조들의 역사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동행하실 때, 그 열조들이 어두운 이방에서 어떻게 불꽃처럼 찬란한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놀라운 약속들을 실제로 성취하며 살았으며 그로 말미암아 온 땅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새롭게 보게 되었는지를 회상하였습니다.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수5:1) 그리고 아사와 그의 백성들은 마음이 가난하여졌습니다. 자신들의 시대가 르호보암이나 솔로몬의 말기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경건한 신앙의 분위기를 누리고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전능하심과 거룩하심을 온 땅에 드러내 보여 주시던 부흥의 때, 열조가 누리던 각성의 시기에 비하면 자신들의 시대의 신앙적인 영향력이 얼마나 왜소한지를 직시하였습니다. 잠시 현재의 신앙에 대하여 스스로 대견해 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열조의 하나님을 찾아야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을 찾기로 다짐하였습니다. 그 언약은 하나님 앞에 맺은 언약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의 하나님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열조의 하나님을 찾기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이일을 위하여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은 단지 옛날에 하나님이 자기들의 열조를 위하여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생각하고 회상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바는 열조 시대에 역사하였던 하나님이 오늘 자기들의 시대에도 그 영광을 보여 주시고, 열조에게 나타나셨던 그 하나님이 동일한 권능과 능력으로 자기들의 시대에도 나타나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역사를 회고하라
그러므로 역사를 읽으십시오.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그들과 동행하셨는지 깨달으며 감격해 보십시오. 그리고 흥분하십시오. 그 위대한 약속들이 단지 열조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하여서 말입니다. 그후에 슬퍼하십시오. 그런 놀라운 특권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오늘날 교회의 현실과 자신의 영적인 삶의 가난함을 보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각성입니다. 아사와 그의 백성들은 자기시대 아득히 잊혀져 가는 다윗 시대의 하나님을 기억하였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의 하나님을 회상하였습니다. 모세 시대의 만군의 여호와를 추억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그 모든 역사들을 옛날 이야기로 회상한 것이 아니라 마땅히 자신들의 시대에 누려야 할 은총의 역사로서 회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역사가 되풀이되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구하였습니다.
위대한 역사는 지금도
오늘도 동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죄악 세상에 둘러싸여 있고 세상은 복음으로부터 영향받기보다는 오히려 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는 자신의 신앙생활을 인하여 만족해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의 것을 원하지도 않고 추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사와 함께 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기들의 시대에 자신들이 해야 한다고 믿는 일들을 하는 것 외에 더 이상의 무엇을 찾고 추구하려고 애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가운데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개인의 신앙의 상태를 깊이 직시하고 그 영적인 곤궁함을 인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위대하신 하나님을 더 알고 싶고, 그분과 더 온전히 교제하며 그 성품을 본받아 더욱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는 갈망이 지금 우리에게 있습니까?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지금 곧 어두운 세상에서 불꽃처럼 살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신앙적인 절박함이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부흥을 사모합니까? 만약에 우리에게 이와 같은 갈망이 없다면 그러한 우리의 형편 자체가 이미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필요로 하는 상황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찾기로 언약함
아사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심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찾기로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서 찾기로 언약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말은 동의어입니다. 그들이 도모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의 삶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일에 온 인격과 성품을 모두 사용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교회와 삶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무력감, 영적인 무기력에 지배 당하게 될 때 우리는 대부분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 모든 무기력은 대체로 그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미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대신에 다른 것들을 주목하고 하나님을 향한 추구에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다른 불경건하고 형식적인 그리스도인과 신앙의 수준을 경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자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 열조에게 나타나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 나와 동행하시고, 그들에게 주셨던 그 놀라운 승리를 오늘 나에게 주시고, 하나님이 동행하시던 지난날, 신앙 선조들의 거룩한 삶 속에 깃들였던 그 놀라운 은혜와 승리를 지금 우리가 누리고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있어서 인생은 이 어두운 세상에서 불꽃처럼 사는 것이 아니면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죄
아사와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도록 백성들에게 촉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는 자는 죽여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는 아사와 그의 백성들의 이러한 결정을 보면서, 그것이 비인간적이라거나 야만적인 결정이라고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이 보여 주고자 하는 바는 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사와 그의 백성들은 정확하게 판단하였습니다. 백성들 중 한 사람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성품을 다하여 위대한 열조의 하나님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문제였습니다. 한 개인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수준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아사와 그의 백성들은 남녀노소 누구든지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고 언약하였습니다. 그들은 나라 온 땅, 방방곡곡에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사모함으로 갈급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가득차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각성과 부흥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또 하나의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하여 결코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하나님을 추구할 뿐 아니라 교회 안의 다른 모든 지체들이, 나아가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갈망하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영적으로 냉담한 자기 만족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열조의 하나님이 함께하셨던 시대의 영광스러움을 알리고 부흥의 시대를 사모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참된 부흥이 있는 곳에는 진정한 하나됨만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버림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곧 그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회색 지대는 없습니다. 믿음 생활에 있어서 중립 지대는 없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오직 두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아사가 자기의 백성들에게 촉구한 것도 오직 둘 중 하나를 분명히 선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든지 아니면 죽임을 당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고 전심으로 열조의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그러한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으로 온 땅에 친히 당신의 뜻이 이루시기를 갈망하는 열망이 없는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린 것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아사와 그 백성들이 결심했던 바는 우상 몇 개를 부수어 버리고 불합리한 제도 몇가지를 뜯어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온 백성이 하나같이 하나님을 추구하도록 그 마음 밭이 기경되기를 원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막을 수 없는 갈망
오직 그 마음이 하나님께만 기울어져 하나님만을 추구하고 전심으로 여호와만을 갈망하는 영적인 변화가 그들에게 도래하기를 원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뿐만 아니라 온 백성들이 이렇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좋으신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리하여 그 열조에게 당신의 위대함을 보이셨던 그 충만한 영광을 자기들의 시대에도 드러내 보여 주시기를 갈망하였던 것입니다. 그 간절한 갈망의 표현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무리가 큰소리로 부르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하매” 그들은 모든 백성들이 빠짐없이 자신들과 같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고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미친 듯이 하나님만을 찾기를 갈망하였던 것입니다. 그 열조의 하나님이 자기들의 시대 가운데 그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지 아니하시면,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여기며 하나님을 구하기를 소원하였던 것입니다.
부흥의 장애물
참된 부흥을 갈망하는 교회에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부흥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각성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영적인 현 상황을 직시하고 근거 없는 마음의 부요함과 현실에 안주하려는 태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바르지 못함을 깨달고, 자신의 영혼의 곤궁함과 교회의 영적인 가난함에 눈뜨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십니까?
마음을 다하지 않는 개인의 신앙 생활은 개인의 의무를 다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심각한 상처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예배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갈망하지 않는 것은 개인의 신앙 생활의 문제일 뿐 아니라 교회 전체의 영적 상태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아사와 그의 백성들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는 자를 죽이기로 결의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성품을 다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는 것은 곧 열조의 하나님이 자신들 가운데 임하셔서 그의 전능하심을 역사하지 못하도록 반항하는 것이라고 인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는 모든 종교적인 모임은 하나님의 관심을 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언제나 그분의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오늘날 예배하고 기도하기 위하여 모이는 대부분의 모임 가운데는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하나님과 교제해야겠다는 단호하고 끈질긴 마음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타성에 젖어서 교회와 집사이를 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삶의 모습입니다.
모두를 위한 하나
아사와 그의 백성들은 이같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을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은 죽이기로 결정한 일의 실행이 갖는 잔인성이 아니라, 그들이 모두 함께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기로 결심한 일입니다. 어느 백화점에서 큰 솥에 가득 끓여 놓은 김이 무럭무럭 나는 먹음직스러운 호박죽이 있었습니다. 누르스름하게 빛깔을 띤 군침이 넘어가는 호박죽이었습니다. 아직 아무도 떠먹지 않은 듯한 방금 쑨 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호박죽에 언제부터 호박죽과 함께 끓었는지 알수도 없을 정도로 통통 불어 있는 똥파리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커다란 호박죽 그릇에서 그 똥파리 한 마리가 차지하고 있는 부피는 극히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큰 솥에 담긴 호박죽은 음식이 아니라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마땅한 오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한 마리 똥파리 때문에 말입니다. 오늘 아사와 그의 백성들이 공동체를 그런 시각에서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를 검색하여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함께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외 없이 마음을 다하여 추구하고 찾는 것이었습니다.
만나주신 하나님
아사와 그 백성들은 홍해를 가르고 만나를 내리시고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키시며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시고 요단의 물을 말리사 가나안 족속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 그것이 자기 시대 속에 재현되기를 갈망하며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들은 짐승의 제사만으로 하나님을 만족케 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가장 훌륭한 제물은 자신들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소중한 마음을 하나님께만 드리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불만족과 고통은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이 더 바쳐지고 더 이상 세상에 나누어 줄 마음이 없는 사람은 세상을 인하여 상처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마음을 주기 때문에 준 만큼 세상으로부터, 세상에 있는 것들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찾았습니다.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그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를 죽이기로 결심하였을 때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그들 가운데 있었겠습니까? 마음의 변화는 반드시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것은 마음의 변화가 아직 충분치 않기 때문입니다.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 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대하15:15)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만난바 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저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하나님 자신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최대 상급은 당신 자신을 그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평강의 부흥
하나님께서 이들과 만나 주시되 그렇게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있는 증거가 온 땅에 나타났습니다.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와 함께하시고 그 백성들이 그 분의 임재 아래서 살아갈 때에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그 쉼, 그분의 날개 아래서 누리는 그 평안한 안식, 그것은 평강입니다. 진정한 안식은 이와 같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은 사람들만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마음이 하나님 한 분을 향하여 모아질 때 이와 같이 놀라운 변화가 교회 속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도무지 뛰어 넘을 수 없었던 불가능한 개혁의 벽을 뛰어넘고, 변혁될 수 없는 비신앙적인 전통들을 타파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부흥은 먼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변화되어 하나님 한 분께 고정되는 일과 함께 시작됩니다.
3. 심판받을 도성 속에 잠든 교회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 19:41-42)
본문의 배경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사건이 있기 직전에 성경이 보도하고 있는 사건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것은 주일이었습니다. 엄창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능하고 놀라운 일들을 보았습니다. 실로 그들의 환영은 대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입성하실 때에 온 성이 소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입성하신 것은 단지 볼품없는 나귀를 타고 들어오신 것이었지만, 환영하는 인파의 찬송과 환영소리는 실로 온성을 뒤 덮었습니다. 그들은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고 불렀고, 그분의 오심이 ‘하늘에는 평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라고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지나가시는 길에는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들었고, 열렬한 추종자들은 자존심의 상징인 겉옷을 벗어서 땅바닥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밭에서 베어 온 종려나무 가지를 깃발처럼 흔들다가 길위에 양탄자처럼 깔았습니다.
이상한 그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억해보십시오. 그분은 이렇게 놀라운 환영을 받으신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왜 이렇게 엄청난 열광과 함께 그리스도의 입성을 환영하였습니까? 그들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민족을 이민족의 박해로부터 구해 내실수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전에는 없는 열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드린 찬송과 환영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인 해방과 구원을 향한 열망의 발로였던 것입니다.
어쨋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한 이례적인 환영과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송을 마땅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이 열렬한 환영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분은 온 백성의 구속을 꿈꾸며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있었고, 이런 구원의 맥락에서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찬송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통곡하시는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엄청난 인파들과 함께 그 행렬은 벳바게와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 성 가까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외투를 집어 던지며 환영의 기쁜 소리와 찬양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 우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헬라어 성경에서는 ‘우시며’라고 번역된 부분을 ‘에클라우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우시고’는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엉엉 소리를 내어 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환영 인파와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다가 갑자기 목놓아 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자신의 도움을 원하며 다가오는 헤아릴수 없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진리로 그들을 가리치시기에 여념이 없는 생애를 사셔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의 야비한 핍박은 실로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지나온 생애에 비추어 보면,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인파들의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감격해야할 모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통곡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통곡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통곡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해볼 때마다 우리는 과연 강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삼십여년 간의 생애는 실로 강철같이 사신 생애였습니다. 특별히 그가 얼마나 강한 생애를 사셨는가 하는 것은 그분의 정서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눈물을 흘리신 기록은 신약 성경에 세 번 나타납니다. 그러나 세 번 모두 자신 때문에 우신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때문에 우셨습니다. 그는 결코 약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초인적인 금식과 강력한 마귀의 시험 속에서도 나약해지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 때문에 이 동리에서 저 동리로 쫓겨 다니면서도 낙심치 않으셨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던 제자들이 당신을 버려두고 도망가던 때에도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속에서도 피와 물은 흘리셨을 지언정 눈물은 흘리지 않으셨습니다. 그토록 강하신 예수께서 가슴이 찢어지는 비탄과 슬픔으로 통곡하며 우셨습니다.
왜 우셨을까?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 앞에서 목놓아 우신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가 우신 이유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19:41)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우신 것은 성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성을 바라보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을 더 뜨거워졌고 통곡은 더 깊어졌습니다.
울어야 할 만한 일이 예루살렘 성에 있었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예나 다름없이 우뚝 서 있고 사람들은 저마다 하루의 일과를 수행하기 위하여 바쁘게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성을 보시자 마치 물이 가득한 주머니가 터지듯이 과격한 통곡으로 우시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신적 정서의 발로입니다. 때때로 부힁의 때에 각성한 사람들은 이처럼 신적인 정서 속에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사정없이 통곡하게 만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고 있는 비관주의나 염세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는 자리에서 그토록 통곡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곡하며 우신 것은 그 성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의미에서의 목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성을 보시면서 아무런 문제 없이 서 있는 광경 속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성곽과는 달리 파도처럼 밀려오는 역사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바라볼수 없는 그 광경을 그리스도는 목격하였던 것입니다. 미래에 일어나 일이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산앙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초로 그 모든 것을 분별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것은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이 깃들었던 예루살렘 성이 무너질 심판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곡하시다가 자신도 모르게 토해 놓으신 독백이 이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눈에 숨기웠도다” 이것은 선포가 아니라 차리라 독백과 같은 것이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신앙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곳을 중심으로 왕들을 세우시고 율법을 가르치셧습니다. 거룩한 언약의 성전을 거기에 두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안에 살고 잇는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멀어져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임하리라는 사실에 대해서 아셨습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나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눅19:43-44)
그리스도의 시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후일 있을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최후의 날, 그날을 주후 칠십년에 있엇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이 우시던 때와 같은 유월절 절기를 위하여 백만여면의 유대인들이 모여있었습니다. 후일 로마의 황제가 된 장군 디도가 이끄는 군대들에 의하여 그곳은 포위당하였습니다. 그 성안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보급이 끊기자 극심한 기근과 목마름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 성안에 버려졌고 급기야는 어린아이를 잡아서 삶아 먹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후 칠십년 6월 24일에는 안토니오 요새가 점령되고, 7월 6일에는 성전의 희생 제사까지 그칠 수밖에 없도록 되었습니다. 8월 27일에는 예루살렘 성의 위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문이 불에 타버렸고, 9월 24일에는 모든 도시가 디도 장군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이날이 바로 예루살렘 최후의 날이었습니다. 그들의 점령에는 무자비한 약탈이 뒤따랐고, 그 일을 위해서는 끔찍한 살육이 자행되었습니다. 거리 이곳저곳에는 겁탈당하는 부녀자들의 비명소리로 아비규환을 이루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피로 도랑을 이루었고 예루살렘 성은 페허가 되었습니다. 살아 남은 자들은 노예로 검투사로 끌려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되어 있는 예루살렘 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잠든 교회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가 깨어있지 못할 때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할 수 없게 됩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고 있었고 부지런히 성경을 베끼고 있었습니다. 어디서든지 율법을 토론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종교적인 일을 위해서 일생을 헌신한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종교적인 삶이나 신앙적인 풍토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보게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잠들어 있을 때 나타나는 뚜렷한 현상은 분별력의 상실입니다. 영적인 분별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처럼 분명하게 보고 계시는 일을 그들은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교회의 특징입니다. 교회는 아주 예외적인 때를 제외하고 언제나 이런 식으로 잠들어 왔습니다. 깊이 잠들 때도 있었고 살짝 잠들때도 있었지만 항상 잠자기를 즐겨왔습니다.
시대 속에서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이처럼 중요하게 생각되어져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고치고 당신들의 백성을 새롭게 살리시기 위해 자신의 힘으로 거의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무지함을 깨우치시기 위하여 친히 일하시기도 합니다. 영적인 것들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신앙의 각성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때로는 역사를 파국으로 몰고 가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위기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도록 만드시기도 합니다. 그 모든 일 자체가 그들에게 각성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사건들을 통하여 그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심각하게 빗나가서 본질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는 자신의 삶속에서 그렇게 일어버린 교회의 영광을 그리워하게 만드십니다.
오랫동안 불편한 것이 없이 살았던 그 탁월한 적응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만족이 아니라 교회와 인간 안에 있는 죄로 말미암는 무감각이 가져다 준 현실 적응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각성의 시대에 깨닫게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의 영광을 회복하기 전에 반드시 이렇게 눈을 뜨게 되는 영적인 각성의 역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감추어진 실상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현실을 정확한 영적인 안목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지 않고는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 지를 알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새드를 향한 하나님의 시각이 자신드의 것이 될 때 비로서 하나님의 마음이 될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루살렘에 이처럼 임박한 미래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이것은 수동태입니다. 누군가에 의하여 보지 못하도록 감추러 버림을 당한 상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영적인 각성이 필요한 교회일수록 영적인 것들에 대하여 무지하게 마련입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신앙에 대하여 염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비성경적인 신앙 속에서 살았는지 우리는 감탄할 따름입니다. 확실히 이 세상에는 속이는 영들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는 무감각 위에 깨닫지 못하게 하는 어두움의 세력들이 무지를 더합니다. 그 가운데 교회는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게 되는 것입니다.
잠들어 있는 성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통곡을 그치신 후에 이어서 방문하신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비둘기 파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상인들의 좌판을 뒤집으셨습니다. 사람들을 이 광경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예수님이 성전을 찾으셨을 때 무슨 엄청난 일이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성전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제처럼, 지난 절기처럼 사람들은 성전에 찾아왔고 지난 번에 행하던 그 일이 그때도 계속되고 있었으며, 작년에 행해지던 의식이 이날에도 되풀이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그 환영 인파도, 예수님을 밤낮없이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성전에서 별다른 하나님의 분노를 살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징그러운 뱀을 보시거나 한 것처럼 흥분하십니다. 오랜 세월동안 전통적인 인습에 따라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십니다. 커다란 죄악의 현장을 목격하시기라도 한 것처럼 상과 의자를 마구 둘러 엎으시면서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본문을 대하면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보십니까?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저는 본문 속에서 이 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며 조국 교회와 여려분의 신앙 생활을 직시하시라는 하나님의 시각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받게 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이런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시대에 태어나면 그 시대의 아들이 됩니다. 그는 자기 삶이 놓여 있는 자리가 가지고 있는 사조와 생각과 사상, 습관 같은 것들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시대 흐름이 옳은 것이건 옳지 않은 것이건 그것과는 상관없이 누구든지 그 시대에 태어나면 그 시대의 소생이 되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일반적인 사고를 거스리며 살아가는 것은 대단한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그렇게 시대를 거스리며 살아가는 일에 대하여 높은 가치를 부여하거나 인식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자신의 이상만을 가지고 그런 고통스러운 삶을 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각성은 바로 그 시대에 태어나서 그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던 사람이 성경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그 시대의 흐름을 따라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그 시대에 유행하지 않는 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엄하게 다스려 바로잡으시는 광경을 보면서 우리가 받게 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있게 된 이 거대한 교회의 전통과 시대의 흐름 속에서 뒤틀리게 해석되어 온 복음에 대한 이해와 기독교 신아에 대한 견해 그리고 치밀한 교회의 조직과 역사 깊은 기독교인들의 습관을 대하면서 문제 의식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격정에 들떠서 예수 그리스도의 입성을 환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 길에 자기의 겉옷을 벗어 깔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지고 있는 그 모든 매매 행위에 대하여 문제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경건하고 성전의 신성에 대한 열망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가 문제로 느껴지도록 만드는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물건을 사고 파는 일과 돈을 바꾸는 일들은 하로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정착된 전통이었습니다. 언제나 급격하게 교회에 심겨진 것들은 급격한 반대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이루어진 일들은 쉽게 인식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마치 예루살렘 입성에 그토록 환영하던 군중들이 자신들의 종교적인 열정과는 상관없이 이처럼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아들의 진노를 살 만큼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평가는 그 교회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 인들의 만족과 불만족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무감각
이 같은 교회의 무감각은 예루살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이 세우신 신적인 기관이지만 그 교회는 세속적인 도시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신령한 영향을 세상에 끼치기도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속된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교회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때로는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신령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심대한 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때도 있었지만 어느 때든지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일반적으로 세상 속에 흐로고 있는 사조와 기류는 하나님의 계시를 신봉하고 말씀의 법도를 따라서 살려고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기독교적인 정신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과 각성이 필요한 시대에 교회는 예외없이 세상의 풍조와 타협하는 데 능숙한 수완자가 되어있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양보하는 대신 세상의 요구를 받아들임이로서 타협에 굴복하고 그 영향을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는 교회와 세상이 갈등을 일으킬 일이 별로 없습니다. 언제가 교회가 부지런힌 세상을 쫓아가기 때문입니다.
깨어있는 길
교회가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일을 피할수 없지만 자신의 거룩한 정체성을 속된 도시 속에서 지켜가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받는 영향과 비교될 수 없으리만치 커다란 영향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마르지 아니하는 진리의 근원이며 다함이 없는 신앙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때에 교회가 세상에서 영향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세상이 끼치는 영향을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재해석하고 여과함으로서 필요한 것들만 취하고 그것들을 받아들일 때에 교회로 하여금 성경적인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할 염려가 있는 것들을 버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서서히 눈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같은 성전 숙정 사건이 그 광경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노를 받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하루 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일어난 역사적이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일은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교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을 보시고 우시다가 성전에 와서 이처럼 진노하시는 것은 그 두사건이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심판을 눈앞에 둔 도시 한가운데는 잠들어 있는 교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은 동일하게 교회의 영적인 상황과 직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들어 있는 교회 한 가운데에는 바로 이같은 탐욕과 이기주의가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었습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아래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는 그 악한 습관과 그릇된 전통들이 교회의 생명을 좀먹고 교회의 영적인 시야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문제입니다. 정신적으로 기능하고 열심히 교회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깊은 침체에 빠진 교회의 영적인 상태에 개선과 조국 교회의 영적 분별력을 회복시켜 주는데 커다란 도움이 안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교회가 이처럼 종교적인 기능을 다하면서도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릴수 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한 시대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많은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들었던 전도자들의 생애를 읽어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깨우시는 각성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에 불현 듯 세상을 보게 하시고 그 세상을 보고 나서 그 영혼들이 불쌍하다는 마음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그 영혼들을 향한 연면의 느낌이 있기 전에 하나님과 관계없이 향햐여 걸아가는 모든 인생들의 비참함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같은 운명에 복종하며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심판을 앞둔 운명과 처지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소위 신적 정서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각성
선지자들의 소명을 바라보면 이 같은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분명히 자기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상들이 아닌 자기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상들이 아닌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설교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고 후세들을 위해서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예언은 당시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상식적인 역사 인식을 뛰어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세속적인 인식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그들의 독특한 역사 인식을 자기의 것으로 삼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경제학자들이 호경기라고 부르는 시대에 가난을 예고하였으며 정치가들이 국운의 전성기를 맞았다고 판단하는 시기에 나라가 곧 무너질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종교가들이 신앙의 번성한 시기라고 생각하던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임박성을 외쳤습니다.
그 시대에 태어나면 그 시대의 아들이 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들이 이처럼 그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것과는 전혀 다른 역사관과 인생에 대한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모두들 낙관하는 사대를 비관적으로 예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으며, 모두들 비관하는 시대에 예언자적인 낙관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촉구하게 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모두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각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나라 대신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으며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보시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선지자적인 인식을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를 바라보시는 것과 거의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야를 가지고 바라보는 여호와를 믿는 신앙과 정치적인 백성득의 삶이,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시야를 가지고 내리는 판단과는 다른 판단을 내리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영적인 소경이 되는 상황을 면하기 위해서는 각성시키는 하나님과 하나님으로 인해 각성된 사람에 의하여 장악된 강단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게 신령하게 열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커다란 영향을 받고 영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될 때 그 변화가 크면 클수록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릴 가능성의 여지는 그만큼 적어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교회의 거룩함을 파괴하고 세속적인 영향을 미치고자 밀려오는 그 모든 세상 풍조 가운데 교회를 지키는 길은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진리를 항상 새롭게 경험하며 세상 풍조를 변화시킬수 있는 신령한 영적인 영향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공급받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세상을 향한 소명에 대해 언제나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탁월하게 복음적인 시각으로 세상의 문제들을 헤쳐 나갈수 있어야 합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상상을 뛰어넘는 진노를 성전에서 보이시고 그 끝에서 주신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에 잠기도록 만듭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마가복음에서 같은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이사야 56:7에서 인용된 말씀입니다. 이사야에서 인용된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사랑을 받으면 영적으로 새롭게 깨어나고 회복되어 은총의 시대를 맞게 될 때 그러한 민족적이며 영적인 형편에 맞먹는 또 다른 변화가 성전에도 있을 것인데 그것은 다름아닌 그 성전이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히브리 본문은 이부분을 이렇게 읽습니다. “왜냐하면 내 집은 그 모든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고 불리어질 것이기 때문이다”(사56:7) 히브리 성경과 헬라어 원문은 모두 이 성전은 단순히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지 않고 소유격을 사용하여 ‘기도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기도의 집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특징이 되어버린 그 집, 구원받을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는 사실을 제외하면 ‘나의 집’임이 잘 드러나지 않을 그 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통찰을 하나 얻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가 영적으로 각성하지 않고는 기도하는 집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왜 그토록 기도에 약해저 있는지 그 원인을 알게됩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많은 우려를 갖게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모든 중요한 요소들은, 하나님의 존재의 속성과 같아서 따로 분리되어 나누어질수 없습니다. 교회가 어느 한 문제에 있어서 심각한 약점이나 오류를 드러내고 있다면 그것은 그렇게 드러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다른 문제들과 필연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에 약한 교회
교회가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 심각하게 약화되어 있는 오늘날의 현실은 단순히 기도 자체만을 강조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되고 있지 못한 오늘날 조국 교회의 현실은 바로 영적인 각성과 부흥이 필요한 시대에 교회들이 놓여 있었던 상황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실로 교회가 부흥을 경험하지 아니하고는 기도하는 집이 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세속적인 모습은 결국 근원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근원적인 뿌리가 바로 마땅히 하나님의 교회가 가져야 할 영적인 특성을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풍성한 기업을 인하여 말할수 없는 즐거움으로 즐거워하는 것 만큼 그러한 구원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구원받지 못한 나라와 백성들을 인하여 슬퍼하여야할 백성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속적인 성전 한복판에는 이미 기도를 잃어버린 예배당이 있었고, 그렇게 기도를 잃어버린 예배당의 모습은 그릇된 하나님과의 관계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흥은 언제나 각성된 소수에 의하여 기도 제목이 도어왔습니다. 자신 안에 하나님의 음성이 있고 그 안에 깨어난 성전이 있어서 그 시대와 조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열망을 소유하게 된 사람들이 자신의 인격의 특징이 기도가 되게끔 하는 변화가 있고서야 교회와 나라의 참된 각성과 부흥을 위하여 제사장처럼 탄원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각성과 기도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이 시대의 교회 모습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생활을 보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과연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나를 묻는 것입니다. 교회의 이와 같은 영적인 형편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약속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와 같은 영적 상황 속에서 신앙 생활을 해나가는 것에 대하여 익숙하던 자신의 삶 속에서 부족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각성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각성을 통해 더 높은 기도 제목들과 시급한 간구의 이유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교회의 특징이 되고 있지 못한 현실은, 단지 하나님이 명하신 여러 가지 종교적인 의미에서 교회가 자신의 할 일을 다하고 있지 못한 무능 이상의 문제를 드러내줍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구원받은 백성의 모임으로서 구원받야야할 백성들에 대한 간절한 기도가 그들의 모임의 특징이 되고 있지 못한 것은 바로 그들의 가난한 영적인 상황을 반영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구원받은 기쁨이 넘칠 때 외에는 세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기쁨으로 헌신할 때가 거의 없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이 구원을 즐거워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고 절박하게 느끼지 않는데 어떻게 그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인하여 감격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구속하신 그 은혜가 아니면 자신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고백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스리고 복음을 거절하는 세상에 구원의 전령으로 살아갈수 있겠습니까?
기도를 아는가?
우리가 과연 기도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영광을 잃어버린 교회의 시대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선포의 중심이 되기보다는 지푸라기와 같은 인간의 사상과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보배들이 설교의 재로가 되었습니다. 기도가 참으로 온 교회의 가장 중심적인 기능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기도의 세계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단지 언어적인 보고 이상의 것이며 , 간절한 기도가 단지 만족스러운 수준의 기도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 교회의 성도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도의 진수인 성령안에서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요? 기도가 깊어지면서 언어가 영혼의 신음소리로 바뀌어 가고 더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면 언어를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는 경지가 있음을 이해하게 된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요? 기도 그 자체가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는 위로가 되는 것을 체험하며 자신을 중보기도에 드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인도받기보다는 인간들이 만든 정교한 규칙과 계획표에 의하여 운영되고, 순간순간 지도하시고 능력 주시는 성령을 의지하기보다는 잘 짜여진 조직과 공교하게 만들어진 기구들을 의지하며, 진액을 짜는 중보 기도 대신 사람들과의 사귐이 교회의 중심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모습으로는 교회가 그 영광스러움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기도와 참된 부흥
오늘날 소위 부흥이라고 불리워지는 것들은 본질을 변화시키는 일에 있어서 지극히 무능하면 따라서 피상적입니다. 현실정이 없거나 성도들로 하여금 그 자신의 삶을 변혁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주는 대신 현실을 도피하게 하거나 일시적인 종교 현상에 그칠 때가 많습니다. 마음을 쏟아 붓고 생사를 건 위기감 속에서 오랜 세월을 끈질기게 기도하는 가운데 일어나느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계획가 조직에 의하여 흉내낸 부흥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참된 부흥은 각성된 사람의 마음을 다 드리는 참된 기도에 뒤어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 시대와 세상의 풍조가 기르쳐준 어리석은 지식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명백하게 볼 수 있는 시야를 되찾는 것입니다. 조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수 많은 말쟁이들의 입씨름이나 입심 좋은 구변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대대적인 부흥입니다. 스치고 지나가는 곳마다 죄를 책망하고 중생케 하는 역사가 일어나며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고 싶어하게 만들어 주는 영원을 향한 각성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전세계에 이와 같은 위대하고 참된 영적인 부흥이 휩쓸고 지나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들의 소망이 완전하게 성취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수 많은 나라들을 혹은 여러 개의 대륙들을 한꺼번에 부흥으로 휩쓸어 버리심으로 평범한 수 많은 사역자들이 그렇게 많이 애쓰고 수고하여도 새롭게 할 수 없었던 교회의 절망적인 상황을 일순간에 새롭게 하셨던 역사들을 성경과 교회사 속에서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부흥, 참된 영적인 각성은 각성된 소수와 개인적으로 부흥을 경험한 적은 무리에게서 시작됩니다. 그들에게 자신들이 체험한 위대한 각성과 부흥에 대한 장엄한 소망을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이 시대의 하나님이 아닌 열조의 하나님을 그리워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들은 비록 고통스러운 지라도 그 기도의 집을 즐겁게 지며 쉼없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에 비구름이 보이지 않아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간구하던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까지 끈질기게 간구하게 만드십니다. 국가적이고 도시적인 위대한 부흥의 조짐이 아직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부흥과 각성을 주시도록 매달리는 것 이외에 대안이 없음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위대한 부흥 이외에 그 어떤 것들도 고통하는 세상과 뒤틀린 교회 시대에 대한 대답이 될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부흥을 향한 영혼의 외치은 한 조각의 구름이 수평선 위에 떠오르도록 만들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지금은 비록 손바닥만한 구름일지라도 장차 온 이스라엘을 흡족하게 적셔줄 위대한 단비에 표적이라는 사실에 우리에 희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