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흐.르.는.곡.오.직.주.만.이(송정미)
가난해서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들도 절망합니다.
불치병때문에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자들도 절망합니다.
개척교회 목사라서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큰 교회 목사들도 절망합니다.
결혼못해서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도 절망합니다.
신용불량자라서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용우량자들도 절망합니다.
가을이라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봄에도 절망했었습니다.
내맘대로 안되어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맘대로 잘될때도 절망했습니다.
인생의 모순 때문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래도 절망하고 저래도 절망합니다.
풍요지수나 지식지수가 높아질수록 절망지수 또한 높아지게 되지요.
누구를 막론하고 절망에서 예외될 사람은 없으며
절망의 영향권안에서 벗어나 절망의 사각지대에 숨을자가 없습니다.
절망앞에서는 영웅도, 위인도, 하나님의 사람도 자유로울수 없습니다.
사람은,
나보다 더 힘들고, 더 가난하고, 더 실패하고, 더 아픈 사람을 보며
용기를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야곱을 생각하며 성화됨의 가능성을 갖습니다.
모세를 보며 살인자를 쓰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를 보며 엉터리같은 내 자신의 영성과 인격에 안도의 숨을 내쉽니다.
엘리야를 보며 우리와 같은 연약한 질그릇이었음에 한숨을 돌립니다.
만일에 하나님의 사람가운데 본래부터 훌륭하고 완전한 사람뿐이었다면
아마도 성경은 우리에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엘리야가 경험한 절망을 만나게 됩니다.
굳이 무었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냥 사는게 힘이 듭니다.
그냥 믿는게 힘이 듭니다.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지에 대한 중압감이 구름이 비되어 내리듯
우리의 심장을 압박합니다.
저도 수일전에 블랙홀과 같은 절망의 수렁에서 헤맸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할수 없었습니다.
일어 날수도 없었습니다.
기도조차 할수 없었습니다.
수저들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렇게도 가고싶은 교회가 천리길이었습니다.
그날은 내게 질척한 수렁이었습니다.
본래 수렁의 특징은 빠져 나올려고 발버둥치면 더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그것 또한 불안의 수렁이 되어 점점 더 깊은 늪으로 빨려 들게 합니다.
이렇듯이 살다보면 누구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절망의 수렁에서
사투를 벌이게 되는 날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예외일수 없으며 위인이라고 다르지 않으며
기도의 거인이라도 봐주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절망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거절때문일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기도한것의 반대로 일이 전개되는것 때문일수 있습니다.
또한 삶의 모든 가능성과 미래에 대하여 희망의 여지가 없는것 때문일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 어떤 사람의 변화에 대한 기대가 어긋나는것 때문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떠하든 우리의 절망의 포커스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 많습니다.
보통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으면 무조건 산정상으로 올라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말은 산위에 올라가면 길이 보인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어디가 정상인지 분별하기 힘들때 극심한 절망에 도달하게 됩니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만 보인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참을수 있고, 기다릴수 있고, 버틸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의 정상, 신앙의 최고봉이신 하나님이 안보이고 안들린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어려움이야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겠지만
하나님이 안보이심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절망지수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다 터널이 무너져
터널의 입구와 출구가 봉쇄된 상태와 같은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예수믿다 절망하고
기도하다 절망하고
사람으로 인하여 절망하고
교회로 인하여 절망하고
가난으로 인하여 절망한 분이 바다의 모래알 처럼 많은듯 싶습니다.
주님이시라면 절망한 영혼들에게 어떻게 하셨을까요?
'지금이 어느때인데 절망하냐'고 호통치셨을까요?
'믿음이 부족해서 절망했다'고 나무라셨을까요?
'기도를 그렇게 못하니 당연히 절망하지 않겠냐'고 정죄하셨을까요?
절망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러나 절망의 회복은 누구에게나 경험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절망의 회복을 갈망하십시요.
하나님이 절망에서 건져내심을 보면 좀 의아하고 너무 일반적이기도 함으로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마음으로만 격려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이상한 방법을 사용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방법으로 그리고 자연소재를 소스로 이용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아마도 성경에 나타난 인물가운데 최초로 자살 시도자(?)내지는
스스로 죽는것을 생각한자 였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너무 힘들고 막다른 길을 만나면
'차라리 죽는것이 사는것 보다 났겠다'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엘리야도 로뎀나무 아래서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큰 절망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이유야 어떻든 엘리야의 생각속에서 죽음을 생각했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시간이었고, 그만큼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불과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물을 내리던
갈멜산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로뎀나무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슬럼프에 빠져 있는 엘리야를 보면
과연 갈멜산의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인가? 할 정도로 상반되는 모습입니다.
엘리야의 절망의 이유가 무엇이었든 하나님은 엘리야의 절망의 현장으로
천사들을 급파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절망을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갈멜산 정상에만 계신분이 아니라, 로뎀나무 그늘 아래에도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갈멜산의 거성이었던 엘리야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로뎀나무아래 초라하게 죽음을 생각하는 엘리야를 바라보시면서
어쩔줄 몰라 하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도자의 슬럼프
사역자의 슬럼프
가장으로서의 슬럼프
아내로서의 슬럼프를 챙기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갈멜산 정상에 있는 엘리야에게만 박수와 갈채를 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로뎀나무 아래 앉아,
아무런 힘없이 나무에 기대고 있는 엘리야에게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박수! 하나님의 파이팅!이야말로..
절망을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 되게 하는 자원입니다.
절망중에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급파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지금도 절망중에 있는 교회, 가정, 성도들을 신속히 희망으로 회복시키시기를
소원하시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절망에서 건져올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절망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엘리야를 찾아온 천사는 엘리야를 어루만집니다.
엘리야를 때리거나 다그친 것이 아니라 어루만진 것입니다.
회복과 격려는 스킨쉽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스킨쉽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절정입니다.
하나님의 터치입니다.
하나님의 접촉입니다.
기름부으심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격려입니다.
'내가 너의 절망을 알고, 너의 피곤을 알고, 너의 통증을 알고, 이해하고, 인정하고,
도와주겠다'는 따뜻한 마음입니다.
그 다음에 마실물과 떡을 주었습니다.
희망으로의 회복의 또 다른 지름길은 휴식과 영양보충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후에 있을 영적전쟁에서 승리하게 하기 위하여
건강을 챙기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떡과 물을 먹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먹고 마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의 문제도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갑이나 냉장고
그리고 바닥난 쌀통에도 관심을 갖고 마음 졸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잘 먹어야 합니다.
밥이 보약입니다.
마찬가지로 절망으로 지쳐있는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은 우리를 어루만지심과 동시에 먹을 것을 주십니다.
그리고 건강을 챙기십니다.
말씀을 먹이시는 하나님.. 생수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영과 육이 아울러 강건하기를 원하십니다.
몸도 마음도 영도 말이죠.
더 나아가 우리의 육신이 너무 피곤하고 지치고 아프면
절망할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하나님의 어루만지심 하나님의 임재 그리고 충분한 휴식과 영양보충
그리고 따뜻한 격려의 말은
절망을 희망으로
죽음을 삶으로
죽을 사람을 산사람으로
쓰러진 사람을 세워짐으로
바꾸어 내는데 첩경이 될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심장을 이식 받은자 들로서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빚진 자들로서 마땅히 절망중에 있는 자들을 찾아내어
어루만지며, 어깨를 두드려 주며, 먹을것을 챙겨주며, 격려와 기도로 섬겨야 할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할일이며 교회의 사명이 아닐까요?
극심한 절망중에 있으십니까?
포기하지 마십시요.
주저 앉지 마십시요.
좀~ 쉬세요.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세요.
맛나는것 잘 챙겨드세요.
그럼 좀 나아질 것입니다.
영적인 일에 대한 지나친 강박관념을 잠시 내려 놓으세요.
어짜피 신앙은 마라톤이니까요.
로뎀나무 아래서 절망하던 엘리야가
나중에는 죽지 않고 병거타고 하늘에 올라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기대를 놓치지 마세요.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편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푸.른.초.장.상.담.실(02)3D975-0691.samohara@hanmail.net">975-0691.samohara@hanmail.net
온유하라목사님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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