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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맥 제 5 구간 (구절재 ~ 추령)
1. 산행일자 : 2008년 7월 26(토)
2. 산 행 지 : 고당산(칠보산 639.7m), 전북 정읍 ․ 순창
3. 총 산행 거리 및 소요 시간 : 약 19.4km, 9시간 정도(구절재 ~ 추령)
4. 참 가 자 : 강동규, 강영재, 노승애, 박봉하, 설경자, 안상경, 윤희원, 이용준, 이태인, 장현옥 (10명)
5. 날 씨 : 흐림(暴炎)
6. 구간별 산행 거리
구절재(235m)---4.0km--사적골재---4.4km---굴재(300m)---1.5km---고당산(639.7m)---1.5km---개운치(320m,21번도로)---2.0km---두들재(395m)---3.7km---복용재(300m)---2.3km---추령(325m, 49번도로)
7. 산행 일정 계획
(1) 수원(05:00) ∼ 천안논산간, 호남고속 ∼ 태인IC(07:00/아침/08:40) ∼ 30번도로 ∼ 구절재(09:10)
(2) 구절재(09:20) → 안부/39번철탑(10:05) → 336.7봉(10:15/10:25) → 사적골재(10:45) → 임도(10:50) → 용전안부(11:20/11:30) → 476봉/능선분기(11:50) → 굴재(12:30/점심/13:10)→ 고당산(13:50/14:00) → 개운치(14:30) → 망대봉/중계소(15:00/15:10) → 두들재(15:25) →여시목(16:05/16:15) → 복용재(16:50) → 550봉/송곳바위(17:30) → 추령(18:10)
(3) 추령(18:20) ∼ 식사 및 숙박(19:30 ∼ )
8. 산행의 실제(산악대장 제공 자료)
(1) 수원(05:45) ∼ 천안논산간, 호남고속 ∼ 태인(07:40/아침/08:25) ∼ 30번도로 ∼ 구절재(08:45)
(2) - ①
구절재(08:54) → 안부/39번철탑(08:59) → 428봉(10:13/10:23) → 사적골재(10:48/11:09) → 용전안부(11:36/기다림/12:37) → 476봉/능선분기점(12:58) → 553봉(13:17/13:35) → 굴재(13:59) → 고당산(14:43/14:58) → 개운치(15:29/점심/16:16)
(2) - ②
개운치 → 망대봉/중계소(16:48/16:54) → 두들재(17:08) → 여시목(17:56) → 복용재(18:48) → 530봉/분기점(19:08/19:18) → 추령(20:20)
(3) 추령(21:25) ∼ 내장산 관광단지 식사 및 숙박(21:40 ∼ )
(4) 탈출로 및 편의사항(숙소) : 호남식당(063-534-4732), 세르빌모텔(063-538-9487)
9. 산 행 기
[1] 산 행 전
2008년 7월 정맥 산행 계획이 카페에 告示(2008. 7. 21) 되었다. 7월 26일(토요일)은 호남정맥 5구간을 산행하고 27일(일요일)은 호남 5대명산의 하나요 전국 8경에 속하며 호남의 금강산으로 불리는『내장산(정읍시, 순창군과 전남 장성군에 걸쳐있는 산)』을 산행한다고 한다.
봄의 신록,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이 아름다워 사시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명승지 『내장산』을 입소문으로, 영상으로, 사진으로만 듣고 보며 언젠가 한 번 내장산의 절경을 마음에 담고 싶었는데 이제 그 뜻을 이룰 수 있다 싶어 유치원 아이가 놀이 가는 날을 기다리 듯 산행 일이 빨리 왔으면 싶고 기대가 된다. 어쩌면 이번 산행은 主客이 顚倒되는 상황이 아닐까 싶다.
7월 24일, 카페를 방문해 보니 10명이나 참가 신청을 했다. 대 성황이다.
7월 25일, 다시「카페」를 방문해 보니
“내일 정맥 산행 시 비 맞을 준비 하세요. 내일 비올 확률 60-70%입니다. 모레도 약간---”이란 산악대장의 글이 올라와 있다.
지난 산행에 이어 이번에도 雨中 산행을 해야 할 모양이다. 날도 덮고 습도도 높은데 雪上加霜으로 비까지 온다면 산행 일을 「연기」할 수 있는 必要充分 條件이 되는데 산악대장은 그럴 의향이 없는 모양이다. 惡天候로 산행 연기 하거나 포기를 하지 않는 것이 한배산악회의 不文律이고 보면 산행을 抛棄하든지 아니면 雨中 山行을 甘受하거나 비가 오지 않기를 祈禱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낮 동안 오락가락 하던 비가 저녁 무렵부터 굵고 세찬 빗줄기로 변한다. 아마도 장마 비를 피해가기는 어려울 듯싶다. 우의와 갈아입을 옷 두어 벌을 여유 있게 챙기는 것으로 배낭을 꾸렸다.
7월 26일 새벽 03시 30분,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창문을 열고 손을 밖으로 내밀어 보니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는다. 다행이다.
간식과 물을 준비 해 집을 나선 것이 04 : 20분, 경기도 여권민원실 앞에 도착(04 : 55분경)해 보니 대원들이 보이지 않는다. 잠시 후 이태인총무와 산악대장 도착하고 연이어 윤사장, 강영재, 설부장을 비롯하여 안교장선생님이 도착했는데 박상호사장이 보이지 않는다. 상가집이 있어 산행에 참가할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강동규사장, 장부장 잠시 후 도착하고 노부장이 다소 늦어지는 모양이다.
05 : 10분경, 이태인총무 차에 먼저 온 대원들, 승차하고 출발이다.
천안 - 논산 간, 호남고속도로를 달려 태인IC를 빠져 나와(07 : 40분경) 잠시 대기를 한다 싶었는데 후미차 곧 바로 도착이다.
식사를 하기 위해 미리 예약해 둔 태인면 태창리(태인IC에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호남식당(☎ 063-534-4732)』을 찾았다. 이른 아침인데도 미리 연락을 받았기 때문인지 主人丈, 반갑게 맞이한다.
아침상을 받았다. 찬도 여러 가지고 맛깔스럽다.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여 식당을 나와(08 : 25분경) 『구절재』로 이동을 했다. 날씨가 후덥지근하고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다.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내심은 소나기 한 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졌으면 싶다.
[2] 산행 들머리 『구절재』
30번 국도를 따라 달리기를 20여분을 차로 달려『구절재』에 도착을 했다. 정읍시 산내면과 칠보면의 경계지점으로 도로변에는 돌장승 두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고 "산 좋고 물 맑은 살기 좋은 산내면"표지석도 세워 놓았다. 지난 산행 때 본 낮 익은 표지물들이라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오늘은 구절재를 출발하여 사적골과 굴재를 지나 고당산(639.7m)을 극복하고 개운치에 잠시 내려섰다가 망대봉 중게탑을 지나고 두들재를 거쳐 530봉을 빡시게 올랐다 추령에 내려서면 산행을 끝맺게 되는 도상 거리 약 19.4km를 9시간 정도 산행을 할 예정이다.
오늘 산행 중 최고봉인 고당산(639.7m)을 기점으로 동편의 물길(학산, 방산, 추령천)은 옥정호를 거쳐 섬진강을 따라 남해로 흘러들고 북쪽의 칠보천은 동진강을 따라 서해로 빠져들며 내장 저수지로 모여든 서쪽 물은 장성땜에서 영산강을 거쳐 목포만으로 흘러든다고 하는데 물길을 가르는 고당산을 올라 보는 것은 이번 마루금 산행의 큰 의의가 아닌가 싶다.
08 : 54분(산악대장 측정 시간), 참여 대원 10명 중, 무릎 상태가 온전하지 못한 장부장은 점심 식사 장소인 개운치까지 차를 운행하며 주변의 관광지와 유적을 돌아보다 오후 산행에 참여하겠다며 빠지고 나머지 대원들은 신 끈을 졸라매고 스틱 길이도 알맞게 조절하여 산내면 경계 표지석을 돌아 밭을 지나 송림 숲으로 들어서면서 산행을 시작한다.
[3] 능교리 『허궁실』마을
잠시 후 철탑을 지나 무명봉에 올랐다. 배낭 정리를 다시하고 산행에 적합한 의복을 갈아입기 위해 잠시 휴식을 가졌다. 구절재를 출발하여 10여분도 걷지도 않았는데 눈언저리로, 얼굴로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아마도 오늘 산행은 땀과 한판 승부를 겨루어야 할 것 같다.
늘 그렇듯 느긋하게 쉴 여유가 없다. 땀을 닦고 물 한 모금 마신다 싶은데 출발을 서두른다. 산도 더 높아지고 경사각도 심해지며 어느 새 모자 창끝으로 땀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또 하나의 산봉을 오르니 저 아래로 마을이 보인다. 지도상에 표기 된「허궁실」마을이다. 「허궁실」은 정읍시 산내면 능교리(菱橋里)에 있는 마을이다. 능교리에는 「구복리, 대능, 문수동, 봉무동, 사척굴, 새보안, 소군실, 허궁실, 화개동」이 있는데 구복리는 마을 옆에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것 같은 산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문수동은 마을에 서당이 있어서 봉무동은 마을 뒷산 봉우리가 武士形으로 생겼기 때문이며 사척굴은 예전에 마을에서 사기그릇을 만들었다 해서, 새보안은 龍같이 생긴 바위 앞에 새로 보(洑)를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소군실은 마을이 군사를 불러들인 곳이기 때문에, 화개동은 마을에 산불이 잦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출처> 두산백과사전 EnCyber &EnCyber.com,
[4] 모기떼 소동
봉을 내려와 안부를 지나 묘 몇 기를 대하고 다시 묘가 자리한 봉에 오른다. 구절재를 출발한 지 50여분이 지난 시간이다. 묘지 봉에서 또 휴식을 갖는다. 습도가 많고 덮기 때문인지 산행을 시작한지 한 시간도 채 되지 못했는데 갈증도 오고 머리도 어질어질하다. 개운치까지 물 두병이면 족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절반도 가지 못했는데 물 한 병이 동이 났다. 앉아 쉬는 것도 쉽지 않다. 풀숲에 숨어 있던 모기가 땀 냄새를 맡고 ‘왠떡이냐’ 싶었는지 벌 떼처럼 달려든다. 갈 길도 급하고 떼로 달려드는 모기도 성가셔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5] 『사적골』과 『연화정사(蓮花精舍)』
묘지 봉을 떠나 약 17,8분을 진행하니 철탑(39번)이 나오고 급한 오름길로 이어진다. 약 10분여를 숨을 몰아쉬며 봉에 올랐다. 삼각점(정읍 478-1997재설)이 있는 봉이다. 잠시 가쁜 숨을 잠시 진정시키고 다시 급경사 봉에 오른다. 지도에 표기된 428m『소장봉』에 올랐다.
소장봉을 뒤로하고 다시 급경사 내리막을 7,8분 내려가니 시멘트 도로가 나오고 건너편에는 기와집 한 채가 있고 먼저 도착한 대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지도를 확인해 시멘트 도로 안부가『사적골재』고 앞에 보이는 기와집은『蓮花精舍』다.
『사적골』은 정읍시 칠보면 반곡리(盤谷里)에 속해 있는 마을이다. 반곡리는 「구랫들, 아랫벗미들」등 들에 둘러싸인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칠보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가마실, 동막, 막골, 사적골, 석탄, 여옥, 잠버들」이 있는데 「가마실」은 마을이 가마솥처럼 생겼다하여, 「동막」은 여옥 동쪽에서 보면 막처럼 보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막골」은 마을 지형이 활처럼 생겼다하여 만궁이라고도 부른다. 『사적골』은 마을이 모래가 많이 쌓인 골짜기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석탄」은 반곡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석탄사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여옥」은 여암과 옥촉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동쪽에 남바우가 있다하여 「남바우」라고도 부른다. 「잠버들」은 마을이 잔버들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출처> 두산백과사전 EnCyber &EnCyber.com,
날씨가 너무 덥기 때문인가? 쉴 수만 있으면 마냥 쉬고 싶은 생각뿐이다. 온 몸이 나른하고 다리에 힘이 없어 걸음이 흐느적거리는 것 같다.
먼저 도착한 대원들이『蓮花精舍』에 설치된 수도에 머리를 디밀고 씻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급해진다. 급히 배낭을 내리고 차례를 기다려 땀과 열기로 범벅이 된 머리에 찬 물을 쏟아 부니 정신이 번쩍 든다. 굳이 極樂과 地獄을 論한다면 바로 이런 순간이 아닌가 싶다.
날씨가 더워 준비해 온 물을 생각보다 많이 마셔 은근히 물이 모자랄 것 같아 걱정을 했는데 물도 충분이 보충이 되었다. 한결 마음이 느긋해 진다.
방에 혼자 앉아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연화정사 보살님이“어제도 뒷산을 오르다 산꾼 하나가 쓰러져 119 차로 실려 갔다.”며 이 더운 날에 산행을 한다고 은근히 걱정을 한다. 조심해서 산행을 하라는 佛心이리라.
[6] 석탄사(石灘寺)
느긋하게 휴식을 갖고 출발이다. 강영재부장, 무릎에 통증이 온다며 이곳에서 탈출하겠다고 한다. 나머지 대원들은 『蓮花精舍』 뒤 산으로 걸음을 옮긴다. 잠시 오르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오고 도로를 횡단하여 가파른 산봉 쪽으로 마루금 표지기가 달려 있다.
한바탕 숨을 몰아쉬며 땀을 흘려야 할 것 같다. 연화정사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가졌지만 더위로 파김치가 된 상태라 급경사를 이룬 560봉을 오르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가야할 길이고 올라야 할 산이니 단단히 각오를 다리에 힘을 모아 보는데 앞서 길 안내를 하는 대장, 산으로 오르지 않고 시멘트 도로를 따라 진행을 한다. 아마도 『석탄사』를 들렸다 갈 모양이다. 산 오름도 부담이 되고 『石灘寺』를 지척에 두고 지나치는 것이 아쉬웠는데 급경사 560봉을 오르는 것도 피하고 석탄사를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산악대장이 너무 탁월한 생각을 한 것 같다.
현지인들이 560봉을 『사자산』으로 부르며 봉 아래 석탄사(石灘寺)가 자리 잡고 있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걷기를 10여분, 『석탄사』에 도착했다. 절의 규모가 꾀 클 것으로 생각했는데 와서 보니 규모는 아주 작다. 대신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듯 시야가 툭 터져 원근의 조망을 제공해 주는 것이 다행이다. 맑은 날은 서해 바다도 조망할 수 있다고 한다.
사찰의 규모는 작지만 다른 절에서 보았던 건물과 석물이 골고루 갖춰져 있다. 절의 중앙에는 대웅전이 위치해 있고 그 옆으로 삼성각이 있다. 石物로는 대웅전 앞의 5層 石塔이 있고 그 뒤로 아슬아슬하게 梵鐘閣이 배치되어 있으며, 삼성각 옆으로 藥師如來佛상 觀音菩薩상, 수자地藏菩薩상 등이 조성되어 있다. 대웅전 오른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계단 아래에 시멘트 블록의 宗務所겸 공양간으로 사용되는 요사채가 2채 더 있다. 그리고 대웅전 우측에 작은 폭포가 쏟아지는 데 불도의 道場(도량)으로서의 운치를 더해준다.
<참고>
① 藥師如來(Bhaisajyaguru)는 불교에서 중생의 모든 병을 고쳐주는 부처님(여래) 즉, 약사 부처님(Medicine Buddha)을 말함),
② 觀音菩薩은 자비를 덕으로 삼고 가장 널리 믿어지고 있는 보살. 관음·관자재(觀自在)·광세음(光世音)·관세자재(觀世自在)·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라고도 한다. 《무량수경(無量壽經)》을 보면, 이 보살은 <극락정토(極樂淨土)>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협시(脇侍)로서 부처의 교화를 돕고 있는데 단독으로도 신앙의 대상이 되어 중생이 괴로울 때 그 이름을 외면 그 음성을 듣고 곧 구제한다고 함)
③ 地藏菩薩은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 중생의 구제활동을 하는 보살. 산스크리트로는 크시티가르바(Ksitigarbha)라고 하는데, <대지를 모태로 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생명을 낳고 기르는 대지와 같은 능력을 가진 보살을 상징함)
석탄사(石灘寺)는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반곡리 사자산(獅子山)에 있는 사찰로 한국불교태고종에 소속 되어 있다.
신라 선덕여왕(재위:632∼647) 때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 하나 당시 이 지역은 백제의 땅이었으므로 신빙성은 떨어진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의상이 이곳에 절을 짓자 한 제자가 ‘왜 이렇게 한적한 곳에 절을 지어 고생을 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의상은 ‘학승이나 선승은 배가 고파야 공부가 잘 되는 법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1597년(조선 선조 30)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1750년(영조 26) 백암리에 살던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이 중건했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뒤에는 동학군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으나 이 때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그 뒤 가산(迦山) 김수곤(金水坤:1873∼1950)이 중건했고, 1950년 6·25전쟁으로 다시 불에 탄 것을 1973년 탄월(灘月) 조병준(趙竝晙)이 중건을 추진하였다. 1986년에 이르러 법당과 종각을 세워 절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 대웅전과 종각·요사·염불전·삼성각 등의 건물이 있으며, 유물로는 범종과 오층석탑·약사불상·십일면관세음보살상 등이 전한다. 대웅전을 등지고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 위를 무제등(舞際嶝)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은 옛날부터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가뭄이 들었을 때 태인읍의 현감이 직접 주관하여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석탄사에는 「탄사복설」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조선후기 헌종 때 석탄사 아래 원촌마을에 이안복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남의 집 머슴을 살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하루는 주인집 소를 끌고 가다가 사서삼경을 팔러 다니는 책장사를 만났다. 책장사는 사서삼경을 흔들어 대면서‘이 속에 정승판서가 다 있다.’고 외쳐대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들은 머슴 이안복은 서슴없이 주인집 소와 그 책을 바꾸어 버렸다. 정승판서가 다 있다는데 소 한 마리가 대수인가 하고, 주인집에 와서는 소 값에 해당하는 만큼 몇 년 더 머슴을 살겠다고 자청했음은 물론이다.
이안복은 그렇게 해서 구한 책들을 아들 3형제에게 주면서 공부를 시켰다. 바로 석탄사에서 공부를 하도록 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 아들들은 철딱서니가 없었다. 한번은 이안복이 아들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가를 볼 겸해서 석탄사에 올라가보니 3형제는 퉁소와 장구를 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목격한 이안복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아들들이 놀고 있는 방문 앞에 밤새도록 엎드려 있었다. 아들 중의 하나가 화장실에 가려고 새벽에 방문을 열고 나와 보니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절 마당에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닌가. 등에는 눈이 수복하게 쌓인 채로, 이를 보고 아들들은 눈물을 흘리고 반성하였다.
이 후로 3형제가 모두 학업에 열심히 정진하여 과거에 급제하게 되었다.」고 한다.
(※ 이 이야기는 무성서원 집강을 지낸 바 있는 현 75세의 이교면 선생이 전하는 이야기다. 이교면 선생은 석탄사 법당의 상량 글씨를 쓴 분이다.)
[7] 轉禍爲福이 아니라 轉福爲禍가 지름 길
동학의 한이나 전설조차 잊어버릴 만큼 멀리 내려다보이는 경관이 아름다운 절집, 정읍의 사자산 『石灘寺』를 둘러보고 宗務所겸 공양간으로 사용되는 요사채 뒤 언덕으로 올라 『굴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언덕 마루에 올라보니 560봉(사자산) 허리로 길이 나 있다. 절에서 가꾸는 고추밭을 지나 3분여를 진행 하는데 앞서가던 안교장과 강사장이 되돌아 나오며 길이 없다고 한다. 대장은 앞서가 어디쯤 갔는지 알 수가 없고 휴대폰으로 연락을 해도 통화가 잘 되지 않는다. 가던 길을 되돌아 나와 560봉 오르는 길을 찾아보았으나 역시 길이 없다. 한동안 右往左往하다 산죽과 잡목을 헤치며 없는 길을 만들며 급경사를 이룬 560봉 정상을 올랐다. 정상에 올라보니 길도 뚜렷이 나 있고 마루금 표지기도 눈에 띈다. 석탄사 가기 전 시멘트 포장도로에서 산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안도의 숨을 쉬며 마루금을 따라 내려가니 안부(용전마을 안부사거리)에서 대장과 강부장이 기다리고 있다. 무려 50여분을 기다렸다고 한다. 강부장도 중도 탈출을 시도하다 개운치까지 가는 것이 수월할 것이라 판단되어 되돌아 왔다고 한다.
560봉(사자산) 급 오름을 피하자고 석탄사를 들려 산허리로 가로질러 나온다는 것이 고생할 것 다하고 시간까지 허비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轉禍爲福이 아니라 轉福爲禍가 되고만 것이다.
[8] 夏節期의 山行苦
잠시 휴식. 시계를 보니 12 : 30분이다. 원래 계획은 11 : 20분에 『용전마을 안부』에 도착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날씨가 더워 휴식도 잦고 길어져 (구절재 ~ 용전안부 : 약 10km / 3 : 36분 소요) 진행시간이 50여분이나 지체되었다. 잠시 알바를 한 탓도 있지만 더운 날씨도 산행을 그 어느 때보다 더디게 만든다. 이 상태로 추령까지 가는 것이 무리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아무래도 점심식사 후 산행은 포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식히고 다시 출발(12 : 44분)이다. 산죽이 키 높이로 자라 길도 보이지 않고 앞서 가는 사람도 확인이 되지를 않는다.
이번 구간의 山行苦를 순위별로 꼽으라면 아무래도 높은 습도와 더운 날씨가 첫째가 될 것 같고 그다음은 잡목과 키 높이로 자란 풀, 그리고 산딸기와 찔레 등 가시나무가 뒤엉켜 가는 길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고 산죽을 자주 대하는 것도 빼 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더하여 휴식을 가질 때마다 떼로 달려드는 모기와 휴식 지점을 멀리 뒤로 했는데도 끈질기게 따라 붙어 눈앞에 얼쩡거리는 작은 날파리가 또한 여간 성가신 존재가 아니다.
[9] 國師峰 分岐峰 - 순창 國師峰
용전 안부를 출발하여 약 15분을 山竹과 雜木을 헤치며 오른 곳이 476봉, 삼각점이 있는 『國師峰, 665m』分岐峰이다. 국사봉은 정읍시 산내면과 순창군 쌍치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전북산사랑회 김정길 회장’은「군신봉조(君臣奉朝) 형상의 명산」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다.
[국사봉(國師峰·665m)]
순창군 쌍치면의 진산 국사봉(國師峰·665m)은 풍수지리상 임금과 신하가 조회하는 군신봉조(君臣奉朝) 형상이다. 임금을 상징하는 국사봉을 정점으로 좌측엔 삼태봉(三台峰)이 연이어져 삼정승이 좌정한 형상이요, 우측엔 육경봉(六卿峰)이 나열해 육판서가 도열한 형국이다. 전면에는 내전을 뜻하는 내동(內洞) 마을이 있고, 후면에는 옥촉(玉燭)을 밝히는 옥촉봉(516m)이 솟구쳤다. 게다가 섬진강의 상류이자 쌍치의 젖줄인 추령천이 고을 앞을 흐르고 있으니, 풍수지리의 이상적인 모델을 모두 갖춘 길지가 아닐 수 없다. 임실 신평의 국사봉, 완주 구이의 국사봉, 김제 진봉의 국사봉 등 전북의 국사봉들이 하나같이 선비 사(士) 자를 취하고 있는 것과 달리 쌍치 국사봉만 유일하게 스승 사(師)를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향토사학자 양상화씨도 쌍치 국사봉은 군신봉조의 풍수지리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고, 삼정승과 육판서는 세자를 어진 임금이 되도록 가르치는 스승(國師)이기 때문에 국사봉으로 부른다고 고증했다.
예부터 호남에서 제일 아름답고 살기 좋은 순창은 물이 좋다하여 옥천(玉川)이라 했다. 이를 증명하듯 순창은 명현석학들이 많이 배출됐고, 그들이 풍류를 즐기며 벗들과 시를 읊었던 누정(樓亭)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지형이 높은 산과 협곡으로 이루어져 통행인을 검문하는 관방(關防)이 설치됐으며, 우리나라에선 함경도 안변, 강원도 인제, 전북 쌍치 셋뿐이다.겨울이 길어 눈이 많이 내리고 봄이 짧고 기온이 낮은 고랭지여서 복분자와 고추가 풍작을 이룬다. 여름철엔 섬진강 상류 복흥에서 발원한 추령천 맑은 물과 계곡이 빼어난 자연경관과 피서지로 각광받는다. 오월 초순이면 국사봉 자락은 열일곱 소녀의 홍조를 닮은 연분홍과 농익고 요염한 여인을 닮은 진분홍, 그리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우리네 어머니처럼 은은하고 수수한 흰 철쭉들이 형형색색의 장관을 이룬다. 이 무렵에 국사봉에 철쭉축제가 열리며 수령 100년이 넘는 토종 철쭉들이 품어내는 은은한 향기와 청정지역 고랭지에서 재배된 맛깔스런 복분자주가 상춘객들의 몸과 마음을 분홍빛에 취하게 한다. 또 가슴 따뜻한 이 고장 인심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한국전쟁 때는 회문산과 쌍치는 빨치산의 거점이었기에 타 지역보다 늦은 1954년에야 수복됐다. 이로 인해 쌍치면 전체가 잿더미로 변해 폐허가 되었던 애환이 서려있고, 1914년 일제에 의해 상치등면(上置等面과) 하치등면(下置等面)이 통합, 쌍치면(雙置面)으로 지명이 억지로 바뀐 가슴 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 이 때문에 김길용씨는 의용군, 경찰, 빨치산 등으로 신분이 변하며 거제 포로수용소까지 갔다 온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오면서 쌍치의 역사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국사봉 아래 남쪽의 피노(避老)리는 조선 선조 때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낀 노론의 한 사람이 피난 은거한 곳에 마을이 형성됐다. 과거 하치등면 소재지로 5일장이 섰으며, 1894년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곳이 있다. 또한 내동(內洞)은 조선 중종 때 현씨와 임씨가 이주해서 살았고, 기왓장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큰 산(국사봉) 아래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다는 의미다. 둔전리는 조선 경종(976년) 군사훈련장 부근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군량미 확보를 위한 전답이 있는 곳으로 하서 김인후의 훈몽제터와 대학암이 있다. 추령천 기룡암(騎龍岩) 위에 있는 영광정(迎狂亭)은 김원중을 비롯한 8명의 동지가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항일투쟁을 했던 곳으로 망국의 설움을 달래던 곳이다. 종곡리의 우암 송시열의 친필암각, 학선리의 박인걸 치도비와 정려 등 유적이 많다.산줄기는 완주 주화산에서 북으로 금남정맥을 배웅하고 남으로 갈려나온 호남정맥이 만덕산, 오봉산, 성옥산, 왕자산, 구절재, 사적골재를 지나 굴재로 가기 전에 남쪽으로 가지 친 산줄기에 국사봉을 일구고 섬진강 상류인 추령천에 숨어든다. 물줄기는 모두 추령천에 살을 섞고 섬진강을 이루다가 남해의 광양만에 골인한다.<출처> Tong - 네틱님의 [산] 안내통 (글 : 김정길 전북산사랑회 회장)
[10] 굴재 이야기
① 굴 재
國師峰 分岐峰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 잠시 내려가다 모처럼 여기저기 바위가 흩어져 있어 운치가 있는 급경사 산봉을 힘겹게 오른다. 국사봉 분기봉을 출발한지 20여분 경과, 작은 공터를 이룬 산봉 정상(노적봉, 553m)에 도착(13 : 20분경), 휴식 시간을 갖는다.
개운치까지 가보겠다던 강부장, 무릎에 계속 퉁증이 오는지 『굴재』에서 차를 부를 수 있으면 하산을 하겠다고 한다.
넉넉하게 휴식 시간을 갖고 553봉 출발.
안부, 오름 길, 524봉에 올랐다 17분여를 내려오니 복분자 밭이 나온다. 복분자 밭을 벗어나니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넓이의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온다.『굴재, 329m』다.
『굴재(嶺)는 정읍시 칠보면 수청리(水淸里)에서 순창군 쌍치면 학선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칠보면 수청리 굴재마을은 굴같은 재 아래가 된다하여 붙여진 이름고 쌍치면 鶴仙里는 순창군의 최북단에 위치한 마을로 산악지역이며 중앙의 골짜기로 학선천이 흐르며 부정(釜井), 오룡촌(五龍村)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오룡리는 학마을터를 풍수설로 오룡쟁주형(五龍爭珠形)이라 하여 마을이름을「五龍里」라 했으며 마을 옆 동산은 여의주로 다섯 龍이 구슬 하나를 보고 경쟁하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② 「오룡 천주교 성지(五龍天主敎聖地)」
선행자들의 산행기에 따르면 복분자밭 한쪽에 「오룡 천주교 성지(五龍天主敎聖地)」안내판이 설치되 있다고 했는데 앞으로 가는 데만 급급하여 안내판을 확인하지 못했다.
※※※ 안내판 내용 ※※※
이곳은 병인박해(1866) 때 천주교 신도들이 몸을 숨긴 교우촌이다. 충청도와 부안 변산 등지에서 감시의 눈을 피하고 있던 천주교 신도들은 좀더 안전한 피신처를 찾다가 이곳 오룡 마을로 옮겨왔다. 처음에는 고당산 자락에 머물렀으나 몇 해 뒤 지금의 위치로 삶의 터전을 옮겨 공소와 숙소를 짖고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공소와 숙소가 한국전쟁 때 소실되자 1957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공소는 2000년까지 강당으로 이용되었으나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③ 굴재의 전설
『굴재』는 옛날에 정읍과 순창을 연결하는 큰 길로서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길이었으나 지금은 거의 사람 흔적이 없는 한적한 곳이 되었는데「팽매바위와 치마바위」,「밀양박씨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에 대한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팽매바위와 치마바위」는 금실이 다정한 부부바위로 바위 앞에 떡시루를 놓고 촛불을 밝혀 식구들 무병장수를 빌면 효험이 대단하다고하며 특히 임신을 못하는 여인이 찾아와 소원을 빌면 필연코 아기를 갖게 된다는 속설이 전해지는 바위인데 굴재에 보(洑)를 막는 바람에「바천댕이, 굴치, 강덕리」등의 마을과 함께 물속에 잠기고 말았다고 한다.
또 「치마바위」앞에 거대한 초상화가 새겨져 있는 있는 바위가 있는데「밀양박씨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의 초상화로 박잉걸이 積善, 積德하여 不治病을 고치고 죽은 후에 중국 청(淸)나라 고종(高宗)의 황태자로 태어났다하여 박잉걸의 肖像을 바위에 새겼다는 전설이 전해 오는 곳이다.
[11] 고당산(=칠보산)
14 : 00시경 『굴재』 시멘트 도로를 횡단하여 숲속으로 접어들었다. 억새와 잡목이 마루금을 차지한 길을 따라 잠시 오르니 좌측으로 벌목을 한 지역이 나타나고 정면으로 높고 큰 산이 앞에 버티고 있다. 해발 639.7m 『고당산(칠보산)』이다. 오늘 산행 중 최고봉이 된다.
가파른 오름 길은 아니지만 그늘이 없는 伐木地 가장자리를 따라 오르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숲 속을 걸을 때는 그나마 해가 가려 숨통이 트이는 듯 했는데 바람 한 점 없는 허허벌판을 햇볕 세례를 받으며 산봉을 오르니 모자 창끝으로 땀이 줄줄이 떨어진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담은 비온 뒤 흘러가는 시냇물 같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온 몸으로 타고 내리는 땀을 주체할 수가 없다. 걸어도 올라도 벌목지가 끝나지를 않는다.
햇볕 세례를 온 몸으로 받으며 걷기를 20여분, 묘지가 있는 528봉에 오른다. 잠시 휴식을 갖고 다시 힘을 모아 급경사를 이룬 산봉을 오른다. 氣盡脈盡이다. 빨리 산봉에 올라 두 다리를 뻗고 쉬었으면 좋겠다.
528봉을 지나 급경사 山竹 길을 스틱에 의하여 20여분 오르니 묘 1기와 삼각점(정읍 316-1984 재설) 그리고 전북산사랑회에서 세운 정상표지판(고당산(칠보산) / 해발 639.7m / 굴재 1.2km, 개운치 1.7km)이 있는 『고당산』정상에 올랐다. 오전 산행, 아니면 오늘 산행의 마지막 고비를 극복한 것이다. 묘지 잔디밭에 팽개치듯 배낭을 내리고 털썩 주저앉아 급한 데로 물을 꺼내 목부터 축인다. 물도 맛이 있다는데 이보다 더 좋은 물맛이 있을까? 물 한 병을 금새 축내고 또 한 병을 꺼내 마시니 그제야 목마름이 해소된다.
「금남호남정맥 완주 주화산에서 분기된 호남정맥이 북으로 금남정맥을 보내고, 남으로 뻗어가며 만덕산, 경각산, 오봉산, 성옥산, 왕자산, 구절재, 굴재를 지나서 고당산을 솟구쳐 놓고 내장산, 백암산을 거쳐 전남 광양의 백운산까지 이어진다.
고당산은 동진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 되며, 물줄기는 동쪽은 추령천을 통하여 섬진강에 합수되어 남해로 흘러들고, 서쪽은 수청저수지를 통하여 동진강에 합수되어 서해로 흘러든다. 행정구역상 전북 정읍시 부전동과 칠보면, 순창군 쌍치면등 1동 2개면에 경계해 있는 산이다.정상에서 조망은 북으로 수청저수지와 칠보면 마을, 서로는 내장저수지와 뾰쬭뾰쬭 솟아오른 내장산의 연봉들이 병풍처럼 줄지어 다가오고, 건너편으로 추월산, 그리고 발 아래는 개운치와 건너편에 통신시설이 설치된 510봉이 보이며, 남으로 회문산이 조망되어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고 「전북산사랑회」에서 소개를 하고 있다.
[12] 開雲峙와 외딴 집 할머니
느긋한 휴식을 갖고 고당산 정상 표지판을 중심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출발, 山竹을 헤치고 4분여를 내려오니 헬기장이 나온다. 직진으로 헬기장을 통과해서 계속되는 산죽 길을 약 12,3분을 내려오면 산죽 길도 끝나고 급경사 내림 길로 이어진다. 약 16,7분을 발끝에 힘을 주며 내려오니 대나무 밭이 나온다. 마을이 咫尺인 것 같다.
대나무 밭을 통과하니 집 한 채가 있고 장부장과 먼저 도착한 대장 그리고 노부장이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예정 시간(14 : 30분)보다 1시간 10분 늦게 『개운치』에 도착(15 : 40분경)을 했다. 우선 배낭을 내려놓고 얼음물로 갈증을 해소하며 마당에 있는 수돗물로 세수를 할 차례를 기다렸다.
미리 점심식사를 한 대장, 오후 산행 탈출자를 확인한다. 오전 산행에 참여하지 않은 장부장을 제외한 전 대원 탈출이다.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다. 지금까지 산행을 하면서 한 두 명은 중간 탈출은 있었지만 오늘 산행처럼 집단 이탈은 처음 있는 일이다. 오전 산행에 어지간히 혼쭐이 난 모양이다. 대장도 난감한 모양이다.
대장, 함께 산행을 권하지 못하고 물과 간식 등 꼭 필요한 등산 용품만 챙겨 장부장과 함께 출발하고 나머지는 식사 준비를 한다. 함께 산행하지 못하는 것이 미안스럽다.
대장과 장부장을 보내고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둘러앉았다. 세수를 하고 땀을 식히는 동안 노부장이 라면도 끓여 놓았다. 아침에 호남식당에서 준비해온 도시락과 각자 준비해온 찬을 내 놓으니 자리가 비좁다. 복분자도 3만을 주고 할머니에게 구입을 했다. 3년간 묵혀 둔 술이라고 한다. 느긋한 마음으로 알싸한 복분자주도 마시고 얼큰한 라면 국물에 밥 한술을 입안에 떠 넣으니 밥이 절로 녹아 넘어가는 것 같다. 어느 맛집에서 이보다 진하고 은근한 맛을 낼 수 있을까?
할머니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밭에 심어 놓은 풋고추도 따오고 직접 담근 고추장과 조개 젓갈도 날라다 주며 먹기를 권한다. 타향살이를 하다 모처럼 찾아온 아들, 딸, 며느리를 반기는 人心이다.
금년 연세 85세.
자식들은 모두 서울에 가서 좋은 직장에 다니고
젊은 시절 빨치산에 끌려가 매를 맞은 것이 화근이 되 허리를 움직이기 힘들다고 한다. 매 맞아 생긴 병이라 치료할 방법이 없단다. 외딴집에서 혼자 생활하다보니 사람이 그립단다. 주말이면 가끔 찾아주는 산꾼들이 그저 반가운 모양이다.
할머니가 외롭게 살아가는 개운리『開雲峙』는 순창군 쌍치면 芳山里에 있는 고개로 정읍과 순창 쌍치면을 연결시켜 주는 고개다. 방산리에는 방산, 사기점, 개운리 등의 자연마을이 있는데 「방산」은 유난히 매화나무가 많아서 마을 이름을 방매(芳梅)라 불렀으며 지금도 매화락지(梅花樂地)란 말이 전한다. 그러다가 일제시대 행정구역개편으로 이름을 방산(芳山)이라 고쳐졌다고 한다. 방산과 새터 사이를 넘는 개운재는 옛부터 서해안 소금과 해산물의 운반산업 노선으로 평야부외 미곡과 내륙 산간부의 잡곡을 상호 유통판매 연결하는 통행대로로 『개운치』라는 이름은 마을 이름이 개운리(開雲里)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3] 중도 탈출의 아쉬움
점심 식사 후 이태인총무와 설부장이 차를 이동시키기 위해 출발한지도 한 시간여가 지났는데도 도착을 하지 않는다. 구절재에서 개운치까지 거리가 만만치 않는 모양이다.
대장과 장부장은 어디쯤 가고 있는가? 추령까지 약 3시간 정도가 걸릴 것이라고 하는데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함께 산행을 하지는 못해도 지도에 표기된 지점을 따라 가 본다. 산 오르내림도 있고 가시나무 잡목이 뒤엉킨 지역도 통과할 것이다. 키 높이를 넘는 산죽을 헤치고 가는 것도 만만치 않으리라.
◆ 『개운치』에서 첫 오름 峰이 『망대봉(553.8m)』이다. 이산은 전북 순창군 쌍치면 방산리(개운리)에 있는 산으로 멀리 바라보기에 좋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정상에는 군부대 통신시설이 자리 잡고 있어 정상에는 오를 수 없다.
◆ 망대봉 군부대 정문에서 약 15분 정도 진행하면 『두들재』에 도착한다고 한다. 이 고개는 쌍치면 방산마을과 부전동 부전저수지 근처의 백석마을을 이어주는 고개로 지금은 이곳 두들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수십년전까지는 순창군 쌍치면과 일부 복흥면 사람들이 정읍장날에 맞추어 농산물을 가지고 이곳을 넘나들었다고 한다. 교통이 불편하고 돈이 귀했던 시절 일종의 물물교환 방식의 거래를 위해 소를 포함한 가축까지도 몰고 넘어가기도 하였던 곳이다.
◆ 여시목 안부(두들재에서 약 40분 소요)
◆ 복룡재 : 쌍치면 신성리에서 내장산 상가지역으로 이어지는 고개(여시목에서 약35분 소요된다고 함)
◆ 550봉/송곳바위(복룡재에서 40분 정도 소요)
◆ 추령(秋嶺)
개운치를 출발한지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총무와 설부장 도착했다. 구절재가지 48km나 된단다.
[14] 秋嶺(= 葛嶺)
몇 번이고 떠나는 우리 일행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할머니를 뒤로하고 숙소를 잡기 위해 내장산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개운치를 출발하여 약 30여분 경과 내장산 상가지역에 도착. 숙소를 정하기 전 대장과 장부장이 하산하는 지점을 확인하기 위해『추령』으로 향했다. 몇 구비를 돌고 돌아 오른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경치도 그저 그만이다. 약 20여분을 산모롱이를 돌아 오르니 내장산 표지석이 나오고 모텔과 음식점 그리고 넓은 주차장이 마련된 『秋嶺』에 도착 한다.
『추령(秋嶺=葛嶺)』은 순창군 복흥면 서마리(瑞馬里)에서 정읍으로 넘는 재로 원래는 칙'갈 자 『갈령(葛嶺)』이었는데, 어느 때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추령(秋嶺)』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葛嶺을 秋嶺으로 부르게 된 것은 내장산이 가을 단풍으로 유명하게 되면서 이름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한다.
추령에는「장승촌」이 있는데 매년 10월 장승 축재가 열린다고 한다.
장승촌에 들려 기념 촬영을 하고 대장과 장부장이 하산하는 지점을 확인한 후 다시 내장산 상가지역으로 내려왔다.
[15] 산행 마무리
미리 연락을 해 둔 상가지역 내 「세르빌모텔(063-538-9487)」에 숙소를 정하고 샤워를 하니 날아갈 듯 몸이 가볍다.
19 : 00시경, 모텔 1층에 마련 된 식당에 들려 대장과 장부장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해물 파전에 이스리를 나누며 더위로 홍역을 치룬 산행이야기며 끝까지 산행을 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20 : 20분, 산악대장과 장부장, 하산했다고 한다. 꼬박 4시간 산행을 했다. 아마 오후 산행에 동참을 했으면 한 시간은 더디 내려왔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21 : 00시(오후 9시)가 임박해서야 대장을 마중나간 차(이태인 총무) 도착, 21 : 40분경, 오늘 산행에 참가한 모든 대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스리를 한 잔씩 따르고 오늘 산행의 수고로움과 내일의 무사 산행, 한배 산악회의 무궁한 발전을 위한 건배를 하는 것으로 호남정맥 5구간 절반 및 완주 산행을 마무리 했다.
♣♣♣♣♣♣♣♣♣♣ <<< 참 고 자 료 >>> ♣♣♣♣♣♣♣♣♣♣
<참고자료 1> 菩薩像
① 지장보살 (地藏菩薩)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 중생의 구제활동을 하는 보살. 산스크리트로는 크시티가르바(Ksitigarbha)라고 하는데, <대지를 모태로 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생명을 낳고 기르는 대지와 같은 능력을 가진 보살을 상징한 것이다. 일체중생(一切衆生)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 보는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과 관련하여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후기에 나타났다.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에 따르면, 지장보살은 석가여래의 부촉에 따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이 성불하기 전에는 자신도 성불하는 것을 연기하고 보살로 머무르면서 중생의 죄고(罪苦) 씻기에 전력할 것을 본원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의 운명은 전생의 업에 의하여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업보사상이 불교의 일반설이지만 지장보살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즉 지장보살은 정해진 업도 모두 소멸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지장보살에게 귀의하여 해탈을 구하면 악도를 벗어나 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일찍부터 모든 중생을 지옥의 고통에서 구해주는 지장보살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였는데, 지장보살은 육도윤회를 심판하는 구세주로 등장하였고, 사찰에서는 명부전(冥府殿)의 주존으로 신봉하게 되었다. 지장보살의 정형적 도상은 천관(天冠)을 쓰고 가사를 입었으며, 왼손에 연꽃을,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의 형상으로 묘사되었으나, 한국에서는 삭발한 머리에 석장(錫杖)을 짚고 여의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묘사된다.
② 觀音菩薩(觀世音菩薩)
자비를 덕으로 삼고 가장 널리 믿어지고 있는 보살. 관음·관자재(觀自在)·광세음(光世音)·관세자재(觀世自在)·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라고도 한다. 《무량수경(無量壽經)》을 보면, 이 보살은 <극락정토(極樂淨土)>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협시(脇侍)로서 부처의 교화를 돕고 있는데 단독으로도 신앙의 대상이 되어 중생이 괴로울 때 그 이름을 외면 그 음성을 듣고 곧 구제한다고 한다. 관세음은 세간의 음성을 관(觀)한다는 뜻이고, 관자재라 함은 지혜로 관조(觀照)하므로 자재한 묘과(妙果)를 얻는다는 뜻이다. 또 중생에게 온갖 두려움이 없는 무외심(無畏心)을 베푼다는 뜻으로 시무외자(施無畏者)라 하고, 자비를 위주로 하므로 대비성자(大悲聖者)라 부르며, 세상을 구제하므로 구세대사(救世大士)라고도 한다. 이 보살이 세상을 교화함에는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여러 가지 형체로 나타난다.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하는데, 33신(身)이 있다. 왼손에 연꽃을 들고 있는데 이 꽃은 중생이 원래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나타내며, 그 꽃이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 성불(成佛)한 것을 뜻하고, 그 봉오리는 불성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장차 필 것을 나타낸다. 그 형상을 달리함에 따라 육도(六道)의 중생을 제도하는 성관음(聖觀音)·천수(千手)관음·마두(馬頭)관음·십일면(十一面)관음·준지 관음·여의륜(如意輪)관음 등 6관음으로 나뉘는데, 그 중 성관음이 본신이고 그 밖의 것은 보문시현의 변화신이다. 그 정토, 또는 있는 곳을 보타락가(補陀落迦;Potalaka)라고 하나, 본래 《화엄경(華嚴經)》에 남인도의 마뢰구타국을 보타락가라고 한 것이 처음이며, 중국에서는 저장성[浙江省(절강성)]의 저우산열도[舟山列島(주산열도)]를 보타락이라 한다.
<출처> 야후 백과사전
<참고자료 2 > 수청리(水靑里)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에 있는 리(里)이다. 언덕지대와 수청들에 자리잡은 농촌마을로 동쪽으로 수청저수지가 있다. 자연마을로는 광덕, 굴재, 노적, 송정, 수만, 외청, 청당이 있다. 굴재는 마을이 굴같은 재 아래가 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노적은 마을이 노적.............같이 보이는 칠보산 밑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송정은 마을에 전에 큰 소나무가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수만은 마을 앞에 물이 괴어 가득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청당은 수청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내청과 외청으로 나뉘어졌다.
< 참고자료 3 > 굴재의 전설
① 팽배바위와 치마바위
칠보면 수청리(水淸里)에서 순창군 쌍치면 학선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굴재(嶺)라 부른다. 그 굴재로 넘어가는 길가에 팽매바위와 치마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팽매바위는 굴재 동남쪽에 있고 치마바위는 팽매바위 뒷쪽에 자리잡고 있다. 팽매바위는 웅장하고 늠름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데 윗부분은 대단히 크고, 아랫부분은 작은 모양의 바위다. 치마바위는 팽매바위에 비해 훨씬 작은 것이 예쁘기까지 하다.
먼 옛날, 칠보면에 이름난 장사들이 여러 명 살고 있었다. 저마다 자기의 힘이 제일 세다고 자랑하는 소문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들은 서로가 힘겨루기를 좋아했고, 자기가 힘으로는 제일이라고 자부하는 터라 경쟁하여 천하장사로 인정받는 날을 기대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기회는 찾아오고 말았다. 힘 좋다는 장사들이 칠보산 가장 높은 용추봉에 모여 힘겨루기를 하기로 하였다. 경기 방법은 큰 바위를 들어 무릎 위까지 올렸다가 내려놓는 방법이었다. 서로 바위를 들어보고 워낙 무거운지라 포기하는 사람이 속출했고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겨우 세 사람뿐이었다. 세 사람이 최종 결승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방법은 바위를 키 높이로 들어서 멀리 던져버리는 대회였다. 바위를 가장 멀리 던져 버리는 사람이 천하장사로 탄생하는 것이다.
첫 번째 사람이 무릎 위까지 올리고 그대로 주저앉고, 두 번째 사람이 가슴 위까지 올리다가 그대로 놓고 말았다. 세 번째 사람이 「뭐, 이런 것도 바위라고」 하며 양손 새끼손가락으로 큰 바위를 들어 하늘 높이 쏘아 버렸다. 바위는 한 참을 날아가 굴재에 '펑'하고 떨어졌다. 마치 어린아이가 조약돌로 팽매(팔매)를 쏘듯이 쏘아버린 것이다. 이 광경을 본 장사들은 너무 놀라서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모두들 환성을 지르며 그 장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천하장사가 태어나는 순간은 엄숙하고도 놀라웠다. 이렇게 천하장사가 던져버린 바위가 팽매바위로 불리워졌다. 팽매바위는 웅장하고 큰 바위인데 위쪽 부분이 두루뭉실하고 아랫부분이 작아 남자 성기를 상징하는 바위로 알려졌다.
어느날 굴재를 지나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근방에서 가장 힘이 세다는 여인이었다. 몸집이 사과처럼 뚱보인데다가 힘이 엄청나게 셌다. 이 여인이 팽매바위 곁을 지나다 보니, 남자가 홀로 서 있는 외로운 모습인지라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여인은 산골짜기를 내려가 큰 바위 하나를 물에 씻어, 바위 위에 자기 치마를 벗어 덮고는 불끈 들어서 높이 쏘아 버렸다. 쏜 바위는 팽매바위 뒤에 신부인양 다소곳이 서 있는 바위로 자리 잡고 말았다. 이 바위의 모습이 여인의 치마를 닮았다 하여 사람들은 치마바위로 불렀다.
뜻밖에 아내를 맞이한 팽매바위는 좋아서 싱글벙글하였다. 치마바위 역시 골짜기에서 혼자 물만 계속 마시다가 남편을 만났으니 천생 인연으로 알고 좋아하였다.
수천년이 흐른 지금도 팽매바위와 치마바위 내외는 비바람 속에서도 금실을 자랑하며 다정하게 서 있다. 근방에 사는 사람들은, 밤중에 이 부부 바위 앞에 떡시루를 놓고 촛불을 밝혀 놓은 채 식구들 무병장수를 빌고 있다. 그러면 그 효험이 대단하다고 믿었다.
특히 임신을 못하는 여인이 찾아와 소원을 빌면 필연코 아기를 갖게 된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역시 강산은 변하는 법, 몇 년 전 굴재는 보(洑)를 막는 통에 바천댕이, 굴치, 강덕리 등의 마을과 함께 물속에 잠기고 말았다.
<출처> 정읍뉴스, 2007년 12월 26일 (수) 09:56:45, 김동필
② 굴치의 암벽에 새겨진 초상화
순창군 쌍치면 학선리 오룡마을에서 정읍시 칠보면 수청리로 넘나드는 재를 굴재 또는 굴치라고 부른다.옛날에는 이 고갯길이 정읍과 순창을 연결하는 큰 길로서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길이었으나 지금은 거의 사람 흔적은 없고 맑은 물소리와 새소리만 고요한 골짜기의 정서를 돋구어주고 있다.이곳 순창과 정읍의 경계지점에 거대한 바위 두 개가 서있는데 하나는 치마바위라 하여 옛날 어느 여인이 치마에 쌓아다 놓았다는 전설의 바위이다. 또 그 앞에 있는 바위는 거대한 초상화가 새겨지고 초상화 주인공의 수도비(수도비)를 각하여 놓았으니 적선, 적덕하여 불치병을 고치고 죽은 후에 황태자로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하여 오기에 적어 본다.
밀양박씨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은 1676년에 태인현 원백암리에서 태어나 수직(壽職)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던 태인고을에 갑부였다. 모은공이 노령에 피부병이 생기어 고민거리가 생겼다. 몸에 비늘 같은 것이 생겨 원근의 명의를 불러 약을 쓰고 다스렸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두루 아들들이나 만나보고 여생을 마칠 양으로 둘째 아들이 살고 있는 정읍 산내면 매죽리를 찾아가기 위해서 말을 타고 굴치를 오르고 있었다.모은공은 고개 중턱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때마침 백발노승이 재를 내려오고 있었다. 모은공은 선풍도골의 신선 같은 사람을 보고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화기(華氣)를 느끼는 순간 어쩌면 저 노승은 도를 깨우친 도인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자 이 노승은 모은을 바라보면서 대감 신액을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라고 하였다.모은은 즉시 도승에게 좋은 비방을 알려주시오 라고 하였다. 그러자 도승은 적선을 하십시오. 우선 이 험한 길을 닦으시오 라고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가던 길로 사라져 버렸다. 모은은 이 분의 말을 산신령의 계시라 믿고 가던 길을 되돌아와 자선사업을 시작하였다. 우선 굴치 길을 닦자고 마음먹고 버선발로 재를 걸어가도 흙이 묻지 않을 정도로 납작한 돌로 깔아 놓았다. 그리고 길가에 막을 치고 옷과 신발을 걸어놓고 옷이 없는 사람 신발이 떨어진 사람은 갈아입고 신고 가라는 방을 붙였다.이 말을 들은 원근간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옷과 신을 가져갔으나 누구도 두 벌을 가져간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그 외에도 많은 적선, 적덕을 베풀었으며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석탄사를 중건하는 등 태인고을 곳곳에 많은 덕을 베풀었다.
그 은덕으로 피부병이 완치되어 90장수를 하였기에 수직을 받아 가선대부가되었다. 그후 모은공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 1767년(영조 32) 정해(丁亥)년에 순창과 정읍의 경계에 서있는 거대한 암벽에 모은공의 초상화와 수도비(修道碑)를 순창 태인 병립이라 각하였으니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더욱이 모은공이 세상을 떠나던 해에 중국 청(淸)나라 고종(高宗)의 황태자가 태어났는데 6개월 동안 왼손을 주먹을 쥐고 펴지 않으므로 강제로 펴고 보니 조선 국태인 박인걸 환생이라 쓰여 있었다고 한다.그래서 청나라에서 이 사실을 확인하러 사신이 왔었는데 태인고을 아전들이 박인걸에게 누가될까 걱정하여 박인걸이란 사람이 없었다고 숨기어 버렸다고 한다.그후 청나라 사신들이 떠나면서 그 사실을 말하였기에 자손들이나 태인고을 사람들은 후회하였다는 말이 지금까지 전하여오고 있다.이와같은 문화유적이 엄연하게 존립하고 있으나 지금은 굴치를 넘나드는 사람의 자취가 없어 녹음속에 이끼만 무성할 뿐 찾은 사람도 없으련만 그 흔적마저 없어질 처지에 있던 바 이번 순창 향지사에서 지명을 조사하는 중에 모은공의 후손 박명귀와 마을 이장 김종거 그리고 본사 상임고문 노영환(盧永煥)의 도움으로 현지를 확인하여 그 암벽의 초상화와 수도비를 보고 세월의 무상함과 개인주의 만연으로 자기만 잘살면 된다고 하는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출처> 전라북도 공무원노동조합 홈
2008.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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