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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의 배반
역대하 10:16-19
16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이새의 아들에게서 업이 없도다
17 이스라엘아 각각 너희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온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18 그러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르호보암이 그 왕이 되었더라 르호보암 왕이 역군의 감독 하도람을 보내었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저를 돌로 쳐 죽인지라
19 르호보암 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역대하 10: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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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축복과 저주의 기준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결정지으시는 기준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결정 내린 기준에 대해서
반감을 갖는다든지
불만을 터뜨린다든지
저주한다든지
외면해 버릴 때,
그때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의 제자 12명 가운데
가롯유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롯유다 자신이 예수님을 배반한 걸로
우리가 알고 있지만,
그런데 본문 19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다고
우리는 알고 있지만,
가롯유다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도리어 가롯유다를
배신한 것이 됩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따를 때부터
자기 기준을 정해 놓은 사람입니다.
곧, 자기의 마음이
곧 자기의 기준이 된 사람입니다.
내가 의인이냐, 내가 악인이냐,
복을 받겠냐, 저주를 받겠냐,
이런 모든 기준이
이미 자기 마음에 확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롯유다 입장에서 볼 때,
자기가 생각했던, 천국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하고
맞지가 않은 겁니다.
가롯유다는 처음에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대하고, 그 소망을 품고 살았지만,
나중에 보니까
예수님은 권세없이 초라하게
군인들에게 잡히니까,
그 동안 친척과 집을 버리고
3년 동안 충성을 다해
예수님을 따랐던 가롯유다 입장에서는
건질게 뭐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가롯유다 혼자만 예수님을 버린 게 아닙니다.
12제자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고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이것은
가롯유다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고
베드로부터 12제자 모두가
예수님에 대해서 납득할 수 없었고
예수님과 조용히 헤어지기로
결단한 이유입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면서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버리고
고기잡으러 갔을 때의 제자들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3년 동안 따라 다녔는데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뭐가 있었습니까?
권력을 가졌습니까?
아니면 재산을 모았습니까?
사회적인 명예를 얻었습니까?
인기를 누렸습니까?
좋은 취직 자리를 허락 받았습니까?
예수 따라 다니고
얻은 것이 뭐가 있었습니까?
ㅡ정말 아무 것도 얻은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했을때
그들이 무엇을 얻을 것이 있어서
교회에 나오는지...
제자들의 심정이 되어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목숨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좁은 길로 가는 것 그것뿐입니다.
주님 가신 그 길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기쁨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내가 있는 곳에 너도 있게 하리라."
이 축복 외에
다른 축복은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안 갈려고 발버둥치는 우리를
강제로 끌고 가시는 겁니다.
그것도 가롯유다 한 사람이 아니라
11제자 모두에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고
말문을 닫게 하십니다.
그들이 가기 싫어하는 좁은 길.
그들이 무서워하는 죽음의 길.
그들이 황당해 하는 막다른 골목.
그 막다른 골목도
주께서는 이게 생명의 길이라고 인도하십니다.
본문에서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데
다윗 집안 중심으로 세워지는 나라를
유다라고 합니다.
다윗의 지파 이름을 따서
유다라고 합니다.
그 외 나머지 11지파가 뭉쳐서 된
북쪽 나라를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라 하면
야곱 아닙니까?
이스라엘이라 하면
12지파로 한 나라가 되게 하신다는 뜻이고
유다 지파라면
유다 한 지파로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유다지파가 아니고
르우벤 지파나
또는 시므온 지파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만이 축복의 계통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성질이 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할 때는
12지파가 의논하고 협력해서 마음 맞춰
좋은 나라 만들려고 했는데,
뭐 다윗이 왕이라고 해서
유다 나라만 하나님의 택한 나라가 되고
나머지는 아니라고 한다면
얼마나 부화가 나겠습니까?
유다 가문하고 만날일도 적은데
우리끼리 나라 만들면 그만 아니냐고
결의를 다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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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본문에서는 그런 생각을
배반이라고 간주해 버립니다.
이런 상식적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은 기분이 상할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것은
누구 중심으로 보면 그럴까요?
바로 다윗집안 입장에서 볼 때입니다.
유다 중심으로 뭉치지 않고
따로 떨어져 나간 게
배반으로 보이지 않지만,
유다 입장에서 볼 때는
배반이라는 말입니다.
또 우리가 본문을 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가 뭘 생각해야 하면,
구원받는 사람과
구원받지 않는 사람의
어떤 외면적 차이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같이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도 같이 하는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열심히 예배드리고, 거룩하게 안식일을 지키고, 안식일에는 노동도 하지 않고,
주님 앞에 헌신하고 금식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외부적으로 기도를 열심히 한다든지,
사랑의 교제를 한다든지,
그런 것은 별 차이가 없는데
무엇이 문제냐 하면
그 당시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의 마음이
예수님 마음과 일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하니까
같은 성도가 아닌가? 하면 안됩니다.
당신의 마음이 지금 어디 가 있습니까? 를
묻고 있습니다.
자, 우리가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봅시다.
바리새인은 누구보다
철저히 율법을 준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계명과 율례를 지키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입니다.
오죽했으면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의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겠습니까?
이 같으면
인간이 해 낼 수 있는
최고 수준에 도달된 사람이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바리새인 보다 더 낫다는 것은
바리새인이 최고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하면 껌뻑 죽던 사람들,
여호와라면 그 앞에 엎드리고 경외하는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종교적인 것에는
최고의 도사들입니다.
그 어느 누가 바리새인보다 더
법도와 율례를 지킬 사람이 있겠습니까?
심지어 바리새인 법에
이런 법이 있습니다.
남이 싫어하는 짓을
네가 남에게 하지 마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 했습니다.
그리고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
이것이 하나님 뜻이다.
라는 것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오셔도 눈 깜짝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가와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네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오른손을 찍어 버려라.
행동으로 옮겨 짓는 것만 죄가 아니라
마음 속으로 음란을 품는 것도 죄다.
형제보고 마음속으로 욕하는 것도 살인죄다.
사람들 앞에서 외식하며 기도하는 것도 엉터리다. 금식할 때 찡그리면서 하는 것도 엉터리다.
구제할 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오니까
인간의 능력을 총동원해서
지킨다고 자부했던 인간들이
오른손이 하는 일에
왼손이 모르게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같은 몸에 붙은 팔, 다리인데,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남의 눈에 티보다
너의 눈에 들보부터 빼라고 하십니다.
인간이 자기의 들보를 뺄 수 있습니까?
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들보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목사가 기복 신앙에서 벗어나라고
주구장창 설교합니다.
자기는 기복신앙을 초월했다는 것입니다.
가능한 일입니까?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죽을 때까지
기복신앙에서 벗어날 사람이 있습니까?
기복 신앙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수시로 생겨나고,
죽을 때까지 생겨 날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를 마치시고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그 문둥병 환자는
어떻게 해서 깨끗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산상 수훈 다 지켰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문둥병이 낮게 되고
그 다음에는 중풍병자를
자신의 능력으로 죄를 사하고
걸어서 나가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인간의 힘으로 성경말씀 하나
제대로 지킬 장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배반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뭐냐 하면 나의 죄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어디까지 걸쳐저 있는지
감도 잡지 못하는 겁니다.
이건 우리가 한평생 두고 살면서
성경 말씀을 대조해 보면서
내 죄가 이것이었구나 라고
생각해야 될 문제를 가지고,
기껏 종교적으로 자기의 행위를 가지고
죄 짓지 않았다고 나서니까
하나님의 의가 제대로 보이겠습니까?
완전히 교만과 자만과 자기오만으로
똘똘 뭉쳐
자기 죄를 감추는 방향으로 나서게 되.는 겁니다.
의인으로서 말입니다.
의인되고 안되고의 기준은
하나님의 용서받은 자와
용서받지 못한 자의 기준이 되는 것이지,
자기의 선행의 근거에 의해서
의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써먹었던 것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거부 할 수밖에 없었고,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기 속에 여전히 들끓고 있는
죄 라는 것에 대해서
너무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간통과 살인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시편51편에 하는 말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심령을 원하시니까
상한심령을 바칩니다.
주의 꺾으신 피로 말미암아
이 상한 심령을 은혜로 덮어서 주여 구원하소서.
이것이 주께서 원하는 참된 제사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우리 교인 중에 간통죄를 짓고도
교회 나올 사람이 있습니까?
아마도 있을 것입니다.
죄를 숨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은 부끄러워서 교회 안 나올 겁니다.
그것이 바로
뭔가 나의 행위로 내세울 만 할 때
교회 나온다는 자체가 뭐냐 하면
그 마음속에
예수님의 용서가 들어 있어야 할 자리에
아직도 바리새인 같은
자기 잘남과 자기 훌륭함과
선할 수 있는 가능성.
그것 들고 주님 앞에 자랑삼아 나왔던 겁니다.
본문에서 배반이라는 말을 사용 할 때
열 지파는 기분 나쁠 겁니다.
우리가 뭐가 잘못 되었기에
유다지파, 다윗지파만 쳐다보며
살아야 되느냐 하고 말입니다.
유다지파는
하나님이 다윗과 약속하기를
모든 죄는 다윗으로 통해서
용서가 전달된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는 기준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선한 양심이
나의 의인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예요.
내가 의인되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가 따로 존재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앞장 세워야 되겠습니까?
누구를 자랑해야 됩니까?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거부하고
앞장세우지 않으면
예수를 배반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성경에는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이
나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22에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그 기준으로써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크게 목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는 교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 붙들고
구원되는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은혜 받았다고 하고
사랑으로 교제한다 해도
그것 붙들고 구원되는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구원의 기준이 되지 말고,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이미 끝나버린 사항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직 주, 예수님 만이냐 하면
주님 사랑보다는
우리가 속해 있는 그것을 사랑하는 그 순간,
우리는 주님을 배반한 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뭘 건져야 되지 않습니까?
주님 제자들은 뭘 건졌습니까?
사도바울이 예수 믿고 뭘 얻었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재벌이 되었습니까?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야고보는 옥에 갇혀 죽었습니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밧모섬에 귀향 가서 죽었습니다.
그들이 과연 예수님을 믿고 무엇을 얻었습니까?
아름다운 교회를 얻었습니까?
그들이 얻은 것은 예수님 자신!
그걸 얻었습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지,
교회가 길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영생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
교회란 주님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자요, 형제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문둥병 환자요 중풍병자입니다.
교회고 형제라면 그리스도만 증거하고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바리새인이 아니라고
발버둥치는지 모릅니다.
우리 마음속에 스스로가 주님을 배반하는
그런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