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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쪽 백두대간을 탐험하는 로저일행. 소주, 컵라면, 김치가 보인다. ⓒ로저 셰퍼드 |
한반도 어디를 가든 술 나눠 마시는 인심은 좋으니 술잔을 잊지 말라고 조언했단다. 정말 북한의 술 인심은 좋을까? 로저의 사진 폴더에서 '술 사진'은 쉽게 눈에 띈다.
로저는 북한의 산에서 길을 잃은 뒤, 한 주민에게 소주를 선물 받은 이야기를 들려
줬다.
지난 2012년 6월이었다. 북한 백두대간을 탐험하는 로저 일행은 백두산으로 향했다.
백두대간의 시작점이어서 로저의 가슴은 설렜다. 하늘은 반대였다. 흐리고, 높이 오
를수록 운무가 짙었다. 설렘은 초조로 바뀌었다. 더욱 진해지는 운무 탓에 산에 올라도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없을 듯했다.
▲ 운무에 휩싸인 백두산 ⓒ로저 셰퍼드 |
"이대로는 어렵겠는데..백두산은 내일 가고, 오늘은 대노은산으로 갑시다!"
백두산 대신 대노은산이라니.
중국을 거치지 않고 백두산에 가고, 마음대로 목적지까지 변경하는 이방인이 부럽다. 우리는 누릴 수도, 선택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더욱 그렇다.
▲ "북한 백두고원의 모습 ⓒ로저 셰퍼드" |
백두고원을 통과하는 양강도 대노은산 가는 길은 장관이었다.
백두산 입구에서 약 50km를 달렸는데, 비포장도로임에도 길이 부드러웠다. 화산재
로 이뤄진 토질 탓이다. 한반도에서 '산 너머 산' 풍경은 흔하다. 이 길은 그와 반대
로 사방이 시원하게 열려 있다. 고원의 지평선은 잔잔한 바다처럼 평화롭고 시원했
다.
사람이 사는 여러 마을도 거쳤다. 집 주변에는 감자밭이 넓게 펼쳐졌고, 그곳에서
일하는 북한 주민도 보였다. 어느 지역에서 차가 한 번 멈췄다. 농부로 보이는 한
남자가 웃으며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 북한 백두고원의 감자밭과 일하는 농부 ⓒ로저 셰퍼드 |
"대노은산 안내를 맡은 김상수씨였어. 남한 시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농부들하고 비슷한 분위기의 남자야. 그가 처음 우리를 데려간 동네 이름이 뭔지 알아? 신사동!"
대노은산 등반을 위해 도착한 마을 이름은 신사동, 로저 일행이 차를 주차한 곳은
'신사동국수집' 앞이었다.
이제 산으로 들어갈 시간, 하늘을 보니 백두산과 달리 맑았다.
▲ 신사동국수집 ⓒ로저 셰퍼드 |
"이 산은 나한테 손바닥이니, 걱정 말고 따라 오시오. 후딱 다녀옵시다!"
김상수가 앞장섰다. 대노은산은 높이 1489m로 그리 높지 않다. 경치가 빼어나다고 알려진 산도 아니다. 하지만 숲으로 들어갈수록 다양한 나무와 꽃들이 펼쳐져 신비
로웠다. 울창한 소나무 숲인가 하면, 자작나무 군락이 나타났다.
▲ 대노은산의 숲. 연한 연둣빛이 보기 좋다. ⓒ로저 셰퍼드 |
정말 손바닥처럼 이 산을 잘 아는지 김상수는 저만치 앞서 걸었다.
그러다 몸에 좋고 맛도 좋다는 산나물을 만나면 그대로 멈춰 서 로저 일행을 기다
렸다. 우산처럼 잎이 넓게 펼쳐진 산나물 앞에서 김상수는 목소리를 높였다.
"뉴질랜드에서도 이런 거 먹어? 병풍나물인데, 이 지역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거야. 쌉싸름한 맛이 나는데, 건강에도 무지 좋아!"
김상수는 병풍나물 하나를 꺾어 로저에게 권했다. 로저가 어떻게 먹는지 몰라 난감
해하자, 그는 줄기를 작게 잘라 씹으며 시범을 보였다. 로저도 따라했다. 레몬향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몸 어디에, 어떻게 좋은지 김상수에게 물었다.
"뉴질랜드에는 이런 거 없지? 어차피 먹을 일 없을 테니, 너무 자세히 묻지 마세요!
그냥 몸에 좋구나..그렇게 생각하면 돼. (웃음)"
김상수는 대충 얼버무리고 다시 앞서 걸었다. 역시 백두산 근처에서는 날씨를 종잡
을 수가 없다. 화창하던 하늘은 갑자기 뿌옇게 변했다. 대노은산에서도 사진을 못
찍을까봐 로저의 마음에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로저는 서둘렀다.
정상에 도착하자 김상수는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마치 산신령처럼 보였다. 그는
"수고했다."며 로저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왼손으로 산 아래 고원을 가
리켰다.
로저도 가만히 산 아래를 바라봤다. 고원을 훑고 온 바람이 대노은산을 흔들었다.
한동안 둘은 가만히 산 아래 모습만 바라봤다.
▲ 대노은산 정상에서 바라본 백두고원 풍경. 제주의 모습과 비슷하다. ⓒ로저 셰퍼드 |
"제주도 오름 위에서 본 풍경과 비슷했어. 바람도, 그 바람에 춤추는 구름도..뭔가 뭉클했어. 제주도에서 밭과 밭의 경계를 주로 돌담으로 나누듯이, 백두고원은 나무로 나눴더라고. 제주에서는 돌담이 바람을 막는데, 여기에서는 나무가 그 역할을
하더군."
제주도 용눈이오름에서 내려다 본 풍경과 정말 닮았다. 제주의 돌담은 바람에 맞서
지 않고, 그 힘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어디 그 바람이 인위적으로 맞선다고 막
아지는 바람인가. 백두고원의 '나무담' 역시 그와 비슷한 원리로 보였다. 한반도 남
쪽 끝 섬과 북쪽의 고원 사람들은 허술한 담으로 바람과의 공존을 선택했다.
로저는 운무가 모든 풍경을 삼키기 전에 서둘러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남쪽에서 검
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조선-뉴질랜드친선협회에서 일하는 황승철, 양강도 공
무원 방령은 뒤늦게 정상에 도착했다. 이들은 하늘을 보며 "비가 쏟아지기 전에 빨리 내려가자."고 재촉했다.
▲ 대노은산 정상에서. 왼쪽부터 김상수, 황승철, 방령, 로저 셰퍼드 ⓒ로저 셰퍼드 |
"천둥번개 치는 모습도 좋은 풍경 아니야? 비가 올 때까지 좀 기다려 보자고."
로저의 제안에 모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김상수가 나섰다.
"이봐 로저 동무, 여기가 뉴질랜드인 줄 알아? 백두고원이라고! 여기서 천둥번개를 기다리면 둘 중 하나야. 벼락 맞아 죽거나, 얼어 죽거나. 얼른 내려가자고. 나만 따라와! 내가 빨리 하산하는 지름길을 아니까."
김상수가 방향을 잡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로저도 서둘러 뒤따랐다. 금방 후두둑 비
가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몸이 젖어 으슬으슬 추워졌다. 과연 백두고원이었다.
호기롭게 자기만 따라오라던 '대노은산의 남자' 김상수가 저만치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얼굴은 "이 길이 아닌가벼.."라고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다리에 쥐가 나 힘들어했다. 로저가 김상수의 허벅지를 주물러 근육을
풀어줬다.
▲ 대노은산에서 내려왔을 때 만난 한 민가 ⓒ로저 셰퍼드 |
여기가 어디여..
상수가 방향을 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잠시 뒤 산 아래에 도착했다. 그런데, 올라 온 지역과 전혀 다른 엉뚱한 곳이었다. 민가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김상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사방을 둘러봤다. 지도를 펼쳐 들고는 혼잣말로 "여기가 어디여.."를 반복했다.
북한의 모든 지역을 잘 아는 '베스트 드라이버' 한명수가 산에 오르지 않은 게 다행
이었다. 황승철은 휴대전화를 꺼내 한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명수는 로저 일행
이 있는 곳을 알아차렸다. 얼마 뒤 한명수가 차를 끌고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비에 젖은 채 산행을 마쳤으니, 이젠 따뜻한 음식과 술로 몸을 데울 시간. 로저 일행
은 신사동국수집으로 갔다. 식당 안에서는 군복을 입은 남자 몇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로저는 살짝 긴장했다.
"혹시 그들이 갑자기 나타난 백인인 나를 미워할까봐 덜컥 겁을 먹었지. 그런데 웬걸, '헤이, 컴 온!' 하더니 술잔에 가득 소주를 따라주더라고. 빈속이었지만 바로 받아 마셨어. 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금방 취하더라고. (웃음)"
로저가 마신 술은 감자로 만든 '감자소주'였다. 30도가 넘는 술이었다. 로저는 이들
과 어울려 소주 세 병을 비웠다. 안주는 멧돼지로 만든 보쌈이었다. 잠시 뒤 주방장
이 나와 "왜 추운 응지 쪽에 앉았느냐"며 로저를 따뜻한 양지 쪽 좌석으로 안내했다.
▲ 대노은산에서 길을 잃었던 김상수는 미안함의 표시로 감자소주 한 병을 선물 했다. ⓒ로저 셰퍼드 |
로저 일행은 대노은산에서 비 맞은 채 길 잃은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안내자였던 김상수는 로저 일행에게 미안했는지 주방으로 들어가 감자소주 한 병을 더 들고 왔다.
"로저 동무, 이 소주는 선물이야. 남한에 가져가서 친구들과 맛있게 마시라고. '북한에서는 안내자가 산에서 길을 잃더라' 뭐 이런 말 하지 말고! 알았지? (웃음)"
선물받은 그 감자소주는 어디에 있을까? 로저는 배를 두드렸다. 부러웠다. 나도 백두고원에서 바람소리 들으며 감자소주 한 잔 들이키고 싶다.
첫댓글 정말 멋 있는데 갈 수 없으니 그야말로 그림이네요.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면 꼭 가고 싶네요.
아름다운 사진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환상적입니다!
세상에...
우리나라에도 저렇게 멋진산이 있을줄 몰랐습니다
통일된다면 1순위로 가겠습니다
단 몸이 허락한다면...
잠실 산악회 에서 한번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