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마르크스와 더불어 서양 근대성의 정립에 공헌했던 프로이드의 탄생 1백50주년을 기념해 프로이드와 기독교의 관계를 성찰하는 심포지움이 개최돼 화제를 모았다. 지난 8일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6층 예배실에서 연세의대 의학행동과학연구소 주최로 열린 이날 행사는 관련 학자와 교계인사 등 2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진행됐다.
이 자리에선 ‘정신분석과 기독교’란 주제로 의학자와 신학자가 개별 전문분야의 입장에서 양자의 관계를 논의하는 발제를 진행해 눈길을 끌었다.
○… 무신론적인 프로이드 저작
먼저 발제에 나선 손진욱 교수(경상대학교 의과대학)는 ‘프로이드의 종교론’이란 제목으로 종교관련 저작들에 나타난 프로이드의 종교적 입장을 소개했다. 손 교수는 “프로이드의 무신론은 19세기 서구에 유행하던 유물론과 반유대주의를 배경으로 한다”며 “자신이 치료한 신경증 환자의 강박증상과 종교의식 사이에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한 프로이드는 둘 다 의례적이고, 상징적일 뿐만 아니라 죄책감에 기반한다고 이해했다”고 소개했다. 손 교수는 “이를 토대로 프로이드는 ‘종교는 인류의 보편적인 강박신경증에 의한 집단신경증’이라고 주장했다”며 “억압된 욕구가 출구를 찾지 못하고 표현되지 못할 때 생기는 신경증이 종교의 이름으로 충족되고 있다고 프로이드는 주장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다윈의 원초집단설과 토템신앙을 결부시킨 프로이드가 자연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거나, 문명이 박탈한 본능적 욕구의 충족을 위해 종교가 생긴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무신론적인 사상가”라고 주장했다.
○… 기독교 성숙 위해 유용한 틀 제공 기독교의 입장에서 프로이드를 해석한 권수영 교수(연세대 신학과)는 “신학은 그동안 정신분석학이 지닌 임상적 공헌에 기울어 목회상담학이나 기독교심리학 등에 프로이드를 차용하는 것에 그쳤다”며 “해석학적 관점에서 프로이드를 바라볼 때, 기독교 신학 전반에 보다 유용한 틀을 얻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사실이란 한 개인이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외부적 사건을 표상하는 방식”이라며 권 교수는 “가령 ‘하나님의 사랑’을 사실적이고 논리적인 진리로 설명하긴 힘들어도, ‘어떻게 하나님이 한 개인에게 사랑으로 표상되는가?’라는 과정적 사실로 해석할 때,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 신학에게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부연했다. 더불어 권 교수는 손 교수에 대한 반론을 펼치며 “프로이드가 ‘종교는 환상’이라고 정의했다고 그를 무신론자로 규정하는 것은 프로이드의 환상 개념 자체를 오용한 것”이라며 “프로이드가 말한 환상은 오히려 인간의 원망(소망)과 깊은 연관이 있는 중립적인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권 교수는 “해석이란 의심의 훈련이라는 리꾀르의 지적처럼 프로이드를 통한 의심의 해석학이 오히려 유아기적 기독교를 보다 성숙하게 할 수 있는 길”이라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신앙의 과정에서도 파생되는 다양한 욕구들을 개인적으로 충족하려는 무의식적 시도를 관찰함으로써 오히려 다양한 개인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논평자로 나선 김재영 교수(서강대학교 종교학과)는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종교가 사회 유지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는 하나 여전히 유아기적 상태의 환상이라고 이해한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며 “프로이드를 해석학적 열쇠로만 이용할 것이 아니라, 신앙의 허위의식을 생산해 내는 무의식의 심층을 밝혀내는 보다 근원적인 작업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로이드가 남긴 종교관련 주요 논문은 다음과 같다. △강박행위와 종교의식(Obsessive Action and Religious Practices), 1907 △토템과 터부(Totem and Taboo), 1913 △환상의 미래(Future of an Illusion), 1927 △모세와 유일신교(Moses and monotheism), 1939
프로이드의 종교 이해와 그 한계
20세기 정신사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인물로 프로이드(S. Freud, 1856-1939)를 빼놓을 수 없는 데 이는 그의 정신분석 이론이 심리학에서뿐만 아니라 문학, 철학, 교육, 예술 등 다방면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에 있어서도 그의 영향은 적지 않았는 데, 종교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이해--종교는 환영(illusion), 집단 신경증이며 그것은 설명해서 없어져야함--는 그의 위대성 때문에 종교에 대한 그의 글을 연구해 보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갖는 데 큰 영향을 끼쳐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이제까지 프로이드 심리학에 대한 소개는 많이 있었지만 그의 학문과 삶의 최종 목표였던 종교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주어지지 않았었다. 본 장에서는 그의 종교이해를 그의 종교비판에 관한 책들인 The Future of an Illusion(환영의 미래), Totem and Taboo(토템과 타부), 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문명과 불만), Moses and Monotheism(모세와 유일신교)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그의 종교비판의 한계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미리 밝혀야 할 한 가지 사실은 프로이드는 비록 정신분석 이론을 가지고 종교를 해석했으나, 그의 종교에 대한 공격은 정신 분석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시인한다. 즉 이미 그전에 종교에 대한 선입관 즉 무신론적 입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종교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함으로 이를 먼저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프로이드 무신론의 기원 프로이드는 정신분석학자가 되기 이전에 이미 어린 시절부터 무신론자였다는 것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프로이드의 무신론은 그의 정신분석 안에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앞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로 하여금 무신론자의 입장을 취하도록 이끌어 갔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프로이드 어린 시절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영향, 그의 교육환경, 당시에 지배하던 과학적 그리고 철학적 분위기, 그리고 그가 인기 없던 소수민족인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연구해 봄으로 얻을 수 있다고 본다. 1) 그의 부모의 영향 가부장적 인물인 그의 아버지, Jakob Freud, 는 정통 유대인으로 교육을 받았고 자유스럽고 유대전통을 좀 멀리하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칼 마르크스의 아버지와 달리,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그의 자유스런 사고가 프로이드에게 영향을 주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프로이드의 어머니는 Jakob Freud의 두 번째 부인으로 20세가 채 안되었을 때 40이었던 그와 결혼했다. 젊은 부인으로 그녀는 늘씬하고 아름다웠으며, 그녀 생애의 마지막까지(90세) 유쾌함과 재치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프로이드는 3남 5녀의 장남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후에 그것을 이렇게 기록한다. "어머니의 충분한 사랑을 받는 사람은 일생동안 정복자의 감정, 실제 성공으로 이끌어 주는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산다." 프로이드는 그가 갖고 있는 확신감은 그의 어머니의 사랑이 주는 안정감에서 왔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종교적 가르침(유대교 신앙)은 프로이드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다. 프로이드의 종교적 배경이 참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점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정통 유대인으로 성장했고, 프로이드는 유대 관습들과 축제들에 대해 친숙했다. 그러나 어네스트 존에 따르면, 프로이드가 네살적에 비엔나로 이사간 다음에 그의 아버지는 정통적인 관습들을 더 이상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은 프로이드가 오랜 종교적 전통과 관습들이 점차 사라지는 가정에서 자랐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어네스트 존은 말한다: "프로이드는 영혼 불멸이나 하나님에 대한 어떤 신앙도 없이 자라났고 그런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프로이드는 후에 그의 어린 시절 성경 읽기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얘기를 하나, 존에 의하면 그것은 역사적 관심이나 윤리적 차원에서 의미한 것이었다고 한다. 2) 반종교적 경험들 무신론의 배경에 대해 논할 때에 프로이드의 어린 시절에 깊게 영향을 준 두 개의 반종교적 경험--의식주의(ritualism)와 반 유대주의(anti-Semitism)의 경험--을 지나칠 수가 없다. 1) 카톨릭 의식주의와의 경험. 어린 프로이드를 돌보던 늙은 보모는 유능하고 엄격한 체코인으로 카톨릭 교인이었는데, 프로이드에게 천국과 지옥에 대한 카톨릭 개념 그리고 다른 기독교 가르침 등을 주곤 했다. 또한 그녀는 어린 프로이드를 카톨릭 미사에 정기적으로 데려가곤 했는 데, 그가 교회에서 돌아와서는 설교를 흉내내고 하나님의 하는 일을 설명하곤 했던 것을 보면 미사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프로이드가 두 살반이었을때 그 보모는 도둑질 한 죄로 붸겨났다. 감수성이 예민한 이 시기에 이 중요한 인물의 영향을 옳게 평가할 수 있는 모든 사실들을 얻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어네스트 존스는 "... 그녀의 이런 부정적인 영향은 프로이드가 후에 기독교적 신념들과 의식들을 싫어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의 종교에 관한 첫 에세이인 「강박적 행위와 종교적 의례」(1907)에서 그가 강박적 신경증을 "종교 형성의 병적 대응물"로 그리고 종교 그 자체를 "우주적 강박적 신경증"이라고 묘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2) 카톨릭의 반유대주의 경험. 프로이드는 자신을 유대인으로 생각했으며 그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 하나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학교에서 늘 일 등을 했지만 소수의 유대인 친구 외에는 친구가 없었으며 반 유대적 크리스챤들에게 날마다 조롱을 당하곤 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건은 열두 살이 되던 해에 프로이드는 한 꼬마가 그의 아버지의 새 털 모자를 흙속에 던지면서 "포장된 길에서 꺼져, 이 유대인아!"소리치는 모욕을 그저 감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들은 프로이드의 내면세계에 일찍부터 증오와 복수의 감정을 일으켰으며 기독교 신앙이란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프로이드가 어려서 이미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그의 반 신앙적 결론들을 정당화할 만큼 충분한 지식을 갖거나 성숙하지 못했다. 그럼 어떤 과정을 통해 그는 종교를 비판할 수 있는 주요 도구들을 얻을 수 있었는가? 3) 학문적 과정 프로이드는 1873년에 비엔나 대학에 의과 대학생으로 들어가서 당시 널리 퍼진 과학적 분위기에 푹 젖어 있었다. 거기서 그는 생리학 교수였던 브뤼케(Ernst Brücke)와 프로이드의 우상의 하나였던 헴홀츠(Hermann von Helmholtz)를 만난다. 브뤼케는 프로이드가 되고 싶어하는 잘 훈련된 과학자의 타입으로 꾸준한 관찰과 묘사에 근거를 둔 과학적 방법의 철저한 사용을 매우 강조하는 독일 학자였다. 프로이드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음은 그의 말에 잘 나타난다: "마침내 브뤼케의 생리학 연구실에서 나는 쉼과 만족을 발견했습니다." 프로이드는 브뤼케의 연구실에서 6년간 머물렀으며 그후에도 그곳을 떠나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더 이상 연구를 할 수 없던 프로이드는 브뤼케의 권면대로 연구소를 떠나 비엔나 제일 병원으로 갔고 그곳에서 곧 수련의(a junior resident physician)가 되었다. 1882년부터 병원의 여러 과 에서 일을 했는 데, 특히 유명한 정신의학자 메이네트(Meynert) 박사와 신경병리학과에서도 근무했다. 뇌해부 연구소와 어린이 병원에서 때때로 일하는 동안에 그는 그의 연구를 동물 신경세포와 신경조직으로부터 인간의 중추신경체계로 확대시켰다. 그는 현대적 의미의 정신의학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뇌해부에 관한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이 점에서 필프 박사는 "프로이드는 한가지 주제나 문제에 대해 집중하는 확고한 경향을 여기에서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그가 너무 일방적이라는 비난을 받도록 까지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프로이드는 브뤼케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아 파리에서(1885-86) 샤코트(Jean Charcot)문하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치유 방법으로서의 최면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영혼 탐구의 첫 시작이었고, 신경학에서 정신병리학으로의 전환이었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최면술에 만족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의 효과는 단지 일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편 프로이드로 하여금 히스테리에 큰 관심을 갖게 만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유명한 안나 오(Anna O)여인의 케이스였다. 그의 동료 의사인 브로이어(Josef Breuer)의 환자로 히스테리로 인해 고통받던 지적인 젊은 여인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그는 히스테리의 증상은 감정적 쇼크(마음의 상처)의 산물, 특히 억눌린 성표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 일을 통해 프로이드는 브로이어와 갈라서게 되는 데, 브로이어는 이 문제를 생리 화학적 이론으로 설명하려고 했었고, 프로이드는 점점 생리학을 떠나 심리학적 범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프로이드의 관심이 생리학에서 심리학으로 바뀌고 있는 것은 그의 "과학적 심리학을 위한 과제 (Project for a Scientific Psychology, 1895)"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심리학적 과정들을 묘사하나 여전히 '신경세포의 수량적 상태' 같은 순수한 생리학적 용어들을 사용한다. 5년후 「꿈의 해석」에서 보듯이 프로이드는 점점 생리학적 표현들에게 심리학적 의미를 주고 있다. 프로이드는 인간심리 특히 직접적 지식으로는 접근 불가능한 정신 지층인 무의식의 역동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완전한 어둠이고, 의식적인 정신적 삶과 비교해 볼 때 명백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모든 심리적 활동이 처음에는 무의식이라는 것은 그의 주요 통찰력이었는데, 이것이 '첫 번째' 심리과정이고, 반면에 의식적 과정은 '두 번째'이다. 프로이드의 획기적인 업적은 무의식을 체계적인 과학적 설명의 대상으로 만든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잠재의식과 무의식을 물론 구분했고, 후에는 정신의 다른 체계들--이드, 자아, 초자아--사이를 구분한다. 프로이드는 정상적 상황에서, 무의식적이고 불쾌한 본능적 충동은 다소 격렬한 갈등 후에, 의식, 자아에 의해 거절된다고 말한다. 방어기제에 의해 처음부터 자아에 의해 거절된 그들은 무의식으로 흘러 들어가는데(즉 억압되어지는데), 이때 변함없이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의 전량을 그대로 갖고 가는 것이다. 이것은 후에 꿈의 형태나 또는 육체적 신경체계안에서 대리 만족(즉 신경증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기에서 치료의 과제는 환자와 치료자가 함께 노력해서 무의식에 억압된 정신적 충격 등의 내용을 억압 상태로부터 끌어내어 의식으로 노출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판단--이전의 거절된 본능적 억압을 수용하든 거절하는 것이 되든--을 내려야 한다. 이리하여 프로이드는 무의식 즉 취급되지 않은 정신적 외상의 경험과 감정을 드러냄으로서 정신적 질병의 치료로 이끄는 길을 발견했다. 이때 자유연상, 전이, 또는 말의 실수 등이 무의식에 자리잡은 이러한 감정들을 밝히는데 좋은 방법이지만, 이것을 위한 지름길은 꿈의 해석이라고 한다. 프로이드는 꿈을 (심리적인)소원성취라고 보면서,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운 신경증 증상들처럼 꿈도 억압된 소원의 위장된 성취이고 따라서 해석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 꿈 해석의 도움으로 프로이드는 어린 시절의 잊혀진 것까지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프로이드는 유아기의 의의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그의 위대한 발견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서 프로이드는 유아가 이미 성적(리비도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단지 이것은 성기적 성애가 아니라 프로이드가 전(前)성기적 성애라고 이름 붙인 입, 항문, 피부라고 하는 성감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또 아주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 아이의 성격 발달, 나아가서는 일생의 운명의 발전에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여기에서 말한다. 또 한가지 프로이드의 중요한 발견은 이른바 오디프스 콤플렉스이다. 그는 모든 신경증의 밑바닥에는 해소되지 않은 '오디프스 콤플렉스'가 있다고 가정했다. 이것은 네 다섯 살의 남자아이가 어머니에 대한 성적 집착과 동시에 라이벌이 되는 아버지에 대한 적의의 감정, 또 동시에 아버지에 의해 거세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관념의 복합을 오디프스 콤플렉스라 부르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디프스 왕'에서 이 이론의 근거를 삼는다. 이러한 이론들은 프로이드의 매우 중요한 과학적 업적이었고, 종교이해에 큰 역할을 하게된다. 이제 프로이드는 뇌해부학과 생리학, 정신 병리학 그리고 심리학의 새로운 형태(초심리학)에 이르는 그의 긴 여정의 끝에 이르렀다. 이제 그는 종교를 비판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다: 종교는 무엇인가? 2. 종교에 대한 프로이드의 이해 1) 종교의 기원 도대체 종교는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을까? 우선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신에 대한 태도는 어렸을 적 아버지에 대한 태도에서 나온다는 개인적(individual or 'ont ogentic') 요인이 있고, 둘째는 종족적(phylogentic) 요인이 있는데, 후자가 종교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이 되므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프로이드는 Totem and Taboo라는 책에서 원시인의 심성과 강박 신경증 환자의 사고 과정사이에 유비를 발견하고 여기에서 종교 기원에 대해 설명한다. 다윈의 이론을 빌려서 프로이드는 인류가 진화의 초기에는 무리 지어 살았는데, 이때 독재적인 "최초의 아버지"가 지배하면서 아들들을 배제하고 모든 여인을 혼자 소유를 했다는 것이다. 어느 날 불만으로 가득찬 젊은이들이 연합해서 아버지를 살해하지만, 곧 아버지의 위대함에 대한 그리움과 동시에 죄책감 즉 보복의 두려움에 대한 무의식적 죄책과 두려운 공포감을 갖게 된다. 결국 프로이드는 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의 여인들을 나누어 가진 자녀들의 죄책과 강박관념이 시간이 지나면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로 (또한 현실적으로 집단의 응집성을 유지하기 위해) 아버지의 상징적 대용물이라 할 수 있는 토템동물을 정하게 되고, 이를 숭배하고 이에 대한 살해금지와 또 동족간의 살인금지를 정하고, 동족내 다른 여인들(곧 아버지의 부인이었던 여인들)에 대한 성적 욕망을 포기하게 하는, 즉 오디프스적 죄책감을 속죄하는 뜻에서 동족간의 결혼을 금하는 족외혼(exogamy)이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년에 한 번 정해진 토템종교의 의례에서는, 아버지의 절대적 힘을 아들들이 받아들이는 상징적 행위로 토템 동물을 죽이고 먹는 것이 허용된다. 이때 토템조상과 그에 관련된 금기들에 대한 양면성은, 아버지와 그에 관련된 소망들--아버지를 제거하고 어머니를 소유하고자 하는--에 대한 오디프스적 양면성과 연관되어 있다. 존경과 두려움의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토템 조상의 힘은 더 한층 전이되어 아버지 모습을 신성으로 승화시켜 종교에서의 절대적인 신의 원형(prototype of God)이 된다. 전(前)종교적 기원으로부터 이런 변형은 세대를 거치면서 나타난 토템 식사의 진화--동물과 인간의 신성하고 희생적인 죽임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못 박힘과 기독교 성만찬에서 절정을 이루는 공동식사에 이르는 진화--에서 두드러지게 보여진다. 토템식사는, 사람의 죄책감(또는 "원죄")을 불러일으키며 또한 종교와 윤리적 구속, 사회조직의 출발점이 되는 바로 그 두려운 행위를 기억하는 축제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전적으로 인류의 오디푸스 콤플렉스에 근거를 두었다는 것이 종교의 기원에 대한 프로이드의 심리학적 설명이다. 종교의 기원에 대한 프로이드의 관심은 암으로 고통 중에 있던 그의 생애의 마지막까지 계속되는데, 그가 죽던 해에 완성된 Moses and Monotheism에서 그는 집단의 최초의 아버지를 죽인 그 범죄에 대한 인식이 종족 무의식 안에 남아있으며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늘 붙어 다니면서 지속적인 죄책감을 유발시키는데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유일신론의 뿌리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간단하게 Moses and Monotheism의 내용을 살펴보면, 모세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집트인이었고, 유대교의 일신론은 이집트로부터 나왔는데 특히 순수한 일신론을 신앙체계로 세우고자 했던 이크나톤(Ikhnaton) 통치 기간에 나왔다는 것이다. 기원전 1375년에 왕위에 오른 이 젊은 바로는 오직 한 신, 윤리적이고 우주적이고 관대한, 아텐(Aten)만을 섬기도록 강요했다. 모세는 바로의 딸들 중에 한 아들, 아마 비합법적인 아들, 이었고 이집트에서 이크나톤 바로 후의 기간동안 살았다. 그의 출신 성분으로 인해 그는 중요한 인물이었고, 아마 한 지역의 통치자로 있으면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었다고 본다. 열성적인 종교 개혁가로서 이크나톤은 당시 대중적인 종교를 모두 쫓아내었으나 그의 죽음이후에 그가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엄청난 혁명이 있었다. 모세는 이크나톤의 지지자였으나, 혁명 때문에 그가 믿던 종교의 형태를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실천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풀어주고 이크나톤의 일신론적 종교로 그들을 훈련시키고자 결심했다. 그는 이것을 실천했고, 얼마 후에(정확한 기간은 알 수 없지만) 이스라엘인들은 이 엄격하고도 고도로 영적인 종교를 참을 수 없어 결국 봉기하여 이것을 강요하던 그를 죽였다. 최소한 두세 대가 지나간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지도자를 뽑았고 그에게 모세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이 두 번째 모세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웨종교를 가져다준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인이었던 처음 모세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인의 종족 무의식 안에서 잠재적인 힘을 갖고 있었고 이것이 앞서 말한 과정을 통해 일신론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수백 년후의 사람들과 예언자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프로이드는 그가 믿는 것을 기독교에도 적용시켰다. 그에 따르면, 원죄 교리의 중요성은 그것이 무의식 안에서 최초의 아버지의 살인을 상징화했다는 것이다. 이 원죄로부터의 구원은 희생적 죽음을 통하여 발견되어져야 되는데, 바로 아들인 예수가 그의 어깨 위에 모든 죄를 짊어졌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버지 옆에서 그 자신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면서, 기독교는 아들 종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유대-기독교 전통은 이 오디프스 이야기의 단순한 확대 기록, 즉 종교는 극복하지도 못하고, 포기하지도 못함으로 해서 신경증이 되어 버린, 어린 시절의 갈등의 성인판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프로이드는 유일신론의 출현을 오디프스 콤플렉스를 근거로 한 원시 가족의 개념을 통해 설명을 시도하며, 또 한편 문명 비판을 통한 종교의 기원을 말한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인간 관계를 통제하기 위한 집단적 노력이 문명인데, 인간은 본래 자기 중심적 존재이므로 언제나 문명의 업적과 안정된 사회를 파괴하려는 충돌에 휩싸인다. 사회 특히 지배계층은 이런 인간 본능의 공격적 위험으로부터 사회와 기존 질서를 방어하고 지키기 위한 제도 장치를 필요로 하는데, 이것이 금기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반사회적 충동심을 적절히 억제하기 위한 강력한 규제나 금기 사항은 자연히 본래의 인간적 욕망과 상충하기 마련이다. 또한 이 금기와 규범을 지키지 못할 경우 죄책감이 생기게 된다. 여기에서 이런 죄책감과 갈등을 적절히 해소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의식이 필요했으며 이것이 종교적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는 문명의 파멸을 막기 위해 인간이 창출해낸 자기 방어기제의 최고형식이라고 본다. 즉, 문명이 문명사회 구성원에게 가하는 과잉억압과 고통의 짐을 심리적으로 위로하고 보상하고자 하는 것이 종교의 기원이라고 한다. 그럼 이렇게 시작된 종교의 본질은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2) 종교의 본질 그가 말하는 종교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책 The Future of an Illusion(1927)를 보는 것이 가장 빠를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종교 현상을 꿈과 신경증 증상에서 발견되는 소원성취의 모델에 적용시킨다. 따라서 그는 "종교적 개념들이란 우리 사고의 최종 결과나 경험의 오랜 축척에서 나온 산물이 아니라,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하고, 가장 간절한 인류의 소원이 실현된 것(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환영(illusion)"이라고 주장한다. 그럼 어떤 소원들인가? 그것은 생의 위협으로부터의 보호, 이 부조리한 사회에서 정의의 실현, 그리고 영생 등에 대한 인간의 소원이다. 이런 모든 소원들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유아의 경험에서 나오는데, 이때 신은 세 가지 기능을 갖게 된다: 자연의 공포를 없애주는 것, 사람들을 운명(죽음)에 화해시키는 것, 그리고 어떤 문화든 욕망의 금지에 근거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사람들이 당하는 일반 문화생활의 고통과 상실에 대해 보상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종교란 희망에 의거한 사고 즉 환영이다. 환영은 종교가 도덕적 의미에서 고의적 거짓말이라거나, 인식론적 의미에서 오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꿈이나 신경증등에서 나타나는) 소원 성취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다. 이를 위해 프로이드는 한 예를 드는데, 만일 한 가난한 소녀가 언젠가 왕자가 와서 자기를 데리고 갈 것이라는 환영에 붙들려 있다고 할 때, 그것을 반드시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신데렐라처럼 그녀는 왕자와 결혼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이것을 믿음으로서 간직할 합리적 근거는 없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오디프스 콤플렉스에서 유래하는, 우주적인 인류의 강박신경증으로서의 종교는 과학 정신의 증가로 말미암아 사라지고 있다고 프로이드는 보았다. 물론 이것은 그의 개인적인 소망으로 끝쳤지만, 그는 개인에게 있어서 그리고 인류 전체에 있어서, 종교는 인간 발달의 과도기 단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처음 단계는 신화적(또는 정령 숭배적), 둘째는 종교적,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적 단계이다. 개인으로서 또한 인류 전체로서 사람은 영원히 아이로 남을 수 없다. 사람은 성장해야한다. 즉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해 주시면 나는 이렇게 하겠습니다고 하나님과 흥정하는데, 이는 부모에게 매달리는 아이의 모습이므로 더 이상 유아적 환상에 매달림으로 성숙하기를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현실을 그 자신의 자원들과 과학의 도움으로 지배해야 하고, 도망칠 수 없는 운명의 필연에 대해 단념하는 것을 또한 배워야한다. 심리학적으로 이것은 쾌락원리에서 실재원리에로 전환하는 성숙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이네의 시에서 인용한 한 구절은 그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Den Himmel überlassen wir Den Engeln und den Spatzen." (하늘은 천사들과 참새들에게 맡겨라.) 즉, 내세에 대해서는 기대를 버리고 이 땅위의 삶에 모든 자원을 집중하라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 1804-1872)로부터 그의 개인적 무신론에 대한 본질적인 논증들을 받아들였다. 포이에르바하도 하나님 개념에 대한 투사는 소원이나 환상에서 온다고 주장하며 무신론에 대하여 심리학적으로 입증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종교사와 종교 심리학의 견지에서 포이에르바하의 심리학적 투사론에 한층 더한 깊이를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프로이드는 먼저 이 하나의 가정에 불과한 투사론을 의심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후에 단지 그것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이드의 종교 이해의 본질은 바로 포이에르바하가 세운 가정(hypothesis)위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3. 종교 이해에 있어서 프로이드의 한계 1. 프로이드의 종교기원에 대한 설명에는, 큉(Hans Küng)이 지적한 것처럼,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약점이다. 종교에 대한 그의 정신분석학적 해석은 실제로 원시 종교의 자료를 연구함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연구의 결과와 상관없이, 그의 글 레오나르도 다빈치(1910)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미 그전에 답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비엔나에서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하는 중에 인간 마음속에 오디프스 콤플렉스가 존재한다는 가정을 하고, 이 이론의 근거를 희랍신화의 오디프스(Oedipus)이야기에서 찾으며, 그 후 종교사를 통해 더 객관적인 설명을 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그가 말하는 것이 단지 심리학적 필연성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고 굳게 생각했으나, 그가 종교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자료들은 잘못된 정보를 담고 있는 것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또 프로이드에 따르면, 모세는 새로운 가르침을 갖고 온 이집트 출신이며, 죽임을 당한 후에 엄청난 아버지 이미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 약 1,400년이 흐른 다음 그 민족의 아들인 한 유대인이 모세를 죽인 그의 형제들의 행위를 대속하고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예수)는 실제로 그의 형제들을 죄책감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은 그를 그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이방인들에 의해 구세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들은 그들의 종족 무의식 속에 모세를 죽인 죄책감으로 고통받을 필요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처음 아버지를 죽였다는 그의 애매 모호한 가정은 전혀 비 논리적이며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 어려운 가정이다. 2. 정신분석은 어린 시절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매우 강조한다. 신경증적 성격, 성품, 개인의 신념 등은 부모-자녀 관계에 있는 어릴 적 경험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그 자신의 종교에 대한 견해 역시 그의 어린 시절 가정교육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2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오랜 종교적 관습들이 퇴색해가고 종교 그 자체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더욱이 유대인으로서 다시 말해 인기없는 소수민족의 한 일원으로서, 비록 종교적 신념을 같이 나누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민족을 박해하는 다수 기독교인(특히 로만 카톨릭)을 향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졌으리라는 것은 그의 전기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그의 감정은 크리스챤의 종교적 믿음에 대한 그의 코멘트를 읽을 때 특히 그가 모든 종교는 환영이라고 확신할 때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렇듯 프로이드가 그의 정신분석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어린 시절의 영향으로 이미 무신론자가 되었음은 그의 종교이해에 있어서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이 이처럼 환경의 영향을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프로이드의 무의식에 있어서도 적용이 된다. 프로이드의 위대한 발견은 역동적인 무의식을 우리 마음에서 가장 강력한 동기력(motive force)으로 파악한 것이었다. 그는 인간 개개인과 인류 역사가 무의식에 의해 크게 결정된다는 것과, 또한 이 무의식은 자유연상과 꿈 분석 등의 방법을 통해 완전히 탐구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비록 무의식의 역동적 본성에 대한 프로이드의 일반적 주장이 옳았다 할지라도, 그 무의식의 내용에 대한 해석은 너무 편협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프로이드도 어쩔 수 없이 그 자신의 사회적인 편견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프로이드는 그의 비엔나 환자를 치료하면서 거의 얻어진 증거에 의해 다시 말해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보편적 인간이해를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비엔나 의사의 경험으로 그는 성적 부적응은 신경증이 유발될 때 많은 경우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보는데, 이것은 그가 살던 독특한 사회 환경에서 즉 성욕이 억압되던 사회였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결론이었고 (물론 이것은 상류층과 하류층에는 비교적 해당이 안되었지만), 결국 이런 배경에서 프로이드는 무의식 안에서 (억눌린)성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생각을 갖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아주 부정적으로 억압된 소원의 창고로 이해되는 무의식적 과정의 견지에서만 종교 경험을 설명하려는 프로이드의 시도는 매우 단순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무의식의 본질과 또한 상징주의에 대한 그의 편협한 태도는 융이나 아들러같은 그의 동료들을 정신분석학의 울타리로부터 떠나도록 만들었다. 3. 프로이드는 19세기 생물학적 진화론, 유물론적 인과론적 입장에서 환원주의 등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그 당시의 지배적인 과학적 견해를 진리의 완전한 계시로서 믿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므로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신에 대한 믿음은 과학에 대한 믿음, 다른 말로 하면, 과학에 대한 유사 종교적 믿음으로 대체되었다. 과학에 대한 믿음이 신에 대한 믿음을 대체할 수 있을까? 프로이드의 예언과는 반대로, 피스터가 주장했듯이, 서방에서나 동방에서나 신에 대한 믿음은 아직 과학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에, 모든 분야에서 과학의 확실한 진전(가공할 파괴력의 무기나 생명복제 기술등)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학에 대한 믿음--과학은 자동적으로 진전을 의미하고, 그리하여 이것은 우주적인 인류의 행복에로 이끄는 열쇠라는 믿음--을 의심하게 한다. 오히려, 큉이 말하는 것처럼, 때때로 과학의 진전과 기술은 종말론적 공포에 이르게까지 하는 어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퍼치고 있다. 과학 그 자체는 인간의 비물질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고 인간의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그리고 진정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가치들을 줄 수 없다는 것을 프로이드는 맹신적인 과학에 대한 믿음 때문에 볼 수 없었다. 프로이드는 모험정신을 지닌 성실한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가 만든 가정 때문에 즉 종교는 거짓이고, 과학은 매우 중요하고 따라서 정신분석 안에 인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있다는 가정 때문에, 그는 극히 좁은 세계 안에서 그의 삶을 마쳤다. 특별한 방향에 대한 그의 지나친 관심은 우주의 많은 부분을 배제시켰다. 오디프스 콤플렉스로서 인류 종교현상을 모두 해명하려고 한 것은 비약이라고 보여진다. 왜 소망하는 것이 허락될 수 없는가? 인류나 개인의 삶이 단지 자연의 비정한 법칙이나 우연성이나 적자생존의 법칙에 지배를 받고, 모든 것은 무(nothingness)로 죽어간다는 생각에 오히려 혐오를 느낄 수 있지 않는가? 프로이드의 무신론은 가정이다. 프로이드 자신도 이것을 저 마음 깊은 곳에서 잘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질문한다: 삶이란 무엇이고, 도대체 죽음이후에는 무엇이 일어나는가? 이런 질문에는 병리학적인 어떤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집단 신경증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자연스럽게 질문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그가 생각하는 과학이 대답할 수 없는 이러한 질문의 중요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인간에게 있어서 이런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추구하는 것은 종교의 한 근원이고 인간의 정상적인 경험의 한 부분이다. 프로이드는 이 경향을 무시하던지 또는 그것을 비정상인 것으로 취급했다. 이것이 그의 종교이해의 또 다른 한계이다. 4. 결론 비록 나는 프로이드의 종교 이해를 비판할지라도, 그의 개척자적인 작업과 인간 그 자신에 대한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는, 그의 문명 비판론에서 보듯, 본능 억압과 승화를 통해 사회와 문명이 파멸되지 않도록 지키는 역할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종교라는 이름아래 너무 많은 억압이 있어 인간 스스로 성숙해짐을 막아왔고 오히려 불행하게도 만들어 왔다는 것에 부분적이지만 공감을 한다. 프로이드는 심층심리학의 관점으로부터, 인간의 편에서 종교, 교회 혹은 신 자신에 의한 억압이나 지배에 대항하여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성숙한 인간성을 추구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했음을 본다. 이것은--인간의 성숙--비록 프로이드와는 접근 방법이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가 함께 추구해 나가야 할 방향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프로이드가 종교를 취급하는 가운데 보여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의 일부는 사실이라는 것이 시인되어야 한다. 즉 많은 사람들의 종교적 신념이 잘못된 투사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크리스챤의 하나님 이미지는 어린 시절 인상 남던 아버지의 이미지에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형성된다. 때론 고의적으로 그들의 자녀를 훈련시키기 위해 교육의 방법으로 부모에 의해 벌하시는 아버지-하나님이 남용되기도 하는데,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것은 아이들에게 종교에 대해 부정적 결과를 갖고 올 수 있다. 또 종교가 소원 성취에만 의존할 때, 본질적 진리가 아니라 그것은 순수한 욕구의 만족으로 환원되어진다. 그런 종교는 유아적 소원으로의 퇴행이다. 또한 종교가 어떤 형식, 의식, 종교적 개념의 강박적 반복가운데서 문자에만 매달리게 될 때, 종교적 개념들은 강박적 의례적 반복에서 오는 만족으로 빠지게 된다. 마치 뜻도 모르고 그저 반야심경을 의미 없이 외우는 것처럼. 이렇게 부적절하게 동기 되어진 종교적 행위는, 강박 신경증 환자의 개인 의례에서 처럼, 어떤 유혹이나 벌에 대한--가끔 무의식적인--두려움, 공포감에 의해 이루어지는 방어 대책이다. 이처럼 프로이드의 비판을 통해서 우리는 자칫 빠지기 쉬운 종교의 모순을 벗어나서 건강한 종교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실수는 모든 것이 파악되고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리꿔가 지적한대로, 정신분석은 구습타파에 필요한 것 이상은 넘어갈 수 없다. 신에 대한 신앙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태도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이것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문제는 신에 대한 믿음이 심리학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적 관점으로부터 신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투사의 구조를 나타내거나 단순한 투사로 의심받을 수도 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연인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그/그녀 자신의 이미지를 반드시 투사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사랑하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자신의 투사의 도움으로 그/그녀는 오히려 단지 객관적인 관찰자로 밖에서 상대를 판단하려고 하는 사람보다 더 심오하게 상대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단순한 투사의 사실이 그것이 언급하는 대상의 존재나 비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심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다시 말해, 프로이드는 종교 개념의 심리학적 본질에만 (환영으로서) 관심이 있었지, 그들의 진리 내용(실재로서) 에는 관심이 없었다. 예수의 말씀과 삶에 대한 관심보다 그의 형상이 상징하는 심리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었다. 이점에서, 게이(Peter Gay)도 프로이드가 구약의 아모스, 이사야의 신학이나 신명기 신학 등에는 관심이 없고, "억압된 것의 복귀"(return of the repressed) 개념의 심리학적 관점에서만 구약의 하나님을 본다고 지적한다.
니체, 마르크스와 더불어 서양 근대성의 정립에 공헌했던 프로이드의 탄생 1백50주년을 기념해 프로이드와 기독교의 관계를 성찰하는 심포지움이 개최돼 화제를 모았다. 지난 8일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6층 예배실에서 연세의대 의학행동과학연구소 주최로 열린 이날 행사는 관련 학자와 교계인사 등 2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진행됐다.
이 자리에선 ‘정신분석과 기독교’란 주제로 의학자와 신학자가 개별 전문분야의 입장에서 양자의 관계를 논의하는 발제를 진행해 눈길을 끌었다.
○… 무신론적인 프로이드 저작
먼저 발제에 나선 손진욱 교수(경상대학교 의과대학)는 ‘프로이드의 종교론’이란 제목으로 종교관련 저작들에 나타난 프로이드의 종교적 입장을 소개했다. 손 교수는 “프로이드의 무신론은 19세기 서구에 유행하던 유물론과 반유대주의를 배경으로 한다”며 “자신이 치료한 신경증 환자의 강박증상과 종교의식 사이에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한 프로이드는 둘 다 의례적이고, 상징적일 뿐만 아니라 죄책감에 기반한다고 이해했다”고 소개했다. 손 교수는 “이를 토대로 프로이드는 ‘종교는 인류의 보편적인 강박신경증에 의한 집단신경증’이라고 주장했다”며 “억압된 욕구가 출구를 찾지 못하고 표현되지 못할 때 생기는 신경증이 종교의 이름으로 충족되고 있다고 프로이드는 주장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다윈의 원초집단설과 토템신앙을 결부시킨 프로이드가 자연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거나, 문명이 박탈한 본능적 욕구의 충족을 위해 종교가 생긴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무신론적인 사상가”라고 주장했다.
○… 기독교 성숙 위해 유용한 틀 제공 기독교의 입장에서 프로이드를 해석한 권수영 교수(연세대 신학과)는 “신학은 그동안 정신분석학이 지닌 임상적 공헌에 기울어 목회상담학이나 기독교심리학 등에 프로이드를 차용하는 것에 그쳤다”며 “해석학적 관점에서 프로이드를 바라볼 때, 기독교 신학 전반에 보다 유용한 틀을 얻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사실이란 한 개인이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외부적 사건을 표상하는 방식”이라며 권 교수는 “가령 ‘하나님의 사랑’을 사실적이고 논리적인 진리로 설명하긴 힘들어도, ‘어떻게 하나님이 한 개인에게 사랑으로 표상되는가?’라는 과정적 사실로 해석할 때,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 신학에게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부연했다. 더불어 권 교수는 손 교수에 대한 반론을 펼치며 “프로이드가 ‘종교는 환상’이라고 정의했다고 그를 무신론자로 규정하는 것은 프로이드의 환상 개념 자체를 오용한 것”이라며 “프로이드가 말한 환상은 오히려 인간의 원망(소망)과 깊은 연관이 있는 중립적인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권 교수는 “해석이란 의심의 훈련이라는 리꾀르의 지적처럼 프로이드를 통한 의심의 해석학이 오히려 유아기적 기독교를 보다 성숙하게 할 수 있는 길”이라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신앙의 과정에서도 파생되는 다양한 욕구들을 개인적으로 충족하려는 무의식적 시도를 관찰함으로써 오히려 다양한 개인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논평자로 나선 김재영 교수(서강대학교 종교학과)는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종교가 사회 유지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는 하나 여전히 유아기적 상태의 환상이라고 이해한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며 “프로이드를 해석학적 열쇠로만 이용할 것이 아니라, 신앙의 허위의식을 생산해 내는 무의식의 심층을 밝혀내는 보다 근원적인 작업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로이드가 남긴 종교관련 주요 논문은 다음과 같다. △강박행위와 종교의식(Obsessive Action and Religious Practices), 1907 △토템과 터부(Totem and Taboo), 1913 △환상의 미래(Future of an Illusion), 1927 △모세와 유일신교(Moses and monotheism), 1939
프로이드의 종교 이해와 그 한계
20세기 정신사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인물로 프로이드(S. Freud, 1856-1939)를 빼놓을 수 없는 데 이는 그의 정신분석 이론이 심리학에서뿐만 아니라 문학, 철학, 교육, 예술 등 다방면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에 있어서도 그의 영향은 적지 않았는 데, 종교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이해--종교는 환영(illusion), 집단 신경증이며 그것은 설명해서 없어져야함--는 그의 위대성 때문에 종교에 대한 그의 글을 연구해 보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갖는 데 큰 영향을 끼쳐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이제까지 프로이드 심리학에 대한 소개는 많이 있었지만 그의 학문과 삶의 최종 목표였던 종교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주어지지 않았었다. 본 장에서는 그의 종교이해를 그의 종교비판에 관한 책들인 The Future of an Illusion(환영의 미래), Totem and Taboo(토템과 타부), 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문명과 불만), Moses and Monotheism(모세와 유일신교)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그의 종교비판의 한계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미리 밝혀야 할 한 가지 사실은 프로이드는 비록 정신분석 이론을 가지고 종교를 해석했으나, 그의 종교에 대한 공격은 정신 분석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시인한다. 즉 이미 그전에 종교에 대한 선입관 즉 무신론적 입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종교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함으로 이를 먼저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프로이드 무신론의 기원 프로이드는 정신분석학자가 되기 이전에 이미 어린 시절부터 무신론자였다는 것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프로이드의 무신론은 그의 정신분석 안에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앞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로 하여금 무신론자의 입장을 취하도록 이끌어 갔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프로이드 어린 시절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영향, 그의 교육환경, 당시에 지배하던 과학적 그리고 철학적 분위기, 그리고 그가 인기 없던 소수민족인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연구해 봄으로 얻을 수 있다고 본다. 1) 그의 부모의 영향 가부장적 인물인 그의 아버지, Jakob Freud, 는 정통 유대인으로 교육을 받았고 자유스럽고 유대전통을 좀 멀리하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칼 마르크스의 아버지와 달리,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그의 자유스런 사고가 프로이드에게 영향을 주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프로이드의 어머니는 Jakob Freud의 두 번째 부인으로 20세가 채 안되었을 때 40이었던 그와 결혼했다. 젊은 부인으로 그녀는 늘씬하고 아름다웠으며, 그녀 생애의 마지막까지(90세) 유쾌함과 재치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프로이드는 3남 5녀의 장남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후에 그것을 이렇게 기록한다. "어머니의 충분한 사랑을 받는 사람은 일생동안 정복자의 감정, 실제 성공으로 이끌어 주는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산다." 프로이드는 그가 갖고 있는 확신감은 그의 어머니의 사랑이 주는 안정감에서 왔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종교적 가르침(유대교 신앙)은 프로이드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다. 프로이드의 종교적 배경이 참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점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정통 유대인으로 성장했고, 프로이드는 유대 관습들과 축제들에 대해 친숙했다. 그러나 어네스트 존에 따르면, 프로이드가 네살적에 비엔나로 이사간 다음에 그의 아버지는 정통적인 관습들을 더 이상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은 프로이드가 오랜 종교적 전통과 관습들이 점차 사라지는 가정에서 자랐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어네스트 존은 말한다: "프로이드는 영혼 불멸이나 하나님에 대한 어떤 신앙도 없이 자라났고 그런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프로이드는 후에 그의 어린 시절 성경 읽기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얘기를 하나, 존에 의하면 그것은 역사적 관심이나 윤리적 차원에서 의미한 것이었다고 한다. 2) 반종교적 경험들 무신론의 배경에 대해 논할 때에 프로이드의 어린 시절에 깊게 영향을 준 두 개의 반종교적 경험--의식주의(ritualism)와 반 유대주의(anti-Semitism)의 경험--을 지나칠 수가 없다. 1) 카톨릭 의식주의와의 경험. 어린 프로이드를 돌보던 늙은 보모는 유능하고 엄격한 체코인으로 카톨릭 교인이었는데, 프로이드에게 천국과 지옥에 대한 카톨릭 개념 그리고 다른 기독교 가르침 등을 주곤 했다. 또한 그녀는 어린 프로이드를 카톨릭 미사에 정기적으로 데려가곤 했는 데, 그가 교회에서 돌아와서는 설교를 흉내내고 하나님의 하는 일을 설명하곤 했던 것을 보면 미사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프로이드가 두 살반이었을때 그 보모는 도둑질 한 죄로 붸겨났다. 감수성이 예민한 이 시기에 이 중요한 인물의 영향을 옳게 평가할 수 있는 모든 사실들을 얻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어네스트 존스는 "... 그녀의 이런 부정적인 영향은 프로이드가 후에 기독교적 신념들과 의식들을 싫어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의 종교에 관한 첫 에세이인 「강박적 행위와 종교적 의례」(1907)에서 그가 강박적 신경증을 "종교 형성의 병적 대응물"로 그리고 종교 그 자체를 "우주적 강박적 신경증"이라고 묘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2) 카톨릭의 반유대주의 경험. 프로이드는 자신을 유대인으로 생각했으며 그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 하나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학교에서 늘 일 등을 했지만 소수의 유대인 친구 외에는 친구가 없었으며 반 유대적 크리스챤들에게 날마다 조롱을 당하곤 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건은 열두 살이 되던 해에 프로이드는 한 꼬마가 그의 아버지의 새 털 모자를 흙속에 던지면서 "포장된 길에서 꺼져, 이 유대인아!"소리치는 모욕을 그저 감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들은 프로이드의 내면세계에 일찍부터 증오와 복수의 감정을 일으켰으며 기독교 신앙이란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프로이드가 어려서 이미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그의 반 신앙적 결론들을 정당화할 만큼 충분한 지식을 갖거나 성숙하지 못했다. 그럼 어떤 과정을 통해 그는 종교를 비판할 수 있는 주요 도구들을 얻을 수 있었는가? 3) 학문적 과정 프로이드는 1873년에 비엔나 대학에 의과 대학생으로 들어가서 당시 널리 퍼진 과학적 분위기에 푹 젖어 있었다. 거기서 그는 생리학 교수였던 브뤼케(Ernst Brücke)와 프로이드의 우상의 하나였던 헴홀츠(Hermann von Helmholtz)를 만난다. 브뤼케는 프로이드가 되고 싶어하는 잘 훈련된 과학자의 타입으로 꾸준한 관찰과 묘사에 근거를 둔 과학적 방법의 철저한 사용을 매우 강조하는 독일 학자였다. 프로이드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음은 그의 말에 잘 나타난다: "마침내 브뤼케의 생리학 연구실에서 나는 쉼과 만족을 발견했습니다." 프로이드는 브뤼케의 연구실에서 6년간 머물렀으며 그후에도 그곳을 떠나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더 이상 연구를 할 수 없던 프로이드는 브뤼케의 권면대로 연구소를 떠나 비엔나 제일 병원으로 갔고 그곳에서 곧 수련의(a junior resident physician)가 되었다. 1882년부터 병원의 여러 과 에서 일을 했는 데, 특히 유명한 정신의학자 메이네트(Meynert) 박사와 신경병리학과에서도 근무했다. 뇌해부 연구소와 어린이 병원에서 때때로 일하는 동안에 그는 그의 연구를 동물 신경세포와 신경조직으로부터 인간의 중추신경체계로 확대시켰다. 그는 현대적 의미의 정신의학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뇌해부에 관한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이 점에서 필프 박사는 "프로이드는 한가지 주제나 문제에 대해 집중하는 확고한 경향을 여기에서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그가 너무 일방적이라는 비난을 받도록 까지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프로이드는 브뤼케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아 파리에서(1885-86) 샤코트(Jean Charcot)문하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치유 방법으로서의 최면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영혼 탐구의 첫 시작이었고, 신경학에서 정신병리학으로의 전환이었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최면술에 만족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의 효과는 단지 일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편 프로이드로 하여금 히스테리에 큰 관심을 갖게 만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유명한 안나 오(Anna O)여인의 케이스였다. 그의 동료 의사인 브로이어(Josef Breuer)의 환자로 히스테리로 인해 고통받던 지적인 젊은 여인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그는 히스테리의 증상은 감정적 쇼크(마음의 상처)의 산물, 특히 억눌린 성표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 일을 통해 프로이드는 브로이어와 갈라서게 되는 데, 브로이어는 이 문제를 생리 화학적 이론으로 설명하려고 했었고, 프로이드는 점점 생리학을 떠나 심리학적 범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프로이드의 관심이 생리학에서 심리학으로 바뀌고 있는 것은 그의 "과학적 심리학을 위한 과제 (Project for a Scientific Psychology, 1895)"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심리학적 과정들을 묘사하나 여전히 '신경세포의 수량적 상태' 같은 순수한 생리학적 용어들을 사용한다. 5년후 「꿈의 해석」에서 보듯이 프로이드는 점점 생리학적 표현들에게 심리학적 의미를 주고 있다. 프로이드는 인간심리 특히 직접적 지식으로는 접근 불가능한 정신 지층인 무의식의 역동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완전한 어둠이고, 의식적인 정신적 삶과 비교해 볼 때 명백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모든 심리적 활동이 처음에는 무의식이라는 것은 그의 주요 통찰력이었는데, 이것이 '첫 번째' 심리과정이고, 반면에 의식적 과정은 '두 번째'이다. 프로이드의 획기적인 업적은 무의식을 체계적인 과학적 설명의 대상으로 만든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잠재의식과 무의식을 물론 구분했고, 후에는 정신의 다른 체계들--이드, 자아, 초자아--사이를 구분한다. 프로이드는 정상적 상황에서, 무의식적이고 불쾌한 본능적 충동은 다소 격렬한 갈등 후에, 의식, 자아에 의해 거절된다고 말한다. 방어기제에 의해 처음부터 자아에 의해 거절된 그들은 무의식으로 흘러 들어가는데(즉 억압되어지는데), 이때 변함없이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의 전량을 그대로 갖고 가는 것이다. 이것은 후에 꿈의 형태나 또는 육체적 신경체계안에서 대리 만족(즉 신경증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기에서 치료의 과제는 환자와 치료자가 함께 노력해서 무의식에 억압된 정신적 충격 등의 내용을 억압 상태로부터 끌어내어 의식으로 노출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판단--이전의 거절된 본능적 억압을 수용하든 거절하는 것이 되든--을 내려야 한다. 이리하여 프로이드는 무의식 즉 취급되지 않은 정신적 외상의 경험과 감정을 드러냄으로서 정신적 질병의 치료로 이끄는 길을 발견했다. 이때 자유연상, 전이, 또는 말의 실수 등이 무의식에 자리잡은 이러한 감정들을 밝히는데 좋은 방법이지만, 이것을 위한 지름길은 꿈의 해석이라고 한다. 프로이드는 꿈을 (심리적인)소원성취라고 보면서,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운 신경증 증상들처럼 꿈도 억압된 소원의 위장된 성취이고 따라서 해석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 꿈 해석의 도움으로 프로이드는 어린 시절의 잊혀진 것까지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프로이드는 유아기의 의의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그의 위대한 발견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서 프로이드는 유아가 이미 성적(리비도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단지 이것은 성기적 성애가 아니라 프로이드가 전(前)성기적 성애라고 이름 붙인 입, 항문, 피부라고 하는 성감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또 아주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 아이의 성격 발달, 나아가서는 일생의 운명의 발전에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여기에서 말한다. 또 한가지 프로이드의 중요한 발견은 이른바 오디프스 콤플렉스이다. 그는 모든 신경증의 밑바닥에는 해소되지 않은 '오디프스 콤플렉스'가 있다고 가정했다. 이것은 네 다섯 살의 남자아이가 어머니에 대한 성적 집착과 동시에 라이벌이 되는 아버지에 대한 적의의 감정, 또 동시에 아버지에 의해 거세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관념의 복합을 오디프스 콤플렉스라 부르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디프스 왕'에서 이 이론의 근거를 삼는다. 이러한 이론들은 프로이드의 매우 중요한 과학적 업적이었고, 종교이해에 큰 역할을 하게된다. 이제 프로이드는 뇌해부학과 생리학, 정신 병리학 그리고 심리학의 새로운 형태(초심리학)에 이르는 그의 긴 여정의 끝에 이르렀다. 이제 그는 종교를 비판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다: 종교는 무엇인가? 2. 종교에 대한 프로이드의 이해 1) 종교의 기원 도대체 종교는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을까? 우선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신에 대한 태도는 어렸을 적 아버지에 대한 태도에서 나온다는 개인적(individual or 'ont ogentic') 요인이 있고, 둘째는 종족적(phylogentic) 요인이 있는데, 후자가 종교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이 되므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프로이드는 Totem and Taboo라는 책에서 원시인의 심성과 강박 신경증 환자의 사고 과정사이에 유비를 발견하고 여기에서 종교 기원에 대해 설명한다. 다윈의 이론을 빌려서 프로이드는 인류가 진화의 초기에는 무리 지어 살았는데, 이때 독재적인 "최초의 아버지"가 지배하면서 아들들을 배제하고 모든 여인을 혼자 소유를 했다는 것이다. 어느 날 불만으로 가득찬 젊은이들이 연합해서 아버지를 살해하지만, 곧 아버지의 위대함에 대한 그리움과 동시에 죄책감 즉 보복의 두려움에 대한 무의식적 죄책과 두려운 공포감을 갖게 된다. 결국 프로이드는 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의 여인들을 나누어 가진 자녀들의 죄책과 강박관념이 시간이 지나면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로 (또한 현실적으로 집단의 응집성을 유지하기 위해) 아버지의 상징적 대용물이라 할 수 있는 토템동물을 정하게 되고, 이를 숭배하고 이에 대한 살해금지와 또 동족간의 살인금지를 정하고, 동족내 다른 여인들(곧 아버지의 부인이었던 여인들)에 대한 성적 욕망을 포기하게 하는, 즉 오디프스적 죄책감을 속죄하는 뜻에서 동족간의 결혼을 금하는 족외혼(exogamy)이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년에 한 번 정해진 토템종교의 의례에서는, 아버지의 절대적 힘을 아들들이 받아들이는 상징적 행위로 토템 동물을 죽이고 먹는 것이 허용된다. 이때 토템조상과 그에 관련된 금기들에 대한 양면성은, 아버지와 그에 관련된 소망들--아버지를 제거하고 어머니를 소유하고자 하는--에 대한 오디프스적 양면성과 연관되어 있다. 존경과 두려움의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토템 조상의 힘은 더 한층 전이되어 아버지 모습을 신성으로 승화시켜 종교에서의 절대적인 신의 원형(prototype of God)이 된다. 전(前)종교적 기원으로부터 이런 변형은 세대를 거치면서 나타난 토템 식사의 진화--동물과 인간의 신성하고 희생적인 죽임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못 박힘과 기독교 성만찬에서 절정을 이루는 공동식사에 이르는 진화--에서 두드러지게 보여진다. 토템식사는, 사람의 죄책감(또는 "원죄")을 불러일으키며 또한 종교와 윤리적 구속, 사회조직의 출발점이 되는 바로 그 두려운 행위를 기억하는 축제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전적으로 인류의 오디푸스 콤플렉스에 근거를 두었다는 것이 종교의 기원에 대한 프로이드의 심리학적 설명이다. 종교의 기원에 대한 프로이드의 관심은 암으로 고통 중에 있던 그의 생애의 마지막까지 계속되는데, 그가 죽던 해에 완성된 Moses and Monotheism에서 그는 집단의 최초의 아버지를 죽인 그 범죄에 대한 인식이 종족 무의식 안에 남아있으며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늘 붙어 다니면서 지속적인 죄책감을 유발시키는데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유일신론의 뿌리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간단하게 Moses and Monotheism의 내용을 살펴보면, 모세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집트인이었고, 유대교의 일신론은 이집트로부터 나왔는데 특히 순수한 일신론을 신앙체계로 세우고자 했던 이크나톤(Ikhnaton) 통치 기간에 나왔다는 것이다. 기원전 1375년에 왕위에 오른 이 젊은 바로는 오직 한 신, 윤리적이고 우주적이고 관대한, 아텐(Aten)만을 섬기도록 강요했다. 모세는 바로의 딸들 중에 한 아들, 아마 비합법적인 아들, 이었고 이집트에서 이크나톤 바로 후의 기간동안 살았다. 그의 출신 성분으로 인해 그는 중요한 인물이었고, 아마 한 지역의 통치자로 있으면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었다고 본다. 열성적인 종교 개혁가로서 이크나톤은 당시 대중적인 종교를 모두 쫓아내었으나 그의 죽음이후에 그가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엄청난 혁명이 있었다. 모세는 이크나톤의 지지자였으나, 혁명 때문에 그가 믿던 종교의 형태를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실천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풀어주고 이크나톤의 일신론적 종교로 그들을 훈련시키고자 결심했다. 그는 이것을 실천했고, 얼마 후에(정확한 기간은 알 수 없지만) 이스라엘인들은 이 엄격하고도 고도로 영적인 종교를 참을 수 없어 결국 봉기하여 이것을 강요하던 그를 죽였다. 최소한 두세 대가 지나간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지도자를 뽑았고 그에게 모세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이 두 번째 모세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웨종교를 가져다준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인이었던 처음 모세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인의 종족 무의식 안에서 잠재적인 힘을 갖고 있었고 이것이 앞서 말한 과정을 통해 일신론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수백 년후의 사람들과 예언자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프로이드는 그가 믿는 것을 기독교에도 적용시켰다. 그에 따르면, 원죄 교리의 중요성은 그것이 무의식 안에서 최초의 아버지의 살인을 상징화했다는 것이다. 이 원죄로부터의 구원은 희생적 죽음을 통하여 발견되어져야 되는데, 바로 아들인 예수가 그의 어깨 위에 모든 죄를 짊어졌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버지 옆에서 그 자신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면서, 기독교는 아들 종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유대-기독교 전통은 이 오디프스 이야기의 단순한 확대 기록, 즉 종교는 극복하지도 못하고, 포기하지도 못함으로 해서 신경증이 되어 버린, 어린 시절의 갈등의 성인판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프로이드는 유일신론의 출현을 오디프스 콤플렉스를 근거로 한 원시 가족의 개념을 통해 설명을 시도하며, 또 한편 문명 비판을 통한 종교의 기원을 말한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인간 관계를 통제하기 위한 집단적 노력이 문명인데, 인간은 본래 자기 중심적 존재이므로 언제나 문명의 업적과 안정된 사회를 파괴하려는 충돌에 휩싸인다. 사회 특히 지배계층은 이런 인간 본능의 공격적 위험으로부터 사회와 기존 질서를 방어하고 지키기 위한 제도 장치를 필요로 하는데, 이것이 금기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반사회적 충동심을 적절히 억제하기 위한 강력한 규제나 금기 사항은 자연히 본래의 인간적 욕망과 상충하기 마련이다. 또한 이 금기와 규범을 지키지 못할 경우 죄책감이 생기게 된다. 여기에서 이런 죄책감과 갈등을 적절히 해소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의식이 필요했으며 이것이 종교적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는 문명의 파멸을 막기 위해 인간이 창출해낸 자기 방어기제의 최고형식이라고 본다. 즉, 문명이 문명사회 구성원에게 가하는 과잉억압과 고통의 짐을 심리적으로 위로하고 보상하고자 하는 것이 종교의 기원이라고 한다. 그럼 이렇게 시작된 종교의 본질은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2) 종교의 본질 그가 말하는 종교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책 The Future of an Illusion(1927)를 보는 것이 가장 빠를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종교 현상을 꿈과 신경증 증상에서 발견되는 소원성취의 모델에 적용시킨다. 따라서 그는 "종교적 개념들이란 우리 사고의 최종 결과나 경험의 오랜 축척에서 나온 산물이 아니라,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하고, 가장 간절한 인류의 소원이 실현된 것(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환영(illusion)"이라고 주장한다. 그럼 어떤 소원들인가? 그것은 생의 위협으로부터의 보호, 이 부조리한 사회에서 정의의 실현, 그리고 영생 등에 대한 인간의 소원이다. 이런 모든 소원들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유아의 경험에서 나오는데, 이때 신은 세 가지 기능을 갖게 된다: 자연의 공포를 없애주는 것, 사람들을 운명(죽음)에 화해시키는 것, 그리고 어떤 문화든 욕망의 금지에 근거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사람들이 당하는 일반 문화생활의 고통과 상실에 대해 보상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종교란 희망에 의거한 사고 즉 환영이다. 환영은 종교가 도덕적 의미에서 고의적 거짓말이라거나, 인식론적 의미에서 오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꿈이나 신경증등에서 나타나는) 소원 성취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다. 이를 위해 프로이드는 한 예를 드는데, 만일 한 가난한 소녀가 언젠가 왕자가 와서 자기를 데리고 갈 것이라는 환영에 붙들려 있다고 할 때, 그것을 반드시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신데렐라처럼 그녀는 왕자와 결혼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이것을 믿음으로서 간직할 합리적 근거는 없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오디프스 콤플렉스에서 유래하는, 우주적인 인류의 강박신경증으로서의 종교는 과학 정신의 증가로 말미암아 사라지고 있다고 프로이드는 보았다. 물론 이것은 그의 개인적인 소망으로 끝쳤지만, 그는 개인에게 있어서 그리고 인류 전체에 있어서, 종교는 인간 발달의 과도기 단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처음 단계는 신화적(또는 정령 숭배적), 둘째는 종교적,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적 단계이다. 개인으로서 또한 인류 전체로서 사람은 영원히 아이로 남을 수 없다. 사람은 성장해야한다. 즉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해 주시면 나는 이렇게 하겠습니다고 하나님과 흥정하는데, 이는 부모에게 매달리는 아이의 모습이므로 더 이상 유아적 환상에 매달림으로 성숙하기를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현실을 그 자신의 자원들과 과학의 도움으로 지배해야 하고, 도망칠 수 없는 운명의 필연에 대해 단념하는 것을 또한 배워야한다. 심리학적으로 이것은 쾌락원리에서 실재원리에로 전환하는 성숙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이네의 시에서 인용한 한 구절은 그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Den Himmel überlassen wir Den Engeln und den Spatzen." (하늘은 천사들과 참새들에게 맡겨라.) 즉, 내세에 대해서는 기대를 버리고 이 땅위의 삶에 모든 자원을 집중하라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 1804-1872)로부터 그의 개인적 무신론에 대한 본질적인 논증들을 받아들였다. 포이에르바하도 하나님 개념에 대한 투사는 소원이나 환상에서 온다고 주장하며 무신론에 대하여 심리학적으로 입증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종교사와 종교 심리학의 견지에서 포이에르바하의 심리학적 투사론에 한층 더한 깊이를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프로이드는 먼저 이 하나의 가정에 불과한 투사론을 의심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후에 단지 그것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이드의 종교 이해의 본질은 바로 포이에르바하가 세운 가정(hypothesis)위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3. 종교 이해에 있어서 프로이드의 한계 1. 프로이드의 종교기원에 대한 설명에는, 큉(Hans Küng)이 지적한 것처럼,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약점이다. 종교에 대한 그의 정신분석학적 해석은 실제로 원시 종교의 자료를 연구함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연구의 결과와 상관없이, 그의 글 레오나르도 다빈치(1910)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미 그전에 답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비엔나에서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하는 중에 인간 마음속에 오디프스 콤플렉스가 존재한다는 가정을 하고, 이 이론의 근거를 희랍신화의 오디프스(Oedipus)이야기에서 찾으며, 그 후 종교사를 통해 더 객관적인 설명을 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그가 말하는 것이 단지 심리학적 필연성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고 굳게 생각했으나, 그가 종교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자료들은 잘못된 정보를 담고 있는 것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또 프로이드에 따르면, 모세는 새로운 가르침을 갖고 온 이집트 출신이며, 죽임을 당한 후에 엄청난 아버지 이미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 약 1,400년이 흐른 다음 그 민족의 아들인 한 유대인이 모세를 죽인 그의 형제들의 행위를 대속하고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예수)는 실제로 그의 형제들을 죄책감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은 그를 그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이방인들에 의해 구세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들은 그들의 종족 무의식 속에 모세를 죽인 죄책감으로 고통받을 필요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처음 아버지를 죽였다는 그의 애매 모호한 가정은 전혀 비 논리적이며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 어려운 가정이다. 2. 정신분석은 어린 시절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매우 강조한다. 신경증적 성격, 성품, 개인의 신념 등은 부모-자녀 관계에 있는 어릴 적 경험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그 자신의 종교에 대한 견해 역시 그의 어린 시절 가정교육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2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오랜 종교적 관습들이 퇴색해가고 종교 그 자체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더욱이 유대인으로서 다시 말해 인기없는 소수민족의 한 일원으로서, 비록 종교적 신념을 같이 나누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민족을 박해하는 다수 기독교인(특히 로만 카톨릭)을 향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졌으리라는 것은 그의 전기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그의 감정은 크리스챤의 종교적 믿음에 대한 그의 코멘트를 읽을 때 특히 그가 모든 종교는 환영이라고 확신할 때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렇듯 프로이드가 그의 정신분석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어린 시절의 영향으로 이미 무신론자가 되었음은 그의 종교이해에 있어서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이 이처럼 환경의 영향을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프로이드의 무의식에 있어서도 적용이 된다. 프로이드의 위대한 발견은 역동적인 무의식을 우리 마음에서 가장 강력한 동기력(motive force)으로 파악한 것이었다. 그는 인간 개개인과 인류 역사가 무의식에 의해 크게 결정된다는 것과, 또한 이 무의식은 자유연상과 꿈 분석 등의 방법을 통해 완전히 탐구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비록 무의식의 역동적 본성에 대한 프로이드의 일반적 주장이 옳았다 할지라도, 그 무의식의 내용에 대한 해석은 너무 편협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프로이드도 어쩔 수 없이 그 자신의 사회적인 편견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프로이드는 그의 비엔나 환자를 치료하면서 거의 얻어진 증거에 의해 다시 말해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보편적 인간이해를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비엔나 의사의 경험으로 그는 성적 부적응은 신경증이 유발될 때 많은 경우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보는데, 이것은 그가 살던 독특한 사회 환경에서 즉 성욕이 억압되던 사회였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결론이었고 (물론 이것은 상류층과 하류층에는 비교적 해당이 안되었지만), 결국 이런 배경에서 프로이드는 무의식 안에서 (억눌린)성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생각을 갖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아주 부정적으로 억압된 소원의 창고로 이해되는 무의식적 과정의 견지에서만 종교 경험을 설명하려는 프로이드의 시도는 매우 단순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무의식의 본질과 또한 상징주의에 대한 그의 편협한 태도는 융이나 아들러같은 그의 동료들을 정신분석학의 울타리로부터 떠나도록 만들었다. 3. 프로이드는 19세기 생물학적 진화론, 유물론적 인과론적 입장에서 환원주의 등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그 당시의 지배적인 과학적 견해를 진리의 완전한 계시로서 믿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므로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신에 대한 믿음은 과학에 대한 믿음, 다른 말로 하면, 과학에 대한 유사 종교적 믿음으로 대체되었다. 과학에 대한 믿음이 신에 대한 믿음을 대체할 수 있을까? 프로이드의 예언과는 반대로, 피스터가 주장했듯이, 서방에서나 동방에서나 신에 대한 믿음은 아직 과학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에, 모든 분야에서 과학의 확실한 진전(가공할 파괴력의 무기나 생명복제 기술등)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학에 대한 믿음--과학은 자동적으로 진전을 의미하고, 그리하여 이것은 우주적인 인류의 행복에로 이끄는 열쇠라는 믿음--을 의심하게 한다. 오히려, 큉이 말하는 것처럼, 때때로 과학의 진전과 기술은 종말론적 공포에 이르게까지 하는 어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퍼치고 있다. 과학 그 자체는 인간의 비물질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고 인간의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그리고 진정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가치들을 줄 수 없다는 것을 프로이드는 맹신적인 과학에 대한 믿음 때문에 볼 수 없었다. 프로이드는 모험정신을 지닌 성실한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가 만든 가정 때문에 즉 종교는 거짓이고, 과학은 매우 중요하고 따라서 정신분석 안에 인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있다는 가정 때문에, 그는 극히 좁은 세계 안에서 그의 삶을 마쳤다. 특별한 방향에 대한 그의 지나친 관심은 우주의 많은 부분을 배제시켰다. 오디프스 콤플렉스로서 인류 종교현상을 모두 해명하려고 한 것은 비약이라고 보여진다. 왜 소망하는 것이 허락될 수 없는가? 인류나 개인의 삶이 단지 자연의 비정한 법칙이나 우연성이나 적자생존의 법칙에 지배를 받고, 모든 것은 무(nothingness)로 죽어간다는 생각에 오히려 혐오를 느낄 수 있지 않는가? 프로이드의 무신론은 가정이다. 프로이드 자신도 이것을 저 마음 깊은 곳에서 잘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질문한다: 삶이란 무엇이고, 도대체 죽음이후에는 무엇이 일어나는가? 이런 질문에는 병리학적인 어떤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집단 신경증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자연스럽게 질문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그가 생각하는 과학이 대답할 수 없는 이러한 질문의 중요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인간에게 있어서 이런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추구하는 것은 종교의 한 근원이고 인간의 정상적인 경험의 한 부분이다. 프로이드는 이 경향을 무시하던지 또는 그것을 비정상인 것으로 취급했다. 이것이 그의 종교이해의 또 다른 한계이다. 4. 결론 비록 나는 프로이드의 종교 이해를 비판할지라도, 그의 개척자적인 작업과 인간 그 자신에 대한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는, 그의 문명 비판론에서 보듯, 본능 억압과 승화를 통해 사회와 문명이 파멸되지 않도록 지키는 역할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종교라는 이름아래 너무 많은 억압이 있어 인간 스스로 성숙해짐을 막아왔고 오히려 불행하게도 만들어 왔다는 것에 부분적이지만 공감을 한다. 프로이드는 심층심리학의 관점으로부터, 인간의 편에서 종교, 교회 혹은 신 자신에 의한 억압이나 지배에 대항하여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성숙한 인간성을 추구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했음을 본다. 이것은--인간의 성숙--비록 프로이드와는 접근 방법이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가 함께 추구해 나가야 할 방향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프로이드가 종교를 취급하는 가운데 보여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의 일부는 사실이라는 것이 시인되어야 한다. 즉 많은 사람들의 종교적 신념이 잘못된 투사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크리스챤의 하나님 이미지는 어린 시절 인상 남던 아버지의 이미지에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형성된다. 때론 고의적으로 그들의 자녀를 훈련시키기 위해 교육의 방법으로 부모에 의해 벌하시는 아버지-하나님이 남용되기도 하는데,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것은 아이들에게 종교에 대해 부정적 결과를 갖고 올 수 있다. 또 종교가 소원 성취에만 의존할 때, 본질적 진리가 아니라 그것은 순수한 욕구의 만족으로 환원되어진다. 그런 종교는 유아적 소원으로의 퇴행이다. 또한 종교가 어떤 형식, 의식, 종교적 개념의 강박적 반복가운데서 문자에만 매달리게 될 때, 종교적 개념들은 강박적 의례적 반복에서 오는 만족으로 빠지게 된다. 마치 뜻도 모르고 그저 반야심경을 의미 없이 외우는 것처럼. 이렇게 부적절하게 동기 되어진 종교적 행위는, 강박 신경증 환자의 개인 의례에서 처럼, 어떤 유혹이나 벌에 대한--가끔 무의식적인--두려움, 공포감에 의해 이루어지는 방어 대책이다. 이처럼 프로이드의 비판을 통해서 우리는 자칫 빠지기 쉬운 종교의 모순을 벗어나서 건강한 종교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실수는 모든 것이 파악되고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리꿔가 지적한대로, 정신분석은 구습타파에 필요한 것 이상은 넘어갈 수 없다. 신에 대한 신앙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태도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이것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문제는 신에 대한 믿음이 심리학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적 관점으로부터 신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투사의 구조를 나타내거나 단순한 투사로 의심받을 수도 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연인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그/그녀 자신의 이미지를 반드시 투사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사랑하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자신의 투사의 도움으로 그/그녀는 오히려 단지 객관적인 관찰자로 밖에서 상대를 판단하려고 하는 사람보다 더 심오하게 상대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단순한 투사의 사실이 그것이 언급하는 대상의 존재나 비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심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다시 말해, 프로이드는 종교 개념의 심리학적 본질에만 (환영으로서) 관심이 있었지, 그들의 진리 내용(실재로서) 에는 관심이 없었다. 예수의 말씀과 삶에 대한 관심보다 그의 형상이 상징하는 심리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었다. 이점에서, 게이(Peter Gay)도 프로이드가 구약의 아모스, 이사야의 신학이나 신명기 신학 등에는 관심이 없고, "억압된 것의 복귀"(return of the repressed) 개념의 심리학적 관점에서만 구약의 하나님을 본다고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