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한통 94p 관련 - 수업하실 때 연개소문 사후 귀족 내부의 분열로 고구려가 멸망한것이지 형제의 내분으로 멸망한것이 아니라고 설명해주셨는데 남생 남건 남산의 분열도 형제인데 그냥 귀족 내부의 분열로 봐야되는 건가요?
·5세기에 이르러 전성기를 구가하던 고구려는 6세기에 들어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531년 안장왕(安藏王)이 피살되고, 이어 안원왕(安原王) 말년에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귀족 간의 내분이 크게 폭발했던 것이다. 이러한 귀족 간의 내분은 강력한 일원적 집권화를 이루지 못하고 사병집단을 거느린 귀족들이 상호 타협하여 실력자의 직책인 대대로(大對盧)를 선임하는 귀족연립정권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나중에 강력한 독재정치를 실시했던 연개소문(淵蓋蘇文) 일파의 세력도 근본적으로는 이 체제를 벗어나지는 못했다.<한특 p71>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으로 고립에 빠진 신라는 당나라와의 연결을 시도했고, 마침내 두 나라는 연합군을 형성하여 통일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통일전쟁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째 단계는 나당(羅唐)연합군과 백제, 고구려왕의 전쟁이었다. 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했으나 백제는 이미 방어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여서 마침내 멸망하게 되었다. 또 이듬해부터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고구려가 이를 방어했으나 자체 내분으로 인해 결국 668년 멸망하고 말았다.<한특 p72>
·이 때 마침 고구려의 집권층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그것은 665년 연개소문이 죽고 장자 남생이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잡자 두 동생 남건(男建), 남산(男産)이 힘을 합쳐 남생을 몰안고 남거니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니, 이에 남생은 옛서울인 국내성(지금 통구)으로 달아나 당에 원군을 청하였던 것이다. 또한 같은 해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가 12성(城)을 들어 신라에 투항함으로써 고구려는 자체분열로 약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한통 p94>
·고구려는 당나라의 공격을 근근히 막아내었으나, 싸움의 형세는 점점 불리해졌다. 당나라는 이미 고구려 주요 성 등을 장악하였고, 신라에서 군량까지 보급받았다. 더구나 666년에는 연개소문이 죽어 그 아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나 고구려의 전력은 크게 떨여졌다.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男生)은 아버지의 지위 태막리지를 이어받았으나 동생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이 축출하였다. 그러자 남생은 국내성 등 성 6개를 거느리고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도 휘하의 성 열둘을 이끌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668년 이적(李勣)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김인문이 이끄는 신라군이 평양성을 총공격하였다. 평양성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1개월여 저항했으나 결국 함락되었다.<뿌샘 권1 p262>
즉, 고구려 장수왕의 손자 문자명왕 이후 안장왕 피살, 안원왕 말기 왕위 쟁탈전, 양원왕기 왕권 실추 등 귀족연립정권체제의 형성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이후 연개소문이 정변을 통해 영류왕을 제거하고 보장 옹립과 본인이 대막리지로 권력의 정점을 차지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 사회가 이렇듯 내적으로 귀족연립정치기에 외적으로 중국의 통일에 이은 위협에도 70여년간 국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영양왕 이후 연개소문이라는 구심점을 중심으로 귀족연립정치기의 중앙집권화를 이룩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개소문 사후 연개소문의 아들 들에 의한 내분 자체는 보여지는 현상으로 이해 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다시말해 연개소문기 자신의 세를 감추고 있어야 했던 귀족들이 제각기 남생 및 남산이라는 과거사적 명분론을 중심으로 분열 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강의 중 ‘단순한 권력 쟁탈전이 아니라 귀족들의 이반에 이은 권력 쟁탈전이 연남생 형제들의 권력 쟁탈전으로 보여진 것이지만 실제로는 귀족들의 권력 쟁탈전입니다’라고 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