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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막한 고전읽기@물푸레 3기 [도시]
첫 번째 모임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
20121114 WED
1. ‘크리스마스 철학자’ 찰스 디킨스
올해는 찰스 디킨스(1812-70) 탄생 200주년이었다(한국에서 이렇다할 기념행사는 없었다). 생몰연대로 계산해보면 환갑도 넘기지 못한, 의외로 짧은 생을 살다 간 디킨스이지만 그는 살아생전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인기가 사그라든 적이 없는 작가다. 거의 모든 작품이 연극, 영화, 뮤지컬, 만화 등으로 각색되어 상연(상영)되고 있으며, 학계에서도 대표적인 연구 대상으로 꼽히다. 유일한 라이벌이 있다면 셰익스피어.
물론 디킨스를 폄하하는 사람도 많다. 이유는 작품이 너무 대중적, 통속적, 전형적이라는 것이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선의 편, 악의 편이 비교적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으며, 소설의 전개 역시 멜로드라마적이어서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대개 권선징악적 결말로 끝난다. 그래서 쉽게 잘 읽히기도 한다). 독자의 흥미를 끌기 위해 범죄물과 미스터리의 요소를 적극 끌어다 쓰기도 한다. 또한 디킨스는 영리하게도 그의 소설을 매월 소책자 형태로 나누어 발간했는데, 이러한 ‘연속출판(serial publication)’ 방식은 오늘날 드라마 방영 방식과 흡사한 것이다. 디킨스는 대중들의 흥미를 어떻게 자극하고 또 붙잡아 둘 수 있는지를 아주 잘 알았던 작가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장점들이, 실험적 기법과 작가의 고유한 가치관, 대중이나 사회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를 중시하는 현대의 비평가들에게는 고스란히 단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약간의 경멸과 무시를 담은 표현인 '크리스마스 철학자'라는 별명이 디킨스를 따라다니기도 한다.
물론 디킨스의 대중성은 19세기 빅토리아 시기 리얼리즘 소설의 가장 뛰어난 성취와 결합된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에 발자크가 있었다면, 영국에는 디킨스가 있었다. 이들은 독자 각각이 지닌 정치적, 계급적 입장과 무관하게, 보편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은 작가들이다.
다른 측면에서 디킨스에 대해 가해진 비판은 그가 과연 근본적인 ‘사회비판’을 행한 작가냐는 것이다. 말하자면 디킨스는 작품에서 중산계층의 위선과 가식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풍자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에 항상 (천사처럼) ‘착한’, 동시에 ‘매력적인’ 부르주아/귀족 인물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이러한 비판을 뒷받침한다. <두 도시 이야기>에서도 역시 혁명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 드러난다. 급진적 혁명가라기보다는 온건한 개혁가인 것.
2. 프랑스 혁명
<두 도시 이야기>는 혁명의 물결에 휩싸인 두 개의 도시, 곧 런던과 파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건은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이라고 하면 가장 대표적인 혁명—어떻게 보면 신성화된(그만큼 화석화된) 혁명—이지만 혁명 당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암기식 교육의 폐해일 텐데, 특히 토마스 칼라일의 <프랑스 혁명사>(디킨스가 작가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책)가 번역조차 안 되어 있다는 건 충격적이다. 따지고 보면 <두 도시 이야기>도 믿을 만한 번역본이 나온 건 최근(2012년 8월)의 일이다. 또 다른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역작인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의 경우에도 프랑스어본을 저본으로 한 번역본이 나온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굉장히 파편적인(당연히 취사선택과 왜곡이 불가피한) 정보만을 가지고 혁명을 이야기해왔고, 혁명에 대한 나름의 로망을 가슴속에 품어온 셈이다.
혁명은 거대한 흐름이다. 개인의 역량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정도의 거대하고 압도적인 흐름이다. 우리가 혁명(근본적 변혁)을 꿈꾸기도 하지만 두려워하는 건 그래서다. 디킨스나 위고는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각자의 자리를 찾으려 하고, 자신의 직분과 책임, 역할과 의무를 다하려 분투하는 개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독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건 꽤 감동적이지만, 동시에 그 한계 역시 명확하다. 개인은 거대한 흐름을 결코 막아낼 수 없다. 버티는 데까지 버티다 부질없이 흐름에 휩쓸려버리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들 각자가 보여주는 모습은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말하자면 소설은 밤하늘의 별의 순간적인 반짝임을 포착해서 거기에 영원성을 부여한다.
저택과 오두막, 얼굴 석상과 허공에 매달린 시체, 돌바닥에 묻은 핏자국, 그리고 마을 샘의 깨끗한 물, 수천 에이커의 땅—프랑스의 전 영토, 아니, 프랑스 자체 그리고 밤하늘 아래 모든 것이 인류의 연대표에는 아주 촘촘히 자리 잡고 있다. 그리하여 사소하든 위대하든 간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모두 별이 한 번 반짝거리는 사이에 일어났다 사라진다. 게다가 인간의 미미한 지식으로도 광선을 쪼개고 그 구성 요소를 분석할 수 있으니, 하물며 더욱 숭고한 지능은 이 땅의 희미한 빛만으로도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의 생각과 행동, 선과 악을 읽을 수 있으리라. (253)
3. ‘가족’ 혹은 ‘비밀’이라는 금실(golden thread)
거대한 흐름으로서 혁명이 밀어닥치는 가운데 거점 노릇을 하는 것은 바로 ‘가족’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가족을 이루는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니 말이다. 디킨스는 여기서 자신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한 여성 주위에 매력적인 남성들을 대거 등장시키는 것이다. 독립적이며 정의로운 찰스 다네이와 타락하고 무기력하지만 루시에게만은 헌신적인 시드니 카턴이 두 축을 이루는 가운데, 깊은 상처를 갖고 있지만 딸인 루시와는 마치 하나로 연결된 듯한 아버지 마네트 박사, 말끝마다 ‘업무’임을 강조하지만 누구보다 배려심 깊은 은행원 자르비스 로리 씨(그는 또 다른 아버지이기도 하다)가 등장한다. 루시를 둘러싸고 각 인물들 사이에는 미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되었다가는 사라지고, 곧 인물을 바꿔 재형성되었다가 또 사라진다. 이러한 역동적이고 계속해서 변화하는 삼각관계망은 소설에 흥미를 더해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소설이 후반부로 갈수록 인물들은 서서히 자신의 위치, 역할과 책임을 찾아간다. 혼란에 빠져있거나 괴로움에 시달리던 남성 인물들이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깨닫는 계기를 제공해주는 인물은 바로 루시다. 가정의 핵심. 런던 소호 지역의 마네트 가에서 “매사의 초점은 루시에게 맞춰져 있었고,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145) 시드니 카턴은 이렇게 말한다. “루시 양의 힘으로 가꾼 이 가정을 보고 제 마음 속에 죽은 줄만 알았던 옛 감정이 되살아났습니다”(217)라고. 로리 씨 역시 주요 방문객 중 한 명이며(점점 ‘업무’라는 말을 쓰지 않게 된다), 아버지 마네트 박사 역시 원기를 회복한다. 인물들은 가정을 통해,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루시를 통해,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깨달으며, 말 그대로 ‘되살아난다.’
아무리 사랑하고 가까운 사이에도 아주 먼 사이와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거라네. 가까운 사이에는 너무 미묘하고 오묘해서 꿰뚫기가 어렵지. (194)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겠다. ‘가족이라는 금실’은, 행복의 씨실과 날실로 인생이라는 천을 자아내기(302) 위한 필수재료라고. 하지만 이 ‘금실’이 사랑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건 아니다. 인물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고 있는 다른 하나의 실은 바로 ‘비밀’이다. 인물 각자가 간직하고 있는 비밀에는 시대의 그림자—이것은 나중에 혁명이라는 폭풍으로 발전한다—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시대의 ‘그림자’라고 했지만 이것은 무거운 것이어서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물들은 각자의 ‘비밀’을 최대한 존중한다. 본질적인 것이든, 거기서 파생되어 나온 지엽적인 것이든 인물들은 서로의 비밀을 최대한 존중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다음과 같은 장면에서처럼, 미묘한 삼각관계에 ‘비밀’이 얹어질 때 소설은 급격히 흥미로워지기도 한다.
“머리가 좀 복잡해요. 오늘 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서요.”
“그게 뭐요, 루시?”
“묻지 말라고 부탁하면 한 가지도 묻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실래요?” (298)
“훗날 오늘 이날을 기억할 때 제 인생의 마지막 비밀이 당신의 순수하고 순결한 가슴속에 간직되어 있고, 아무와도 나누지 않은 채 그 가슴속에만 고이고이 담겨 있다고 믿게 해주시겠습니까?” (219)
‘비밀’을 존중한다는 건 곧 ‘개인성’을 존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비밀’은 그것이 교환되고 지켜지기를 약속받는다는 점에서 감정적 차원의 ‘거래’이기도 하다. 비밀을 제공하는 자는 비밀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제공받는다. 이런 식으로 감정적 친밀함이 싹튼다. 너와 나 사이의 친밀함은 너와 나 사이에서만 ‘공유된 비밀’을 토대로 급격히 증가한다(얼마나 급격히 증가하는가는 카턴이 루시에게 비밀을 지켜준 대가로 감당하는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거래’라는 단어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단어다. 그것은 상업 활동을, 은행 업무를 연상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거래’는 공적 단어인 반면, ‘친밀함/사랑’은 전적으로 사적인 감정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제리 크런처 같은 인물도 깨닫고 있듯,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는 법’이다. 언제나 “업무일 뿐입니다!”를 외치지만 돌아서서 눈물 흘리는 로리 씨만 보더라도 그건 확실하다. 미스 프로스의 다음과 같은 발언도 같은 맥락에서 인상적이다.
“나는 아가씨가 열 살 때부터 데리고 살았어요. 아니, 아가씨가 나를 데리고 살았다는 게 정확하겠지요. 난 대가를 받았으니. 하지만 맹세코, 나에게 혼자 먹고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아가씨까지 먹여 살릴 여유가 있었다면 절대 대가를 받지 않았을 거예요.” (139)
여기에 덧붙여, 식민지조선이 낳은 걸출한 모더니스트 이상(李箱) 역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썼다는 사실을 알면 놀랄까?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다는 것만큼이나 허전한 일이다.”
4. 비밀이 허용되지 않는 도시 : 파리
‘가족이라는 금실’은 각자의 비밀—개인성(혹은 프라이버시)—이라는 금실 생산공방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물론 이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마구 뒤섞어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우리가 각자의 사적인 것을 누군가에게 밝힐 때 그 과정이 얼마나 섬세해야 하는지, 나름의 원칙을 어김없이 따라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공과 사가 마구잡이로 섞일 때 발생하는 문제는 다음에서 잘 드러난다.
이제 나리는 사적으로, 공적으로 자신에게 세속적인 골칫거리가 하나둘 불거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사적이며 공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조세 징수원 계급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 공적 재정 문제에 관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기에 그것을 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맡겨야 했던 것이다. 사적인 재정에 관해서도 조세 징수원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 조세 징수원은 부자였기 때문이다. 해가 갈수록 나리는 엄청난 사치와 소비를 반복하면서 점점 가난뱅이가 되어갔다. (152-153)
비밀과 개인성에 대한 존중이 ‘가족이라는 금실’을 만들어내는 생산공방 역할을 했다면, ‘나리’가 행한 공과 사의 뒤섞음은 나라를 망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나리는 자신의 사적 이해관계를 공적 업무에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러면서 민중들의 탄원은 개인적인 일이라며 무시해버린다. 이것은 민중들과 나리들 사이에 친밀함이 아니라 복수라는 네거티브적 감정이 급격히 증가하는 원인이 된다. 이 경우에는 나리 입장에서의 ‘사’만 존재하고 ‘공’은 없다.
그런가 하면, 혁명 이후의 파리는 반대로 ‘공’만 존재하고 ‘사’는 사라진 도시가 된다.
[...] 도시의 관문과 마을 세관마다 언제라도 발사할 태세를 갖춘 소총을 소지한 애국 시민단이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오가는 행인을 불러 세워 자세히 따져 묻고 서류를 훑어보며 명단에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한 뒤 퇴짜를 놓거나 통과시키고, 아니면 끌고 가서 구금했다. 그런 기준은 어디까지나 이제 막 출발한 ‘자유,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공화국은 하나요, 나눌 수 없다’라는 슬로건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환상이나 변덕스러운 판단에 따라 달라졌다. (353)
“무슨 법입니까, 내가 무슨 법을 위반했습니까?”
“네가 여기 온 후 새로운 법이 생겼다, 에브레몽드. 그리고 넌 그 법을 위반했다.” (360)
문제는 ‘공=법률’에 이렇다 할 원칙이나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디킨스가 적절히 비판하듯 프랑스 혁명의 이상은 “환상이나 변덕스러운 판단에 따라” 제멋대로 해석되고 적용된다. 더구나 주목할 점은, 민중들은 스스로 ‘공적 절차’에 따라, ‘법’에 따라 일을 행하고 형을 집행한다고 믿고 있다할지라도, 그 아래에는 사실상 ‘복수심’이라는 사적 감정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마네트 박사의 비밀 수기를 찾아내서 재판의 증거 자료(공적 자료)로 활용하는 장면 역시 의미심장하다. 이는 당시 디킨스가 인식한 런던과 파리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디킨스가 보기에 파리는 비밀과 개인성을 허용하지 않는 도시, 사적 감정과 사유 재산을 허용하지 않는 도시이며(“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는 문제 [...] 국유재산, 하나이며 나눌 수 없는 공화국”(403)이란 표현이 있다), 오로지 분노에 휩싸인 군중의 광기가 만들어내는 방향도 없고 목적도 없는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이 휨쓸리듯 결정되는 도시다.
5. 동정/연민(sympathy)
“우리가 이 아이처럼 어렸을 때, 아니, 그보다 훨씬 전에, 우리가 본 아내들과 어머니들이 한 번이라도 배려받은 적이 있었나? 그 아버지와 남편들은 감옥에 갇혀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도 제대로 못했지 않아? 우리가 평생 봐온 우리 언니들이나 그 아이들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에 걸려 비참하게 살면서 온갖 핍박과 멸시를 받지 않았던가? [...] 잘 생각해보라고! 아내이자 어머니가 겪는 고통이 지금 우리한테 그렇게 대단하게 보이겠어?” (385)
민중에게는 고대의 의심스러운 미덕을 흉내 내어 스스로 인민의 제단에 제물이 되고 희생하기를 바라는 광기어린 열망이 잠재해 있었다. 따라서 판사는 공화국의 훌륭한 의사에게, 가족에서 귀족 출신 사위를 아예 뿌리 뽑아 영웅 대접을 받고 딸을 과부로 만들고, 손녀를 고아로 만들어 성스러운 기쁨과 환희를 느끼라고 권유할 정도였다. 그 말에는 인간에 대한 동정이라곤 티끌만큼도 없고 오로지 흥분에 겨운 환호성과 애국심의 열기만 있을 뿐이었다. (477)
디킨스가 제시하고 있는 긍정적 가치는 ‘동정/연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역시 개인성을 토대로 형성되는 감정이다.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하나의 개인으로 볼 때 동정심은 생긴다. 계급이나 성별, 민족/국적을 근거로 ‘나’와 ‘너’를 이분법의 논리에 따라 폭력적으로 편가르기할 때 동정심은 싹틀 여지가 없다. 그저 상대가 ‘귀족계급’이냐 아니냐, 우리편이냐 아니냐 하는 것만 중요해지는 것이다.
물론 동정의 한계 역시 명확한 것이다. 누군가 고통을 호소하는 특정 개인을 동정심에 의거하여 도와준다고 해서 사회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또한 동정은 대개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에게 베푸는 형식—일방적인 거래의 형식—을 취한다. 우월한 자의 마음이 바뀌어 베풀기를 그만두면 어쩔 것인가? 열등한 자는 아무런 방도도 취할 수가 없다. 동정은 우월한 자가 누리는 호사이자 사치일 수 있다. … 마지막으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란 불가능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더 이야기해보기로 한다).
강렬한 고통, 그중에서도 특히 굶주림이나 질병과 같은 극심한 신체의 고통은 철저히 개인적인 경험에 속하기 때문에 내적 번민과 달리 공유되거나 재현되기 어렵다. 아담 스미스는, 우리의 육체가 다른 사람의 육체를 본뜨는 것보다도 우리의 상상이 그/그녀의 상상을 본뜨는 것이 훨씬 용이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실연을 당했다거나 야심이 좌절되었다든가 하는 경우가 최악의 신체적 고통보다 더 깊은 동정을 이끌어낸다고 말했다. 따라서 공유될 수 없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와 남의 경계를 허무는 동정과 위로가 아니라 나의 힘을 극대화하여 그것을 견디는 데서 찾는 것이다.
- 손유경, <고통과 동정>
‘가족’과 ‘비밀’, ‘개인’을 디킨스가 옹호하는 가치이자 특히 <두 도시 이야기>를 관통하는 키워드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런던은 이들이 존중되는 공간인 반면, 파리는 ‘귀족 나리’들의 폭압, 그리고 복수심에 찬 군중의 광기에 의해 그 가치들이 존중되지 못하는 공간이다. 이상의 표현을 빌려 ‘허전한’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사회를 지탱하는 ‘중심축’이 ‘중심 윤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후의 프랑스는 아니나다를까, 걸출한 영웅들을 중심축으로 삼아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 간다.
앞서 제시한 키워드들에 ‘거래’라는 단어를 추가해볼 수 있겠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읽을 소설들에서 또 다루게 될 것이지만, 재산과 정보의 ‘거래’가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텔슨 은행’을 디킨스가 어떤 식으로 묘사하고 있는지를 기억해둘 필요는 있을 것 같다.
템플 바 옆에 있는 텔슨 은행은 1780년 당시에도 이미 구식 건물이었다. 아주 작은 데다 지나치게 어둡고 흉측하고 불편했다. 작고 어둡고 흉측하고 불편한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은행 동업자들의 도덕적인 믿음은 더욱 구식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이런 특징이 유난하다는 점을 자랑스러워했고 오히려 불만이 적으면 그만큼 존경을 덜 받을 거라는 강한 확신에 불타올랐다. [...] // 이 동업자들은 자기 아들 중 누구든 텔슨 은행을 개축하겠다는 의견을 제기하면 상속권을 박탈해버릴 기세였다. 이런 점에서 은행은 국가와 아주 비슷했다. 영국에서는 오랫동안 반대가 극심해서 오히려 더욱 존중받아온 법률이나 관습을 개선하자고 제안하는 아들의 상속권을 박탈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79-80)
사실 당시에는 처형이 모든 직종이나 분야에서 유행했고, 텔슨 은행에서는 만병통치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죽음은 만물에 대한 자연요법인데, 법률 문제에서는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 따라서 그 시대의 더 큰 기업체나 동시대인들처럼 텔슨 은행도 많은 생명을 빼앗았다. 만약 시체를 개인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템플 바 위에 모두 매달아 놓으면 은행 일 층으로 들어오는 빛이 상당히 많이 차단되었을 것이다. (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