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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만나교회 담임 이덕휴목사의 신학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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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철학 스크랩 아름다움의 정상, 오드리 햅번의 생애
이바울 추천 0 조회 1,258 13.11.02 18: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오드리 헵번 (Audrey Kathleen Ruston)
1929년 5월 4일 (벨기에) - 1993년 1월 20일


 

오드리 헵번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영국계 아버지지와 네덜란드의 남작 가문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오드리 헵번
오드리 헵번의 원래의 성은 러스턴으로 헵번이 아니며, 햅번은 먼 친척 뻘이라고 한다.
그녀가 헵번이라는 성을 가지게 된것은 당시 사회적으로 불안정 하던 시대 그녀의 아버지가 자주 이름과 성을 바꾸면서 먼 친척 뻘인 헵번을 리스턴 앞에 붙여 쓰면서 오드리 헵번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시대가 변해도 변치 않는 아름다움으로 전세대의 사랑을 받아온 그녀-

이제는 흑백필름의 모습밖엔 안남았지만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녀의 이름은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아름답게 만드는 것일까? 전세대가 사랑했던

그녀의 일생을 알아보기로 했다- 

 

 

유년기_전쟁으로 인해 힘들었던 어린시절

 

 

오드리 햅번은 1929년 5월 4 벨기에 브뤼셀에서 부유한 아일랜드계 영국인 은행가 아버지와 유서 깊은 남작 가문 출신 네덜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4살에 영국으로 건너가서 6살에 런던 교외의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녀가 8살이 되던 해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머니를 따라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열 살이 되던 해 음악학교에서 발레를 배우기 시작하며 최고의 무용수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제2 세계대전 때 나치의 군대가 네덜란드에까지 쳐 들어와 상황이 어려워져 발레 배우는 것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전쟁 중 정신적 공황과 심각한 굶주림에서 비롯된 영양부족으로 호흡곤란과 빈혈과 같은 질병이 생겨 매우 힘든 시절을 보낸다. 

 

 

 

 배우 활동 전_신데렐라를 꿈꾸는 배우 지망생

 

19살 때 어머니와 함께 영국으로 이사하여 잠시 보류하였던 무용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발레학교에 입학한다.하지만 그녀의 키가 170cm로 발레를 하기에 너무 컸고 담당 선생님에게 소질이 없다는 냉정한 충고를 받았다. 1950 21살 되던 해에 햅번은 마리오 잼피 감독의 눈에 띄어 영화 ‘낙원의 웃음‘에서 단역으로 영화계에 데뷔한 후 6개의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출연 영화는 실패하거나 배우로서 주목을 받진 못하였다.

 

프랑스 몽테 카를로에 체류하던 중 "The Levender Hill Mob" 에 출연한 것이 프랑스 소설가 콜레트 여사의 눈에 띄어 콜레트의 소설 "지지Gigi"에 브로드웨이 각색작의 주연으로 출연하게 된다.

 

1951년 연극 ‘지지'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오드리 햅번은 연기 경험이 부족했음에도 195324살 때 자신의 출세작이자 할리우드의 대표작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그레고리 펙과 함께 주연을 맡게 된다. 

 

 

 

  

활동시기(1)_출연한 영화

 

 

[영화 '로마의 휴일']

스크린의 요정, 세계의 연인인 오드리 햅번의 헐리웃 데뷔작이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작. 트래비 분수의 전설과 함께 단발머리, 면직 블라우스, 개더 스커트 등의 뉴패션을 전 세계에 유행시켰고 날씬한 몸매와 지성, 투명한 이미지로 미인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작품으로 영화사의 영원한 걸작으로 기록되었다. 특히 천진난만에게 계단 위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있는 장면은 별볼일 없는 다리를 이 장면 하나 때문에 매우 유명하게 했다. 또한 이장면은 CF나 영화에서 많이 패러디 되었을 만큼 많은 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영화 한편으로 전세계적인 스타가 된 오드리 헵번


 

 

 

[영화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로마의 휴일과 더불어 오드리 햅번의 대표작 중 하나로 오드리 햅번이 창가에 앉아 기타를 치면서 부른 아름다운 OST 문리버로 더욱 유명한 영화이다. 오드리에게 최고의 명성을 가져다 준 영화로 이 영화로 인해 오드리 햅번은 4번째 오스카상 후보로 지명된다. 1964년 영화사상 최초로 백만달러 개런티를 받기도 한다.

 

티파니에서 아침은 상류 계급으로 나아가고 싶어하는 이른바 '된장녀' 홀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티파니 보석 진열장 앞에서 값비싼 보석들을 보며 준비해 온 싸구려 빵과 커피로 아침을 먹으면서 상류층으로의 진출을 꿈꾸는 귀여운 홀리의 모습은 버거킹 CF를 비롯, 각종 광고나 영화에서 패러디 되어 후세에 계속 기억되고 있다. 

 

 

[그외에 영화들]

 

 

  

 

활동시기(2)_패션 아이콘으로 자리잡다

 

 

[발랄한 공주풍 패션]

로마의 휴일을 찍을 당시 사회의 보편적 여배우들 이미지는 글래머나 퇴폐적 관능미, 그리고 헤어스타일 식으로 마릴린 먼로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드리 헵번은 비쩍 마르고 키가 크고 기존에 없었던 숏커트라는 획기적인 헤어스타일로 나온 여배우로 발랄함과 귀염움을 내세웠으므로 관능적인 섹시미와는 거리가 먼 배우였다.

 

오드리헵번 이전에 이런 스타일로 등장한 배우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 매우 독특하고 신선해서 대유행 하게 된다. 특히 숏커트 뿐만아니라 스카프와 발랄한 원피스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패션 아이콘이 되기도 하였다.

 

 

 

[고급스럽고 우아한 패션]

티파니에서의 아침은 무엇보다 햅번룩을 탄생하였다는 점에서 오드리햅번에겐 뜻깊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말아올린 헤어스타일과검은 정장, 티파니 보석, 모자와 머리에 쓰는 스카프는 시대가 흘러도 오드리햅번만의 패션스타일로 굳혀지게 됐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햅번룩을 입고 화보촬영을 하는 연예인들이 많기도 하다.

 

특히 로마의 휴일에서 보여준 발랄하고 활동적인 패션에 비해 좀더 고급스럽고 우아한 이미지로 인해 오드리햅번은 훗날 구호사업가 역할까지 더하여 후세에서도 기품있고 우아한 이미지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오드리 헵번 결혼 과 아이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출로 어머니와 생활 한 오드리 헵번 그래서 일까 그녀는 늘 안정적인 가정을 원?고 배우로써 유명세를 타는 것 보다는 한 남자의 아내로 헌신하는 삶을 원했다고 한다.

 


오드리 헵번이 '로마의 휴일'로 스타가 된 1년 후 1954년 오드리 헵번(당시 25세)은 당시 그녀 보다 12살 많은 배우이자 제작자, 프로듀서, 감독 였던 "멜 퍼러"와 결혼을 했다. 이때 멜 퍼러는 이미 2번의 결혼을 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결혼생활_영화와는 다른 로멘스

 25살 되던 해 오드리햅번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2살이나 많고 2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첫 번째 남편 멜 페레와 스위스에서 결혼하여 스위스에서 살게 된다. 주변의 염려와 달리 의외로 그들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꾸려나가 1960첫 번째 아들 숀 페레(Sean ferrer)가 태어났다. 오드리는 아들을 키우느라 연기하는 것을 잠시 쉬기도 한다 남편과 같이 출연한 영화 전쟁과 평화 이후에 날로 인기가 높아지는 오드리 햅번과 달리 멜 페레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이에 열등감을 느낀 멜 페레는 바람을 피고 결국 1968년 오드리 햅번은 첫 번째 남편과 이혼하게 된다.

 

오드리 햅번은 아들인 숀 페레와 같이 살다가 1969년 자신의 열성팬이었던 9살 연하 이탈리아 의사 안드레아 도티와 결혼하여 1970두번째 아들 루카 도티를 낳았다. 그러나 오드리 햅번은 남편 도티가 독신남 흉내를 내며 바람을 피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결별하고 1980년에 이혼하게 된다.

 

두 번의 이혼 후 오드리 햅번은 로버트 월더스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서로의 곁에서 힘이 되었으며 1993 64살의 나이로 오드리햅번이 임종할 때까지 인생의 반려자가 된다

 

   

배우은퇴 후 삶_구호 사업가로 변신하다

 

1987년에 햅번은 공식적으로 유니세프의 특별 대사로 지명되었다. 아름답던 얼굴에는 주름살이 생기고 늙어갔지만 누구도 여배우의 모습이 초라하다고 생각 하지 않았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는 로브터 우들러와 함께 에티오피아, 수단, 방글라데시, 베트남 같은 곳을 방문하여 아이들을 돌보았다. 1991년 소말리아에서 돌아온 햅번은 직장암으로 진단받았고, 1993년 1월 20일

스위스의 Tolchenaz에서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지만 그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오드리 아동기금이라는 이름으로 재단이 설립되었고 지금까지 오드리헵번의 이름으로 전세계 불우 아동들에게 도움을 주고있다.  그녀를 모델로 하는 모든 활동은 오드리 아동기금으로 기부되어 전세계 불우한 아동돕기에 쓰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오드리햅번 가방이 있고 최근에는 국내 기업의 휴대폰 광고모델를 통해 광고 수익금의 일부를 오드리 아동기금에 전해주는 등 그녀가 떠난 후에도 그녀의 사랑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아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져야 하고,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오드리 햅번이 숨을 거두기 1년 전 크리스마스 때   아들 숀에게 해주었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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