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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회 산행일지 : 소요산과 감악산 그리고 마니산까지
(경기도 동두천, 파주시, 강화읍)
일시 : 2007년 7월 15-17(일-화)
날씨 : 흐림, 장맛비, 갬
2박산행은 등고선 창립이래 처음이다. 지난 달 계획하였었지만 한 달을 미루어 비록 장마 중이지만 일요일 오후 도원동에 모였으니 桃園決意라고 봐도 되는지 모르겠다. 총무는 멀리 간다고 모친께서 챙겨주신 삼계탕을 들고 온다고 아주 조금 늦었다. 김이돌 회원의 차로 성서 금도현 회원의 아파트로 가는데 앞차 뒷유리에 귀여운 협박으로 “까칠한 어른이 타고 있어요”라고 붙어 있다. 5시 10분 소요산을 향해 출발이다. 애초에는 경기도에서 가장 높은 화악산과 명지산 두 곳을 2박으로 다녀오려고 하였으나 장마기간이고 대구로부터는 교통이 오히려 나쁘고 다소 낮지만 최북단의 소요산, 감악산을 하루에 그리고 역시 교통이 먼 거리의 강화도 마니산을 하루에 걸쳐 다녀오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계획대로라면 하룻길로 다녀오기에 다소 부담스러운 세 곳의 100명산을 이번 2박산행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뒤늦게 산행을 눈치 챈 김주봉 장로님이 전화가 왔었으나 이미 차는 출발하고 있었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달리며 총무가 싸온 찐감자를 2개씩 나누며 우선 배고픔을 감추고 빨리 소요산에 도착하여 밥을 해먹기로 한다.
충주휴게소에 들렀다가 호법JC에서 갈등을 하다가 중부선을 탔는데 건너편의 제2중부선의 차들이 다소 빨리 빠진다. 아무튼 의정부에서부터도 다소 차들이 밀렸지만 쉬지 않고 달려와 9시10분경 소요산에 도착하였으나 민박집이 없다. 식당에 들러 2층 방을 흥정했으나 50,000원을 달라고 하여 다시 조금 아래의 백운장에서 35,000원을 30,000원으로 깎아 2층 방으로 들었다.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우리의 뒤통수로 “방에서 밥을 해먹지 말라”는 주인 아주머니의 소리에 소심한 순태형님은 내내 마음이 걸렸던 모양이다. 총무가 식단을 준비하였지만 금도현이 찬거리를 많이 준비해 온 덕분에 밥과 함께 된장찌개와 김치, 김, 가죽나물 절임 등으로 늦은 저녁을 맛있게 먹었지만 아시안 컵 축구예선 2차전 바레인전에서는 2:1로 역전패하여 울화통을 터지게 만들었다. 식후 잠간의 산책을 즐기고 얘기를 나누다 12시 30분 경 잠에 든다. 밤사이에 비는 퍼붓다가 그치기를 반복한다.
1. 소요산
6시10분에 일어났다. 햇반에다 김과 김치만 준비하여 아침을 먹고 7시 20분 여관을 나선다. 먼저 소요산이다. 이른 시간이어서 매표소 앞에다 주차를 하고 입장료도 공짜이다, 날씨는 습기를 잔뜩 머금었고 길은 촉촉이 젖어있다. 원효폭포를 왼편으로 돌아 곧 자재암이다.
신라 무열왕 1년 654년에 원효가 창건하였다는 自在庵은 등산로에 연해 있어 따로 발품을 팔지 않더라도 돌아볼 수 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 얘기들이 전해지는 곳, 신라의 석학 설총이 자란 곳 등의 옛이야기도 있고 우측의 옥류폭포, 그리고 바위아래에 들어선 나한전도 볼 만하다. 자재암을 지나면 약 20분 이상 경사가 심한 돌산을 올라야 한다. 우측의 골짜기도 사뭇 깊어 보인다. 자재암에서 700여미터, 30분 정도 땀을 흐리면 하백운대에 이른다. 이제부터는 거의 능선길이다. 다시 해발 510미터 높이의 중백운대는 400미터 거리. 구름이 능선을 넘어온다. 해발 559미터의 상백운대까지는 다시 500미터, 상백운대 이정표를 만나면 곧바로 나한대 방향으로 직진하여야 한다. 이정표 우측의 상백운대 봉우리로 가면 아래로 곧바로 내려가는 비교적 널찍한 길이 보이는데 이 길은 선녀탕을 경유하여 하산하는 길이며 조금 더 가면 길이 가파르게 낭떠러지이고 험하다. 김생곤 총무가 혼자서 좀 더 내려가 보더니 아닌 것 같다기에 다시 상백운대까지 뒤돌아왔다.
상백운대에서 칼바위에 이르는 능선에는 바람방향으로 바위들이 날이 서있고 군데군데 거북 등딱지같은 굵은 소나무들이 바위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용틀임하고 있다. 마침 능선 좌측의 구름이 말끔히 걷히면서 전망도 좋다. 나한대(571m)로 오르는 길은 다시 오르막이다. 300미터를 더 가서 10시 정각 의상대, 소요산의 정상(587m)에 이른다. 짙은 구름이 덮고 있지만 우리 산행의 들머리도 선명하고 동두천시내도 깨끗하게 보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총성과 포성이 계곡을 따라 길게 울린다. 하산 길은 공주봉 방향으로 900여 미터를 간 후 삼거리에서 일주문과 샘터 방향으로 잡았다. 삼거리에서 샘터까지는 급경사이다. 샘터에서 생수 한잔을 들이키고 일주문을 지나 11시에 하산을 완료한다. 유명산보다는 나은 듯하지만 소요산(逍遙散)이 경기의 소금강이라고는 하나 100대 명산으로는 조금 달리는 느낌이다.
이른 시간에 산행을 시작한 탓도 있지만 규모가 크지 않은 산이라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다. 좀 이른 시간이지만 소요산 계곡(계곡이라 하기엔 좀 뭣하고 보통의 산 아래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시내 정도)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하고 자리를 잡았다. 라면을 5개나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 일어서니 커다란 현수막에 “관광지 불법행위 금지”라고 쓰여 있고 그 아래 칸에는 불법행위들의 예로 취사행위가 있다.
11시 45분 네비에 파주군 적성면 감악산을 입력하고 17.4km의 길을 출발한다. 소요산에서 나와 3번 국도로 3km 정도 남행하여 마트에서 장보고 아이스크림 하나씩 먹고 우회전하여 양주방면으로 길을 잡았다. 이제 비가 내린다. 잠시 길을 잘못 들기도 하였으나 법륜사를 물어 입장료 및 주차료를 내지 않고 바로 입구까지 도착하니 다른 몇 팀들의 산꾼이 보인다. 다들 하산하는 길이다. 차안에서 비에 대비한 정비를 마치고 빗속으로 들어선다.
2. 감악산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우산을 받쳐 들고 시멘트 길을 내려온다. 등산로 좌측에 법륜사가 있으나 들러보지는 못하고 식수만 받아온다. 이정표가 깔끔하다. 대한민국 대표도시 파주란 말은 알겠는데 그 옆의 G&G PAJU는 무슨 뜻인지 상상에나 두어야겠다. 어쨌거나 중간기점들까지의 거리가 소수점 둘째자리까지 친절하게 표시되어 있다.
오늘 산행은 법륜사-숯가마터-까치봉-감악산정상-임꺽정봉-숯가마터-법륜사의 약 5.5km를 돌아오는 코스로 잡았다. 숯가마터에는 긴 안락의자를 비롯 벤치들이 많이 있다. 다소 너른 공터의 묵은 밭에서 직진하면 1.7km의 거리에 감악산 정상이 있으나 까치봉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길을 잡았더니 비닐을 깐 웅덩이에 물이 많이 고여 있다. 아마도 농업용수로 쓰는 모양이다. 곧바로 숲으로 들면서 오르막이 시작되고 700여 미터를 올라 안부의 벤치에서 숨을 돌린다.
금도현과 김생곤은 빨간색, 김이돌은 노란색 그리고 난 검정색 오버트로즈를 입었지만 땀과 비가 함께 몸을 적시기 시작한다. 까치봉에 이르는 길은 능선길이어서 그다지 힘이 들지는 않지만 비가 억세게 내린다. 등산로에는 물이 콸콸 흘러내리고 구름에 쌓여 보이는 것도 없다. 사진을 찍기도 어렵지만 빗속을 뚫고 사진을 찍더라도 어디인지 분간이 어렵다. 하동 금오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비를 한꺼번에 맞는다. 감악산을 오르는 곳곳에는 참호가 지어져 있고 방어용 호로 연결되어 있다.
오후 1시 10분, 까치봉이다. 빗줄기가 더욱 거세져 앉을 곳도 없어 다시 400미터 정도를 가니 정상 바로 아래 나무로 된 팔각정자가 있다. 아마도 군인들이 지은 것인가 보다. 고맙게 비를 피하고 상의를 벗으니 속옷이 땀에 절었다. 마트에서 산 자두를 깨무니 신맛에 정신이 번쩍 든다. 정자의 상단 구석 한켠에는 상량 때 쓴 것으로 보이는 북어 한 마리가 아직 묶여 있다. 고향을 떠나 말린 채로 이 높은 정상에 있는 북어는 고향바다 내음이 그립기나 한지...정상은 100미터 앞이다. 이동통신회사의 안테나가 있고 군인들의 초소가 있다. 설인귀비가 있는 곳이 감악산 정상 675m이다.
바위사이에 검은 색과 감색 빛이 동시에 흐른다하여 감색바위, 즉 紺岳山이라 하였다는데 날이 좋으면 개성의 송악산과 북한산까지 보여 전략적 중요성 탓에 전쟁 시에는 격전지였다고 한다.
감악산비, 설인귀비라고도 하는 정상의 비석은 지난 1,40여년의 역사를 견디기가 힘이 들었던지 글은 거의 마모되어 판독할 수 없어 몰자비(沒字碑)라고도 한다. 다만 형태적으로 진흥왕 순수비를 닮아 제5의 진흥왕 순수비라는 설도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지만170cm 높이와 80cm에 이르는 너비의 규모로 그 위엄은 충분히 갖추고 있다.
군부대 초소에는 두 명의 초병이 근무를 서고 있다. 교대와 식사가 궁금하여 금도현이 물었더니 상급부대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둘이서 취사하면서 생활한다는 답을 들었다. 행정구역으로는 양주시에 속하는 임꺽정굴 혹은 설인귀굴이라 하는 굴은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산길, 빗줄기는 다소 약해졌으나 여전하다. 한 시간 남짓 하산하니 묵은 밭을 지나 다시 법륜사 앞이다. 이렇게 오늘은 100명산 두 곳을 예정대로 큰 무리없이 올랐다.
3. 월송산장
차에서 젖은 옷을 갈아입고 오늘밤 묶을 곳을 찾아 나선다. 감악산 입구를 나오면서 우측의 민박집들 몇 곳을 들렀으나 가격도 비싸고 한곳의 산장에서는 우리 일행을 보고 대뜸 화투를 칠 것이 아니냐며 물어오기도 했다. 감악산 입구 국도변을 오르내리는데 포터 트럭이 다가오더니 대구서 왔느냐며 무조건 따라 오란다. 물이 넘치는 개울을 건너-여기는 사실 들어가 보려 했으나 개울물이 길 위로 넘치고 있어 차가 갇힐까봐 돌아 나왔던 곳-월송산장(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031-959-8243)에 멈추었다. 차에서 내리며 인사를 나누었는데 대구사람이라며 무척 반가워했다.
쉰 정도로 보이는 주인, 최월송(崔月松)씨는 대구 사람으로 서울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수년 전에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며 끊어진 반도의 최북단인 이곳에서 대구사람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남편을 닮은 부인과 할아버지께서도 무척 반가워하시며 1분정도 거리의 조용한 산속 너른 방을 50,000원에 주겠다고 하셨다.
짐을 들고 염소 똥들이 널린 임도 같은 길을 따라 방으로 오르는데 족히 10분 이상은 걸린 듯하다. 무거운 짐을 든 금도현 회원이 맨 뒤에서 힘들어하며 올라왔다. 염소 집 옆에 판넬로 지어진 방은 부엌과 목욕탕이 있는 원룸형으로 상당히 넓어 우리일행이 묶기엔 맞춤형이었다. 더운 물로 샤워하고 흙 묻은 옷의 바지가랭이를 씻고 곧 저녁 준비를 하여 맛있게 먹고 나니 6시를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나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고, TV마저도 채널이 제한되고... 총무와 바둑을 몇 판 두고 나니 10시가 되었다. 밤엔 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내일 물이 불어 차가 나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데 빗소리는 점점 멀어져 간다.
4. 임진각, 자유의 다리 그리고 도라산
2008년인 來年부터는 국가공휴일에서 제외된다는 제헌절 아침, 7시에 일어났다. 다행히도 예보대로 비는 멎었다. 해장국과 햇반, 남은 반찬으로 아침을 먹고 커피까지 끓여 마셨다. 8시를 넘어 산장을 나서는데 큰 손님들이 오신다고 주인 아주머니가 부산하게 음식준비를 하고 있다. 아래의 방들에서도 수련회를 온 것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일어나 부산하게 아침을 맞고 있다. 인사를 나누고 물이 상당히 불은 개울을 무사히 건너 22km 거리의 임진각 방향으로 길을 잡았더니 곧 임진강 주변이다.
서쪽부터 푸르게 개여 오는 하늘이 반갑다. 서늘한 바람, 코스모스 핀 국도변이 초입의 가을풍경 같다. 너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임진각에 올랐다. 어제 종일 빗속에서 있어서인지 카메라렌즈에 습기가 뽀얗게 서려있다. 임진강을 건너는 자유의 다리가 보이고 북한 땅이 지척이다. 망배단을 보고 자유의 다리에 섰다.
목재를 깔아 편안하게 느껴지는 자유의 다리는 한국전쟁이 휴전되면서 납북포로 12,773명이 이 다리를 넘어 귀환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어제(8월 29일) 지난 7월 중순 아프간에 봉사 차 갔다가 탈레반에게 41일간 납치되었던 젊은이들이-비록 두 분은 피살 돌아왔지만- 죽음의 공포로부터 풀려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았다. 그들에게나 54년 전 12,773명의 전쟁포로에게나 ‘자유’의 가치는 ‘생명’과 동의어일 것 같다. 자유의 다리 북쪽(서쪽인가?) 끝에는 갖가지 사연과 염원을 담은 깃발과 플랜카드들이 무질서하게 가득 채우고 있고 그 위로는 날카로운 철조망이 푸른 하늘에 더욱 선명한 이빨을 드러내놓고 있다. 잠시 포즈를 취하고 생각에 잠기노라니 갑자기 주변이 소란해 진다. 중국인들로 보이는 단체 관광객들이 왁자하다.
다리 아래로는 한반도 모양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데 물속을 보니 백두대간이 잠겨있다. 물에 잠긴 백두대간이라... 연못가운데 설치되어 있는 위아원(We are one)이라는 조형물도 마음에 안들기는 마찬가지다. 평행한 두 기둥을 허리부분에서 묶어 잘록하게는 만들어 하나로 묶어 보겠다는 의지는 보이지만 그 윗부분이 다시 원래의 두 기둥처럼 벌어져서는 ‘위아원을 지향하여 노력은 했지만 결국은 위아투’라는 듯이 보인다.
임진각 주차장 앞쪽으로는 야외공연장으로 보이는 넓은 잔디광장이 시원하다. 주변은 각색의 바람개비, 대나무 혹은 등나무의 점증형 조형물, 작은 연못과 색색의 수도꼭지 조형물, 그리고 작은 나룻배까지 보기가 좋다. 금도현은 직업의식이 발동하는지 몸을 꺽어가며 렌즈에 담기에 바쁘다. 건너편에는 삼각대까지 설치하여 사진찍는 작가같은 사람도 있다. 자유로에서 이어지는 통일교를 건너 판문점도 볼 수 있을까 하여 다리를 건넜지만 사전에 허락된 자만이 통과할 수 있다는 위병의 말을 듣고 돌아서야 했다.
넓고 시원한 자유로를 따라 남하한다. 임진강이 강폭을 크게 하며 따라오고 강둑의 철책선도 쉬지않고 함께 달린다. 통일동산, 파주영어마을, 인쇄단지 등이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다. 도라산 전망대에 들었다. 주차장 주변엔 고급스런 모텔들이 즐비하다. 무료 셔틀을 타고 전망대에 올랐더니 물경 입장료가 2,500원이다. 금도현은 보았다고 사양했으나 함께 들어가니 전망대 내부에서는 단체 관광객들에게 보여주는 비디오 설명이 중국어로 진행되고 있었다. 전망대 옥상에 올라 북녘을 향했다. 이곳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가는 합수점이다. 황톳빛 거대한 두 개의 물줄기가 소리도 없이 어울려 어깨를 걸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DMZ 평원위의 새들과 들짐승들은 넘나들지만 우리는 자유로이 갈 수 없는 곳이다. 북쪽으로는 텅빈 위장마을과 함께 정말 헐벗은 산(잡풀들만 있지만 군데군데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들만 눈에 가득 들어온다. 앞은 적막한 강산인데 고개를 뒤로하면 10차로인 자유로 위의 줄지은 차량, 그 뒤로 집단을 이룬 고층아파트 단지들, 그리도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줄지은 고급모텔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말레이지아에서 기차로 다리만 건너면 싱가폴인데 그 차이가 대단하기는 하나 역시 사람 사는 동네라고 여겨지지만 이곳 도라산에서 느끼는 차이란 족히 비교할 대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단지 추상적이고 교과서적이지만 극명하다고만 할뿐. 전망대를 돌아 나오니 이번에는 수학여행 온 일본 고교생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5. 강화도 마니산
일산까지는 막힘없이 왔으나 굴욕의 역사현장 강화에 이르는 길은 휴일이어서 그런지 정체가 극심하다. 지난 해 여름휴가로 강화도 삼산면인 석모도에 갔었는데 그때도 체증이 대단했던 기억이 있다. 초지대교를 건너는 일도, 강화섬에 들어서서도 정체는 계속되어 문산리의 마니산 주차장에는 1시가 넘어서 도착하였다. 강화도는 단군의 역사와도 맛닿아 있어 역사의 길이로는 유구하지만 고려 23대 고종이 몽고를 피해 피난한 것을 시작으로 24대 원종, 25대 충열왕 등 고려시대에는 39년간 수도 노릇을 하였다. 조선조에서는 병자호란 시에 인조가 몽진하였고, 2차호란 시 역시 강화로 몽진하려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인조 14년 1636년 음력 12월 겨울의 한복판에서 남한산성의 빗장을 걸었다가 45일만인 이듬 해 2월 봄과 함께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었던 부분을 작가 김훈은 ‘남한산성’에서 두꺼운 얼음 위를 걸어서 건너던 당시의 한강변 겨울 날씨만큼이나 가슴시리도록 묘사하고 있다. 조선말에 이르면 강화는 다시 서양 열국의 포연에 휩싸이게 되는 비극을 맞게 되는 등 우리 역사의 전부분에 등장하리만큼 사연과 유물도 적지 않은 곳이다.
입구에서 급하게 라면을 끓여 먹고 13시 40분, 1,500원씩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마니산으로 들어선다. 왕복 2시간30분에서 3시간 거리라는데 교회 청년들 수련회가 열리고 있는 공주에 갔다가 대구에 오늘 중으로 닿으려면 가급적 빨리 다녀와야 했다. 이미 하산하는 사람도 많고 그리 깊지도, 수량이 많지도 않은 계곡을 채운 사람도 가득하다. 날은 완전히 개여서 해가 나왔다 들어갔다 한다. 시멘트 길을 20여분을 오르니 마니산 기도원이 있고 삼거리이다. 여기서 물 한잔을 마시고 좌측의 계단로로 들었다. 바로 계단이 시작된다. 부모님들의 손을 잡고 내려오는 아이들도 많다. 햇빛에 덥기도 하고 땀도 나지만 한번만 잠시 쉬고 열심히 올랐다.
듣기로는 계단이 무려 981개라는데...2시 40분, 한시간만에 참성단에 올랐으나 정작 참성단은 철문으로 잠겨져있다.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를 올리던 곳으로 지금도 10월3일이면 이곳에서 단군에게 제를 올리고 있으며 전국체전의 성화를 채화하는 곳이어서 특별 행사가 있는 날에만 개방한다는 안내가 서 있다.
바로 옆 봉우리인 마니산 정상은 468m에 지나지 않지만 낮은 것이 아니다. 摩尼山은 백두산, 묘향산과 함께 단군왕검의 전설이 얽혀 있는 곳이며 백두산과 한라산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비온 뒤여서 정상에서의 조망은 장관이다. 마침 썰물이어서 드넓은 뻘밭과 함께 강화의 산과 들, 서쪽으로의 많은 섬 등 각도만 조금씩 바꾸어도 펼쳐지는 풍광이 모두 다르며 볼만하다. 단지 오늘 정상의 가장 높은 바위위에서 마치 ‘타이타닉’ 영화 장면같은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중년 부부의 모습이 눈에 불편했을 뿐. 이들은 오래도록 그렇게 있어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 바위에 오르지도 못하게 하였다. 하산은 참성단의 좌측으로 난 단군로를 택하였다. 중간쯤에서 등목을 하고 내려오니 마니산 기도원 삼거리를 만난다. 3시 50분 하산 완료.
더운 기운을 아이스크림으로 누르고 곧바로 차에 올랐으나 체증은 오전보다 훨씬 심하여 초지대교를 건너기까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후배 청년회원들이 수련회를 하고 있는 충남 공주시 반포면 금남리의 로뎀나무 수련원까지 저녁은 커녕, 화장실까지 참으며 쉬지 않고 달려 이미 어두워지고 있는 7시 50분에 도착하다. 선물도 사오지 못해 격려금과 함께 대표인사만 하고 8시 다시 차에 올랐다. 유성IC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다가 금강휴게소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성서에 도착하니 10시 25분, 10시 30분에 학원을 마치는 현재를 픽업해서 우리의 차고지로 3일째에 돌아오다. 등고선 창립이후 첫 2박 산행은 경기도의 산들이 그렇듯 크게 산으로서 마음에는 차지 않았지만 그래도 3개의 100명산과 함께 임진각의 안보관광과 3일간 맛나는 식사, 즐거운 대화와 동침 등 수많은 보너스를 맘껏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登 ? 苦 ? 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