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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문 결어는 대산종사님께서 일상속에서 새기고 다짐하셨던 기원문으로
간절한 서원으로 이어 받아 깨달음 얻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기원문 결어 전문입니다.
一相圓 中道圓 十方圓.
主世佛〈佛日重輝 法輪復轉〉 祖師〈佛日增輝 法輪常轉〉.
世界復活 道德復活 會上復活 聖人復活 마음復活.
〈네가지 訓練〉 自身訓練 敎徒訓練 國民訓練 人類訓練.
大誓願 大精進 大佛果 大佛供 大自由 大合力.
大懺悔 大解 大赦免 大精進 大報恩 大進級.
一圓會上 永劫主人 一圓大道 永劫法子.
千佛萬聖發芽 億兆蒼生 開福.
無等等한 大覺道人 無相行의 大奉公人.
大宗師님의 一大經綸〈濟生醫世〉
眞理는 하나, 世界도 하나, 人類는 한家族,
世上은 한일터, 開拓하자 하나의 世界,
이 세계는 하나의 마을, 이 세계는 하나의 가족,
이 세계는 하나의 세계, 세상은 한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
단순한 개인적 바람을 ‘소원’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넘어서서
큰 뜻을 담고 굳건한 다짐을 실은 바람을 ‘서원’이라 합니다.
‘기원(祈願)’이란 서원을 절대자에게 빌고 또 약속하는 것입니다.
절대자는 하나님이나 부처님, 혹은 법신불을 이야기 하지요.
종교에 따라 이렇게 인격화시켜 놓긴 했는데
저희들은 ‘진리’라고 부릅니다.
원불교에서는 ‘일원상진리’라고 부르지요.
아무튼 ‘기원문’은 그 바람을 쓴 글인데,
‘결어’는 총체적인 결론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원문 결어’는 ‘궁극적 바람의 총체적인 결론’,
혹은 ‘간절한 기원의 마지막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원문 결어’는
대산 종사님께서 열반(원기 83년, 1998)하시기 7, 8년 전부터
당신의 간절하신 기원을 담아 기도하신 것인데요
제생의세의 실현을 위해 염원을 담으신
게송과 같은 기도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산 종사님께서 영모묘원 비닐하우스에서 들판의 영가들을 향해 외우시고,
수계농원에서도, 열반직전 하와이에 가셔서도
하루에 수 십번을 외우시고 기원하셨던 것이 바로 이 ‘기원문 결어’입니다.
매일 방에서 혼자 외우셨고,
원기 83년 열반에 드실 무렵에 몸의 열이 37, 38도가 되자
시자들에게 ‘기원문 결어’를 계속해서 외우게 하시고 풀어보라 하셨습니다.
당시 시자였던 이성국 교무는 하루에 30번을 읽어 드렸다고도 하셨습니다.
병중 법문 삼매이셨습니다.
열반 두 해 전인 원기 81년(1996),
하와이 봉불식에 가셔서도 ‘기원문 결어’를 밝히셨습니다.
이 뜻은 세계만방에 이 기원을 전하려 하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원기 80년 당시 좌산 종법사님은
UN을 방문하여 ‘세계평화 3대 제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 ‘기원문 결어’에 바탕하여
이것을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셨습니다.
그 때 다녀오셔서 UN깃발을 대산 종사께 올리셨지요.
왜 그토록 간절하게 외셨을까요?
참된 진리에 바탕해서 모든 생령들을 건지고 세상을 구하겠다는 염원이셨습니다.
병석에서도 염원하셨던 것은
당신의 뜻을 저희 모두에게 전해 세세생생 이 다짐으로 살라하신 뜻입니다.
대종사님과 정산 종사님의 일대경륜을 펴시고자 하는
간절하고 간절하신 기원이 담긴 법문을 세계에 펴시고자 하신 뜻입니다.
저희들도 이것을 알고, 외고 또 외우면서
진리를 통해 제생의세 하겠다는 다짐을 하자는 것입니다.
전국을 순회하고 있는 ‘원불교 100년 성업 대정진 기도’를 하면서
저희는 이 ‘기원문 결어’와 ‘대적공실’ 의두를 반복해서 법어봉독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 법어는
두 가지 모두 뜻이 심오해서
일단은 풀어서 한번 듣고,
관조로 깨쳐 들어 가야 합니다.
‘대적공실’은 풀어봤으니
이 ‘기원문 결어’를 풀어보겠습니다.
모두 12개의 표어로 되어 있는데요,
굳이 나누어 보자면 4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자... 본격적으로 들어가 봅시다.
먼저 ‘일상원 중도원 시방원’ 입니다.
이것은 ‘일원상의 진리’를 밝혀 주신 것 입니다.
'일상원' 부터 하나씩 알아봅시다.
1. 일상원 (一相圓)
‘일상원(一相圓)’ 이란
‘진리의 절대 자리’ 를 밝혀 주신 것입니다.
‘고불미생전 응연일상원’이라고 하였지요.
옛 부처님이 나기 전에도 한 상이 둥글었다는 말입니다.
진리는 부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 전부터 원래 있었고
다만 부처님은 그것을 보아다가 깨치시고 전했다는 말이시지요.
바로 진리의 본체·당처 자리를
‘일상(一相)’ 즉 ‘한 모양’이라고 하지요.
그 자리가 바로 ‘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일상원’이지요.
그걸
기독교 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뿐인 님’이라는 말이시지요.
둘이나 몇 개로 나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안계신 곳이 없지요.
그래서 '무소부재(無所不在)하다' 그럽니다.
우주 전체가 한 모양이기 때문에
이것을 도가 에서는 ‘자연’이라고 하지요.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할 때의 그 ‘자연(自然)’입니다.
스스로 자(自), 그럴 연(然) 해서
‘스스로 그런 것, 원래부터 있는 것’이란 뜻이지요.
또 그 안에 운행하는 이치가 있어서
‘길’을 의미하는 ‘도(道)’라고도 합니다.
유가 에서는 ‘태극’이나 ‘무극’이라고도 하지요.
우리 태극기 안에 있는 태극은 음과 양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원이지요.
음과 양이 돌고 돌면
결국은 완전한 상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불교 에서는 ‘법신불’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모습을 한 부처님이 아니라
‘법의 몸을 가진 부처님’이다 해서 법신불이라 하지요.
사람의 몸을 가진 인격적인 부처님 즉 화신불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데,
법신불은 시공을 초월해 자연처럼, 하나님 처럼 어디에나 계시지요.
그것을 일러서
‘<하나의 모양>이신 <원>이다’해서
‘일상원’이라 합니다.
다시말해 ‘진리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다’는 의미로
‘진리의 유일성( 唯一性 )’ 을 밝히신 겁니다.
진리의 절대적인 자리, 오직 하나인 자리를 뜻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하나님도
십계명에 ‘나 이외의 다른 신은 믿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즉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기 때문에
그것 말고는 모두가 이단이요, 사마외도요, 허상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원’이라고 이름지은 진리를 ‘일상원’이라고 설명하신 겁니다.
바로 대종사님께서 밝히신 ‘일원상 진리’ 를 말하지요.
2. 중도원(中道圓)
다음은 중도원(中道圓)입니다.
중도(中道)라는게 뭡니까?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가운데 길'이라는 말이지요.
일을 할 때는 원근친소에 끌리지 않는 것도 중도라 하지요.
같은 학교 출신, 같은 고향 출신을 더 우대한다면 이건 중도가 아니지요.
그래서 한편에 끌리는 착심을 떼는 것도 ‘중도’라 합니다.
그런데
‘중도’라는게 꼭 가운데만 의미합니까?
2차선 도로에서 길을 잘 가고 있어요.
그런데 반대편 차선에서 화물차 한 대가 승용차를 추월해
제가 달리는 길로 무시무시하게 달려옵니다.
그러면 내 차선이니까 나는 쭉 가야합니까?
일단 서행을 하면서 한쪽으로 비켜야 사고가 나지 않지요?
그때 한쪽으로 비켜난 것이 중도를 벗어난 것입니까?
오히려 그 상황에서는 한편으로 비켜난 것이 중도죠?
마찬가지입니다.
시소나 저울도 정확히 가운데가 중도는 아닙니다.
한쪽이 무겁고 또 한쪽이 가벼우면
무거운 쪽으로 가야 중심이 잡히지요?
이처럼 중도라는 것은 때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것을 우리는 ‘시의적절 하다’고 말하지요?
그래서 중도라는 것은 ‘시의성’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자로 잰듯이 정확하게 가운데가 아니라
때에 따라 적절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중도가 힘들지요.
‘중도원’이란 것은
‘중도의 진리’ 즉 ‘진리의 시의성( 時宜性) ’ 을 밝히신 겁니다.
중도를 행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육근 작용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해야 합니다.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육근작용이 바로 ‘중도원’ 입니다.
때에 따라서 힘들 수도 있는 이 중도의 길을
진리적으로 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불제성께서
그 진리를 깨달아서 짜놓으신 모든 법을 연마하는 겁니다.
대산 종사님께서는
“모든 도의 근본, 모든 진리의 근본은 중도”
라고 말씀하시며
“대종사님께서 밝혀주신 일원대도
즉 삼학팔조 사은사요가 중도원”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중도원’이란
‘시의적절한 중도의 진리를 밝힌 것’이며,
그 길은
‘ 사은사요 삼학팔조 의 신앙 수행 법을 체받아 실행하는 것 이다’는
점을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바로
나를 잘 다스리고(수행),
처처불상의 심정으로 남과 잘 관계하는 것(신앙) 을 말하지요 .
3. 시방원(十方圓)
다음은 시방원(十方圓)입니다.
시방이라는 말은 사방, 팔방에 하늘과 땅을 더해 열 방향,
즉 십방(十方)인데 읽을 때 시방이라 하는 것이지요.
모든 곳을 말합니다.
따라서 ‘시방원’은 모든 곳에 진리가 없는 곳이 없고,
진리가 펼쳐지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의 보편성 (普遍性) ’ 을 뜻합니다.
진리는 이 법당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진리적 삶은 여기 계신 교도님들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삶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보편적인 진리이지요.
특별한 민족에게만 광명을 내리시는 하나님이라면,
특별한 사람만 보호하는 부처님이라면
오늘날 이렇게 기독교와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겠습니까?
대산 종사님께서는
“시방원이란 누구나 보편적인 진리인 교법에 입각해서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말해
“시방원은 시방세계를 일원화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진리의 유일성을 밝힌 '일상원',
진리의 시의성을 밝힌 '중도원',
진리의 보편성을 밝힌 '시방원'은
‘일원상 진리의 세가지 속성’이자
‘진리를 세상에 구현할 방향성’을 아울러 내포하신 표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원문 결어는
모두 다 일원대도 대세계주의에 바탕한 법문이며,
모두 12개의 표어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일상원’ 부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까지
다 연결된 법문이라고 대산 종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일원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요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라고 밝혀주신 법문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일상원, 중도원, 시방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주세불 불일중휘 법륜부전(佛日重輝 法輪復轉),
조사 불일증휘 법륜상전(佛日增輝 法輪常轉)’ 입니다.
‘진리’를 밝히신 다음,
‘주세불과 조사의 역할’ 을 밝히신 대목입니다.
‘불일(佛日)’ 이라는 말은
' 깨달음의 빛’ 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진리’ 라는 말이지요.
▶ ‘주세불’은 ‘불일중휘 법륜부전’ 이라 하셨습니다.
‘주세불’은
불일을 ‘거듭(重 거듭 중 )’ 밝히시고 법륜을
‘다시(復 다시 부 )’ 굴려 주신 분 이란 말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주세불은 ‘부처님’이나 ‘대종사님’과 같은 분을 말합니다.
일원의 진리는
부처님 나시기 전에도 있었으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6년 설산 고행끝에 다시 불일을 밝혀주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
28조사를 거쳐 중국에 5조를 내려와
불일이 꺼졌다가
다시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일원상의 진리로써 불일을 거듭 밝히시어
누만대에 전할 수 있도록 하여 주셨으니
주세불이시라는 것입니다.
주세불은
인륜이 땅에 떨어져 꺼진 진리의 등불을 다시 밝히고,
멈추어선 도덕의 수레바퀴를 다시 굴려
세상을 건지고자 하신 분입니다.
서양에서는 이런 분을 ‘메시아’라고 하지요.
‘예수님’과 같은 분입니다.
종교의 문을 여신 분으로
저희들은 ‘성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성자들이 밝히신 법을 수지봉대하여
땅에 떨어뜨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요,
여기서 분명하게 해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대종사님에 대한 주세불관입니다.
대종사님은 일대겁만에 오신 주세불이십니다.
부처님께서도 ‘법부성폐 (法腐成弊) ’라고 하셨습니다.
법이 오래가면 폐단이 생기지요.
시대가 바뀌어서 봄기운이 오는데 겨울옷을 입고 다니면
땀만 뻘뻘 흘리고 몸이 둔해서 잘 움직이지도 못하지요.
봄 옷 입고 나와서 그 때 맞는 법으로 일을 해야지요.
그것이 바로 일원주의에 입각한 일원대도입니다.
법도 오래돼서 폐해지면 도덕이 타락해집니다.
그 때 진리의 태양을 높이 띄워줄 분이 필요합니다.
그 분이 바로 대종사님이시고,
그 법이 바로 일원대법입니다.
차도 오래되면 수선하지만 그래도 안되면 어때요?
폐차하고 새차를 사야지요?
그렇듯 묵은 법은 물러가고, 참고는 하되 새 법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대종사님은 불일중휘 하시어
어두워졌던 태양을 다시 중천에 띄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온 천하에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구르지 않는 폐차가 된 그것을 버리고
새 차로 새 법을 굴리게 하는 바퀴를 가지고 나오셨습니다.
저희들은 대종사님에 대한 주세불관을 이렇게 확실히 세워야 합니다.
▶다음으로 ‘조사’는 ‘불일증휘 법륜상전(佛日增輝 法輪常轉)’ 이라 했습니다.
‘조사’는
불일을 ‘더욱(增 더할 증 )’ 밝혀 주시고,
법륜을 ‘항상(常 항상 상 )’ 끊임없이 이어 전하시는 분 이란 뜻입니다.
조사는 꺼진 진리의 등불을 밝혀주신 부처님을 이어
법을 더욱 풍성하게 밝히신 분들입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이어 가섭 존자가 1대 조사가 되어 이후 28조사가 있고,
마지막 28조사가 동토 즉 중국으로 와서 중국 1대 조사가 되어
6대 혜능까지 33명의 조사가 있었지요.
바로 삽삼조사를 말합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정산종사님을 비롯해
법통을 이으신 역대 종법사님을 말씀하시지요.
조사는
부처님께서 밝히신 법을 더욱 밝게 빛나도록
시대에 맞게 법을 응용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이 법이 끊기지 않도록 계속 굴려 가시지요.
저희들 종법사님께서 그렇지요?
대산종사님을 이어, 좌산상사님, 그리고 경산종법사님이 그렇습니다.
이 분들은
종통을 이으신 분들이기 때문에
부처님과 대종사님의 대행으로 알 고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부처님과 대종사님의 법을
현 시대에 맞게 밝혀 주시기 때문에
그 분들의 법문과 경륜을 실천해야 하는 것 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하기 쉽게
일반적인 것을 말씀드린 것이구요,
거기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원불교는 보통급부터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
즉 삼학팔조 사은사요를 밟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뭐예요?
부처가 되는 법이지요?
원불교는 모두를 부처로 만들려 합니다.
바로 ' 원불교의 조사'는 우리 교도 모두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우리들을 조사의 반열에 올려 놓으신 겁니다.
특히 저희들은 원기 100년대 안의 창업주들입니다.
조사들이 뭘 한다구요?
부처님의 법을 더욱 밝히고,
항상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대종사님의 법을 쉬지 않고 궁글리는 것입니다.
어때요? 조사 여러분!
법회 빠지고 싶은 생각 나세요?
좌선이나 법회시간에 졸고 싶은 생각이 나세요?
여러분이 주세불을 이으신 조사이신데
욕하고 원망하고 싶은 생각이 나세요?
남의 조사들 견성한 것 배우려 애쓰지 마시고,
우리 경전을 잘 보고
마음 잘 챙겨서
대소유무와 시비이해를 잘 가리면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대종사님께서 반열에 올리신 조사입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 즉 진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성인들은 이 진리를 밝히시고 끊임없이 전하신다는 것이
기원문결어의 서두였습니다.
한번 복습해볼까요?
일상원․중도원․시방원 이라고 했는데요,
이것은 진리의 3가지 속성을 뜻합니다.
일상원은...진리는 유일한 하나라는 ‘진리의 유일성’을 말합니다.
중도원은...진리는 어느 한쪽에 편착하지 않는다는 ‘진리의 시의성’을 뜻합니다.
시방원은...진리는 어느 곳에도 없는 곳이 없다는 ‘진리의 보편성’을 말합니다.
다음은
주세불〈불일중휘 법륜부전〉 조사〈불일증휘 법륜상전〉 입니다.
주세불과 조사의 역할을 밝혀 주셨다고 했지요?
불일(佛日)은 ‘깨달음의 빛’이란 뜻이니 ‘진리’를 뜻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주세불’은 불일(진리)을 ‘거듭(重 거듭 중 )’ 밝히시고
법륜을 ‘다시(復 다시 부 )’ 굴려 주신 분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고불미생전이니
원래부터 있어서 새로 진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거듭 밝혀 주셨다는 말씀이시지요.
‘조사’는 불일(진리)을 ‘더욱(增 더할 증 )’ 밝혀 주시고,
법륜을 ‘항상(常 항상 상 )’ 끊임없이 이어 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모두가 조사가 되어야 하고
대산 종사님께서는 우리를 조사의 반열에 올려 주셨으니
그 상황에서 생각을 하자고 말씀드렸지요?
1. 부활(復活 : 다시 살아남 )
오늘은 진리와 성인에 이어 ‘부활과 훈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인들이 진리를 밝히시고 전하시는 것은 '부활'시키기 위함이고,
이 부활은 기적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된다 는 것이
오늘 말씀드릴 요지입니다.
대산종사님께서는
‘세계부활 도덕부활 회상부활 성인부활 마음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세계가 다시 살아나려면 도덕이 다시 살아나야 하고,
도덕이 다시 살아나려면 정법회상이 다시 살아나야 하고,
회상이 다시 살아나려면 성인이 다시 살아나야 하고,
성인이 다시 살아나려면 자신의 마음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시며,
마음부활이 그 궁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이란 ‘죽은 생명이 다시 살아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지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기독교의 문화에서
우리는 부활이란 용어를 가장 쉽게 접할 수 있지요.
가끔씩 신문을 보면 맑은 서울 도심의 사진이 1면에 나오곤 합니다.
맑은 도시 전경과 더불어서 멀리 개성까지 보인다는 설명을 덧붙입니다.
흔히 ‘비가 오고 난 뒤 선명해진 서울’이라는 설명과 함께 말입니다.
항상 자동차 배기가스가 가득 차 구름이 없는 날에도
뿌연 모습이 일상화 된 서울이기에 그 모습이 뉴스가 되는 모양입니다.
뿌연 도시의 모습, 우리는 그것을 스모그가 찼다고 합니다.
스모그라는 말은
‘스모크(smoke)’라는 ‘매연’과 ‘포그(fog)’라는 ‘안개’가 결합된 말이라고 합니다.
다시말해 매연이 안개처럼 늘 끼어 있는 상태를 말하지요.
서울과 같은 대도시가 멀리서 보면 항상 안개처럼 쌓여 있는데 매연 때문에 그러지요.
그래서 호흡기가 나쁜 사람은 대도시에서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스모그에 쌓여 있는 것이지 사라진 것은 아니지요.
스모그만 사라지면 원래의 아름다운 서울이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맑은 개울물이나 논에서 미꾸라지를 잡는다고
첨벙거리다 보면 흙탕물이 일어 금방 뿌옇게 됩니다.
물 속이 잘 보이지 않게 되지요.
한동안 물 속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조금 지나 사람들이 물러가면 흙탕이 가라앉고
다시 바닥이 보이는 맑은 상태로 돌아옵니다.
이른 새벽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안개를 만나면 거북이 운행을 하지요.
10미터 앞이 안보이게 지독한 안개가 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안보이기 때문에 서행을 할 수 밖에 없고,
자칫 속도를 내다가는 사고를 일으키기 쉽습니다.
안개가 낀 날 뉴스에서는 몇 중 연쇄추돌 사고가 났다는 보도를 자주 접합니다.
하지만 안개가 걷히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들이 다시 속도를 내고, 사고도 사라지지요.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과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마음은 누구나 맑디 맑아 똑같습니다.
그것을 ‘본래 마음’ 즉 ‘본심(本心)’,
혹은 ‘부처의 마음’ 즉 ‘불성(佛性)’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성품(性稟)’이나 ‘정신(精神)’이라고도 합니다.
마치 제가 교무님, 우세관, 형님, 아들이라고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본래 마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안이비설신의 육근 동작에 의해 경계를 받아들여
그 때 그 때 변합니다.
눈으로 좋은 것을 보고는 탐심이 일어나는가 하면,
인도네시아나 칠레의 지진으로 다친 사람들을 보면 돕고 싶은 마음이 나지요.
김길태의 악행을 들으면 화가 나기도 하고,
법정스님이 열반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면 애절한 마음도 나지요.
그래서
이 육근 동작 때문에
착한 마음, 나쁜 마음, 예쁜 마음, 미운 마음이 만들어 지지요.
우리는 이 육근 동작에 의해 받아들이고 구분하는 것을 ‘분별’이라고 합니다.
본래 마음 즉 성품이나 정신에 이 ‘분별’이 나타날 때를 일러 ‘마음’이라고 하지요.
착한 마음이 들어 밖으로 실천하면 선행(善行)을 하게 됩니다.
나쁜 마음이 들어 밖으로 나타내면 악행(惡行)이 나오지요.
그래서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는 선업이나 악업같은 업(業)을 짓게 됩니다.
이처럼 업은 분별된 마음이 짓게 된다는 말이지요.
마치 검은 선그라스를 쓰면 어둡게 보이고,
붉은 안경을 쓰면 세상이 붉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본래의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색깔있는 안경을 벗어야지요.
그러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간의 관계에서도 오해를 하면 ‘색안경을 벗고 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 색안경이 바로 ‘분별’입니다.
분별을 놓았을 때 ‘본래 마음’이 됩니다.
이것이 원불교에서 말하는 부활입니다.
마치 비온뒤 스모그가 사라지면 도시 본래 모습이 드러나고,
흙탕물이 가라 앉으면 맑은 물이 되어 물 안이 다 보이듯이 말입니다.
안개가 사라진 고속도로가 다시 속도를 회복하듯이 말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과는 조금 의미가 다르지요?
죽은 것이 살아나는 '기적이나 마술'이 아니라
후시딘 연고를 바른 세포의 재생처럼 '회복'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도 원래는 아름다울텐데 사람들의 탐욕이 타락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부활시키기 위해 도덕을 부활시켜야 하고,
그 도덕을 힘있게 부활시키기 위해 이 회상을 부활시켜야 하고,
이 회상을 여 신 성자들을 부활시켜야 하는 것이고,
그 성자들 같은 성자가 되어 모두가 성자가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우리 각자 각자의 마음을 본 래심으로 부활시키면 된다는 말입니다.
대종사님께서는 부활의 의미를
기독교에서 처럼 ‘기적’의 차원이 아니라
‘신앙’의 차원, '수행'의 차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즉 생명의 근원인 사은의 은혜로 다시 살려내어
세계도, 도덕도, 회상도, 성인도, 각자의 마음도
다시 살려내자는 말씀입니다.
은혜의 빛이 꺼졌을 때
생명도 죽게 되고 세계도 전쟁으로 변해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恩)으로 다시 살려 내자는 말씀입니다.(세계, 도덕, 회상, 성인)
그리고 '수행'을 통해 자신을 갈고 닦아 부활을 시키자는 것입니다.(마음)
2. 훈련
한 사람이 벼룩을 잡아 유리병 안에 집어놓고 관찰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벼룩은 가볍게 튀어 올라 유리병 밖으로 나왔습니다.
몇 번을 다시 집어 넣었지만 결과는 마찬 가지였습니다.
이 사람은 이 실험을 통하여
벼룩이 자기 몸길이의 4백배가 넘는 높이를
튀어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벼룩을 다시 유리병 안에 집어 넣고 재빨리 뚜껑으로 입구를 닫았습니다.
종전과 마찬가지로 높이 튀어 오르기를 시도하던 벼룩은
계속해서 유리병 뚜껑에 부딪혀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벼룩은 매번 튀어오를 때마다 뚜껑에 부딪혀서 “퉁!” 하는 소리를 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벼룩은 유리병의 높이에 맞추어 튀어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벼룩은 뚜껑에 몸을 부딪치지 않으면서
유리병 안에서 자유롭게 튀어 오를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유리병 뚜껑을 열어주었습니다.
하지만 벼룩은 유리병의 높이만큼만 튀어오를 뿐 유리병 밖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사흘 후, 일주일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벼룩은 유리병보다 더 높이 뛸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습관이라는 것이 이렇게 만듭니다.
원래 있던 능력까지도 잃게 만들지요.
혹시 우리는 내 인생의 한계를 스스로 낮게 잡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어느 사이엔가 잃어버리고 살지는 않는지 한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간절히 염원하면 못 이룰 일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고
자신의 능력을 막아버리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성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한계를 극복하자는 것, 이것이 바로 ‘훈련’입니다.
우리는 성자들이 밝히신 진리를 통해 부활해야 하고,
부활시켜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서 잘 압니다.
내가 부활하고, 세계를 부활시키는 그 마법의 방망이가 바로 훈련입니다.
대산 종사님께서는 ‘네가지 훈련’이라 하여
‘자신훈련, 교도훈련, 국민훈련, 인류훈련’을 밝혀 주셨습니다.
원불교의 훈련은 뭐지요?
정기훈련과 상시훈련이 있지요.
대종사님께서 제시하신 훈련법은 정기훈련과 상시훈련으로 나뉩니다.
‘정기훈련’은
일정한 기간을 정해 집중적으로 삼학 수행을 단련하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2년간 훈련을 받고,
신입사원들이 업무에 들어가기 전에 일정한 기간동안 견습훈련을 받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상시훈련’은
상시 즉 평상시에도 일하면서 삼학 수행을 떠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죽을 때까지,
혹은 내가 부처로 완성될 때까지 끊임없이 공부를 하라는 것입니다.
정해진 때만 훈련을 한다는 개념을 벗어나서
평상시에도 항상 자신을 살피고 공부심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불법시 생활이요, 생활시 불법’입니다.
정기훈련과 상시훈련법은 원불교만이 가지는 고유한 훈련법으로
‘잠시라도 공부심을 놓지 말고 살라’는 독특한 공부법입니다.
정기훈련과 상시훈련은 삼학팔조에 근간한 수행을 말합니다.
결국 ‘훈련’과 ‘수행’은 하나로 통하지요.
훈련이란 수행의 방법론인 셈입니다.
한마디로, 수행을 통해 부활을 시키자는 말입니다.
전 인류를 건지는 길이 바로 훈련이요 수행인 것입니다.
이 정기훈련과 상시훈련은 ‘자신훈련’에 속합니다.
그런데 대산 종사님께서는 훈련을 자신에게만 국한 짓지말고
모두에게 펼쳐서 시행하자는 것을 바로 이 기원문 결어에 담으셨습니다.
자신과 교도님뿐만 아니라 전 국민과 전 인류에게 까지도 훈련을 시키자 하셨습니다.
대산 종사님께서 각 곳에 훈련원을 설립하시었는데
완도 소남훈련원에서는 전남의 청소년들을 연간 5만여명이나 훈련시킨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 지역마다 훈련원이 있지요.
서울에는 봉도와 오덕훈련원, 경기도에는 둥지골훈련원, 충청도에는 삼동원,
전라도에는 만덕산과 하섬, 소남 훈련원, 강원도에는 우인훈련원,
경북에는 성주삼동연수원, 부산에는 배네골훈련원,
그리고 경남에는 와룡산훈련원 등 각 교구마다 훈련원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전무출신들을 훈련시키는 중앙중도훈련원이 익산성지에 있지요.
또 세계인들을 훈련시킬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제주도에는 국제훈련원, 하와이에도 국제훈련원을 설립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 각 지역마다 교당 말고도 훈련원이 있습니다.
미국에는 포코노 훈련원, 유럽에는 한울안무시선공동체,
호주에도 원광 선문화원 등이 그것입니다.
이 훈련원에는 일반인들이나 기업체 등에서도 훈련을 납니다.
해외에서도 일반 외국인들이 훈련원을 찾아
자신을 찾고 자신을 바꾸려는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교당이 가장 일상적인 교도들의 신앙과 수행의 중심지라면,
훈련원은 정기훈련을 중점적으로 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각 지역마다 이렇게 훈련원을 만든 것은
교도들과 국민, 전 인류에게 훈련을 시키자는 뜻입니다.
바로 원불교법에 의한 훈련 말입니다.
이것이 자신훈련과 교도훈련을 넘어서서 국민훈련이요,
더 나아가 인류훈련으로 이어 가는 길입니다.
이 훈련을 통해서 부활이라는 기적이 정말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원불교는 결코 마술에 기대지 않습니다.
이렇듯 현실적이지요.
그래서 쉬우면서도 어렵다고들 합니다.
3. 훈련을 통해 부활의 기적을
우리 인류의 가장 큰 소원은 무엇일까요?
내 능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도를 깨쳐 부처의 위에 올라 일체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소원이
제일 높고 가장 큰 원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일러 '성불제중(成佛濟衆)의 대원'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으로는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부처가 되어야 하겠다는 서원을 세우지 못하고
언제나 범부와 중생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의 능력을 지레 짐작으로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마다 불가능에 도전했던 현대의 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님이 생각납니다.
“할 수 없다”는 부하들의 말에
왕 회장은 언제나 “너 해보기나 했어? 해 보지도 않고...”라고 말씀 하셨다는 겁니다.
시도라도 해봐야 한다는 말이지요.
불가능은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부처를 이룬 위대한 스승님들을 보아 왔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렇고, 예수님과 공자님,
우리 원불교의 소태산 대종사님이 그렇습니다.
일상원, 시방원, 중도원이라는 진리를 성자들께서 밝히고 전해 주셨으니
우리는 이것으로 세계와 도덕과 회상과 성인과 마음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바로 이 네가지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대산종사의 간절하신 기원입니다.
오늘은 기원문 결어를 여기까지 살펴보고,
다음에는 이같은 수행에 들어가기 위한
각자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가 에 대한 대산종사님의 부촉이 또 이어지십니다.
그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자...이어서 다시한번 살펴봅시다.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 즉 진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성인들은 이 진리를 밝히시고 끊임없이 전하신다는 것이
기원문결어의 서두였습니다.
그리고 이 진리를 삶속에서 구현하기 위해서
‘부활’시키고,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인들이 진리를 밝히시고 전하시는 것은 이것을 ‘부활’시키기 위함이고,
이 부활은 기적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훈련’을 통해서 된다는 것이
우리가 지난번 까지 공부한 요지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일상원(유일한 진리)
시방원(두루 보편적인 진리)
중도원(치우침 없으신 진리)이라는
진리의 속성을
성자들께서 밝히고 전해 주셨으니,
우리는 이것으로
‘세계’와 ‘도덕’과 ‘회상’과 ‘성인’과 ‘마음’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바로 네가지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인데
‘자신’과 ‘교도’와 ‘국민’과 ‘인류’를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이
바로 대산 종사의 간절하신 기원입니다.
공은 이제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축구에서 공을 잡은 팀은
최선을 다해 공을 뺏기지 않고 공을 가지고 있으며
그 공으로 골인을 넣어야 하는 것이지요?
공을 상대방에게 줘버리면 골인을 넣을 기회도 없어지고,
오히려 골을 먹게 되지요?
같은 이치입니다.
오늘은 그 염원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마음가짐 ' 입니다.
구도자로서 마음에 씨앗 두 개를 심어야 진리를 부활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훈련도 잘 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진리를 부활시키기 위한 훈련
즉, 수행에 들어가기 위한 각자의 마음가짐,
마음의 종자가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 하는
대산 종사님의 부촉을 공부하십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서원’과 ‘참회’입니다.
작은데 얽매이지 않고
감히 꿀 수 없는 큰 일을 이루겠다는
간절한 기원과 다짐이 서원입니다.
그 씨앗을 심자는 것입니다.
원불교는 원하는대로 이루어진다죠?
씨앗을 심어야 열매가 맺습니다.
이것이 '서원'입니다.
그리고 큰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작은 기운이라도 막힘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큰 제방도 작은 구멍으로 무너지는 것이고,
안전한 기차도 철로 위의 작은 장애물 때문에 탈선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서원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는데
막히는 모든 기운을 풀기위해 우리는 '참회'를 해야 합니다.
씨앗이 장애없이 잘 자라도록 하는 것이지요.
'서원과 참회'가 바로 구도자가 심어야 할 기본 종자입니다.
우리의 마음가짐이지요.
그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2. 대서원 (大誓願... 간절하고 크나 큰 기원과 다짐 )
: 수행의 종자
대산 종사님은 '서원'의 단계를 6가지로 말씀해주셨습니다.
주로 ‘수행’에 대한 말씀입니다.
대서원 대정진 대불과 대불공 대자유 대합력!
대서원이 없이는 훈련을 할 수가 없고 수행도 할 수가 없습니다.
'대서원'을 세웠을 때 '대정진심'이 나오고 '대불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정진을 하지 않으면 불과를 얻지 못하며 안익은 박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대불과는 여의보주를 말합니다.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여의주 말입니다.
그 불과를 얻어 무엇을 하자는 것일까요?
▶‘ 대불공’ 을 하는 것입니다.
불공은 원불교 신앙의 핵심이지요?
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과 사람에게 드리는 정성 입니다.
그래서 그냥 불공이 아니라 대불공입니다.
대불공은 신명을 바치고,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 된 마음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만 드리는 불공은 ‘중도원’이 아닙니다.
모든 부처님께, 그리고 일체중생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대자유'가 와집니다.
▶우리를 얽어매는 이 부자유함.
우리는 일체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꿈을 꾸고 삽니다.
그것이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합니다.
자유롭게 나다니고 싶은데 외손주 때문에 못가지요?
하다못해 강아지 밥 때문에도 못 움직이고,
집안의 화분 물주는 것 때문에도 여행을 못갑니다.
두루 갈 수 있는 ‘시방원’이 안되는 것이지요.
‘대자유’ 의 마음은
너와 내가 없는, 안과 밖이 없는,
멀고 가까움이 없는, 걸리고 막힘이 없는 자리 입니다.
'대자유'라는 것은 결국 나뉨이 없는,
경계가 없는 대불공의 자리일 때,
하나의 자리일 때 가능한 것이지요.
▶ 하나의 자리가 뭡 니까?
결국 ‘일상원’이지요 .
대자유를 얻되 하나로 힘을 모으자는 겁니다.
마음이 같을 때 하나가 되지요?
대자유의 자리에서는 모든 마음이 같아집니다.
자유롭지 못하니까, 자유롭지 못한 원인이 제각각이니까 하나가 안되지요?
'대자유'의 자리에서 '대합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대자유를 얻어서 독선기신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면으로든지 합력을 하자는 것입니다.
주법에게 모든 마음을 비우고 자유스러운 마음으로 대합력하는 것입니다.
또한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당에서, 사회, 국가, 세계에서도 합력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대합력’은 하나된 마음입니다.
결국 '대서원'에 바탕한 '하나의 마음'인 것이지요.
그래서 이 서원이라는 종자가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대서원’으로 ‘큰 수행(대정진)’을 해서
이 세가지의 진리(일상원 중도원 시방원)를 나투는
‘대불과’를 얻자는 것입니다.
3. 대참회
(大懺悔 . .. 막혀있는 작은 기운 하나라도 다 푸는 간절한 뉘우침 )
: 신앙의 종자
자 다음은
우리 구도자가 심어야 할 또 하나의 씨앗인 '참회'를 봅시다.
대산 종사님은 6가지를 말씀하셨어요.
대참회 대해원 대사면 대정진 대보은 대진급!
'대참회'로써 '대진급'하자는 법문으로
‘부활’을 할 수 있는 길 을 밝혀 주셨습니다.
다시말해
▷묵은 세상의 얽히고 설킨 모든 업을 다 풀어주고 ,
▷ 보은을 통해 신앙의 길을 밝혀 주셨으며,
▷묵은 세상을 청산하여 서로서로
공생공영으로 대진급하여 새 세상을 열어가자 는 것입니다.
▶다시 새롭게 거듭 태어나고 살아나려면
'대참회'가 없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작은 기운 하나라도 막히면 천하사가 다 틀어집니다.
그래서 막힌 기운을 풀자는 것이 참회인데요,
작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풀어버리자는 것이 ‘대참회 ’ 입니다.
▶ 대참회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방법으로 두 가지 를
대 산 종사님께서는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는 내 안의 모든 원망을 놓아버리는 것이고,
밖으로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해 버리는 겁니다.
내 안의 모든 원망을 다 놓아버리는 것을 ‘대해원’이라 하고,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해 버리는 것을 ‘대사면’이라 합니다.
쉽지는 않지요?
한 가지 명심합시다.
원망은 독입니다.
독을 품고 살면 독이 결국 내 몸에 번져 내가 죽게 됩니다.
그래서 놓아야 하는 겁니다.
원망도, 원수도 말입니다.
자신뿐 아니라 삼세를 통해 원한 맺혀있는
모든 업장들을 풀고 풀어주고
금생에 맺어진 모든 죄업도 다 사면해 주어
새 생명을 얻게 해주고, 새 생활을 개척해야 합니다.
대종사님께서도
참회는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개척하는 초문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 인과의 이치를 깨치지 못하면 진정한 참회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인과를 알아야 쉴 자리에 쉬고, 갚을 자리에 갚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과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인과를 알아 진정한 참회를 위해 ‘대정진’이 필요 한 것이지요.
▶ 이 대정진의 마음으로 인과를 깨쳐 은혜를 발견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고(苦)가 아니라 ‘은혜 덩어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원망이 아닌 감사생활, 은혜를 갚는 보은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대참회를 하면 결국 자연스럽게 ‘대보은’이 나투어 지는 겁니다.
▶ 참회하고 대보은행을 하면 나와 남 모두 다함께 ‘대진급’ 이 되지요.
이것이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가 ‘부활’하는 길입니다.
<천여래 만보살의 회상>
1. 일원회상 영겁주인, 일원대도 영겁법자
지 난번에 ‘부활’과 ‘훈련’에 대해 알아봤는데,
▷‘부활’은 대참회로 대진급하는 데서오고,
▷참다운 ‘훈련’은 대서원으로 대불과를 얻는 길임을 확실히 아셨습니까?
그렇게 하는 뜻은,
▶ 일원회상에서 영겁토록 주인이 되자 는 겁니다.
일원의 큰 집(원불교 집안)에서 영원한 주인이 되자는 겁니다.
머슴이 되면 안됩니다.
대산종사님의 전매특허가 있지요.
똥덩어리 법문입니다.
머슴이 되면 똥덩어리 밖에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주인이 못되고 객이 되어 왔다갔다 해서는 안됩니다.
‘손님이나 왔다갔다 하지 참 주인은 영겁을 한결같이
내 집처럼 지키고 사는 사람이다’고 하셨습니다.
주인이 되려면 꾸준히 해야 됩니다.
중단하지 않고 꾸준히만 하면 됩니다.
일시적인 주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분이 좋으면 하고 나쁘면 않고 해서는 안됩니다.
▶또 일원대도에서 영겁토록 법을 체받는 사람(법자)이 되어야 합니다.
일원의 큰 길을 벗어나지 않는 영원한 공부인이 되자는 말입니다.
이 회상에 와서 법을 꾸준히 체받는 공부인
즉, 영겁법자가 되지 못하면 껍질입니다.
교당에 다니며 이 교법을 수지하여 실천하지 못하면 껍질이지요?
그 말씀입니다.
속알맹이는 없이 빈껍질만 있어 봤자 아무 소용없습니다.
2. 천불만성 발아, 억조창생 개복
일원대도가 길이 전하여 지려면
주인과 공부인이 많아야 합니다.
일원회상 영겁주인과 일원대도 영겁법자가
수 없이 쏟아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 주인과 공부인이 많아지면,
천불만성 발아 라,
천불만성이 많이 싹 터서 열매가 맺습니다 .
부처님과 성자들이 무수하게 쏟아진 다는 말입니다.
▶ 또 주인과 공부인이 많아지면,
억조창생 개복 이라,
억조창생 즉 모든 중생들의 복문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다같이 복족족 혜족족한 삶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간절히 염원하신 것이지요.
3. 무등등한 대각도인, 무상행의 대봉공인
▶ 우리 모두가 부처가 되고 성인이 되려면 (천불만성을 발아 시키려면)
‘무등등한 대각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등수가 없는걸 평등하다고 하지요.
바로 제불제성과 평등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파수공행 할 수 있는 대각도인,
그것이 바로 ‘일원대도의 영겁법자’입니다.
▶또, 우리가 모든 중생의 복문을 열려면(억조창생을 개복 시키려면)
‘무상행의 대봉공인’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였다는 상이 있으면 주인은 아닙니다.
무상행의 대봉공인이 ‘일원회상의 영겁주인’입니다.
상이 없이 공중을 위해 바쳐야 합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일원회상의 영겁주인이 되고,
일원대도의 영겁법자가 되어
천불만성을 발아시키고
억조창생의 복문을 열어주는,
무등등한 대각도인
무상행의 대봉공인이 되어
대종사님의 일대경륜인 제생의세를 실현하자는
간절하신 염원이 담긴 법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