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이후 판문점에서의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① 1953년 8월 5일∼9월 6일까지 1개월에 걸친 포로교환(8만 2493명의 북한군과 중국군 포로가 북으로 송환되고, 1만
3444명의 유엔군 포로가 남으로 송환).
② 1953년 10월 15일∼12월 23일까지 송환거부포로에 대한 설득(2만 2000여 명의 대상자 중 설득되어 송환된 자는
북한군 188명, 중국군 440명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왔다.).
③ 1959년 1월 27일 프라우다 평양특파원 이동준(李東濬) 탈출 귀순.
④ 1967년 3월 22일 이수근(李穗根) 간첩 위장귀순.
남침용 땅굴
전면적 기습전과 후방공략을 달성하기 위한 북한의 땅굴은 2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땅굴사업은 1971년 9월
25일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金仲麟)과 북한군 총참모장 오진우(吳振宇) 등에게 내려진 “속전속결전법을 도입하여 기습전을 감
행할 수 있게 하라”는 김일성의 ‘9.25교시’에 의하여 개시되었다. 땅굴의 발견경위와 규모는 다음과 같다.
북한은 남북 적십자회담 및 남북 조절위원회 회담 등을 통해 겉으로는 대화를 계속하는 척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습남침을
위한 땅굴을 파고 있었다. 1972년 5월부터는 휴전선 전역에서 땅굴을 파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땅굴은 4개이다.
제1땅굴은 1974년 11월 15일 경기도 고랑포 동북방 8k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제 1땅굴 갱도와 갱도구축시 사용된 갱차[-坑車],철제,전쟁기념관 소장
⑴ 제1땅굴:1974년 11월 11일 경기 연천 고랑포(高浪浦) 북동쪽 8km 지점인 군사분계선 남방 약 1.2k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너비 90cm, 높이 1.2m, 길이 지하 45m, 길이 약 3.5km에 달하는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전술능력은 1시간에 1개 연대의 무장병력이 통과할 수 있고, 궤도차를 이용하면 중화기와 포신(砲身)도 운반할 수 있다. 땅굴의
예상 기습로(奇襲路)는 고랑포에서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향하는 방향이다.
제 2 땅굴
⑵ 제2땅굴 : 1975년 3월 19일 강원 철원(鐵原) 북쪽 13km 지점인 군사분계선 남방 900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너비 2.1m,
높이 2m, 깊이 지하 50-160m, 길이 약 3.5km, 남쪽으로 1.1Km, 북쪽으로 2.4Km. 에 달하는 암석층 굴진 아치형 구조물이다. 그
중 견학할 수 있는 거리는 500m이다.
제 2땅굴이 발견 될 당시 수색하던 한국군 7명이 북한군에 의해 희생되었다.이 땅굴을 이용하면 1시간에 약 3만 명의
무장병력이 이동할 수 있으며 탱크까지 통과할 수 있다. 땅굴 내부에는 대규모 병력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이 있고, 출구는 세 개
로 갈라져 있다.
제 3 땅굴
⑶ 제3땅굴 : 제3땅굴은 1974년 9월 5일 귀순한 북한의 김부성씨에 의해 땅굴공사 첩보를 근거로1975년부터 문산 지역에
대한 시추작업을 하였으나 땅굴 징후를 포착하지 못하다가 1978년 6월 10일 시추공 중 1개가 폭발함으로서 역갱도 굴착
공사를 실시, 1978년 10월 17일 적갱도에 관통하여 판문점 남방 4.35k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이 땅굴은 지하 73m, 폭 2m, 높이 2m, 총길이는 1,635m에 달하고, 암석층 굴진 아치형 구조물이다. 전술능력은 1시간에
3만 명의 병력과 야포 등 중화기를 통과 가능한 규모이며 그 위치가 서울에서 불과 52km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규모면에서는
제 2땅굴과 비슷하나 임진각에서 서북쪽으로 4km, 통일촌 민가에서 3.5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서울에서 승용차로 4
5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이다.서울로 침투하는데 있어서는 제1.2땅굴보다 훨씬 위협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제 4 땅굴
⑷ 제4땅굴:1989년 3월 3일 강원 양구(楊口) 북동쪽 26km 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되었으며 군사분계선에서 1.2Km
떨어진 곳이다. 너비 2m, 높이 2m, 깊이 지하 145m, 길이 약 2.1km에 달하는 암석층 굴진 구조물이다.
제4땅굴은 북한의 새로운 침투 방법으로 모색되어 굴설된 땅굴로 1978년 제3땅굴이 발견된 지 12년 만인 1990년 3월 3일에
양구 동북쪽 26㎞ 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되었으며 군사분계선에서 1.2km 떨어진 곳에 있다.
1974년 고랑포 동북쪽 8km지점에서 발견된 제 1땅굴의 높이 1.2m, 폭 0.9m, 길이 지하 46m와 비교해 볼 수 있다. 땅굴
출입구에는 발견당시 땅굴을 수색하던 중 북한군이 설치한 수중지뢰에 의해 산화한 군견을 위로하는 충견비가 세워져 있다.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1976년 8·18판문점 도끼만행사건[八一八板門店-蠻行事件]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유엔군 측 초소 부근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장교 2명이
북한군 50~60명에게 도끼로 살해당하고 9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으로 긴장이 고조되어 전쟁까지 이어질 뻔한 사건이다.
이날 오전 10시경 미군장교 2명과 사병 4명,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등 11명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유엔군 측
제3초소 부근에서 시야를 가리고 있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는 한국인 노무자 5명의 작업을 지휘·경호하고 있던 중, 북한군
장교 2명과 수명의 사병이 나타나 「나뭇가지를 치지 말라」고 요구했으나 우리 측 경비병이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하자,
갑자기 수십 명의 북한병사들이 트럭을 타고 달려와 도끼·쇠꼬챙이·몽둥이 등을 휘두르며 폭행, 미군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하고 나머지 9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물러갔다.
사건 직후 주한미군과 한국군은 데프콘 3호(경계상태 돌입)를 발령, 전투태세를 갖추었고, F4·F111 전폭기 대대가 한국에
증파되었다. 곧이어 해병대가 출동하고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한국해역으로 항진했으며 B52 폭격기가 급거 출동하는 등
전쟁위기에 직면했으나, 북한의 김일성이 유감의 뜻을 표명하는 사과문을 유엔군 측에 전달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고, 9월
1일부터는 판문점지구의 분할경비가 시작되었다.
8·18판문점 도끼만행사건 [八一八板門店-蠻行事件] (한국근현대사사전, 2005. 9. 10., 가람기획)
⑤ 1976년 8월 18일 상오 10시 45분 도끼만행, 미군장교 2명 피살 외 9명 중경상, 1978년 10월 27일 제3땅굴 발견.
⑥ 1981년 10월 30일 중립국감독위원회 소속 체코인 일병 망명. ⑦ 1984년 11월 23일 소련인(북한 주재 소련대사관 보조원)
망명, 탈출시 쌍방경비병의 총격전으로 한국군 1명 사망, 미군 1명 부상, 북한군 3명 사망, 1명의 중상이 있었다.
임수경 방북 사건 (林秀卿·訪北事件)
[임수경] 은 서울특별시에서 11월 6일에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서울지하철공사 간부로, 집에 컴퓨터가 있었을 정도니
당시 기준으로 본다면 제법 부유한 편이었다. 이런 것 때문에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불어과에 1986년 입학하기까지
운동권과 접점을 찾을 길은 없었다.
대학생 때도 운동권과는 관련이 없었고 미스 코리아에 나가기 위해서 사진을 찍기도 하거나 KBS '젊음의 행진'에 출연해서
김형곤과 짧은 콩트를 하였다. 이런 활동을 보면 부자집 딸내미였고, 잘 나가는 아가씨였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시대가 시대였고 대학생치고 사회운동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없다고 할 때였기 때문에 점점 사회운동에 관심을
두게 된다. 그래도 이때까지 활동은 풍물반, 학생자치회, 공정선거감시단 같은 내부적인 민주화 운동이었고 통일이나 민족운동
쪽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시 시대 사항을 보면 완전히 분리가 안되지만 가정형편을 봐도 그렇고 자진해서 입북할 기미는 없었다. 그런 것이
총학생회에서 일하면서 바뀌었다.
[입북 배경 및 과정] 북한은 1989년 7월 1일로 예정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면서 조선학생위원회 명의로
전국대학총학생회협의회(이하 '전대협')에 초청장을 보냈다.
이 초청장은 조선학생위원회 -> 조선(북한)적십자사 -> 대한적십자사 -> 통일원(현 통일부) -> 전대협의 경로로 전달된다.
전대협은 축전 참가를 준비한다. 총학생회에서 일하던 임수경은 당연히 '용인/성남 지역 총학생회연합 축전준비위원회'와
연결되어 일하게 된다.
북한에 대해 온건적이었던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기에도 어려운 일이 노태우 정권 시절에 가능했던건 당시 전세계적인
탈냉전 분위기 속에서 남북간에도 화해 분위기가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공산권과의 대대적인 교류와 조건없는 남북대화를
주장한 7.7 선언으로 고조되었다.
더구나 한정적이지만 민주화의 성공과 맞물린 자유로운 분위기와 여소야대 상황에서 정부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에 이런 것도 가능했다. 즉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자체는 당시의 정부 방침에 어긋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별
제재거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문익환 목사의 밀입북 사건이 벌어지면서 삽시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문익환 목사가 몰래 입북해서 김일성과
포옹까지 하는 상황에서 공안정국이 조성되었고, 1989년 6월 6일에는 문교부 장관이 전대협의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를
불허한다.
하지만 이미 실무적인 차원의 준비는 끝나 있었고 무엇보다 정부에서 안된다고 해서 안할 전대협이 아니었다. 전대협은
밀입북을 하기로 결정하는 호기를 부린다.
대한민국에서 북한 지역으로 넘어가는 가장 빠른 길은 휴전선과 북방한계선을 제외하면 서울-베이징(북경)-평양을 거치며
가는 길이었다. 한중 수교 이후에 가장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문익환 목사가 이 루트로 방북하는 바람에 이용이
불가능해졌다.
그렇기에 때문에 임수경은 일본-서독-동독을 통한 우회로를 선택한다. 6월 21일 임수경은 도쿄로 출발하고 일본에서 7일간
머무르고 이후에 서베를린으로 간다. 이후에 동베를린을 거쳐서 모스크바로 간 다음에 평양으로 출발, 9일만인 6월 30일 오후
1시 30분에 평양에 도착한다.
[입북후 북한의 임수경]
1989년 7월 2일 평양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 선 임수경
. 170개국에서 사회주의 청년 2만명이 몰렸으나 스타는 단 한 명, 임수경이었다. /임수경 제공
임수경의 방북은 남북 양쪽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사실 남한에서는 당시 온갖 밀입북 사건이 터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꼬꼬마 대학생도 북한에 들어가네'' '젓 비린내나는 기집애도 막나대네' 정도의 반응을 보인 반면. 북한에는 선전이란 측면에서
거의 핵폭탄을 터뜨렸다. 실제로 후폭풏까지 있다는 점에서 진짜 핵 폭탄이었다
당시에 온갖 남한 인사의 방문으로 정신없으면서도 즐거워 하던 북한 입장에서도 임수경의 방북은 굉장히 신선하면서도
충격이었다. 당시에 방문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남자들로 남한에서도 제법 명망을 지녀서 함부로 하기 어려운
이들이 많았지만, 임수경은 중산층 자제에 아직 앳된 평범한 여대생이었다.
거기다 임수경의 모습은 노동운동이나 민족운동에 투신한 투사의 모습이 아닌 발랄한 남쪽 대학생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
당장에 북한의 관심은 임수경에게 집중된다. 오죽하면 북한 언론이 김일성보다 더 많이 취재하려고 했던 유일한 인물이란
평가까지 있었을까.
살벌한 사회통제가 당연시 되는 이북에서 임수경이 나타나면 동원하지도 않은 지역 주민들까지 자발적으로 몰려들면서 인근
공장이 모조리 마비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인만큼 북한에서는 선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상투적인 선전 방문을 준비한다. 그런데 임수경은 북한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임수경의 돌출행동은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처음에 와서 한 말이 "나는 북한 체제를 동경해서 온게 아니라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왔다." 였고 사람들만 모이면 원고없이
즉석 연설을 하는 등 통제되지 않았으니 선전 담당자들이 얼마나 당황했을지는…. 거기다 북한에서는 가보급인 김정일
하사품을 그냥 두고 나오고, 북한의 기술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만만하게 준비한 선전용 컴퓨터를 보고는 "어, 우리 집에
있는 거랑 똑같은 거네?"(…) 같은 걸로 당시 북한의 자존심에 사정없이 상처를 내었다. 거기에 세습정치도 비판해서 북측을
무안하게 했다고 한다.
특히 북측이 미리 준비해둔 조선은 하나다라는 선전문구를 끝끝내 거부하고 조국은 하나다로 고치게 만들었다. 북의 학생들이 선
물해준 스카프도 버리고, 집단체조 관람중에 퇴장하고,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 방문도 '다른 행사도 있는데 거긴 왜 가요-_-
??'라고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 뜻을 보인걸 북측 실무자들이 울며불며 사정해서 겨우겨우 방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적이거나 도발적인 발언보다는 젊은 여대생의 존재 자체에 북한 사람들은 엄청나게 열광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탈북자들의 증언과 임수경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북한에서 임수경은 인기 정상의 아이돌이었다고 했다.
당시 임수경은 전형적인 새내기 운동권 여대생의 복장(하얀 티셔츠에 긴 청바지, 운동화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이미지부터가
북한에서는 엄청난 문화충격이었던 것. 당시 북한에서 대학생의 이미지라고 하면 그저 시커먼 옷을 입고 당의 규율이나
주체사상만 외워야만 했던, 수동적이고 암울한 이미지였는데 작고 당돌한 여성이 캐주얼한 복장으로 통일 통일을 외치니 신선한
충격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북한 대학생들은 몰래 모여서 "남조선의 대학생이 저렇게 당당하게 다니는데 우리는 뭐냐."라고 한탄 비슷하게 말하기도 했었다고. 임수경이 가는 곳마다 북한 사람들이 몰려와서 보려고 난리치고 환호하고, 기자들이 플래쉬를 터뜨리고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종종 노래해보라고 기자들이 요구하기도 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전대협진군가> 같은걸 불렀다고 한다. 이후에 이 두
노래는 북한에서 유행한다. 오죽했으며 이런 예상하지 못한 임수경의 선전전(?) 덕분에 의도치 않게 이득을 본 남한 정부에서
뜻하지 않게 공을 세웠지 않느냐는 의견이 나왔다고 할까.
[입북 후 남한] 방북 자체야 임수경 이전에도 여러 사람이 했지만, 문익환 목사 같은 명망있는 사회운동가도 아니고 대학생 운
동권의 핵심인사도 아닌 평범한 여대생의 입북은 남쪽에서도 큰 관심사였다. TV 대담토론에서도 거론되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치기어린 여자애의 행동으로 취급되었고, 임수경의 방북으로 인해 남한이 뜻하지 않게 선전 효과를 얻었다는 점 때문에라도 썩
나쁘게 평가되지는 않았었다.
그렇지만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이 발표된 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임수경이 직접
기초했다는 이 선언문은 당시 화해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군사적 긴장 완화, 평화협정 체결, 남북불가침 선언처럼
상식적이고 누구나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중에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라는 문구가 들어있었다. 꼭 북한의 주장을 따라서만은 아니었고, 당시
전대협 역시 주한미군이 자주통일의 방애물이라는 이유로 주한미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임수경은 단계적이란 용어를 빼자는 북한의 주장을 물리쳐냈다지만, 당시 사회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주한미군 철수는
함부로 주장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었다. 탈냉전 분위기가 강해지는 중이었다곤 해도, 당시 남한에서 주한미군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우리나라를 구해준 군대'였다.
거기다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강하게 부르짖는 상황에서 이러한 주장은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도 거는 일이었다.
덕분에 남측에서 임수경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다. 군 복무시에 총기사고로 죽은 오빠는 군내 의문사로 거론되었고, 10촌 이내
친척 가운데 월북자가 8명이라는 도대체 무슨 상관인지 모를 근거없는 기사가 나왔다.
임수경의 어머니는 막내딸인 임수경을 학생운동에서 떼어놓기 위해서 억지로 신청해서 1988 서울 올림픽 우정의 사절로 뽑혔다.
1989년 6월 30일 입북한 임수경이 8월 15일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 나와 구호를 외치고 있다.
/조선일보 DB
1989년 8월 15일, 임수경, 문규현 신부 불법 방북 후 귀환
[귀환과 그 이후] 45일간의 방북을 마친 임수경은 8월 15일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서 귀환한다. 이것도 처음에는
안된다고 했는데 단식투쟁을 해서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귀환 이후에는 안기부로 가서 조사를 받은 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5년형을 선고받고 3년 5개월간 복역 후 1992년 2월 가석방되었다.
[임수경 쇼크 북한] 위에서도 설명했듯 당시 북한 사회가 이 사건으로 받은 충격은 상당히 컸다. 임수경이란 인물 자체가 당시의
북한의 젊은층에게 굉장한 충격이었기 때문. 바로 이 때문에 북한에서 임수경은 '자유'를 상징하게 되었다.
방북 후 북한 대학생 사이에서는 원래는 금지된 미국의 상징인, 임수경과 같은 면티에 청바지의 캐주얼한 차림이 일명 림수경
복장으로 유행했다. 그리고 <전대협 진군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북한 전역에서 유행했다.
또한 북한은 중산층 자제인 임수경을 통해서 남한이 어느 사회인지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되었다. 즉 임수경의 여유롭고
자유분방한 행동과 경제적 여유를 통해 남한의 경제적 수준과 남한 사회가 누리는 자유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된 것. 덕분에
북한에서 사상투쟁(사실상의 사상통제)을 하느라고 고생했다는 후문이다.
임수경의 가족들도 뜻하지 않게 북한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1990년대 초반 남북총리급 회담이 열렸을 때 임수경과 가족들이
무사하다는걸 믿지 못한 북한 기자방문단이 불시에 임수경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통일열사의 가족이 고초를 당하는지 확인하고, 만약 사실이면 비판을 하겠다'는 의도에서였다. 헌데 임수경의 집에 들이닥쳐
보니 임수경의 가족들은 정말로 멀쩡히 살아 있었고, 임수경 가족의 생활상까지 북한 TV로 방영(사실상 생중계)되었다.
남한기준에서 보면 임수경 가족들의 처지는 그렇게 편하지 않았다. 임수경의 언니는 직장에서 짤렸고, 임수경의 부친은 짤릴
위기에서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는 조건으로 정권과 타협했다가 결국 시간이 흐른뒤에 자의반 타의반 결국 그만둔다. 뿐만
아니라 일가 친척 모두 "빨갱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했다.
그렇지만 북한에서는 누군가가 밀입남했다가 돌아올 경우 본인은 사형, 가족과 일가친척들은 수용소로 들어가는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판이었으니 임수경의 가족들이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런 범죄자의 집안에 그 귀한 컬러 TV, 소파, 냉장고 등 온갖 가전제품이 있고(임수경은 당시 남한 기준으로도 꽤
잘사는 집안임을 감안하자.) 냉장고를 열었을 때 통조림이나 우유 등이 쏟아 나오는 모습에 북한 주민들은 그만 눈이
돌아갔다고 한다. 체제경쟁에서 졌다는 걸 TV생중계를 통해 보여주며 망했어요.
이건 임수경의 재판에서도 이어졌다. 북한은 로동신문을 통해 임수경이 15년 구형에 5년 징역을 받았다는 사실을 소개하며
한국 정부를 비판했지만, 제대로 된 재판을 열고 사형이 아니라 15년형을 구형받고, 겨우 5년형만 받았다는 사실이 북한에서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게다가 그마저도 다 채우지 않고 3년반 만에 출소했다는 사실까지 북한 언론에 보도되어 충격을 안겨주었다. 반역자를 사면하는
남한 정권이라니...사실 북한 사람들은 임수경이 휴전선을 넘어 돌아갈 때 죽으려고 돌아가는 줄 알고 슬퍼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거기다 감옥에서 편지와 일기를 쓰고 책도 읽는다는 등 하나하나가 충격이었다.
[임수경 쇼크 -남한]남한에선 임수경 방북 사건을 북한에 비해 비교적 가볍게 받아들였다.(물론 어디까지나 비교적이지만)
북한에서 임수경이 했다는 남한 정부 비판은 사실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당시 남한의 넉넉한 경제력과 (북한보다는 상대적으로) 정의로운 사회상 그리고 자유로움을 선전하는 뜻하지 않는
기회를 가지는 등 이익이 더 컸기 때문에 이적행위(?)보다는 북한에 변화의 바람을 약간이라도 불고 온 통일의 기수라는 면이 더
강조되었다.
더욱이 임수경 방북 이후에 80년대부터 90년대말까지 쉴새없이 온갖 사건이 몰아쳤기 때문에 재판 이후에는 금세 잊혀졌다.
이런걸 보면 당시의 이익은 남한이 더 컸다. 1990년대 이후 쏟아진 탈북자들의 증언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게 임수경으로 인한
충격이었으니 삐라 수백만장 돌리고 대북방송 전파쏘는 것보다 효과 더 좋은 선전효과를 거둔 것이다.
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된 임수경
[방북행위의 정당성] 조선일보 기자이자 수용소의 노래의 저자인 탈북자 강철환씨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 시 임수경 학생을 본
충격을 그대로 적고 있으며 이 일로 인해 남한 사회에 관심을 가지게되고 라디오를 몰래 청취하다 탈북했다고 밝히고 있다.
완전통제구역의 저자 안명철씨는 경비대로 근무하던 시절 임수경의 자유분방함에 놀랐고 이후 임수경이 그 끔찍한
국가보안법에 걸려 죽을 것이 분명한데도 살아있다는 말을 듣고 북한 체제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임수경씨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진술이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임수경 방북 사건 자체는
그로 인한 부정적인 문제보다 긍정적인 효과가 더 크다고 봐야함에는 이견이 별로 없으리라 본다.
그러나 그 행위 자체가 긍정적인 효과였느냐하는 것과 그 행위 자체가 옳았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임수경씨가 세운 공을
생각해보면 투옥하지 않았어야 맞다든가 아예 이런 효과를 노리고 자유롭게 방북을 허용해야한다거나 하는 의견들이 눈에
띄는데 이런 것은 긍정적인 효과를 냈으면 행위도 정당화된다는 인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효과는 긍정적이더라도 행위 자체는 비판받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임수경의 방북 자체는 북한의
내부적 붕괴와 대한민국 실체에 대한 대중의 파악을 노리고 간 것이 아니었다.
되려 임수경씨가 정말로 평화통일을 목적으로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방북을 한 것이라면 탈북자 증가와 북한 내부 붕괴 효과는
그녀가 원하던 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긍정적 효과와는 별개로 방북 행위나 의도 자체는 비판받을 수 있는 일이다.
⑧ 1989년 8월 29일 중국군 좌수개(左修凱) 소령 부부 망명. ⑨ 서해에서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1995.5.30)된 우성호
선원 5명(3명은 사망)을 판문점을 통해 송환(1995.12.26). ⑩ 판문점에서 1990년 1월에 남북 국회회담 제10차 준비접촉과
남북고위급회담 제6차 예비회담과 7월에 남북고위급회담 두차례 실무대표 접촉이 있었다.
⑪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1991.12.10)으로 1992년 8월에 3차례의 분과회의가 있었고, 1992년 한해 동안
판문점에서 총94회에 이르는 남북회담이 있은 뒤 1993년 10월에 3차례의 특사교환 실무대표 접촉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