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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기계유씨(杞溪兪氏) 원문보기 글쓴이: 유섭(炳,1946,慈,포천)
미주(微註)
▉ 丁外(內)艱喪에 대한 정정 : 단성공이 13세 되던 해는 1535년[1522년+13=1535년]으로서, 이 해에 선고 참판공(휘 관)께서 별세하였다(外艱喪). 그리고 3년 후인 1538에 왕고이신 경안공(휘 여림)께서 별세하였다. 모부인 의령남씨는 참판공의 사후 42년이 되어 별세하였으니 이해가 을해년(1575년, 선조 8년)이었다(內艱喪). 그러나 원문에 내외간상이 바뀌어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를 바로 잡는다.
▉ 요역 [徭役 ]: 요부(徭賦), 잡역(雜役), 호역(戶役), 역역(力役), 부역(賦役) 등이라 하였다. 전통적 수취체제인 조(租) ·용(庸) ·조(調) 가운데 백성의 노동력을 징발하는 용에 해당된다. 용이 노동력을 징발하되, 실제 노역에 종사하는 대신 포(布) 등의 현물로 대신 납부할 수 있도록 제도화된 것에 비해,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이래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였다. 전 근대국가에서 백성의 노동력을 징발한 방식에는 특정의 인신(人身)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역을 부과하는 신역(身役)과 불특정의 민호(民戶)에게 수시로 역을 지우는 요역 두 종류가 있었다. 이 중 요역은 호를 대상으로 한 호역으로서 국가에서는 백성이 노동력을 제공한 데 대해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았으며, 지배기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각종 물자의 생산 및 수송, 토목공사 등 인간의 노동력이 요구되는 모든 분야에서 징발되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요역은 그 것이 적용되는 일의 내용에 따라 전세미(田稅米)의 수송, 공물(貢物) ·진상물, 잡물(雜物)의 조달, 토목공사, 지대(支待) ·영접(迎接) 등 크게 네 종류로 구분되었다. 초기에는 인정의 수에 따라 일꾼을 내도록 했으나, 1428년(세종 10)부터 토지소유 면적을 기준으로 하여 호를 5등급으로 나누어 일꾼을 내게 하는 계전법(計田法)으로 바뀌었다. 1471년(성종 2) 역민식(役民式)을 제정하여 토지 8결을 단위로 한 사람의 일꾼을 내도록 하는 팔결출일부제(八結出一夫制)를 법제화하였다. 이로써 요역은 다른 조세와 함께 토지를 단위로 한 수취제도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농사기술의 발전으로 토지를 놀리지 않고 매년 경작할 수 있게 된 농업 생산력의 발전이 세제(稅制) 개편에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운영과정에서 법제적 규정과는 달리 지방관이 임의로 징발하는 경우가 많아 농민을 괴롭히는 무거운 부담의 하나가 되었다. 게다가 인정을 단위로 한 군역과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아 성종(成宗)대 이후에는 사실상 토목공사에 군인이 동원되고 모든 인정이 군역에 충당됨으로써 요역부과 대상자는 사실상 노동력을 상실한 노약자에 불과한 현상이 나타나, 오히려 군역이 요역으로 변질되는 현상이 촉진되었다. 즉, 군역제도가 바뀌어 군인의 수가 늘어나면서 상대적으로 요역 부담자가 줄어들어 법제상으로 규정된 요역체제는 점차 무너져갔다. 17세기 이후 공물을 현물 대신 쌀이나 포(布)로 거두는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면서, 요역은 역을 지는 대신 현물을 냄으로써 그 의무를 다하게 되는 대동세(大同稅), 잡역세(雜役稅)로 개편되어 갔다. 다른 한편에서는 중앙정부나 지방관아에서 일이 있을 때마다 인부를 모집해서 일을 시키고 임금을 지불하는 고립제(雇立制)가 발전하였다. 이러한 변화과정은 국가권력의 개별적, 인신적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농민의 저항행위로 더욱 촉진되었다. 또한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으로 중앙이나 지방 관부에서 현물 재정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대된 것과 궤를 같이한다.
■ 김귀영(金貴榮)[1519(중종 14)∼1593(선조 26)]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으로 김응무(金應武)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2년(1547) 알성 문과에 급제, 예문관 검열이 되고 정자 · 박사 · 대교(待敎)를 역임하면서 《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에 기사관으로 참여하였다. 이어 부수찬 · 정언 등을 거쳐 명종 10년(1555) 김홍도(金弘度)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恩典)을 입었으며,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도순찰사 이준경(李浚慶)의 종사관으로 종군한 후 이조 정랑 · 승지 · 이조 참의를 거쳐 명종 15년(1560) 7월 18일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다.
선조 즉위 후 도승지를 거쳐 예조 판서에 오른 뒤 이조 판서를 8차례, 사신으로 북경을 내왕하기 9번을 거듭하고, 선조 14년(1581) 우의정에 발탁된 후 좌의정이 되었다가 1589년의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지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나 조헌(趙憲)의 탄핵을 받고 상주로 은퇴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원임대신으로서 왕자 임해군(臨海君)을 시종하여 함경도로 갔다가 왜군에 포로가 되었으며, 왜장(倭將) 가토오에 의해 화의(和議)를 목적으로 석방되어 선조에게로 보내어졌으나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희천(熙川)에 유배되어 죽었다. 현종 5년(1664) 손자 김명창(金命昌)의 상언(上言)으로 복관(復官)되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志, 燃藜室記述
【관련항목】 강사상(姜士尙)
3) 신계공파 파조(波祖) 휘 순(諱 洵) <1531~1589>
공의 자(字)는 노천(老泉)이다. 첨지중추부사 휘 기창(諱 起昌)의 종손이고 군기시판관 휘 순거(舜擧)의 손자이며 평구찰방 휘 경(璟)의 아들이다. 모(母)는 언양김씨(彦陽金氏)로 통사랑(通仕郞) 극섬(克銛)의 따님이다. 생부(生父)는 증 영의정 기계부원군 휘 관(綰)이고 생모는 의령남씨(宜寧南氏)로 증(贈) 사복시정(司僕寺正) 남충세(南忠世)의 따님이다. 찰방공(察訪公) 휘 경(璟)에게 아들 정(定)이 있었는데 조졸(早卒)하여 공으로 하여금 후사(後嗣)를 삼으니 어릴 적부터 양모(養母) 언양김씨(彦陽金氏) 김섬(金銛)의 따님을 섬김에 효성이 극진하였다.
공의 관직은 1567년(명종22) 벼슬길에 나가 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가 되고 1572년(선조4년)사헌부 감찰에 천거되었고 같은 해 여름에 아산현감(牙山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모친상을 당하여 비인에서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장차 외직에 제수 받으려는데 연 달아 생모이신 의령남씨(의령남씨)의 상(喪)을 당하여 1577년(선조 10년)에 상복(喪服)을 미치게 되었다. 1578년 겨울에 홍천현감(洪川縣監)이 되었고 1585년(선조17년),여름에 다시 감찰(감찰)에 서용되었다가 얼마 후 이천현감(伊川縣監)이 되었다. 1588년 여름에 한성부의 참군이 되었다가 신계현령(新溪縣令)으로 승차하였으나 이듬해 관아에서 병으로 별세하셨다. 후에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참여하여 의례에 따라 좌승지(左承旨) - 이조참판으로 증직이 더해 졌음)에 증직(贈職)되었다.
배위(배위) 증(贈) 정부인(貞夫人)은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판관(判官) 휘 흥효(興孝)의 따님이다. 공은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는데 자(子)는 종사랑(縱仕郞) 대이(大頤)이고 딸은 선공감 감역(繕工監 監役) 안창(安昶), 충의위(忠義衛) 박안명(朴安明), 군수(郡守), 이상관(李尙寬, 구발(具撥) 등에게 출가(出家)하였다. 공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고(考) 기계부원군(杞溪府院君) 묘 앞 병향(丙向)에 있고 배위(配位)는 충남 서천군 판교면 저산리 동재궁 증조고(曾祖考) 첨추공(僉樞公) 묘소 백호 병향(丙向)에 있다. 공의 묘지명(墓誌銘)은 두 편이 전하는데 그 중 하나는 7세 연상의 중형(仲兄) 홍(泓)이 지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헌대부 예조판서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 이호민(李好閔)이 찬(撰)한 것이다. 묘전(墓前)에는 1994년(갑술년) 4월에 전 대종회장 휘 동준(諱 東濬)이 글을 짓고 글씨를 써서 진태, 재홍, 풍요, 정호, 상영 등 후손이 추진위를 구성. 묘갈을 세웠다.
<충남 서천군 판교면 저산리 서호공 좌록에 모셔진 신계공의 배위 묘소>
4) 휘 대희(大禧) <1544 ~ ?>
공의 자(字)는 경길(景吉)이고 부(父)는 단성현감 증 영의정 휘 호(灝)이고 모(母)는 청주한씨(청주한씨) 현령(현령) 수온(守溫)의 따님이다. 공은 학문에 뜻을 두어 학덕을 쌓아 음직으로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올라 정여립(鄭汝立) 나에 공을 세워 호정원종공신록권()이 하사되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시 극난극복에 적극 참여하여 1605년(선조38년 04월 05일에 임난왕실호종(壬亂王室扈從)의 공을 세웠고 세자 광해조정( )을 수행하여 1614년(광해 6)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배위(配位) 숙부인(淑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 만종(萬種)의 따님이다. 군수(郡守) 달증(達曾), 사직참봉 노증(魯曾)이고,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고묘(考墓) 좌록(左麓) 술향(戌向) 합폄(合窆)으로 족보(族譜)에 기록되어 있으나 실전(失傳)되어 2007년 07월에 기계부원군과 단성공파조의 묘도(墓道) 우측에 제단비(祭壇碑)를 세워 위업을 기리고 있다.
1991년의 기계유씨 대동보에는 공의 아들이 휘 달증(達曾) 한 분을 기록되어 있으나 광해군 일기 광해 10년(1618년 무오) 02월 29일(기미)에 자에 따르면 당시 사직서 참봉(社稷署 參奉)으로 있었던 둘째 아들 노증(魯曾)공이 또 있었음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Ⅱ. 파주 탄현선영
1. 진사공파 안동공 후손의 파주세거, 정착 내력
진사공파조의 둘째 아드님인 안동공의 파주묘역과 진사공파조 할아버지 묘역과의 거리는 정확히 20km(오십리)이고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1시간에 4km,정도를 걸을 수 있다고 하므로 당일에 왕복이 가능한 거리이고 실제로 교통이 불편한 시기에는 말을 타거나 우, 마차를 이용하지 아니하는 한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을 것이다. 현재에도 파주시 조리면 장곡리의 장곡검문소와 파주시와 고양시가 시계(市界)를 이루고 있고 장곡리에서 금승리가 16km(15.7km)이고 장곡리에서 관산동 선영인 불암산 모경재까지는 3.93km(4km)인데 조선시대에는 시, 군의 경계가 자주 변경되지는 아니 하였으나 행정구역의 관할은 자주 변경된 것으로 기록된 것을 감안하면 선조님들은 고양과 파주를 굳이 다른 곳으로 여기지 아니한 관점이 여러 곳의 문헌에서 관찰된다.
※ 필자의 고향인 청양에서 서천 비인까지 할아버지와 선친과 당숙들이 걸어서 시제를 모시러 다니시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고 그 거리가 36.35km이다.
안동공의 묘갈명을 쓰신 분은 당대 국 ,내외에서 명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던 참판공[최 립(崔 岦, 1539년~1612년. 단성공파 양간공(良簡公) 휘 대기(諱 大祺)공의 장인이다]인데 이 분이 금승리 선영(先塋)에 대하여 표현하기를 “以某月日葬于高陽某原先塋之側”으로 “모월모일에 고양군(高陽郡) 모원 선영 곁에 장사지냈다“라고 하셨으니 당시에는 금승리 까지도 고양군 관할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직역(直譯)을 하더라도 ‘금승리를 불암산 선영 곁’이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금승리를 고양선영과 한 권역을 이해한 것은 맞는 것 같다.
안동공의 둘째 아드님이신 사옹원정공(司饔院正公)[ 휘 학증(諱 學曾) 문과, 춘추관 기사관, 암행어사, 정언, 한림 경성판관(鏡城判官)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의 묘소도 관산동 선영이며 이 분의 큰 아드님 통덕랑공[휘 벌(諱 橃)]의 묘소도 관산동 선영이고 현재도 위토(位土)를 보유하고 있으니, 진사공파조(諱 涵)을 관산동 선영에 모시고 진사공파 후손들이 고양, 파주에 세거하게 되었고 또한 안동공의 첫 째 아드님이신 증 호조참의 공[휘 경증(諱 景曾), 금승리에 묘소가 있음]후손들이 안동공 묘하(墓下)인 금승리에 세거정착하게 된 사유가 될 것이다.
※ 안동공 셋째 아드님[휘 천증(諱 踐曾)]의 후손들은 충남 보령시 등에 세거중임.
2. 기계유씨 진사공파 안동공 묘역 조성비(杞溪兪氏 進士公派 安東公 墓域 造成碑)
우리 기계유문(杞溪兪門)은 시조(始祖) 신라(新羅) 아찬(阿飱) 휘(諱) 삼재부군(三宰府君)의 후예(後裔)다.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께서 만력(萬曆) 병술년(丙戌年),1586년)에 공(公)의 증조(曾祖)이신 예조판서(禮曹判書) 경안공(景安公) 휘 여림(諱 女霖) 내외분과 선고(先考)이신 진사공파조공(進士公派祖公) 휘 함(諱 涵)내외분이 모셔진 고양(高陽)선영(先塋)곁인 이곳에 모신 이래 어언 436년이 흘렀다.
공(公)의 후손(後孫)이 번창(繁昌)하매 근동(近東)에서도 여러 곳에 묘소(墓所)가 흩어져 조상(祖上)에 대한 예(禮)가 소홀(疏忽)함을 늘 애달게 생각하여 후손들이 뜻을 모아 대대(代代)로 조상(祖上)을 숭배(崇拜)하고 종친(宗親) 상호(相互)간에 화목(和睦)을 도모(圖謀)하기 위한 만남의 장(場)이 되기를 기원(祈願)하면서 묘역(墓域)을 조성(造成)하고 이 비(碑)를 세운다. 아무쪼록 선조(先祖)의 유덕(遺德)을 추모(追慕)하고 백세일실(百世一室)이 친의(親誼)를 돈돈히 하며 면면세세(綿綿世世) 번창현달(繁昌顯達)을 지향(指向)하며 이곳을 찿는이는 덕(德)을 쌓고 실행(實行)하는 계기(契機)가 되기를 바란다.
서기2012년(임진년) 05월 12일 (음력 윤 3월 22일)
기계유씨(杞溪兪氏)진사공파(進士公派)안동공종중회(安東公宗中會)회원(會員)일동(一同)
3. 안동공 묘역에 봉안된 선조
1) 안동공
가. 경모2집의 내용
- 안동대도호부사 휘 대수(大脩) <1546~1586>
공의 자(字)는 사영(思永)이고 호(호)는 삼오정(三五亭)이다. 부(父)는 성균진사(成均進士) 증 (贈) 의정부좌천성(議政府左贊成) 휘 함(諱 涵)이며 모(母)는 증 정경부인 광주안씨(廣州安氏)는 목사(牧使) 한준(漢俊)의 따님이다. 관직은 1564년9명종 19년)에 진사(進士)와 1565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시작하여 동지사 일행과 중국에 다녀와서 성균관 사예, 사헌부 장령을 거처 통정대부(通政大夫)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배위(配位)는 은진송씨(恩津宋氏) 참찬(參贊) 기수(麒壽)의 따님이다. 자(子)는 증 호조참의(戶曹參議) 경증(景曾), 2자 사옹원 정(司饔院 正) 학증(學曾), 3자 천증(賤曾),이증(履曾)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무덕동 안골 곤좌간향(坤坐艮向)에 쌍분으로 되어 있다. 족 후손 전(前) 대종회장 동준(東濬)의 글과 글씨로 비를 세웠다. 기계문헌(杞溪文獻)97쪽에 묘갈명이 수록되어 있고 형조참판(刑曹參判) 간이(簡易) 최립의 찬(撰)이다.
안동공 종중의 숙원사업의 일환으로 안동공 묘역 주변을 정화, 확장하여 단기(檀紀)4345년[임진년(壬辰年) 서기 2013년] 5월 12일(윤 3월 22일)에 새능 및 금승리 주변에 뫼셔진 안동공 후손 중 증(贈) 호조참의 휘 경증(景曾), 사헌부 감찰 휘 진(榗), 증 승정원 좌승지(贈 承政院 左承旨) 휘 명심(命諶), 증 사복시정 (증 사복사정) 휘 홍기(弘基), 성균진사(成均進士) 휘 흥기(興基)공을 이폄하고 묘역조성을 완성하였다.
나. 학문과 사상
- 안동공과 서애 유성룡 선생의 교류 기록
1. 자료의 출처 : 서애선생 연보(西厓先生年譜) 제1권 연보(年譜) 8, 1577년-1579년
2. 시기 : 만력(萬曆) 6년 무인. 서애선생 37세, 1578년 8월
3. 내용
휴가를 얻어 안동에 계신 어머니를 가 뵈었다. 사인(舍人) 이발(李潑)ㆍ좌랑 이순인(李純仁)ㆍ한림 이길(李洁)ㆍ정랑 홍가신(洪可臣)ㆍ목사 유대수(兪大脩)ㆍ한림 김첨(金瞻)ㆍ참봉 허상(許鏛)ㆍ감역(監役) 박의(朴宜)ㆍ참봉 이덕홍(李德弘)ㆍ사인(士人) 권응시(權應時)가 술과 음식을 내어 동호(東湖)의 몽뢰정(夢賚亭)에서 같이 묵으면서 각각 송별시를 지었는데, 선생도 석별의 시 한 수를 지었다. 조정에 돌아와서 다시 홍문관 응교에 제수되었다. 선생이 옥당에 있을 때,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불러 하외(河隈)의 산수도를 그려 그것으로 어버이 생각과 고향 생각하는 뜻을 붙였다
□ 학봉 김성일 선생과 교류한 자료
-학봉일고 제3권 기묘일기(己卯日記) 4월 9일(을유)
비가 내림.○ 비를 무릅쓰고 새재[鳥嶺]를 넘었다. 김형윤(金亨胤) 척사(戚史) 및 홍원해(洪元海)를 만났다. 낮에 안보역(安保驛)에서 쉬었다. 저녁에 중원(中原)에 도착하여 목사(牧使)의 관아에 들어갔다. 유사영(兪思永 유대수(兪大脩)와 더불어서 밤에 이야기하다가 객관(客館)에 나와서 묵었다. 이날 밤에 큰 비가 내렸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1
□ 南冥學派 關聯 人名錄(남명학파 인명록)자료 41쪽 중 20쪽에 나옴)
이상필(문학박사,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편찬, 제공(2005년 4월)
兪大修 1546-1586 士永 (思永) 杞溪 京 退溪門人 以都事受敎
柳德龍 1563-1644 時見 鷦鷯堂 文化 三嘉 南冥覺齋門人 享北巖院 鷦鷯堂實紀
柳斗永 1846-1907 詳見 聾隱 文化 大坪 堂村柳坪 聾隱集
柳得培 全州 晋州 烜從子
2) 증(贈) 호조참의 휘 경증(景曾) <1572~1618>
공의 자(字)는 자유(子唯)이고 부(父)는 안동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휘 대수(大脩)이며 모(母)는 은진송씨(恩津宋氏) 참찬(參贊) 기수(麒壽)의 따님이다. 관직은 1606년(선조 39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배위(配位)는 하동정씨(河東鄭氏) 판서(判書) 광적(光績)의 따님이고 자(子)는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진(榗)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 62-1 소재 신릉동 경좌 갑향에 뫼셨다가 안동공 종중의 숙원사업으로 안동공 묘역 주변을 확장, 정화하여 2012년도 임진년 5월 12일(음력 윤 3월 22일)에 무덕동 안골 선영(先塋), 고묘 하(考墓 下)으로 이폄, 간좌 곤향에 함폄(合窆)되어 있다.
3) 사헌부 감찰 휘 진(榗) <1593~1649>
공의 자(字)는 사장(士章)이고 호(號)는 학곡(學谷)이다. 부(父)는 증(贈) 호조참의(戶曹參議) 휘 경증(景曾)이고 모(母)는 하동정씨(河東鄭氏) 판서(判書) 광적(光績)의 따님이다. 관직은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지냈다. 배위(配位)는 전주유씨(全州柳氏) 대사간(大司諫) 영근(永謹)의 따님과 안동김씨(安東金氏) 호군(護軍) 준형(俊亨)의 따님, 연안김씨(延安金氏) 취선(就善)의 따님, 세 분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 62-1 소재 신릉동 임좌 병향에 뫼셨다가 안동공 종중의 숙원사업으로 안동공 묘역 주변을 확장, 정화하여 2012년도 임진년 5월 12일(음력 윤 3월 22일)에 무덕동 안골 선영(先塋), 조고묘 하(祖考墓 下)으로 이폄, 간좌 곤향에 3위 함폄(合窆)되어 있다.
4) 증 승정원 좌승지(贈 承政院 左承旨) 휘 명심(命諶) <1643~1716>
공의 자(字)는 신보(信甫)이고 부(父)는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휘 진(榗)이며, 모(母)는 연안김씨(延安金氏)로 취선(就善)의 따님이다. 관직은 통덕랑(通德郞), 증 승정원 좌승지(贈 承政院 左承旨)이다. 배위(配位)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택중(擇中)의 따님이다. 자(子) 처기(處基), 2자 시복시정(司僕寺正) 홍기(弘基), 3자 진사(進士) 흥기(興基), 4자 혁기(赫基), 5자 무과(武科) 부사(府使)일기(一基), 6자 보기(普基)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 59번지 소재 무덕동 경좌 갑향에 뫼셨다가 홍수에 의한 제전유실로 2001년(辛巳년) 03월 29일에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 62-1 소재 신릉동 유자묘향에 이폄하였고 안동공 종중의 숙원사업으로 안동공 묘역 주변을 확장, 정화하여 2012년도(壬辰年) 5월 12일(음력 윤 3월 22일)에 무덕동 안골 선영(先塋), 조고묘 하(祖考墓 下)로 이폄, 간좌 곤향에 함폄(合窆)되어 있다.
5) 선숙공(善叔公) 휘 처기(處基) <1663~ >
공의 자(字)는 선숙(선숙)이고 부(父)는 증 승정원 좌승지(贈 承政院 左承旨) 휘 명심(命諶)이며 모(母)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택중(擇中)의 따님이다. 배위(配位)는 문화유씨(文化柳氏) 부사(府使) 준(晙)의 따님이며 자(子)는 언겸(彦謙)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무덕동 안골 선영(先塋) 고조고묘하(高祖考墓下)에 함폄(合窆)되어 있다.
6) 성균진사(成均進士) 휘 흥기(興基) <1674~1716>
공의 자(字)는 기숙(起叔)이고 부(父)는 증 승정원 좌승지(贈 承政院 左承旨) 휘 명심(命諶)이며 모(母)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택중(擇中)의 따님이다. 관직은 1702년(숙종 28년)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배위(配位)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세마(洗馬) 태(泰)의 따님이며 계자(系子)는 성균진사(成均進士) 언진(彦進)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 54-1 소재 경좌갑향(庚坐甲向)에 뫼셨다가 안동공 종중의 숙원사업으로 안동공 묘역 주변을 확장, 정화하여 2012년도(壬辰年) 5월 12일(음력 윤 3월 22일)에 무덕동 안골 선영(先塋), 조고묘 하(祖考墓 下)로 이폄, 간좌곤향(艮坐坤向)에 함폄(合窆)되어 있다.
4. 기타 파주(탄현)지역 선조묘소
1) 기장현감 휘 명시(命諟) <1649~1695>
공의 자(字)는 명보(明甫)이고 부(父)는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휘 진(榗)이며, 모(母)는 연안김씨(延安金氏)로 취선(就善)의 따님이다. 관직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기장현감(機張縣監)을 역임하였다. 배위(配位)는 백천유씨(白川劉氏)로 응문(應門)의 따님이다. 자(子) 석기(錫基)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서당곡 경좌갑향(庚坐甲向)이다. 표석은 8대손 영준(永濬)과 철준(哲濬)의 유지(遺志)에 따라 1990년(庚午年)에 세웠다.
2) 증 사복시정 (司僕寺正) 휘 홍기(弘基) <1668~1729>
공의 자(字)는 홍관(洪寬)이고 부(父)는 증 승정원 좌승지(贈 承政院 左承旨) 휘 명심(命諶)이며 모(母)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택중(擇中)의 따님이다. 관직은 1699년(숙종 25년)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贈職)되었다. 배위(配位)는 연일정씨(延日鄭氏) 군수(郡守) 도행(道行)의 따님이며 자(子)는 군수(郡守) 언휘(彦徽)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 62-1 소재 신릉동 선영(先塋) 갑좌인향(甲坐寅向)에 함폄(合窆)되어 있다.
3) 휘 혁기(赫基) <1676~1734>
공의 자(字)는 해숙(嗨叔)이고 부(父)는 증 승정원 좌승지(贈 承政院 左承旨) 휘 명심(命諶)이며 모(母)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택중(擇中)의 따님이다. 배위(配位)는 평산신씨(平山申氏) 계장(繼壯) 따님이며 냉천강씨(冷川姜氏) 득(鍀)의 따님 이다. 자(子)는 언호(彦豪), 언준(彦俊), 언규(彦珪)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송남 중리 오좌자향(午坐子向)이다.
4) 부사 휘 일기(一基) <1678~1731>
공의 자(字)는 일지(一之)이고 부(父)는 증 승정원 좌승지(贈 承政院 左承旨) 휘 명심(命諶)이며 모(母)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택중(擇中)의 따님이다. 관직은 숙종(肅宗) 32년(1706년 병술년) 무과정시(武科庭試) 45위에 급제한 후 1714년 05월 흥해군수(興海郡守) 1720년 07월 우변 포청 종사관(右邊 捕廳 從事官), 10월 거제부사(巨濟府使), 1424년 12월 수안군수(遂安郡守), 1726년 10월 순천영장(順天營將), 1728년 서천군수(舒川郡守), 1729년 11월 통정대부(通政大夫) 삭주부사(朔州府使) 겸(兼) 황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黃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배위(配位)는 나주정씨(羅州鄭氏) 재도(載燾)의 따님이며 자(子) 언태(彦台). 성균진사 언진(彦進), 무과(武科) 현령(縣令) 언신(彦愼)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 59번지 소재 무덕동 경좌갑향(庚坐甲向)이다.
【一家님들의 聲援에 感謝드립니다.】
기계유씨다음카페 執行部一同 謹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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