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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부산화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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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님 이야기 스크랩 괴시리전통마을(목은이색선생출생지)
정암,이세복 추천 0 조회 119 10.07.25 21:0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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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시(槐市)마을과 목은이색(牧隱李穡)

 

□ 위 치 :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1리(일명 : 호지마을)


□ 개 요 :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전통 마을은 목은이색선생의 출생지로 유명하며 전통 고가옥 30여동이 고스란이 보존되어 있어 역사체험코스로 유명하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5호인 영양남씨괴시파종택, 문화재자료197호인 대남댁, 198호 물소와고택, 199호 해촌고택, 378호 천전댁, 392호 입천정, 393호 주곡댁, 394호 물소와서당, 395호 경주댁, 396호 구계댁, 397호 괴시리괴정, 424호 영감댁, 425호 사곡댁과 460호인 스므나골재사 등 15점의 문화재가 있으며 비지정문화재인 남중칠, 남학순, 남영헌, 남영화, 남영충, 남시중님의 가옥과 괴시침수정, 괴시만서헌, 목은유허비각 등 총24동의 고가가 소재한다.


 이 마을 앞에는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松川)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북쪽에 호지(濠池)가 있어 호지촌 이라 부르다가 고려말 목은 이색선생(1328~1396)이 문장으로써 원 나라에 이름을 떨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구양박사(歐陽博士)구양현(歐陽玄)의 괴시 마을과 자신이 태어난 효지촌의 시야가 넓고 아름다운 풍경이 비슷해 괴시(槐市)라 고쳐 이름지었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기름진 영해평야가 펄쳐져 있으며, 남동쪽의 망일봉(望日峰)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세가 마을을 입(入)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이러한 자연지형에 맞추어 대부분의 가옥들이 서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고려말에 함창 김씨(咸昌 金氏)가 마을에 처음 입주하였고 그후 조선 명종(明宗:1545~1567)년간에는 수안 김씨(邃安 金氏)와 영해 신씨(寧海 申氏), 인조 8년(1630)에는 영양 남씨(英陽 南氏)가 시거(始居)하였다.그후 3성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지금은 영양남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 교 통 편 : (자가운전) 울진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영덕방면 영해사거리에서 대진항방면 12번 군도를 따라가면 괴시리로 가는 마을길이 나온다. 영덕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울진방면 영해사거리에서 대진항방면 12번 군도를 따라가면 괴시리로 가는 마을길이 나온다. (대중교통) 영해시외버스터미널에서 5분거리에 있으며 영덕에서 영해로 가는 시외버스는 20분 간격으로 있다.


□ 주변관광지 : 인량리 전통마을, 대진,고래불해수욕장, 신돌석장군 생가 및 유적지, 목은이색산책로 등이 있다.


□ 입장료는 받지 않음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마을 전경

 

 

              

                     목은선생의 초상화

 

    지 정 번 호 : 보물 제1215-4호                                목은이색선생의 상(2006년6월제작)

    주         소 : 대전광역시 중구 옥계동 84번지 대전영당
    지정년월일 : 1995년 12월 4일
    소   유   자 : 한산이씨대종회

                           

                                         

                      牧隱先生의 肖像畵


고려말 3은(三隱) 중의 한사람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의 초상화이다. 이색의 초상화는 원래 관복차림과 평상복차림의 두 종류가 있었으나 현재는 관복차림만 전해진다. 관복차림의 그림도 원본은 전하지 않고 원본을 보고 옮겨 그린 것으로 모두 4본 5점이 전해진다.


1654년 허의와 김명국이 옮겨 그렸다고 전해지는 가로 85.2㎝, 세로 143㎝ 크기의 예산누산영당본(禮山樓山影堂本)은 관리들이 쓰는 사모를 쓰고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사모에는 회색줄을 넣어 입체감을 표현했으며, 얼굴에는 옅게 붉은 기운을 넣어 당시의 화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초상화는 고려말 관복을 충실하게 표현하였고, 옮겨 그린 것이지만 당시 일류화가들이 그린 것으로 회화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목은영당본(牧隱影堂本)은 가로 25㎝, 세로 25.8㎝ 크기의 소본(小本)과 가로 81.6㎝, 세로 149.8㎝ 크기의 대본(大本)이 전해진다. 소본은 누산영당본과 같은 시기인 1654년 그린 것으로 현재는 반신상이지만 잘려나간 곳을 감안하면 전신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본은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크기로 1711년에 옮겨 그려 임강서원에 모셔 두었다.


가로 85.2㎝, 세로 150.7㎝ 크기의 문헌서원본(文獻書院本)은 목은영당본과 동일한 형식으로 1755년에 새로 옮겨 그린 것이다. 목은영당본에 비해 수염처리와 옷의 묘사 등의 표현기법이 떨어지는데 이는 화가의 기량 차이 때문인 것 같다.


가로 78.7㎝, 세로 146.3㎝ 크기의 대전영당본(大田影堂本)은 헌종 10년(1844)에 옮겨 그린 것으로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규모이며, 뛰어난 화가에 의해 옛 그림 화풍이 잘 표현된 초상화이다.


현재 이색영정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시대 일류화가에 의해 새로 옮겨 그려진 4본 5점 모두 수준이 높고 보존 상태 역시 양호하며, 역사상 중요 인물을 그린 것으로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글 : 피의사제님)

 

 

 

   

                        목은이색(牧隱李穡)선생의 시


 

                                     

             백설(白雪)이 자자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梅花)는 어늬 곳듸 ?엿는고

             석양(夕陽)에 홀노셔셔 갈 곳 몰나 하노라.

 

  <풀이>

  흰 눈이 녹은 골짜기에 험한 구름이 몰려 있구나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어 있는가?

  날은 점점 저물어서 어두워지고 있는데 나는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시의배경>

  목은 선생께서 쇠퇴해 가는 고려 왕조의 무력해 지는 것을 보고 자신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나타낸 시로서,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해지고 있는 노래이다. 이 작품은 고려 말 새 왕조를 이룩하고자 하는 급진파가 득세하고 있는 터에 힘을 잃고 심산유곡으로 몸을 숨긴 고려의 중신들을 한없이 그리워하면서, 점점 허물어지고 있는 고려 왕조와 구기력해진 선생 자신을 한없이 한탄하는 심정을 그리고 있다.  때로는  이것을 우국가(憂國歌)라고 부르기도 하나 그 내용이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라는 뜻에서 후대에 부친 것이다.

 


                          牧隱先生의 親筆詩

                     

                                          부벽루(浮碧樓) 


 

      

       昨過永明寺 작과영명사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暫登浮碧樓 잠등부벽루 (잠깐 부벽루에 올랐어라)


       城空月一片 성공월일편 (성은 비었는데 달은 한 조각이요)


       石老雲千秋 석노운천추 (돌은 늙었는데 구름은 천추일세)


       麟馬去不返 인마거불반 (인마는 가고 돌아오지 않고)

 

       天孫何處遊 천손하처유 (천손은 어느곳에 노니는가?)

 

       長嘯倚風? 장소의풍등 (길게 한숨쉬고 풍등에 의지하니)


       山靑江自流 산청강자유 (산은 푸르고 강물만 멋대로 흐르네).



 <시의배경>

목은 선생께서 원(元)으로 가는 도중 고구려의 유적지인 평양성을 지나자 찬연했던 고구려의 옛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오언율시(五言律詩)이다. 특히 고려의 국운이 쇠약해지고 있는 터에 선생께서는 찬란했던 고구려의 퇴색 자취만 쓸쓸이 남아 있음을 인간의 유한과 자연의 영원함을 한 조각의 달과 그름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웅혼한 역사를 이룩한 고구려 동명성황(東明聖王)의 위업을 천손으로 비유하여 그리워하고 있다. 이작품은 현재에서 과거를 비추어보는 시각과 또 과거에서 현재를 다시 비추어 보는 시각을 절묘하게 조화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牧隱先生의 뛰어난 文章力을 讚揚한 詩 

                                           

                                                桑村 金子粹 作


       東國文章集大成 동국문장집대성

        동국(東國)의 문장을 집대성하였으니,


       稼亭父子冠群英  가정부자관군영

        가정(稼亭)의 그 부자가 모든 문인(文人)의 으뜸이었네.

  

       山川孕秀今猶古  산천잉수금유고

        산천의 품은 정기는 지금도 옛과 다름 없는데,


       且問何人繼姓名  차문하인계성명

        묻노니 어느 사람이 그 이름을 이을꼬.

 


 ※ 가정(稼亭)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 先生의 부친  


 이 詩는 상촌(桑村)선생께서 최고의 文章力을 集大成한 牧隱李穡선생의 생각하며 지은 시로 상촌 선생은 본관이 경주김씨(慶州金氏)이며 충정왕(忠定王) 3년(1351)에 태어났고 이름을 자수(子粹)라 하고 자(字)를 거광 이라 하고 호(號)를 상촌(桑村)이다. 공민왕(恭愍王) 23년 (1374)에 과거에 합격한 후 관로에 진출하였다. 20세가 되던 공민왕(恭愍王) 9년 (1370)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학문에 전념 하였으며 좌상시(左常侍)와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재직하였다. (참고문헌:신천식의'桑村先生의 生涯와 思想‘)     

              

    

목은이색(牧隱李穡)선생 유적지(遺蹟地)

 

 西쪽으로는 드넓은 영해평야(寧海平野)가 펼쳐있고, 그 뒷편으로는 낙동정맥(洛東正脈)크고 작은 산이 병풍처럼 솟아 있으며, 東으로는 일망무제(一望無際)창해(滄海)가 펼쳐 있는 이곳은 고려 말 정치가, 대학자이며 대문호(大文豪)이었던 목은이색(牧隱李穡)선생의 유허(遺墟)이다.


 선생의 본관은 한산(韓山), 시호는 문정(文靖), 가정 이곡(稼亭 李穀)선생과 함창김씨를 父母로 하여 1328년 이곳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무가정(無價亭)에서 탄생하였으며, 일찍이 20세에 부친 가정공이 머물던 원(元)나라에 유학을 하였다.


 귀국 후 26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숙옹부승(肅雍府丞)을 시작으로 30세에 우간의대부, 40세에는 판개성부사 및 성균관의 대사성을 겸직하였고, 47세에는 왕명(王命)으로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 출신인 나옹선사(懶翁禪師)의 비명(碑銘)을 찬(撰)하였다.


 58세에 이르러서는 벽상삼중대광검교시중(壁上三重大匡檢校侍中)에 올랐으며, 62세에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제수되었다. 64세에는 벽상공신삼중대광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에 올랐다.


 65세때에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고려가 망(亡)하였으나 고려조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으며, 마침내 69세에 여강(驪江 지금의 여주의 남한강) 청심루(淸心樓)아래 연자탄(燕子灘)에서 세상을 떠났다.


 목은선생께서는 이곳에서 태어나 일찍이 고향을 떠났으나, 종신토록 고향을 잊지 않았다. 특히 영덕과 관련하여서는 관어대소부(觀魚臺小賦)와 유사정기(流沙亭記)외 20여수(首)에 이르는 시(詩)가 있어 당시 고향에 대한 선생의 생각과 당시의 풍습과 문화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또한 7,000여수에 이르는 방대한 시문을 남긴 대문호일 뿐만 아니라 성리학(性理學)진작시킨 대학자이신 목은선생(牧隱)인연(因緣)을 숭앙(崇仰)하고자 선생의 자취가 남은 이곳 유허에 유적지를 조성하였다.

 

The Remains of Master Lee Saek (Pen Name : Mogun)


The place, where the Yeonghae Plain extends away westward and beyond it mountains stretch away along the Nakdong-Jeongmaek like a wall and where the East Sea spreads eastward, is the remains of Mogun. He was a politician, great scholar and great author at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His clan was originated from Hansan, and his poetic pen name was Munjung. His father was Master Lee Gok (pen name : Gajung) and his mother was of the Kim clan from Hamchang. He was born in Mugajung in Goesi-Ri, Yeonghae-Myeon, Yeongdeok-Gun in 1328. When he was twenty, he studied abroad in Yuan (ancient Chinese Empire) where his father stayed.

After returning home, h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and became  Manager of the Empress Department. When he was thirty, he became  Manager of the State Consultative Committee. When he was forty, he became Manager of the Sungkyunkwan (the highest state educational institution) concurrently holding the position of the Chief Manager of the Metropolis Department. When he was forty seven, he wrote the panegyric on the gravestone of the Zen Master, Naong in obedience to the royal command. When he was fifty eight, he became Premier. At the age of sixty two, he was appointed to Chief Manager of the State Executive. Two years later, he was appointed to State Adviser.

At the age of sixty five, when the Goryeo Dynasty was perished by General Lee Sung Gye, he refused to serve two dynasties to the last. Finally, he breathed his last at the Yeonjatan in vicinity of the Cheongsim Pavilion around the Yeo River (presently the Namhan River in Yeoju).

Although Master Mogun left his birthplace early, he did not forget his home all his life. In particular, he wrote some twenty poems concerning Yeongdeok including 'GWANEODAESOBU', 'YUSAJEONGGI'.  His nostalgia for his hometown as well as the customs and culture in those days was revealed in these poems. Besides, he wrote about 7,000 poems as a great author. He was a great scholar who promoted the Neo-Confucianism.

This historical site was created in memory of Master Mogun.

                                    

 如初 金應顯님의 마지막 作品, 전 동방연서회장, 초당이무호선생의 스승

 

                      牧隱先生의 記念館

 

 이곳은 목은 이색선생께서 태어나신 곳으로 2006년 6월에 목은 기념관을 준공하였다.

 

목은 선생의 생애에 관한 기록

 

목은 이색선생과 사승관계

 

목은이색선생의 유물

 

기념관의 내부

전시관 중앙의 조경시설 

 

  

 

 

左로부터 牧隱先生의 後孫인 李貞馥 牧隱硏究會長님과 李洸馥 檀國大學校 名譽敎授님(2007.7.24)

 

 

 

  

 

침향정 浸香亭(목은선생의 생가에는 침향지가 있었다)

江原大學校 名譽敎授 黃在國 謹書

관어대소부(觀魚臺小賦)

관어대는 영해부(寧海府)에 있는데, 동해(동해)를 내려다보고 있어 암석의 낭떠러지 밑에 유영(遊泳)하는 고기들을 셀 수가 있으므로 관어대라 이름한 것이다. 영해부는 나의 외가(外家)가 있는 곳이므로 소부(小賦)를 지어서 중원(中原)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영해의 동쪽 언덕 일본의 서쪽 물가엔 큰 파도만 아득할 뿐 그 나머지는 알 수가 없네 물결이 움직이면 산이 무너지는 뜻하고 물결이 잠잠하면 닦아놓은 거울 같도다 바람 귀신이 풀무로 삼는 곳이요 바다 귀신이 집으로 삼은 곳이라 고래들이 떼지어 놀면 기세가 창공을 뒤흔들고 사나운 새 외로이 날면 그림자 저녁놀에 잇닿네.


 관어대가 굽어보고 있으니 눈에는 땅이 보이지 않도다. 위에는 한 하늘만 있어 아득히 면 그 사이가 천리만리나 되누나. 오직 관어대 밑에는 파도가 일지 않아서 고기들을 내려다보면 서로 같고 다른 놈 있어 느릿한 놈 활발한 놈이 제각기 만족해하누나. 임공의 미기는 과장된 것이라 내가 감히 흉내 낼 바 아니요 태공의 낚싯바늘은 곧았으니


 내가 감히 기대할 바 아니로다. 아 우리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니 내 현제를 잊고 그 즐거움을 즐기며 즐거움을 즐기다 죽어서 내 편안하리. 물아가 한마음이요 고금이 한 이치인데 그 누가 구복 채우기에 급급하여 군자의 버림받기를 달게 여기랴 슬프도다. 문왕은 이미 돌아갔으니 오인을 생각해도 바라기 어렵거니와 부자로 하여 금 떼를 타게 한다면 또한 반드시 여기에 낙이 있었으리라

오직 고기가 뛴다는 짧은 글귀는 바로 중용의 가장 큰 뜻이니 종신토록 그 뜻을 깊이 탐구하면 다행이 지사자를 본받을 수 있으리

 

 이영근 영덕군 문화예술담당과 남이육 영해면 괴시1리장님

 

 

              무가정지(無價亭地)                  稼亭.牧隱 先生遺墟碑閣

  

                                        牧隱 記念館周邊의 松林     

 

 

 

                            

                       

                        槐市마을의 傳統家屋

 

 

(영양남씨 괴시파종택)

1700년경 남붕익께서 건축한 고가로 조선후기 주택의 소박한 격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건물이며 괴시마을 공간구성에서 핵심적인 건물이다.(민속자료 제75호)

 

(괴시동 대남댁)

이건물은 1766년에 남준형께서 영해면 괴시리에 건립한 가옥으로 1911년에 중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괴시리마을 입구자형()주택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집이다. (문화재자료 제197호)

 

(괴시동 물소와고택)

괴시리 마을의 입구자형() 주택중에서 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건물은 남유진께서 지은 집으로 이후 한차례 중수하였다고 전해진다. 고택은 정면 5칸 반의 규모로 정침, 중문, 사랑 등으로 배치되어 있다.(문화재자료 제198호)

 

(괴시동 예촌고택)

1775년 해촌 남극만께서 건축하여 1878년 한차례 중수한 건물이다. 입구자형() 목조로 정침은 정면 5칸, 측면 7칸이다.(문화재자료 제199호)

 

(영덕 천전댁)

19세기 전반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로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로 구성된 입구자형() 목조이며, 속칭 날개집 유형에 속한다. 조선후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문화재자료 제378호)

 

(영해 입천정)

1860년경에 남붕익선생께서 2~3칸 규모로 건립하였으나 무너지고 1888년에 현재의 규모로 다시 세운 정자로 괴시마을 내서당의 위치와 함께 마을을 구성하는 중요한 건물이다(문화재자료 제392호)

 

(영해 주곡댁)

1800년대 초에 건립한 정면5칸, 측면6칸, 규모의 가옥으로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남경괄의 처가인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를 따서 주곡댁이라 한다.(문화재자료 제393호)

 

(물소와 서당)

이 서당은 좌승지에 추증된 물소와 남택만선생게서 학덕을 추모하고 후손들의 학습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850년경에 건립한 한일자형(一) 정면3칸, 측면1칸반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문화재자료 제294호)

 

(영해 경주댁)

이 건물은 당초 수안김씨가 살았던 주택으로 전하며 괴시마을에서 천전택과 더불어 별도의 대문채가 있는 주택의 하나로, 대문채과 입구자형(口) 안채로 구분되어 있다.(문화재자료 제395호)

 

(영해 구계댁)

이 건물은 졸헌 남경악께서 1850년경에 건립한 정면5칸, 측면6칸의 입구자형() 건물이다.(문화재자료 제396호)

 

(괴시리 괴정)

이 건물은 조선 명조42년(1766년)에 괴정 남준형공께서 건립 하였으며, 6.25전쟁 후에는 야학의 학당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문화재자료 제397호)

 

                     

                                                        魁亭(괴정) 

     

              

(괴시리 영감댁)

(문화재자료 제424호)

 

(괴시리 사곡댁)

(문화재자료 제425호)

 

(영덕 괴시리 영은고택)

(문화재자료 제459호) 

 

                                               稼亭.牧隱 先生遺墟碑閣

 

                               稼亭.牧隱 先生遺墟碑閣 內部 (稼亭은 목은선생의 부친) 

 

  

 

                    스므나골 齋舍(괴시리5번지)  

 

이 建物은 英陽남시 槐市마을 入鄕祖 南斗遠의 曾孫인 槐亭 南俊衡(1703~1778)의 묘를 수호하기 위하여 1780년에 건립하였다 한다. 재사는 괴시마을의 스므나골 안쪽 작은 내가 합류하는 곳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전면에는 영은(瀛隱)남공수(南公壽)의 우정(遺亭)인 침수정(枕漱亭)이 있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2칸의 일자형 겁집형태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마루가 발달한 겹집형태로 부엌에 외양간이 첨가된 점 상부의 환기구멍 등은 재사 건축에서 특이한 까치구멍집과 유사한 형태를 보여주는 건물이다.(慶北文化財資料 第460호)  

 

 

 

 

스므나골 齋舍앞의 소나무                    

 

  

 

                             목은 문화제


 목은 이색선생은 고려말 3은의 한사람으로 대사상가(성리학)이며 훌륭한 재상으로써 불사이군의 충절과 고려 문학을 대표하는 삼은 중 한분인 목은 이색선생을 추모하는 전국적 행사가 영덕군과 목은문화제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괴시리 마을에서 격년으로 개최하고 있다. 지난 제2회 목은 문화제는 2005.5.13일에 개최하였다. 주변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전통문화를 접목시켜 지역문화의 우수성과 새로운 관광수요 창출의 기틀이 마련되고 있다.

한시백일장

 

 궁중무용의 최초발상지로 유명하며 영덕무고단의 무고재연장면

 

 국립국악단의 공연장면

 

 인절미만들기

 

목은기념관내부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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