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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와 마리아
[본문] 누가복음 10:38-42
오늘 김oo 권사님의 권사 은퇴 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수고하신 김 권사님의 노고와 봉사를 생각하고 또 그렇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 이 예배를 드립니다.
은퇴한다는 것은 교회의 공식 직분에서 은퇴한다는 의미이지, 교회 봉사를 그만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몇 년 전에 oo의 어느 가정교회 지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그렇지요. 사실, 성경에 보면 은퇴가 없습니다. 사도들은 죽을 때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모세도 죽을 때까지 일했습니다. 여호수아도 죽을 때까지 일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죽어야 은퇴합니다. 천국 가는 게 진정한 은퇴입니다. 진정한 은퇴는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은퇴 제도를 정한 것은 공식적으로 교회 직분에서 은퇴하는 것이고, 교회 봉사는 계속됩니다. 말하자면, 전에는 교회 직분에 매여서 봉사했다면 앞으로는 자유롭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편안하게, 즐겁게 봉사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을 잘 믿고 섬긴 두 자매 곧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해 생각해 보고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인데 누가 언니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대개 먼저 나오는 사람이 언니입니다. 그래서 마르다가 언니이고 마리아는 여동생이라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가까운 베다니에 살았습니다. 오라비는 나사로인데 오빠인지 남동생인지 알 수 없습니다. 편의상 나사로를 오빠로 보고, 마르다와 마리아를 여동생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 남매가 다 예수님을 잘 믿고 잘 섬겼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시면 대개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에 숙박했습니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는 3km 조금 안 됩니다(약 7리 정도). 예루살렘에 가서 가르치고 사역하시고 나서 돌아와서 주무시기에 좋은 거리입니다.
이들은 제법 유복한 가정이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예수님을 대접하고 섬기려 하면 물질이 제법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오시면 그냥 혼자 오시는 게 아닙니다. 열두 제자를 데리고 오십니다. 또 갈릴리에서부터 따르는 여자들이 같이 옵니다. 또 이래저래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 합치면 오십 명쯤 될지 모릅니다. 어쩌면 백 명이 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 많은 사람이 누워 자려면 방이 몇 개나 필요하겠습니까? 그냥 마당에 멍석 깔아놓고 자든지, 또는 몇 개의 방에 빽빽하게 모여 잤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끼 식사 준비하는 데도 엄청 준비해야 합니다. 게다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같은 제자들이 조금 먹겠습니까? 많이 먹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많이 먹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들은 근육을 쓰는 어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물을 끌어 올리는 데 힘이 많이 듭니다. 그러니 많이 먹어야 합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오시는데 소홀히 할 수 있나요? 예수님의 대적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은 먹기를 탐한다고 비난했습니다(마 11:19). 그러니 며칠씩 머물면 물질도 많이 들고 또 일손이 많이 필요합니다. 아주 바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마르다의 집에 오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바빠졌습니다. 수십 명분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데 부엌에서 하는 일이 많습니다. 마르다는 이 많은 식사를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이웃집 아줌마들이 와서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따라온 여자들도 도왔을 것입니다. 그래도 엄청 바쁩니다. 그런데 여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가서 그 발아래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딱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면 부엌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볼 때 화가 나겠습니까? 안 나겠습니까? 엄청 화가 나겠지요? 부아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러니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마르다가 볼 때 속에서 불이 납니다. ‘아니, 요것 봐라. 지금 바빠 죽겠는데,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인데, 자기는 편안하게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네.’ ‘앙콤스럽다. 얌체다. 야마리가 없다. 이기적이다.’ 그래서 속불이 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예수님에게도 화가 납니다. ‘아니, 예수님은 그런 마리아를 당장 쫓아 보내셔야지 ... 그걸 그냥 두고 보시다니 ... 예수님도 마찬가지네. 한 패다. 한 통속이야.’
그래서 마르다는 부엌에서 일하다 말고 예수님께 쫓아가서 말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40절) 여기서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는 원어로 볼 때 ‘마음에 걸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신경 쓰이지 아니하시나이까?’입니다. ‘나 혼자’라는 것은 부엌에 마르다 혼자뿐이라는 뜻이라기보다 마르다와 마리아 중에서 ‘나 혼자’란 뜻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자매라면 당연히 둘이서 같이 일해야 하는데, 마르다 혼자 두고 자기는 예수님 발 앞에 앉아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일손이 모자란 것도 있지만, 마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는데, 자기도 예수님 가까이 가서 말씀을 듣고 싶지만, 동생 마리아는 만사 제쳐놓고 자기 혼자 가서, 그것도 예수님의 발치에 웅크리고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자기 혼자 예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뿔따구가 나는 거지요. ‘아니, 요것 봐라. 지 혼자서 예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네.’ 그러니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 앞에 가서 불평을 쏟아내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내버려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마르다는 이렇게 말을 해야 속이 풀리지,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입니다. 예수님에게도 할 말은 합니다. 말은 부드럽게. 그러나 할 말은 하고야 마는 성격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1-42절) 아주 중요한 말씀인데, 그 의미를 차근차근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마르다야, 마르다야,” 이렇게 두 번 말씀하신 것은 친근함의 표시입니다. ‘네 마음을 잘 안다. 네가 얼마나 바쁘고 분주하고 애가 타겠느냐? 내가 네 마음을 잘 안다.’ 이렇게 달래는 의미가 있습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 여기서 ‘염려한다’는 것은 마음을 쓴다는 것입니다. ‘근심하다’는 것은 원어로 볼 때, 경황이 없다, 혼란스럽다, 당황하다는 뜻입니다. 밥도 해야 되지, 국도 끓여야 하지, 나물도 무쳐야 하지, 생선도 구워야 하지, 소고기도 구워야지, 양념도 만들어야지, 채소도 씻어야지, 파도 썰어야지, 양파도 까야지 등등 ... 데치고, 무치고, 버무르고, 뒤집고, 썰고, 빻고, 으깨고 ...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부엌에서 일하다 보면 그렇습니다. 전을 먼저 부쳐야 하나? 생선을 먼저 구워야 하나? 아차 간장을 안 넣었네. 국에 계피 가루를 조금 넣어야 하는데 잊어버렸네 ... 이처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이걸 해야 할지 저걸 해야 할지,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마음이 나뉩니다. 무엇부터 먼저 해야 할지 정신이 없어요. 그런데도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한가하게 예수님께 가서 발아래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참으로 앙콤스럽지요? 얌체입니다. 밉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마르다의 마음을 다 이해하면서도 마리아를 두둔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몇 가지만 하든지” -- 이 부분은 사본들 중에 있는 사본들도 있고 없는 사본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알 수 없습니다.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 이 말씀은 “그러나 한 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가 요구된다’, ‘하나가 꼭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식사 준비는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가 필요하다,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42절 끝에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발아래 앉아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한 가지’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옛날 고대교회의 사막 수도사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관상하는 삶을 칭찬했습니다. 조용히 주님을 바라보는 삶, 관조하는 삶, 관상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4세기 후반에 이집트에 압바 모세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디오피아 사람이었습니다. 강도떼의 두목이 되었는데, 정부군에 쫓겨서 사막의 수도원으로 숨어 들어갔다가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수도원의 압바(사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본문에서 마리아를 칭찬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거룩한 관상 안에 머무는 것을 가장 선한 것으로 여기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담화집』 I,1,8) 곧, 세상의 번잡한 것을 내려놓고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 곧 관상(觀想)을 최고의 삶으로 보았습니다. 부모 형제를 떠나고 친지를 떠나서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수도생활하는 것을 최고의 선(善)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아주 적은 양의 음식을 먹으며, 잠도 적게 자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또 잡념을 없애기 위해 노동하였습니다. 가능한 한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기를 애썼습니다. 마리아는 이런 수도원적 삶, 관상의 삶의 표본, 모범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본문의 초점은 말씀을 들었다는 것에 있지, 관상했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39절에 보면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의 핵심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인간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단지 훌륭한 강연이나 지혜로운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훗날 종교개혁의 핵심이고 개혁주의 경건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2절) ‘이 좋은 편’은 곧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집중해야 합니다. 지긋이 눈을 감고 관상하면 안 됩니다. 오늘날 가톨릭에서 말하는 ‘관상’의 핵심은 생각을 중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식이 없는 상태, 무의식의 상태를 목표로 합니다. 생각을 안 한다는 생각조차 없어야 합니다. 절대 무의식, 자기 망각. 몰아지경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관상을 깊이 하다 보면 정신 줄을 놓아버리게 되고 자칫하면 귀신 들릴 수 있습니다. 귀신이 들어오기 좋은 상태가 되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잘 듣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의식이 또렷하고 정신이 맑습니다. 말씀에는 진리가 있고, 약속이 있고, 생명이 있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잘 듣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식사 준비를 필요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식사 준비는 필요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영의 양식이 중요하지 육의 양식은 필요 없어!”라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또는 “먹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육체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말씀 듣는 게 중요하지, 식사가 뭐 중요하냐?”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라면 마르다는 “네, 주님, 좋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금식합시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졸졸 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먹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먹고 마시면서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은 식탁에서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잔칫집 분위기가 나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떠들썩하고 웃음소리가 나야 합니다. 그러니 식사 시간이 교제 시간이고 또 수업 시간입니다.
여러분, 교회에는 먹는 게 있어야 합니다. 예배드리고 나면 먹는 게 있어야 교제가 되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먹는 것을 탐해서가 아니라 먹어야 서로 교제가 되고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교회에 가보니까(2001년) 찬양을 잘하고 목사가 설교를 잘하는데, 예배 마치고 나면 우르르 나와서 차 타고 집으로 가버립니다. 그러니 예배는 잘 드렸는데 좀 허전합니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어느 한인교회에 가보니까, 설교는 보통이고(그러나 정통임) 찬양도 그저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배 끝나고 나면 밥을 줘요. 밥을 먹으면서 한 시간 가량 서로 이야기하고 소식을 주고받고 하니 재미있고 뿌듯해요. 주일에 교회 가는 기분이 납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한인교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깨달은 것이 ‘예배 후에 밥 주는 교회가 좋은 교회다’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교가 좋아도 밥 안 주는 교회는 재미가 없습니다. 물론 영의 양식이 좋아야 하겠고, 그 다음에는 육의 양식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제사드리고 나면 고기를 나눠 먹었습니다. ‘번제’의 경우는 다 태웠지만, 그 외에 속죄제나 속건제, 화목제 등의 경우에는 내장과 기름을 불사르고 고기의 좋은 부위는 제사장에게 주고 나머지는 가족들이 함께 나눠 먹었습니다. 그러니 일반 백성이 볼 때 제사드리는 날은 고기 먹는 날로 인식되었습니다(cf. 삼상 9:13).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에 전념하였다.”고 합니다(행 2:42). 말씀을 배우고 나서는 식사 교제를 힘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게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게 필요 없다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부엌에서 수고하는 여인들의 봉사는 귀합니다. 이런 여인들의 봉사가 없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재미없고 사람들은 다 집에 갔을 것입니다. 배가 고픈데 집에 가야지 뭐 별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르다와 같은 여인들의 봉사도 귀합니다.
3.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은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다는 것입니다.
왜 ‘좋은 편’입니까? 마리아가 선택한 것은 빼앗기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빼앗기지 아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생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빼앗기지 아니합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빼앗기지 아니할 것이요 또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은 빼앗기지 아니합니다.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고 했습니다(요 6:63). 마리아는 영생의 말씀을 선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합니다. 좀 앙콤스럽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예수님께 칭찬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식사 준비나 교제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식사 준비나 다른 봉사도 다 말씀을 잘 듣기 위한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영생을 얻도록 하는 데 도움 되기 위한 것입니다. 마르다는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느라 예수님 말씀을 못 들었지만, 식사 후에는 말씀을 잘 들으면 됩니다. 그때는 마리아에게 “설거지는 네가 해!”라고 하면 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둘 다 귀한 믿음의 여인입니다. 주님을 잘 섬긴 여인들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마르다가 되었다가, 때로는 마리아가 되었다가 서로 역할을 교대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영생의 말씀을 잘 듣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에서 감사함으로 살며, 또 사는 날 동안 주님을 잘 섬기고, 특히 예수님의 말씀 듣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 칭찬받고, 영원히 빼앗기지 아니하는 영생을 누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024년 11월 24일 주일 오후 구지교회 ooo 권사 은퇴감사예배 설교. 변종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