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주산성은 고양시의 서남쪽 끝 한강 연안에 위치한 산성으로 덕양산 7~8부 능선에 축조된 토성으로 둘레는 약 1km이며, 1593년 권율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왜군을 크게 물리친 행주대첩 전적지로 유명하다.
1592년(선조 25) 7월 8일 이치(梨峙)에서 왜적을 격멸한 권율은, 12월 수원 독산성(禿山城)에서 다시 적을 물리친 뒤 서울 수복작전을 개시,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과 승장 처영(處英) 등 정병 2,300명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행주 덕양산(德陽山)에 진을 치고 서울 수복을 노렸다. 이때 왜군 총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의 부하 장성을 거느리고 3만여 병력으로 공격해왔다. 권율은 이들을 처절한 접전 끝에 크게 무찔렀다.
지금 산허리에 목책(木柵) 자리가 남아 있고, 삼국시대의 토기 조각이 출토되는 것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도 중요한 군사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1603년(선조 36)에 세운 행주대첩비와 1963년에 다시 세운 대첩비가 있으며, 1970년 권율의 사당인 충장사(忠莊祠)를 다시 짓고 정자와 문을 세웠다.
장군은 해발 124m의 덕양산 중턱에 이중의 튼튼한 목책성을 설치하였다. 전투 준비가 끝난 1593년 2월 12일 새벽 6시 경 왜군 총수 우희다수가는 3만명에 이르는 7개 부대를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대한 정면공격을 개시하였다. 치열한 12시간의 공방전이 있은후 오후 6시경 결구 적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갔다. 전과는 사상자가 1만여명에 이르렀고 노획한 전리품 또한 대단하였다. 이 대첩의 승리로 권율장군은 도원수로 승진하였다. 바로 이 행주대첩이 충무공의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더불어 역사에 길이 빛나는 임란 3대첩이다.
이 대첩에는 고양의 부녀자까지도 전투에 참여하여 치마폭에 돌을 날라 석전을 전개하였는데 그 치마를 행주치마라고 한다. 지금도 산 중턱에 목책자리가 남아 있고 삼국 시대 토기 조각과 기왓장 등이 다수 출토되어 옛날에도 군사기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대첩이 끝난 후 1603년에 건립한 행주대첩비가 비가 속에 남아 있으며 1963년에 세운 대첩비도 서있다. 이 비의 전면 글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1970년 대대적인 정화공사를 하면서 권율장군의 사당인 충장사를 다시 짓고 정자와 문을 세워 경역을 규모있게 조성하면서 1845년에 세운 행주서원 기공사 경내의 대첩비는 충장사 옆에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