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牛)가 된 이야기
몇년전 뉴질랜드에서 귀국하여 마땅히 거처 할 곳이 없어 하단에 있는 여동생 집에 머물때 이야기다.
下端은 어촌으로써 젖먹이때 피난와 신혼초까지 살았던 정든 고향과 같은 곳으로 아직도 네자매가 이곳에 살고있다. 집에서 성당까지 1 키로 정도 걸어 가야한다.
성당 가는 길 중간쯤에 초등학교 후배가 운영하고 있는 조그만 구멍가게가 있다. 가계 앞에는 평상이 놓여 있는데 미사를 마치고 돌아 갈 때마다 단골 몇 사람이 항상 평상에 앉아 지나가는 필자를 부른다. 한잔하고 가란다. 주일마다 성당구내 및 주위도로는 주차난이다. 좀 늦으면 미사참여도 힘들정도였다. "신앙과 환경 문제" 다른 사람들이 관심도 없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며 걸어다니기로 마음 먹은 후로 부터 평일날에도 자주 이곳에서 후배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그들은 이 강촌마을에서 함께 자란 꼬치친구들이다. 그들 대부분이 후배들이지만 함께 늙어간다. 그 중 한 후배는 필자의 선친을 무척 따랐다. 그는 가업을 이어받아 아직도 재첩잡는 어부로써 살아간다고 했다.구리빛 얼굴이 많이 늙었어도 목소리와 순진한 얼굴모습은 그 시절 그대로였다.
전기불도 없고 라디오도 귀하던 강촌마을 하단, 우리집은 들어오는 입구외는 갈대 밭이 였다. 여름밤 무성한 갈대 숲에서 도깨비가 튀어 나올 것 같은 두려움 속에 어린시절을 보냈다. 밤마다 아무 할 일이 없던 그 시절, 특히 긴긴 겨울 밤의 지루함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동네처녀 총각들, 아줌마들이 지루한 밤을 보내기엔 선친의 구수한 옛날 이야기가 제법 인기가 있었다. 가끔 담배를 사들고 저녁마다 호롱불 밝힌 초가삼칸으로 모여 들었다. 여름이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풋풋한 쑥향기 그윽한 모기불 피워 놓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도 한 여름에는 먹을 것이 있었다. 텃밭에서 캔 삶은 새끼 감자도 있었고 옥수수도 있었다. 겨울이면 먹을 것이 없어 손님이 모이면 인정많은 어머니는 살 얼음이 더덕 더덕 붙어있는 큼직한 무우 동김치를 큰 그릇에 담아 가지고 오셔셔 잘게 썰어주신다. 그것을 씹어가며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 중에 오늘 만난 후배도 있었다.
선친의 이야기 보따리가 워낙 풍성해서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이 흘러나왔다. 심청전 같은 이야기는 일주일 연속으로 한적도 있었다.
필자의 선친은 주시경 한글학교와 남궁억선생의 경성학원을 졸업하고 와세다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하셨다. 그 후 황해도 오산학교 교편생활을 하시다 심훈의 상록수를 읽고 큰 감화를 받아 김해 진영(노무현고향)으로 낙향하게 된다. 日憲의 철저한 감시 속에 농토개간사업과 한글학교 운영과 소작인보호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해방이 되자 민족주의를 부르짖던 김규식선생과 노선을 함께하다 신탁통치반대 영남대표로 덕수궁에서 연설을 하게된다.“조선은 조선인의 조선이니 소련, 미국 물러가고 조선인이 조선을 다스려야 훗날 후회가 없다.”라는 연설을 마치고 내려오다 연단 아래 앉아있던 소련대표 스치코프와 우연히 이루어진 한 번의 포옹이 동아일보에 기사화되자 서슬이 시퍼런 김두한이 이끄는 광복청년단(그 당시 경남도에 조직된 김두한 예하 반공청년단) 이 가만 둘리없었다. “빨갱이”로 지목되어 쫓기는 신세가 된것이다. 기사화된 이 사진 한장이 한 가정을 몰락하게 만들었다. 5.16혁명이 일어나자 부산 육군형무소 3개월 정치범 복역을 끝으로 더렵혀진 명예는 회복되어져 비로소 자유를 얻게된 것이다. 본인과 가족들이 입은 씻을 수 없는 상처는 보상받을 곳이 없다. 그 시대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조국의 장미빛 미래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 사건후 이곳 낙동강 하구 한적한 어촌 마을 갈 숲속으로 피신하여 오두막을 짓고 詩作으로 여생을 보내야만 했다. 이문열의 소설 “젊은 날의 초상”중 ”하구 편“에 필자가 서동호로, 선친이 서 노인으로 우리 집안이야기가 소설로 그려져 있다.
주일미사를 마치고 오는 길에 대낮부터 붙잡혔다. 술이 일순 배 돌아가자 선친 이야기가 나왔다. 아직까지 그 후배는 선친께서 들려준 “석가모니 제자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옛날 한 옛날에 석가모니 제자 한분이 있었다. 화창한 가을 날 아침이었다. 석가모니는 하루 길인 먼 곳까지 친구에게 私札을 보내기 위해 제자를 불렀다. 그 제자는 선생님의 분부대로 私札을 가지고 길을 떠난다. 어느 고을 오곡이 무르익고 있는 황금벌판을 가로 질러 걷고 있었다. 누렇게 영글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조밭 이랑을 지나면서 "참 그놈 이쁘게 잘 익었구나"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탐스러운 조 한 자루를 손바닥에 얹어보았다. 그러자 조 세 알이 손바닥에 떨어져 아무생각없이 입안으로 털어 넣고서는 유유히 길을 갔다.
저녁 늦게 돌아온 제자는 선생님께 사찰을 잘 전해주었노라 보고를 드리자 스승님은 수고했다는 말 대신에 큰 소리로 나무라고 있었다.
“심부름을 시켰지 도둑질을 시켰더냐.”
제자는 “스승님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지금까지 남의 것을 탐해 본 적도 없을 뿐더러 오늘도 도둑질 한 적이 없습니다. 조밭 옆을 지나가다 잘 익은 조가 있어 너무 탐스러워 살짝 만져 보았더니 조 세알이 떨어져 손바닥에 붙어 있길 래 버리기가 아까워 먹은 일이 있는데 그것도 도둑질이 됩니까”
“그게 도둑질이 아니고 무엇이더냐” 호통이 떨어졌다.
“너는 조 세알을 먹은 죄로 지금 바로 소가되어 그 농부 집으로 들어가거라. 조 한 알에 일 년 씩 삼년간 그 주인집을 위해 일을 하고 오너라.” 스승의 준엄한 명령이 떨어졌다.
스승의 말씀이 떨어지자 그 제자는 바로 소가 되어 그 농부 집으로 가게 된 것이다.
건장한 황소 한 마리가 집안으로 들어오자 농부는 길 잃은 소라고 생각하고 주인이 찾으러 올 때까지 외양간에 매어 두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수소문을 해도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때부터 그 소는 밤낮없이 농부의 논밭 일은 물론이고 남의 논밭까지 거둬들였다.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던지 농부의 살림살이가 늘어만 갔다.
그렇게 해서 소살이 삼년이 다된 가을날 이였다.
외양간에서 “주인님”하고 농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외양간으로 가 보았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만에 소가 말을 했다. 소가 말을 하자 매우 놀란 농부는 정신을 차리고서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다 들었다.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산적 수백 명이 며칠 후 밤에 주인집을 습격 할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주인은 “그럼 어떡하면 되겠느냐”고 소에게 물었다‘
“그들이 먹을 음식과 술을 푸짐하게 준비하여 동구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그리고 소가 된 사유를 들려주라” 고 일러 준 다음날 새벽에 그 소는 사람이 되어 소리 없이 그 집을 떠나갔다.
소가 일러준 그 시각에 농부는 푸짐하게 음식을 준비하여 동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각에 맞추어 횃불을 밝히고 말을 탄 수백 명의 산적 무리가 마을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을 보고는 길에 엎드리고서 그들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산적선생님들? 어서오세요" 친절하게 인사까지 했다.
밤늦게 까지 술과 음식으로 배를 채운 산적 두목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며 농부를 불렀다.
“여 보시오, 주인장, 수 십 년간 도둑질을 해왔지만 이런 일은 처음 보오. 우리가 올 것을 어떻게 알고 이런 성찬을 준비하였소.”
농부는 두목에게 경위를 일일이 고해 받쳤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두목은 “조 세알 훔쳐 먹은 사람이 소가 되어 삼년이란 긴 세월동안 고생을 했다면 도적질을 직업으로 살아온 우리는 수백 년을 소로 살아도 부족 할 것이 아닌가. 아이 고! 이 죄를 어떻게 다 갚아야 할 꼬” 말하면서 두목은 목 놓아 울었다. 두목의 우는 모습을 보고 수백 명의 산적들도 함께 울어 눈물바다를 이루었단다.
그 후로 크게 후회하고 각성한 산적들은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선친께서는 항상 이렇게 이야기로 들려주면서 어린자식들의 인성 교육을 시켰다.
자식이 생각해도 선친은 대단한 분이셨다. 꿈에 그리던 조국통일을 보지 못하고 선친 가신지 4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조국통일은 아직도 염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