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s
사랑하는 마리아
Side.
A
1. 사랑하는 마리아 -
패티김
2. 사랑과 이별 (연속극
'풍란' 주제곡) - 패티김
3. 슬픔의 천사 -
패티김
4. 꽃밭에 산다 -
패티김
5. 9월의 노래 -
패티김
Side
B
1. 첫사랑의 언덕 -
박형준
2. 망향의 노래 -
최희준
3. 사랑은 홍역 -
하수영
4. 네 얼굴을 보면은 -
길옥윤
5. 웨딩드레스 -
한상일
6. 낙엽 -
길옥윤
네 얼굴을 보면은
-
작사.작곡.노래:길옥윤
네 얼굴을 보면은 쥴르부아 쥴르부아
마주 앉아 있으면 쥴르부아 쥴르부아
마음속에 간직한 말 못할 사연을
잠자코 있어도 쥴르부아 쥴르부아
기쁨에 넘칠 때는 쥴르부아 쥴르부아
두근거리는 가슴 쥴르부아 쥴르부아
슬픈 일이 있어서 흐느껴 버리면
흘리는 그 눈물을 쥴르부아 쥴르부아
아무리 숨겨보아도 나만은 속이지 못해
너무나 깊이깊이 사랑하는 까닭에
어쩌다 너와 나의 사랑이 식어서
뿔뿔이 헤어지는 그날이 온다 해도
이별의 인사는 말어 슬며시 떠나가다오
행복했던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
아무리 숨겨보아도 나만은 속이지 못해
너무나 깊이깊이 사랑하는 까닭에
어쩌다 너와 나의 사랑이 식어서
뿔뿔이 헤어지는 그날이 온다 해도
이별의 인사는 말어 슬며시 떠나가다오
행복했던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
쥴르부아 쥴르부아
길옥윤의
이별콘서트
길옥윤 선생의
콘서트 얘기가 처음 나온 것은 1993년 가을이었다.
일본 출장중인 나를
찾아온 그는 대뜸 고국 무 대에 다시 서고 싶으니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했다.고국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도 곁들였다.
사업에 실패하여
일본으로 도피한 처지이기는 하지만
그는 일본
무대에서도 일류 대접을 받는 작곡가요 연주자였다.
그러나 고국 무대에
다시 서고 싶다는 얘기를 할 때 그의 표정에는 긴 이국생활에서 오는 향수와 지난 시절에 대 한 회한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우리는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며 많은 얘기를 나눴다.
내년 9월쯤 귀국
콘서트를 마련해보겠다는 약속도 했다.
다급한 연락이 온
것은 1994년 5월 이었다.
전화를 한 사람은
24세 연하의 두번째 부인 전연란 씨였다.
길옥윤 선생이 암
수술을 받았으며 현재 건강상태는 걸을수도 없을정도로 나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지난번에
약속했던 콘서트 를 내달 중에 꼭 성사시켜 달라는
길옥윤 선생의
당부를 전했다.
이게 아마 마지막
부탁이 될 것 같다는 얘기를 하면서 그녀는 목이 잠겨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꼭 패티김과
함께 공연하고 싶어한다는 주문도 덧붙였다.
전연란 씨 의
호소는 너무나 간절하여 단번에 내 마음을 움직였다.
"제가 직접 전화를
하면 실례가 될 것 같아서요. 요즘 부쩍 패티김 선생님 얘기를 하세요."
그 조심스러운
말속에는 두 음악인을 우러르고 감싸안는 포용이 깃들어 있었다.
남편의 전부인에
대한 세속적인 거리감은 전혀 느낄수 없었다.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콘서트 를 하겠다는 것인지 막막했지만
일단 패티김의
의사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파경 이후 길옥윤
선생의 노래를 한번도 부른 적이 없는 패티김이 과연 그의 청을 들어줄것인지, 무엇보다 그게 선결문제였다. 패티김의 첫 반응은 깊은 슬픔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하고 한동안 눈물만 흘렸다.
"이 부장님이
일본엘 좀 다녀오세요.
그 분이 원하는 게
뭔지, 내가 뭘 어떻 게 해주면 되겠는지 좀 알아오세요."
길옥윤 선생은
반쪽이 되어 있었다.
암 치료 부작용으로
머리카락은 듬성듬 성 빠져 있었고 혼자 힘으로는 일어서지도 못했다.
몇달 전에 만났을
때 아직도 할일이 많다며 일 욕심을 부리던 그 길옥윤 선생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콘서트는커녕 서울행 여정 자체도 무리일 것 같았다.
담당 의사를
만났다. 그는 치료 과정의 틈새를 이용 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일정을
잡아주었다. 콘서트는 그렇게 성사되었다.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나오고도 의사생활을 마다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작곡과 연주 활동을
시작하면서 음악
인생을 살아온 타고난 예인 길옥윤.
패티김을 만나
'사월이 가면' ,''사랑하는 마리아','서울의 찬가' ,'사랑은 영원히''빛과 그림자' 등 주옥같은 명곡을 남겼고, 길옥윤 음악의
클라이맥스‘이별’을 끝으로 패티김과 운명적인 이별을
한 인간 길옥윤.
이혼과 사업 실패 등 참담한 좌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 갔다가 끝내 불치의
병마와 함께 그는
다시 돌아왔다. 자신의 음악 동료들과 수많은 팬, 그리고 고국에 마지막 이별 을 고하기 위하여. 무대에는 손목인, 황문평, 박춘석 등 길옥윤
선생의 음악 동반자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초등학교 동창인
김재순 전 국회의장, 자별한 사이인 탤런트 이순재도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자리를 같이했다.
길옥윤 선생은
휠체어 에 앉은 채 자신을 위해 마련된 콘서트 「길옥윤 이별 콘서트가 남긴
세가지 이별 의식
이남기·보도본부장 SBS 10년사에 남긴 작은 발자취 111 를 지켜보며 시종
흡족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월이 가면' 을 부른 뒤 패티김이 물었다.
"이 노래가
프로포즈였습니까?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길옥윤 선생은
패티김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피한 채 보다 깊은 얘기를 했다.
"우리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차고 기름진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헤어진것은 몸이었지
마음이 아니었어요."
이 말 속에는
패티김에 대한 변함 없는 애정과 사죄의 뜻이 담겨 있었다.
영혼을 고갈시키는
창작 활동과 혼신의 열정을 기울여야 하는 연주 생활, 그는 어쩔수 없이
순간적인 쾌락에
탐닉하게 되었고, 구도자와 같은 절제로 자기 관리를 하는 패티김은
그런 흐트러진
모습을 용납할수 없었다.
훗날 어느 TV
프로그램에서‘몸매는 곧 음색을 결정짓는 악기다.
내 몸은 이미 나
개인의 것이 아니라 내 노래를 사랑하는 모든 팬들의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먹고싶은 음식 한번 제대로 먹어본 적도 없고 여섯시 이후에는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는다.'
던 패티김이 아니던가. 두사람은 끝내'사랑하기 때문에'이혼을 해야 했던것이다.
길옥윤 선생이 청한
'사랑은 영원히' 를 부른 패티김도 이에 화답했다.
"거 뭐 병 같은
걸 앓고 그러십니까!" 북받치는 슬픔을 억제하는 핀잔이었다.
부부간에나 가능한
교감이요 애정이 담 긴 투정이었다.
그녀 역시 마음은
헤어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날레는 '이별'
이었다.
노래가 절정 을
향해 치닫자 패티김도 목이 메었다.
그녀는 카메라를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내 평정을
되찾아 감동적인 마무리를 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길옥윤 선생, 초청받은 인사들, 길옥윤 선생의 노래를 부른 후배 가수들을
비롯한 출연진 들,
공개홀을 가득 메운 방청객들, 눈 시울을 붉히며 콘서트를 지켜본 수많은
시청자들, 그 날의
모든 사람들이 콘서트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길옥 윤 이별
콘서트] 는 SBS가 우리 시대 최고 예인에게 헌정하는 장중한 이별의식이었다.
콘서트가 막을
내리자 길옥윤 선생은 휠체어를 탄 채로 앰뷸런스에 올랐다.
그의 표정은 한없이
만족스러웠다.병자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만큼 화색이 돌고 있었다.
그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대중 예술가에게 이런 무대를
마련해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있었으리라.
그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콘서트가 끝나고
길옥윤 선생을 배웅 할 때까지 30분정도 지났을까?
나는 그제야 길옥윤
선생 환송 대열에 패티 김이 보이지 않았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의 분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었다.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는 혼자 거울
앞에 고개 를 숙이고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떠나간 길옥윤
선생을 두고 그는 그렇게 인생과 예술과 애증이
교차한 패티 김식
이별 의식을 올리고 있었다.
나또한 [길옥윤
이별 콘서트] 를 끝으로 현장 지휘봉을 놓았으니, 그 감동적인 무대는
내게도 뜻깊은 이별
의식 이었던 셈이다.
SBS가 최고
예인에게 헌정한[길옥윤 이별 콘서트].
글의 출처 :
SBS 이남기 보도본부장
1970년초...
작곡가 길옥윤 씨와
가수 패티김 씨는 많은 팬들의 박수와 축복을 받으며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후에 정아라는
예쁜딸을 낳고, '1990년 정아는 스무살' 이라는 노래를 길옥윤 씨가 작사.
작곡을
해 패티김이 불러 힛트를 치며 그들의 가정과 자식에
대한 사랑을
대중들에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TV가 대중화 된 것이 아니어서 브라운관을 통해 보는
스타의 모습은 우상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런 길옥윤 씨와 패티김이 갑작스레 이혼을 발표했습니다.
헤어지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에...' 라며.
늘 그들의 부부애를 지켜보던 많은 팬들 또한 충격에서 벗어날수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이혼이 거의 대중화 되다시피 했지만, 당시만 해도 아무리 연예인이라 할지라도 이혼을 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가 될 시기였기 때문이죠.
길옥윤 씨는 이혼을 하고 얼마안되서 '이별' 이라는 노래를 만들게 됩니다.
그 노래 '이별'을 다른 가수가 아닌, 예전의 부인 패티김에게 부르게 하죠.
이 방송을 저도 본 기억이 납니다.
패티김과 길옥윤 씨가 다정스레 (조금은 어색해보이는...) 나와 길옥윤씨는 하얀양복차림에 섹소폰을 연주하고, 패티김은
검정계열 반짝이 롱드레스를 입고 나와
이 노래를 함께 불렀죠.
이때 패티김은 길옥윤 씨에게 '선생님' 이라는 칭호를 쓰며 깍듯이 존중에 마지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이별'이라는 곡이 어느정도 힛트를 했는가...하는 예를 한가지 들어보자면, 그 당시
LP음반 한장의 가격이 보통 180원~250원 정도였는데, '이별'이란 노래가 실린 라이센스 음반 한장의 가격은
800원으로 거의 4배에 육박하는
사상초유의 엄청난 가격에 판매되었다는 것이죠.
그것도 날개 돋친듯 팔려나가 늘 매진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이렇게 고가의 음반이 팔려나가게 된데에는 '이별' 이라는 노래도 훌륭했거니와,
이노래를 만들고 부른 사람이 바로 아픔의
당사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얼마전에 그동안 구전가요로 알려져있던 '사노라면'의 원곡이 바로 길옥윤 씨가
작곡하고 김문응
씨가 작사. 쟈니 리가 노래했던 '내일은 해가뜬다'였음이 밝혀졌습니다.
'내일은 해가
뜬다' 라는 노래는 쟈니 리의 '뜨거운 안녕' 음반에 실린 곡으로 당시 엄청난 힛트를 기록했던 '뜨거운 안녕'에 가리어 주목을 받지
못했죠.
그러다 1967년
가사가 너무 '현실부정적' 이라는 이유로
방송금지곡에
묶이게돼 잊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가요계에
평생 헌신한 길옥윤 씨...
하지만, 그의
말년은 너무나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이 포스트의 자료를
찾으러 다니면서도 그와 관련된 기사나 글...
그리고 사진등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지요.
패티김과의 사랑을
넘어선 사랑...그리고, 혜은이 씨의 발굴...
우리나라 재즈역사에
미친 지대한 업적.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그의 노년은 너무나 쓸쓸했고,
이러한 세상의 모든
짐을 뒤로 놓은 체 편안히 쉴 수 있는 세상으로 나래짓 한 것 같습니다.
※길옥윤
이름 : 길옥윤 (본명 : 최치정)
출생 : 1927년 2월 22일
사망 : 1995년 3월 17일
출생지 : 평안북도
영변
데뷔곡 :
1962년 현인 - 내사랑아
저서 : 이제는
색소폰을 불수가 없다.
인생이 뜻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제와서 후회 같은
것은 없지만, 글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꼭 같은 인생을 걸을
용기가 있을까
자문해 보면 물론 있다고이야기 하겠지만 그 중에서 그늘지고 낭비적인
세상을 무언가
생산적인 시간으로 돌렸으면 하는 욕망이 있지.
욕망...
나는 욕망의
사나이였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욕망, 지식에 대한 욕망, 작품에 대한 욕망, 허영에 대한 욕망,
술에 대한 욕망
등등 오만 가지의욕망들이 나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게 했고, 깊은 계곡을 뛰어 내리게 했고,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동반하는 이별을 하게 했고,
끝없는 방황을하게
했다.
안개 저편에서
어설프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그림자처럼 조금씩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할때 해는 이미 기울기 시작했고, 인생은초가을에 접어든
느낌이다.
앞으로 갈 여정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지나간 어제를 회고 하면서 나는 이 소중한
나머지 가을과
겨울을 어질고 사랑스럽고,진실하게 살고 싶다.
詩(노래) 와 酒(술) 와 로망의 어제는 아름 다웠었다.
1980년 11월
길 옥윤.
첫댓글 '네 얼굴을 보면 쥴르부아 쥴르부아' 처음 듣는 노랜데 끝까지 들으며 익숙했던 것 같이 느껴지네요. 욕망의 사나이, 멋진 사니이 그를 많이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모든 것은 지나가고 또 다시 생각하면서 나이가 드나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은 영원하다고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