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가을이구나! 붉은 수수의 춤사위가 시작됐다.
비온 뒤 하늘은 쿡 찌르기만 해도 푸른 물이 주룩 흐를 것 같은 맑고
푸르다. 칙칙한 기분을 말끔히 씻어버린 일요일 아침, 서둘러 집을 나섰다. 행선지는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는다는 즉 법이 잘 지켜져
태평하다는 뜻인 '道不拾遺'의 고장 경북 청도다.
▲청도 장연사지
그런데 차를 타는 달리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밥은 챙겨 넣었나? 또 김치 담은 그릇도?'
점점 건망증이 심해진 나는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차를 세우고 준비물을
챙겨보았다. 역시 두어 가지 빼 먹고 온 것이다.
"엄마는 요즘 뭐든 잘 빠뜨리잖아요. 우린 짐작하고…."
"이런~"
어찌 애들 하는 얘기가 영 못마땅해 버럭 화를 내고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며
달렸다.
가지산 꼭대기지점에 다다를 무렵 아래를 보며 우린 탄성을 자아냈다.
비온 뒤 날씨가 쾌청한 관계로 사방 천지가 뚫려 보이지 않던 동네까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와~ 멀리 미포조선까지 보이네."
하늘에 구름 몇 점까지 보태 한 폭의 산수화가 연출된다. 좀 전
냉랭한 분위기는 어데 가고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기 시작이다. 왠지 청도여행도 순탄하게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우린 운문사 반대 방향으로 가서 운문댐 초입에 있는 운곡정사에
들렀다. 이 정사는 경북 민속자료 제90호로 취죽당 김응명(1593~1647)의 8대손 운곡 김몽노(1828~1884)의 생가이다. 건립은
1700년경으로 추정, 1910년 중수하고 1993년 운문댐 건설로 순지리 406번지에서 현 위치인 순지리 342-2번지로 옮겼다. 이곳에서는
황금빛에 물든 운문호의 운치를 제대로 느낄 수 있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곳에 거주하고
있는 후손.
건물의 배치가 사랑채부분과 제사를 지내는 정침 부분으로 구획하고
있는데, 집을 지키는 개 두 마리가 워낙 사나워 발을 들여놓지도 못하고 담 너머로 기웃거리기만 했다.
▲운곡정사 바로 앞에 운문댐이 내려다 보인다.
운문댐을 끼고 달리다 금천면 임당리 김씨고택을 찾았으나,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 박곡리에 있는 대비사로 갔다.
▲보물 제834호인 대비사 대웅전
대비사는 신라 진흥왕 18년(557년)에 신승이 호거산에 들어와 3년
후에 절을 짓기 시작. 7년 걸려 5갑사를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세웠는데, 서쪽의 소작갑사 또는 대비갑사라고 한 다섯 갑사
중의 하나로 신라 진평왕 22년(600년) 원광국사가 중창한 사찰이다.
▲대비사의 꽃 향연
보물 제834호로 유명한 대웅전이 시선을 끈다. 대웅전 건물은
16세기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중기의 건축양식으로 전체구성이 짜임새가 있고 공포도 건실하게 짜여있다.
▲여름이 끝나도 꽃은 피고..
이 사찰은 당초 박곡리 마을에 있었으나 고려시대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고 한다. 또 사원의 명칭을 대비사(大悲寺)라고 한 것은 불교의 대자대비라는 뜻으로 붙어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당시 신라 왕비가 수양차
이 절에 와서 오랫동안 지냈기 때문에 소작갑사를 대비갑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사찰 입구의 많은 부도가 고승 대덕 분들이 주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깻단
조심스레 사찰을 둘러보다 한켠에 수북히 쌓여있는 것에 눈을 돌렸다.
삼각받침대 모양으로 세워 놓은 깻단이다. 낟알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나른 흔적이 남아있다. 이제 여름이야기를 두두둑 쏟아내고
풍요로운 가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대비사 경내를 둘러보고 난 후, 짧은 다리를 건너 다음 행선지로
가려다 맑은 날의 아름다운 풍경에 젖어 차를 세웠다. 붉은 수수밭에 수수가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는게 보였다. 우리도 덩달아 바람에 몸을 맡기고
싶어졌다.
붉은 수수밭은 중국 배우 공리가 출연한 영화제목을 떠오르게
한다. 수수 몇 대만 항아리에 꽂아 놓아도 가을 분위기가 멋스럽게 연출될 만큼 수수는 우리의 감성을 자극한다.
모처럼 푸른 하늘과 붉은 수수를 본 탓인지 기분이 최상이다. 서둘러
매전면 동산리에 있는 처진 소나무자리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처진 소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95호로 금강송에 속한다. 수령은 약
200년이며 높이가 14m이다. 이 나무는 국도에서 약 8m 정도 떨어진 언덕 위에서 자라고 있다. 숲 속에서 자라던 소나무의 가지가 옆에서
자라는 나무에 눌려 처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가지에 눌렸을 때 그늘이 심하면 살아날 수 없는데, 가지를 늘어뜨리면서 살아남은 귀한
나무이기에 그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이 나무는 가지가 수양버들 같이 처진다고 유송이라고도 부른다. 10여 주가 같이 자라고
있었으나 한 그루만이 남아 한층 더 아름답게 보인다.
이곳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인 장연사지
삼층석탑으로 발길을 옮겼다. 청도는 아름다운 풍광과 맑은 공기를 자랑삼아도 좋은 고장이나, 이정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것이 다소
흠이다. 우린 문화재를 찾을 때마다 몇 번의 오류를 범해야 했고 차를 세워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했으니까.
장연사지는 그 중 가장 찾기 힘든 곳이다. 이곳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을 수 없도록 꼭꼭 숨겨두었다. 감나무에 폭 싸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삼층석탑을 주민의 안내로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장연사지는 마치 정글을 헤치고 찾은 보물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일대가
온통 감나무 천지다. 제법 높은 탑도 감나무에 가로 막혀 있으니, 초행자로서 찾기 힘든 유적지다.
장연사지 삼층석탑은 보물 제677호이다. 장연사지는 청도 산동지방을
흐르는 동창천을 바라보는 장연리 평지가람의 신라시대 큰 사찰이다. 미륵불을 모시는 흥경사라 전하기도 한다.
삼층 석탑들은 통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서탑은 도괴돼 하천에 버려진
것을 1980년 2월 현 위치로 복원, 동탑은 1984년 12월에 해체 복원하였다.
▲삼층석탑 주위는 감나무 천지다.
두 탑은 하층기단의 탱주가 하나로 줄어들고 옥개석의 층급 받침이 모두
넷으로 보아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에는 당간지주, 수조, 주초, 석등대좌 등이 있으며, 사지 산기슭에 있던 미륵불은 매전
초등학교에 옮겨져 있다.
이곳에서 슬슬 기운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자칫 여행에 지장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계속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지도를 펼쳐 약 20분 정도 소요되는 청도군청으로 가기로 정하고 차를
몰았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