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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화사까지 간 이유
2008년 11월 7일 새벽에 우이동 집을 나섰다.
만야님은 영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동서울 06시 15분발 영주행
첫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만야님과 나)는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春陽 石峴), 태백산
록의 각화사(覺華寺)로 달렸다.
대동지지에 의하면 경도(京都)~봉화 500리길, 봉화대로(奉化大
路)는 흥인문(興仁門:東大門)에서 봉화군 봉성면 봉성리까지다.
그러니까 역(逆)으로 한다면 봉성1리, 봉화현 관아였던(옛 鳳棲
樓:문화재자료 제418호)) 봉성면사무소가 시발점이 돼야 한다.
그럼에도 동북쪽 50리를 더하여 춘양면 각화사까지 간 것은 봉화
대로의 존재와 무관치 않은 사고지(史庫址:우리의 이야기들 320,
321번 글 참조)를 출발점으로 하기 위해서 였다.
각화사는 조계종 제16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다.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였으며 이조 숙종때 무애국사(無碍
國師)가 중건하였다.(1101년)
정조는 이곳이 삼재불입지(三災不入地)라 하여 사고(太白山史庫)
를 건립하고(1777년) '조선왕조실록'을 수호하게 했는데 당시는
800여 승려가 수도하는 국내 3대사찰중 하나였단다.
지금은 경북도유형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된 귀부(龜趺)가 있을
뿐인 말사지만.
각회사(위)와 귀부(아래)
주지스님을 찾아 뵙는 게 우선인데 독실한 불자인 만야님과 동행
함으로서 수월했다.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東茶頌을 지은 草衣禪師)의 영향인가.
승려들, 특히 학승과 선승은 그윽한 다향을 선호한다.
언행이 정갈스러운, 법명이 등월(登月)인 주지스님이 손수 끓여
내놓는 차가 낙동정맥 종주 중에 하룻밤 의탁했던 청련사(영덕)
원상스님 생각을 불러와 스스럼이 없어지는 듯 했다.
지난 여름의 서울시청앞광장 불교대집회를 비롯해 사고지, 억지
춘양 등의 대화에서 봉화대로의 탄생사를 짚어볼 수 있었다.
오지중 오지인데다 도성과의 내왕도 뜸하나 사고와 궁궐 재목인
춘양목의 다량 출하라는 명분이 힘을 발휘한 것일 게다.
굳이, 여기까지 온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그러나 사고지까지 올라가지 못했다.
대형 홍수사태로 위험하기 때문이라며 저지해서.
제시하는 이유는 이렇지만 선원(禪院) 분위기 보호가 목적인 듯.
봉화군 당국이 거액을 들여 사고지 복원을 시도하고 있으나 사찰
측이 극구 반대해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단다.
복원될 경우,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인해 선원의 피해가 막심하게
된다는 것이 반대의 이유라니까.
고한 함백산의 정암사처럼 각화사 소유의 산이기 때문에 군청측
에서도 무력감에 허탈상태인 듯.
억지 춘양(春陽)
'억지 춘양'은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다.
"(격에 맞지 않거나 어색하여 내키지 않는 일을) 억지로 우겨서
하거나 하게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라고.(doing by force라나)
다만, 난센스(nonsense)인 것은 '억지 춘향'으로 둔갑한 것.
왔네 왔네 나 여기 왔네 / 억지 춘양 나 여기 왔네
햇밥 고기 배불리 먹고 / 떠나려니 생각나네
햇밥 고기 생각나네 / 울고 왔던 억지 춘양
춘양면 일대의 이 구전속요(俗謠) 속에 억지 춘양의 뜻이 있다.
처자(處子)가 이 오지까지 억지로 끌려오듯 시집왔다.
밖으로 나가긴 어려우나 금정광산, 춘양목 등으로 경제적으로는
타지역에 비해 오히려 여유로우니까 되려 좋아졌다.
그런데 또 억지로 끌려가듯 나가야 한다.
그러니까 춘양으로 들어가는 것도, 춘양에서 나가는 것도 타의라
해서 억지 춘양이라는 것.
예전에는 내가 사는 우이동을 울고 왔다 울고 가는 곳이라 했다.
어쩌다 떠밀리듯 예까지 오게 된 것과 산과 물, 공기 모두 비할데
없이 좋은 이 곳을 떠날 때의 아쉬움을 이르는 말이었다.
억지 춘양의 내력으로 또 있다.
춘양의 특산 소나무인 춘양목은 백목(百木)의 왕이다.
이를 기화로 인근 지역에서 나오는 소나무까지 포함해서 시장에
출하되는 소나무는 모두가 춘양목이라고 너나 없이 억지부렸기
때문이라는 것.
영동선 철도에 근원을 두는 이들도 있다.
본래의 설계는 풍수지리를 신봉하는 지역 원로들과 변화에 거부
감을 가진 주민들의 거센 반발도 아랑곳없이 직선 노선이었단다.
노반공사가 끝나고 레일(rail)까는 일만 남아 있었는데 이 지역의
국회의원(정문흠?)이 권력의 실세가 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당시의 여당인 자유당 원내 총무가 된 그는 기성공사를 무시하고
춘양면소재지를 감아돌아가도록 억지를 부렸다는 것.
결국, 그 억지가 통하여 꼬불꾸불 굴곡노선이 되고 말았다.
내력이 이러한데도 우리 국어사전은'억지 춘향'이라고 올렸다.
아무 관련 없는 남원골 춘향을 불러다 우격다짐하겠다는 건가.
이같은 내력(어원)도 모르면서 해석은 용케 했으니 기찰 일이다.
사전마다 내로라 하는 학자의 감수라고 과시하지만 천편일률의
부실덩어리 때문에 생기는 지식의 오류를 어찌 한단 말인가.
봉화대로와 영동선의 동병상련
점심 공양을 받고 돌아섰다.
만야님과도 헤어졌다.
영주고등학교와 선영여자고등학교 재단(松岩敎育財團)이사장인
그의 공사(公私)가 어찌 다망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백두대간 도솔봉 기슭의 해후(백두대간 79번 글 참조)
이후, 인근 산행 안내와 동행 등 나를 위해 매번 많은 시간을 할애
해 주시는 분이다.
이번 옛길에서도 봉화, 영주지역 통과에 물심으로 도와주셨다.
늘, 뭐라 표현하거나 보답할 길이 없어, 다만 감사드리는 마음일
뿐이다.
봉화읍은 본래 안동부(安東府) 관하 내성현(奈城縣)이었다.
봉화현(봉성)과 20리 간인 여기에 점(奈城店)이 있었는데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
한데, 한자를'乃城'으로 바꾼 것은 이 지역에 있는 성(城)이'乃'자
모양이기 때문이었다는 것.
1914년 일제의 대대적 행정개편때 내성면(乃城面)이 됐고, 춘양
면에 있던 군청을 이리로 이전함으로서 다운타운이 형성되었다.
광복후 봉화면으로, 다시 봉화읍으로 승격했는데 읍소재지가 된
내성리는 법정리(法定里)로 존속되고 있다.
영동선 철로와 내성천을 끼고 가는 옛 36번국도의 영주길 8km,
짧은 구간에서 건널목을 4번이나 건너야 한다.
1970년대 중반부터 동해안 어촌 노실(삼척군 원덕읍)에 숱하게
왕래할 때마다 느꼈던 참으로 해괴한 도로와 철로의 관계다.
아마도, 그래서 봉화인들이 들고 일어섰나 보다.
"철도 이설은 봉화의 살 길이다"
봉화의 곳곳에 나붙은 현수막이다.
곳곳에 걸려 있는 현수막
문단역(문단2리)을 앞둔 건널목에서 졸고 있는 간수를 깨워 현수
막 사연을 물었다.
"철도 놔달라 애걸복걸 목매던 사람들이 저런다"고 볼멘 소리다.
단물 빠지니까 뱉는 격이라며"예산이 없는데 현수막 걸고 데모만
하면 다 되느냐" 고.
영주가 고향인 50대 중반의 김해김씨라는 그는 평소 안동권씨의
세도가 못마땅했던가.
중앙선 영주에도 그들의 세도에 눌려 역간거리가 가장 짧은 역이
있다는데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철도이설추진위원회도 등장했다.
봉화~영주의 경계 건널목에서 거촌역(봉성면)까지 14km 사이에
건널목이 무려 12개나 된다니 대책을 주장할만도 하겠다.
태어날 때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던 영동선이다.
일제는 춘양지역의 풍부한 광산물, 임산물 수탈을 극대화하려고
철도개설을 독촉했으나 완공 직전에 패망했다.
광복 이후에도 계속된 개설공사가 6. 25 민족동란으로 중단됐고,
끝내, 정치바람에 휘둘려 억지 춘양의 꼬부랑 철길이 되었다.
그래도 한 때, 산업선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탄광의 쇠락
으로 사양이더니 마침내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눈꽃열차> 라는 이름의 관광선으로 변신은 했으나 천수답(天水
畓)에 다름 아니다.
어찌 영동선 철도에 국한된 일이겠는가.
세상 만사가 다 그러한 것이지.
내가 지금 걷기 시작한 봉화대로 역시 선정 과정이 정략적이었을
것이라는 냄새만 짙게 배어있을 뿐 거들떠 보는 이 누구인가.
국도로 업그레이드된 구간만은 계속해서 광영을 누려왔다.
그러나, 그중 대부분은 신국도의 개설로 다시 지방도로로 전락될
(down grade) 것이고, 그러면 관할청이 도로공사에서 지자체로
이관됨으로서 마침내 퇴계(退鷄)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길(철도 포함)은 애용자가 많아야 비로소 길다워지며
대접을 받을 수 있으니까.
봉화대로와 영동선이 동병상련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단지, 과객이었을 뿐인 영주였는데...
길가의 도촌초등학교 앞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낙목 만추에 외로이 핀 국화(이 학교의 교화)만이 썰렁한 교정을
달래주는 듯 했으나 이 학교 역시 한 걱정을 안고 살 것이다.
지방에서는 학생수의 부족으로 본교가 분교로 전락되고, 미구에
폐교돼 노랑버스가 대신하는 것이 순서로 되어 있으니까.
한 중년녀가 무를 가득 담은 손수례(cart)를 밀고 가는데 힘겨워
보이기에 잠시 밀어주었다.
고마움의 표시로 내미는 무 2개중 예쁜 놈 1개를 받아들었다.
목 탈 때 깎아먹으랬지만 하도 예뻐서 만지작거리며 걷는 동안에
영주땅에 접어들었다.
이처럼 예쁘게 잘 자란 무는 아마 처음 보는 것 같아 상처날 새라
조심스럽게 수건으로 싸서 배낭에 넣었다.
그 새에 만야님과 상정님(소백산민들레)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더는 폐를 끼치기가 저어돼 얼버무리며 영주 시가지를 살폈다.
영주(榮州)의 옛 이름(李朝)은 영천(榮川)이다.
일제 강점기에 풍기군, 순흥군 등과 병합해 영주군이 되었다.
광복 이후에 영주시와 영풍군으로 개편되었다가(1980년)1995년
영주시로 재통합, 오늘에 이른 경북도내 최북단 시군중 하나다.
영주를 선비의 고장이라고 한다.
선현의 얼이 깃든 문화유산과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이라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인 소수서원(紹修), 일편단심
충절이 서려 있는 금성대군 신단, 1400년 고찰인 부석사, 장대한
백두대간 소백산 만으로도 영주의 인력(引力)은 충분히 강하다.
나도 오랜 세월 이 인력을 거역하지 못한 셈이다.
불혹에 접어든 아들 딸들이 꼬마였을 때부터 드나들었으니까.
만야님과의 해후 이전에는 단지 과객이었을 뿐이었지만.
옛 영천군 관아터로 알려진 현 영주초등학교 교정를 지나 묻고
물어 새내기 찜질방(스포렉스)에 들었다.
이 분야 업종의 시설은 거개가 후발일 수록 고객 친화적이므로.
그간 이용해온 곳이 있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때의 일이다.
찜질방 활황기를 맞아 영주땅에도 뉴페이스(new face)가 속속
등장, 서비스의 질이 향상된다면 고객에게는 더없이 다행한 일.
서비스업종에서 카르텔(Kartell)이 쉬운 일이 아니니까.
누가 휴대폰을 족쇄라 했던가.
편리하면서도 거북한 도구다.
나를 가만 둘 만야님, 상정님이 아니잖은가.
찜질방까지 찾아오신 두 분에게 나는 또 무기력했다.
늙은이의 행동거지가 이렇듯 폐(worry)의 양산이라 생각된다면
사려깊은 재고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온 산을 누비고 팔도 길을 걷는 동안, 당면할 때마다 마음으로만
감사드렸을 뿐인데 바야흐로 새로운 과제로 등장하는 중이다.
<계속>
* 카메라 탓일까 내 조작미숙 때문인가.
셔터를 많이 눌렀는데 남은 것이 이것 뿐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