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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생애] 제11부 국가개조 (40) -- <351>일서의 기자회견 .사진설명 : 영빈관 로비에서 기자회견중인 박정희 의장. 박정희는 예화를 들어 설명할 때도 일본 역사의 일화를 자주 인용하 곤 했다. 김종필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일본어와 일본역사에 대한 해박 한 지식엔 일본인들도 감탄하곤 했다. 김종필 정보부장이 박정희 - 이 케다 정상회담을 주선하기 위해서 이케다 수상을 만났을 때 이케다는 이렇게 묻더라고 한다. "대단히 실례지만 지금 연세가 몇이십니까?" "서른여섯입니다" "명치유신 때의 지사를 보는 것 같습니다. 아주 감복했습니다". 박정희도 방일중 일본 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5·16을 명치유신 에 비교하면서 주체세력들이 그때의 지사들처럼 국가개조에 생명을 걸 었다고 역설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전한다. 박 의장의 방일은 일본 자민당 정권의 실력자들과 인간적인 신뢰를 쌓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 가장큰 성과였다. 박정희 정권 18년간 계속된 한일협력체제의 한 요인 은 양국 지도자들 사이의 문화적, 정서적 유대감이었다. 박 의장은 오 찬이 끝나자 곧장 주일대표부로 갔다. 대표부 직원들과 재일동포대표들 이 모인 자리에서 박정희는 훈시를 했다. 그는 오전에 있었던 기시 수 상과의 정상회담에 언급하면서 "일본지도자들이 한일회담을 타결하기 위해서 성의와 노력을 다하겠다고 확약한 만큼 우리도 호양의 정신으로 인내심을 발휘하여 회담에 임하겠다. 그러나 낙관도 비관도 금물이다" 라고했다. 영빈관으로 돌아온 박정희 의장은 아래층 로비에서 1백30여명의 기 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가졌다. 당시 일본에 상주하던 조선 일보 특파원 김윤환(현 한나라당 의원), 동아일보 이만섭(전 국회의장), 동양통신 한종우(전 코리아 헤랄드 사장, 현 성곡언론재단 이사장)기자 도 참석했다. 첫 질문을 던진 것은 이만섭 기자였다. 그는 5·16 혁명 직후 윤보선대통령의 '조기 민정 이양 희망' 발언을 보도했다가 구속되 어 한 달만에 풀려난 뒤 도쿄 특파원으로 와 있었다. 이만섭은 박정희 의장을 도와주기 위해서 일부러 선수를 쳤다고 한다. "외국 기자들이 대부분인데 그래도 한국 기자가 질문을 하면 박 의 장이 용기를 얻을 것이라 생각했죠. 외신기자들이 궁금해 하는 것을 박 의장이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도록 질문 내용을 생각하여 던졌습니 다. 박 의장은 제 의도를 잘 이해못했는지 표정이 썩 좋지 않았습니다. 답변도 제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고요. 아무래도 군인이라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만섭 기자는 세 가지 질문을 했다. "첫째, 대일청구권에 관하여 이케다 수상이 구체적이 숫자를 제시했 는가. 없었다면 의장을 초청해놓고 제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둘 째, 한국정부는 지금까지 대일청구권 문제와 한국에 대한 일본의 경제 협력문제를 분리했는데 그 정책엔 변동이 없는가. 셋째, 금번과 같은 회담이 장래에 도쿄나 서울에서 다시 있을 것인가". 박정희 의장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첫째 질문에 대하여, 대일청구권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토의가 없었 다. 그 이유는 아직 실무자 회의에서 진전이 없었으므로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인 숫자를 제시하지 않는 것이 서로 좋다고 느꼈다. 둘째 질문에 대하여, 변함 없다. 셋째 질문에 대하여, 현 단계에서는 말할 수 없다". 박정희 의장은 다른 질문에 답변하는 가운데 "일본이 우리의 대일청 구권에 성의를 보인다면 우리는 평화선 문제에 신축성을 보이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한일회담에서 주고받을 것에 대하여 큰 줄기를 정 리해준 말이었다. 박 의장은 한일회담의 연내타결 가능성을 묻는 질문 에 대해서 "앞으로 회담의 진행상황을 보아야 말할 수 있다"고 답했다. 박 의장은 또 "이케다 수상과의 단독회담에선 한일문제, 아시아 문 제, 세계정세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했는데 대부분의 문제에서 수상과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하면서 "대일청구권은 일본에 대한 전쟁 배상 요구가 아니다"고 했다. 박 의장은 한 서양 기자가 경제원조를 받아들 이는 한국의 자세에 대해서 질문하자 세일즈맨처럼 열심히 대답했다. "한국은 장기 경제개발계획을 이미 만들었고 외국원조와 차관을 효 율적으로 받아 쓸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국내 자원을 최대 한도로 이용하여 경제개발 계획을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었습니 다. 이것들이 우리가 원조와 차관을 요구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생각합 니다". UPI의 찰스 스미스 기자가 "국내 정세가 안정되었으니 계엄령을 해 제할 의도는 없는가"라고 물었다. "경찰이 군대의 힘을 빌지 않고 치안을 유지할 수 있을 때 경비계엄 을 해제할 것입니다". 약40분간의 기자회견에서 박정희는 짧게 군더더기 없는 답변을 했 다. 이날 저녁 박정희는 정일영 한일회담 대표에게 오후의 기자회견을 거론하면서 자신에게 맨 처음 질문한 기자가 누구냐고 묻더니 "그 놈들, 고국에서도 말썽이더니 여기서도 속을 썩이는구먼"이라고 불평하더란 것이다. 오후 4시40분 영빈관으로 영친왕(고종의 셋째 아들) 이은의 일본 황 족출신 부인 방자여사가 찾아와 박 의장을 만났다. 이은은 뇌혈전증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었다. 방자 여사와 박 의장의 만남을 주선한 것은 당시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이던 원로 언론인 김을한이었다. |
[박정희 생애] 제11부 국가개조 (41) -- <352>박정희와 영친왕 .사진설명 : 1963년 봄, 이방자 여사의 정원에서 촬영한 사진. 왼쪽부터 방자 여사의 친구인 일본 귀족 부인, 방자 여사, 왕세자 이구, 최영택 참사관. 광복 후 영친왕과 이승만 정부 사이엔 악연이 생겼다. 영친왕의 저택은 도쿄의 노른자위 땅인 아카사카에 있었다(지금의 프린스 호텔 자리). 대지가 약2만 평에 건평이 500평이나 되었다. 주일대표부가 생길 때 우리 정부에서는 영친왕의 저택을 대표부 건물로 인수하려고 했 다. 영친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의 나는 재산이라고는 이 집 한 채밖에 없고 해방 후 여러 해 동안 수입이 없이 살아왔으므로 빚도 많아서 그대로 줄 수는 없 으니 꼭이 집이 필요하다면 시가보다 좀 싸게 사 가시오.". 우리 정부와 영친왕의 교섭은 합의에 이르지 못해 주일 대표부는 아자부에 자리잡게 되고 영친왕도 큰 손해를 보고 저택을 일본인에게 넘기게 되었다. 이런 분규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영친왕을 비애국 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957년 영친왕은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으로 와 있던 김을한을 불러 부탁을 했다. 아들 이구가 미국 MIT공대 건축 과를 졸업하는데 대학 총장이 영친왕 부부가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보내왔다는 것이다. 영친왕은 한국여권을 좀 받게 해달라고 했다. 김 을한 기자는 쉽게 생각하고 주일대표부에 이 건을 이야기했더니 의외 로 "경무대나 외무부에서 결정할 사항이다"는 답이 돌아왔다. 의분을 느낀 김을한은 서울에 와서 변영태 외무장관을 만났다. 소신 있는 장 관으로 유명한 변영태도 "이승만 대통령이 영친왕을 못마땅하게 생각 하니…"라면서 난색을 보였다. 김을한은 자유당 정권의 제2인자인 이 기붕 국회의장을 찾아가 대통령께 잘 말씀드려달라고 부탁했다. 이의 장도 "내가 여쭌다고 해도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다"면서 거절했다. 김을한 기자는 성과 없이 일본으로 돌아가 영친왕의 집을 찾아갔 다. 어떤 할머니가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영친왕 부부가 이미 미국으 로 떠났다고 하는 게 아닌가. 김을한은 궁내청으로 가서 우사미 장관 을 만났다. 장관은 영친왕이 일본여권이라도 내달라고 졸라 영친왕과 방자여 사에게 일본 여권을 내주었는데 그 과정에서 영친왕이 일본국적을 갖 게 되었다고 하는 게 아닌가. 김을한은 영친왕이 야속하게 생각되었 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궁지로 몰아넣은 이승만 대통령이 더 원망스러 웠다. 미국에서 돌아온 영친왕에게 김을한은 싫은 말씀을 드렸다. "아무리 경무대의 처사가 나쁘더라도 전하는 체통을 지키셔야 할 것이 아니오니까. 나라가 있었으면 28대 왕이 되셨을 전하가 일본인 으로 귀화하였다는 것을 알면 태조대왕 이하 열성조의 임금들이 얼마 나 슬퍼하겠습니까.". 영친왕도 자신의 실수를 알고는 국적을 도로 고쳐달라고 하는 것 이었다. 김을한은 다시 분주하게 일본의 관공서로 뛰어보았지만 거의 불가 능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영친왕이 환국하는 것이 해결책 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 정부가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장면 총리는 '지나간 날 본국 정부에서 잘못한것을 다 용서하시고 되도록 속히 환 국하시와 신생 공화국을 위하여 지도와 편달을 해주십시오'란 요지의 편지도 보내왔다. 1961년 5월 영친왕 이은은 앓고 있던 뇌혈전증이 재발, 입원했 다. 장면정부의 퇴장과 함께 추진되던 환국도 중단되었다. 이런 때에 도쿄에 온 박정희의장을 방자 여사가 꼭 만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한 김을한은 이동환 주일 공사를 통해서 면담신청을 냈다. 박정희 의장 은 선뜻 면담 요청을 받아들여 11월 12일 오후4시에 영빈관으로 와달 라고 했다. 김을한이 방자 여사를 안내하여 영빈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2층 귀빈실로 안내되었다. 박정희 의장이 절도 있는 걸음걸이 로 들어오더니 방자 여사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김을한에게도 담 배를 권한 박정희는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다. 방자 여사는 모기만한 소리로 "왕전하를 입원시켜주셔서 고맙습 니다"라고 인사했다. 영친왕이 졸도했다는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주 일공사를 통해서 즉시 입원시켜드렸던 것이다. "뭘요, 당연히 정부가 할 일을 한 것뿐인데 너무 어렵게 생각하 지 마십시오.". 김을한은 영친왕의 국적이 일본으로 되어버린 사연을 설명했다.신 중하게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박 의장이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루 속히 국적을 한국적으로 환원시키고, 본국으로 모셔다가 여 생을 조국에서 보내시도록 해주시고, 생계비를 충분히 부담해주시고, 덕혜옹주(고종의 막내 딸)도 빨리 귀국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박 의장은 "덕혜옹주는 누구인가요?"라고 물었다. 김을한이 설명 하자 박정희는 "그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일이다"면서 김을한의 부탁을 모두 들어주었다. 요컨대 영친왕의 입원비는 정부에서 책임을 질 것 이고 병환에 차도가 있는대로 귀국하면 환영할 것이며 국적문제는 법 무부에 지시해서 해결할 것이고 덕혜옹주의 귀국도 언제든지 환영한 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박 의장은 아침에 이케다 수상을 만났을 때 "왜 이왕전하를 좀 더 잘 보살펴드리지 못했는냐"고 농담삼아 꾸짖었 더니 머리를 긁적이면서 "참 미안합니다"라고 하더란 이야기를 전했 다. 10여년간 풀지 못했던 문제를 단숨에 다 해결하고 돌아가는 차중 에서 방자 여사는 김을한에게 "처음에는 젊은 군인이라 어떨까 마음 이 무거웠는데 막상 만나보니…"라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박의장을 칭찬하더란 것이다. |
[박정희 생애] 제11부 국가개조 (42) -- <353>앵커리지 .사진설명 : 조디 먼디 장군의 안내로 앵커리지 공항 전시장에서 박제된 백곰을 구경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신동식(67세,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 역임, 현재 한국 해사산업연 구소이사장)은 서울대학교 조선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는 국내 에선 조선기술을 펼 수 있는 무대가 없음을 알고는 스웨덴으로 유학길 에 올랐다가 영국 로이드 선급협회의 국제선박 검사관이 되었다. 이 무 렵 신동식은 일본에 주재하면서 일본에서 건조되는 선박에 합격 판정을 내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날 아침 주일대표부에서 신동식에게 영빈 관으로 나오라는 전화를 걸어왔다. 신동식은 박정희 의장에게 소개되었 다. 박정희가 가운데 앉고 그 주위에 수행원들이 줄지어 앉아 있는 방 에 들어갔다. 박 의장은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청년 신동식에게서 큰 감명을 받은 듯 일어나서 악수를 청했다. 한 군복입은 수행원이 신동식에게 다가오더니 "당신이 신동식이요? 한국에 가서 같이 일합시다. 우리하고 돌아갈 준비를 하시오"라고 명령 조로 말했다. 신동식은 이 말을 들으니 울화가 치밀었다. 유학차 출국 할 때 여권을 발급받는 것이 형무소를 출감할 때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 이 떠올랐던 것이다. 신동식은 칵테일을 한 잔 마신 기운을 빌어 울화 를 쏟아부었다. "가슴에 훈장을 달았다고 이렇게 애국을 강요해도 되는 겁니까. 제 가 오늘 이렇게 국제적으로 성공했다고 조국으로 돌아가자고 하시는데, 제가 출국할 때는 여권을 순순히 발급해주셨습니까? 제가 외국에서 고 생하면서 공부할 때 언제 장학금이라도 대주신 적이 있습니까?". 박정희 의장이 나서서 신동식을 진정시킨 다음에 수행원들을 소개시 켜주었다. "이렇게는 워싱턴으로, 이렇게는 서독으로 갑니다. 중공업 발전을 위해서 차관을 구하러 가는 길입니다. 여러 가지 구체적인 계획은 있지 만 바다와 관련한 조선-해양분야가 미흡합니다.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도움을 주면 좋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술김에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조국에 대 하여 좋은 추억이 별로 없습니다. 저는 서울대학교 조선공학과를 졸업 할 때 해무청장 상을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시상식 날 총무과장이 술을 마시고 출근을하지 않는 바람에 시상식은 취소되고 우편으로 상장을 받 은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유학차 조국을 떠날 때도 가족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도 진심으로 저의 장도를 축하해주지 않고 오히려 질시의 눈길만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일분일초도 조국을 잊어본 적이 없 습니다. 지금 저의 서명이 없으면 일본에서 건조된 선박의 인도가 불가 능할 정도의 위치에 있습니다만 무조건 애국을 강요하진 마십시오. 제 가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일본은 우리에게 좋은 교과서입니다. 제가 북해도에서 시모노세키까지 일본의 조선공업시설과 공단을 안내해드릴 테니 꼭 한번 시찰하고 가시죠.". 이 말이 떨어지자 한 수행원이 "젊은 사람이 건방지군. 네가 뭔데 감히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라고 했다. 박정희 의장은 또 그 말을 제지하더니 이영진 대한조선공사 사장을 향해서 "일정을 며칠 연기하시 고 이 청년과 함께 둘러보고 가시죠"라고 지시했다. 신동식은 속으로 '나같은 사람을 이렇게 감싸주는 이 분은 보통사람이 아니구나'하는 생 각을 했다고 한다. 다음날 신동식은 일행을 안내하여 일본의 여러 조선 소들을 돌아다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신동식은 로이드 선급협회에 휴직계를 내고 귀국하여 경제기획원장관 고문으로서 우리 나라 조선공 업 발전의 터전을 닦는 역할을 맡게 된다. 박정희 의장 일행은 이날(11월12일)밤 하네다 공항에서 노스 웨스트 여객기에 올랐다. 30시간의 바쁜 방일일정이 끝난 것이다. 박정희와 수 행원들은 일등실 전부를 전세내었다. 여객기는 알라스카 앵커리지를 향 해서 기수를 돌리고 태평양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날 한국은행은 통계를 잡을 수 있는 세계40개국의 국민소득을 비 교분석한 자료를 발표했다. 1인당 국민소득(1959년 기준)에서 세계1위 는 미국으로 2,250달러, 2위는 캐나다(1,521달러), 이어서 스웨덴(1,387 달러), 스위스(1,299달러). 영국은 1,023달러로 여덟번째, 서독은 833 달러, 일본은 1인당 국민소득이 299달러로서 세계랭킹 25위로 나타났다. 한국은 끝에서 다섯번째인 1인당 78달러였다. 타이, 콜롬비아, 필리 핀, 그리스, 터키, 브라질, 남아연방은 1인당 100∼400달러로서 한국보 다도 훨씬 앞서 있었다. 인구밀도는 한국이 세계 제4위인데 인구증가율 은 연 2.9%로서 세계 제6위라고 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축에 든 대한민국의 짐을 진 44세의 깡마른 지도자가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나라의 지도자를 만나러 가는 길,박정희의 마음은 착잡했을 것이다. 전용기도 없어 미국 여객기의 한 구석을 빌어 탄 혁명정부의 대표들은 노스 웨스트 항공사에서 일부러 신경을 써서 내어놓은 한식 저녁을 먹지 못했다. 영빈관에서 만찬을 한 지 몇시간밖에 흐르지 않아 식욕이 동할 리 없었다. 박정희는 한일 정 상회담을 보도한 일본 신문들을 일별하고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일 부 변경선을 지난 노스 웨스트 여객기가 앵커리지에 도착하니 12일 오 전 9시30분이었다. 알라스카 사령부 사령관인 조지 먼디 공군중장이 출 영했다. 먼디 중장은 박 의장에게 "이 공항이 민간용이기 때문에 군의 장대의 환영의식을 베풀 수 없어서 죄송하다"고 사과부터 했다. 먼디는 "다음 기착지로 떠나실 때까지 시간이 있으니 기자회견을 하시든지 시 내 구경을 하시든지 택일하시라"고 했다. 박 의장은 외국을 방문할 경 우 그 나라의 정상을 만날 때까지는 기자들에게 아무 말도 안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시내관광을 선택했다. [박정희 생애] 제11부 국가개조 (43) -- <354>시카고 유학생들 .한 미국인 기자가 "군사정부에선 교통질서위반자들까지도 엄벌에 처하 고 있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다. 박정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모범답변을 했다. "지켜져야 하는 것이 규칙이다. 범칙자가 처벌되어야 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이다. 교통규칙은 혁명 전에도 있었지만 지켜지지 않 았다. 우리 정부는 이 규칙을 지켜지도록 만들고 있는 것일 뿐 중벌설은 거짓이다.". 오후 5시50분 노스 웨스트 여객기는 시애틀 공항을 출발, 이날 밤 11 시에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도착했다. 미 제5공군 사령관, 시카고 시장대 리 이외에 정일권주미대사, 김재춘선발대장을 비롯한 백여명의 재미동포 들이 영접을 나왔다. 박정희 일행이 시카고 시내로 향해서 달릴 때 우리 교민들도 차를 몰고 차량행렬을 따랐다. 고속도로엔 비가 내려 미끄러웠 다. 교민들이 탄 승용차 다섯 대가 연쇄 충돌사고를 일으켜 6명이 부상하 는 사고가 일어났다. 숙소인 드레이크 호텔에 도착하여 이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수행원을 병원으로 보내 위문케 했다. 다음날 아침 드레이크 호텔에선 시카고에서 유학중인 학생들과 교민들 이 주최한 박정희 의장 환영 조찬회가 열렸다. 지금은 약15만 명의 교민 들이 살고 있는 시카고이지만 당시엔 한인회를 결성할 정도의 숫자도 되 지 않았다. 시카고 학생회(회장 김준엽)는 일부 미국 언론이 박정희 의장 의 방미에 대해서 비판적인 기사를 싣자 울분을 느끼고는 박의장에게 초 청장을 냈던 것이다. 시카고 학생회 총무는 노스 웨스턴 대학원 재료공학 과 1학년생 천성순이었다. 한국 과학기술원 원장을 거쳐 지금은 대전산업 대학교 총장으로 있는 천성순(63세)은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유학생들은 박정희 장군이 쿠데타로 집권했다는 데 대한 문제의 식을 별로 느끼지 않고 있었습니다. 조국이 오직 강하고 부자 나라가 되 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미국 텔레비전에 나오는 한국은 고아들이 손을 내미는 장면과 구호기관에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 일색이었습니다.우 리는 또 인종차별을 무수히 당하면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길을 걷 다가 버스에 탄 백인학생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 모욕을 당한 적도 있었 습니다. 그래서 군사정권이 들어서서 과감한 개혁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 식을 듣고는 자랑스러웠습니다. 박 의장을 만나보니 추진력이 강해보이고 강직한 인상이 꼭 잘 사는 나라를 만들 분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날 조찬 환영식에 참석한 박정희 의장은 대단히 감동했다고 한다.훈 시를 할 때도 미리 준비해간 연설문을 밀어버리고 즉석 연설을 했다. "우리는 두 번의 혁명을 치렀습니다. 환자에 비교하면 두 번 수술을 한 셈입니다. 4·19수술은 경과가 좋지 않아 5·16으로 재수술을 받은 것 입니다. 다행히 수술 결과가 양호하여 건강을 회복해가고 있습니다. 수백 년을 내려온 고질을 뿌리채 뽑아버리는 개혁을 단행한다는 것은 우리 혁 명세력의 과업일 뿐 아니라 민족의 과업입니다. 만약 이번 혁명이 실패하 면 다음에 올 것은 공산혁명밖에 없습니다.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할 때 우리나라의 경제재건에 관해서 토의할 작정입니다. 경제혁명 없이는 민주 주의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군인입니다. 정치는 모르지만 나라가 망하는 것은 좌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이 선진기 술과 학문을 습득하여 귀국한 후 국가재건에 공헌하리라고 확신합니다.". 학생회 총무 천성순은 박의장에게 의사봉을 선물로 전달했다. 천성순 에 따르면 '가난한 유학생들이라 돈을 적게 들이고 의미가 있는 선물을 생각하다가 박 의장이 국가개조를 하는 데 모든 결정을 이 의사봉으로 땅 땅 잘 처리하라는 뜻에서 의사봉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천성순은 그 뒤 유타 대학 교수로 있다가 해외두뇌 유치의 일환으로 국내에 들어와 한국 과학기술원 부원장, 원장 등 요직을 맡게 된다. 박정희 의장은 이날 오전에 리처드 J 데일리 시장을 방문했다. 시장 실에서 환담하는데 미국 기자들이 몰려와 북새통을 이루었다. 기자들에 대한 거의 생래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박정희는 미국에 온 후 국내에서 는 경험할수 없었던 무질서한 취재경쟁에 노출되었다. 박정희는 데일리 시장에게 "신문기자들은 어딜 가나 똑 같군요"라고 농을 했다. 이날 시카 고 시장은 박의장에게 군의장대 사열을 받도록 해주고 명예시민증도 증 정했다. 귀국한 뒤 명예시민증을 살펴보니 이름이 엉뚱한 사람으로 되어 있어 되돌려주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박의장 일행의 시카고에서 워싱턴까 지의 비행에 미정부요인들이 이용하는 쌍발프로펠러 전용기 '컨베어'기를 제공했다. 객실은 두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뒷쪽은 라운지처럼 꾸민 귀빈실로서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박 의장은 여기서 보좌관들을 불 러 내일 있을 회담에 대비한 토의를 하고 준비한 문서를 읽었다. 앞 구역에는 미 국무부 한국과장 도널드 S 맥도널드와 미 대통령 통역 관폴 클라인 박사, 그리고 박 의장 담당 미국 경호원이 타고 있었다. 컨베어기는 시카고 공항을 이륙한 지 네 시간만인 13일 오후 4시에 워 싱턴 내셔널 에어포트 군용 터미널에 도착했다. 미 육군의장병이 트럼펫 을 불어 국빈의 도착을 알리는 가운데 박 의장이 내리자 키가 큰 린든 B 존슨 부통령이 맨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박정희가 아내를 동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중나온 사람들도 혼자였는데 딘 러스크 국무장관만은 그 8일 전 방한할 때 데리고 갔던 아내를 동반했다.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있 을 때 유엔군 사령관이던 라이만 L 렘니처 대장은 당시 합참의장이었다. 그는 5월16일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이 박정희 소장 일파에 대한 강경진 압 자세를 보일 때 이를 누그러뜨리려고 했던 이였다. 그도 박정희 의장 을 반갑게 맞았다. [박정희 생애] 제11부 국가개조 (44) -- <355># 미국측의 입장 #사진설명 : 워싱턴 공항에서 박 의장을 영접하는 존슨 부통령(맨오른쪽). 박 의장 뒤로 러스크 국무장관, 버거 주한 미국대사, 램니처 합동참모본부 의장이 보인다. 박의장은 전속부관, 경호관, 주치의와 함께 맥킬 테라스 2838번지 주미대사관저에 들었고 나머지 수행원들은 이웃한 쇼어햄 호텔에 투숙 했다. 박 의장은 이날(11월13일) 오후에는 공식 행사가 없어 대사관저 에서 머물렀다. 그는 5·16주체세력인 육사8기출신 김동환참사관으로 부터 워싱턴 일정 전체에 대한 보고를 들었고 저녁은 정일권 대사가 베푼 만찬에 수행원들과 함께 참석하여 한식을 먹었다. 박정희 의장이 워싱턴에 도착한 날 백악관 안보 보좌관 월터 W 로 스토우박사는 다음날 있을 한미 정상회담에 대비한 요약보고서를 메모 형식으로 작성하여 케네디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박 의장의 방미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결과중 의 하나는 한국인과 세계인들에게 미국이 장기적으로 한국의 장래를 낙관하고 있음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단된 조국의 장래에 대해서 절망하는 버릇이 있는 한국 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한국인들은 어떻게 하면 경제적 자립을 달성 할지 혼란에 빠져 있다. 특히 학생들은 그들이 이승만 정권을 전복시 키는데 성공한 직후 조국이 그렇게도 빨리 권위주의 정부로 돌아가야 했다는 데 대해서 크게 실망하고 있다. -이것은 또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현재의 한국정권이 이승만식으로 복귀하고 있다고 보는 경향이기 때문이다.이 들은 미국이 처음에는 쿠데타에 반대하다가 이제 와서는 쿠데타의 지 도자를 정중하게맞아들이는 데 혼란을 겪고 있다. 이상의 문제점들을 감안하여 우리는 공사석에서 다음 두 가지 점 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a. 한국 정부는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부정 부패 등 고질적 문제 들을 헌신적으로 고쳐나가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정부는 문민정부로 복귀하기 위한 과도단계에 있는 정부이다. b. 한국은 경제개발에 유리한 건전한 기초를 갖고 있으며 우리는 경제개발의 조속한 진전을 위해 모든 수단을 다해 지원할 것이다. 군사 정부는 우리의 압력을 받고 1963년 4월에 헌법을 개정하고 5월에 선거를 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준비작업은 하지 않고 있다. 박의장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해주었으면 함. a. 헌법은 어떻게 고칠 것인가. b. 1963년 선거의 출마자격에 대한 제한이 있을 것인가. c. 선거 전에 정치활동을 허용하여 정당을 정상적으로 기능하도록 할 것인가. d. 선거는 공정하게 실시될 것인가. 한국측은 공동성명서에 1963년에는 문민정부로 복귀할 것이란 약 속의 재천명을 포함시키자고 제의했다. 이런 재천명은 최대한 확고한 표현이라야 할 것이며 각하의 질문에 따라 새로운 사항이 나타난다면 공동성명서에 이를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예컨대 현정부가 기본권에 대한 제한을 완화할 것임을 내비치면 성명서에 이를 반영할 수 있다. 지난 6월 한국문제 대책반은 각하에게 군사안보에 너무 치중하고 있는 비생산적인 대한원조정책을 수정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발 전을 위한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건의한 바 있다. 한국 정부가 자 조적인 조치를 취한다면 미국은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적극적으로 지 원할 용의가 있음을 명백히 하고 특히 5개년 전원개발계획에 외부 지 원을 제공할 것임을 약속한다. 한국문제 대책반이 여러 가지 건의를 올린이후 한국에 대한 무상지원은 당초의 1억2천만 달러에서 9천만 달 러로 감축되었고(작년엔 1억8천6백만 달러) PL 480 식량원조도 약간 감소했다. 대책반이 지적한 모든 문제점들에 대해서 현재의 정부가 정 력적으로 달려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원조의 총액은 줄었다. 한 국측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작년 원조 가운데 2천만 달러는 일회성인 특별지원이었고 올해 회계연도 예 산에 4천만 달러가 남아 있는데 이것을 개발차관으로 전용할 수도 있 을 것이라고. 한국정부는 우리가 재촉한 개혁들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도 원조가 삭감당한 것에 대해서 실망감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현재 무상원조에서 개발차관으로 중점을 전환하는 단계에 있다. 한국처럼 외환보유고의 90%와 정부예산의 큰 부분을 우리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나라에서 이런 전환을 너무 서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생 긴다. 주한미국대사와 유솜(USOM=대한원조기구)국장은 대한 원조 액수 에 이견을 제시하지 않는 대신에 다음과 같은 건의를 했다. a.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정책(편집자 주=미국원조자금으 로는 미국물자를 구입해야 한다는 원칙)을 비료구입에 대해서만은 예 외로 해줄 것. b. 미국의 대한군사원조 자금으로 구입해온 물자를 점차적으로 한 국군의 예산으로 구입해야 한다는 정책을 보류해줄 것. c. 한국군이 필요한 물자를 군사원조자금으로 한국내에서 해외구 매 형태로 구입하도록 해줄 것. 당초의 지원예산규모인 1억2천만 달러수준을 복원하든지 위에서 건의한 것에 대해서 조치를 취하든지 해주었으면 한다. 군사지원에서 경제지원으로 서서히 중점을 이동하는 문제에 대해 서 한국측과 토의를 시작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된 다. 한국군에 대한 군사원조 액수를 약간 삭감하고 경제원조로 전환 하는 시험적 조치를 취해볼 것을 건의한다. 유엔의 기치 아래서 미군 2개 사단이 비무장 지대에 배치되어 있는 한국보다도 적의 침략에 대 한 억제력을 완벽하게 확보하고 있는 곳은 이 세계 어디에도 없다.진 짜 위협은 한국의 국내문제이며 이는 경제개발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 다. 공동성명서에는 한국의 경제개발에 대한최대한의 지원 의사를 명 백히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