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1)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12장은 ‘그 날에’ 일어날 예루살렘의 구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1-9절은 예루살렘을 공격한 적들을 물리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날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부어주시는가 하면 10절 말씀에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신다고 합니다.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새 번역 성경에서 “은혜를 구하는 영과 용서를 구하는 영”으로 번역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이란 이스라엘백성들이 기다린 정치적인 구원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임을 이미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낮에 누가복음 7장에서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을 말씀을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 메시아를 증거 한 세례요한이 왜 예수님의 대하여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까?
자신이 직접 세례를 베풀고 하늘에서 성령이 임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 분이 메시아라고 증거 한 세례요한이 의심을 품었다는 것은 평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품고 있었던 메시아관이 어떠한 것임을 알 수가 있는 내용입니다. 즉 예수님의 행하신 일과는 전혀 반대되는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10절을 다시 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 즉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심령이 된다는 것은 자신들이 무언가 대단한 잘못을 한 것이 전제가 됩니다. 그 잘못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통곡하기를 장자를 잃고서 통곡하듯이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찌른바 그가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이 찌른바 그가 누구입니까? 이 본문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이라고 되어 있는 말씀이 ‘나를’이라고 번역이 되어야 더 정확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거민들이 그들의 목자요 왕인 여호와 하나님 그분을 찔렀다는 것입니다. 이 왕이 어떻게 오시는지 스가랴 9:9절에서 왕이 겸손하여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십니다. 11:12절에서는 그 목자가 싫다고 노예의 몸값인 은 30에 팔아버린 목자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찔렀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찔렀다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이요.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이 됩니다. 동일하게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지 않고 배척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께서 먼저 찔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요한보다 큰 자라는 의미를 여기서 찾아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 중 가장 큰 자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저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한 세례요한이지만 무엇을 몰랐던 것입니까? 그들이 메시아를 죽이게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자기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수많은 고난을 받았기에 자신들을 괴롭히는 이방나라들을 심판하고 자기들은 구원하여 줄 것을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그 백성들에 의하여 배척을 받고 찔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자신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창세기 3:15절에서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먼저 상하게 합니다. 그러면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합니다. 먼저 공격하는 자가 뱀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공격한 자가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와 다르다고 배척한 것입니다. 물론 기적을 베풀 때에는 다 환영하면서 그들의 임금을 삼고자 하였지만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이야기 하시고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 된다는 말씀에서는 베드로조차 믿지 못한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셔서 메시아의 사역을 온전히 이루어 내시는 것은 그렇게 메시아를 기다린 유대인들조차 모르는 방식으로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한계이며 문자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인간이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고 조사하여 알아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영생이 있는 줄을 알고 부지런히 상고하였지만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성경 박사들이라는 유대인들의 손에 의하여 예수님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다시 본문 10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으로 결론 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셔야만 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주의 성령을 부어주심으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어야 자기가 행한 일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이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나사렛 이단의 괴수 예수를 적법하게 처단하였다고 여긴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자기들이 찔러 죽인 메시아라고 회개를 하겠습니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성령이 임하여야만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기고 하늘 보좌에 등극하셔서 이제 성령을 부어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합니다. 그렇게 성령이 임하게 되니 비로소 성령을 받은 자들이 자기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31-37절을 봅니다. “31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거 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36 이 일이 이룬 것은 ㄷ)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ㄹ)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도 성령이 임하고서 요한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장면을 기록하면서 그 뼈가 하나도 꺾어지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출애굽기 12:46절의 유월절 양의 뼈를 꺾지 말라는 말씀과 시편 34:20절의 그 뼈가 보호되어 하나도 꺾어지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의 성취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한 스가랴 12:10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증거 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2:36-37절을 봅니다.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3)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오순절 성령이 임하여 베드로와 사도들이 처음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너희가 찌른바 나를 보고서 애통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자들이 심령이 찔린 것입니다. 심령에 찔려서 회개하는 자들이 바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이 임한 자들입니다. 주의 영이 임하면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 죄란 자신이 바로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면 회개하고 애통하게 됩니다. 무엇으로 애통 하는가 하면 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이 한스러워서 통곡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원통해 하는 내가 바로 예수님을 찔러 죽인 장본인임을 알고서 마음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애통하는 것입니까?
10-11절입니다. 자기 외아들, 독자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통곡하는 것입니다. 므깃도 골짜기 하다르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요시아 왕이 전사한 곳이기에 백성들이 애통하였습니다. 요시아 왕의 개혁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압니다. 무너져 내리는 유대를 온 힘을 다해 개혁한 그런 왕이 죽었을 때에 이제 유대의 희망이 사라졌다고 운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운 것입니다. 이 정도의 애통, 이 보다 더한 애통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일어나는 것이 바로 성령이 임하여 애통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번 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평소에는 예수님의 고난은 관심도 없이 그저 세상의 영광을 이야기하다가도 이번 주간만큼은 주님의 고난을 생각한다고 금욕적인 행사들을 많이 합니다. 특별새벽기도회를 한다든지, 금요일 하루를 금식한다든지, 청소년들에게는 게임 한 주간 안하기 등의 과제를 주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러한 과제를 수행하고 나면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보다는 무언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였다는 뿌듯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이 바로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려온 사고방식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는 메시아를 기다린다면서 율법을 지키고 금욕적인 모습으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손에 의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찔려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죄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피조물의 손에 의하여 살해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죄를 모르고서 그저 윤리도덕적인 몇 가지의 거론하면서 회개를 말하고 그런 회개를 한다고 집단적인 모임을 만들어 통곡기도회를 한다고 하고 무슨 집회들을 한다고 야단들입니다.
그러나 주의 성령은 사람들이 운동한다고 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바람이 부는 것처럼 사람이 주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에서 각각 따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12-14절입니다. 따로따로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전하여 주는 방식이 아닙니다. 이런 영이 임하는 것은 유다만이 아니라 온 땅 각 족속에서 임하게 됩니다. 처음에 애통하였던 그 예루살렘의 일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오늘 우리가 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각자가 따로 통곡하게 됩니다. 집단 기도회를 통하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믿어왔지만 과연 내가 예수님을 찔러 죽인 자라는 사실을 얼마나 인식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얼마서 아프셨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감상적입니다. 세 개의 못 이라는 복음성가는 그때 그 무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오늘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우리 자신들이 다 예수님을 찔렀던 자들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이 말씀은 여전히 현재의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은혜가 임하기를 바랄뿐입니다. 주의 영이 임하여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 주의 용서를 구하는 심령, 그 찌른바 주님을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자기의 독자를 잃어버린 것처럼 나라가 망한 것처럼 통곡하는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