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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는 영정(影幀)
택시에서 내리자 바삐 매표구로 걸어갔다.
발이 자꾸만 비틀거리는 것 같다. 몸을 바로 세우고 대합실의 문을 밀었다.
들어서면서 매표구에 눈을 부었다. 승객이 두어 사람 서 있다. 아기를 업은 여인이 차표를 들여다보면서 걸어가고 있다. 아마 친정집이라도 찾아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우선 마음이 놓였다. 수십 명은 몰라도 적어도 입구까지 줄을 대고 서 있으려니 하던 걱정이 사라졌으니, 다행한 일이다. 하기야 허구한날 수없이 떠나는 차들이 많은데, 뭐 그때마다 만원이 되어 야단을 피울 리는 없다고 해도 이렇게 한산하고 보면 오히려 조바심을 낸 일이 우스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깐일 뿐, 어느새 너댓 사람이 뒤에 서 있고 꾸역꾸역 사람들이 오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매표구를 봤다.
앞사람이 큰돈을 냈는지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웃으며 나갔다. 깡마른 볼에 스쳐간 미소의 여운은 표를 샀다는 안도감일까. 비닐팩을 든 모습이 가볍게 보였다.
다른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몇 마디 주고받고는 표를 받아들고 곧장 나갔다.
“서울행은 언제 떠나죠?”
좀 바삐 다가서면서 매표구를 향해 물었다. 아가씨가 고개를 들면서 쳐다봤다. 화사한 원피스를 입어 들길에 한들거리는 코스모스와 같은 인상이다. 눈이 시원하게 보였다. 누구에게 쫓기는 듯한 말에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모양이다.
“곧 안 떠납니까, 어서 표나 사셔요. 염려 말고예.”
경상도 억양이 곱게 궁구는 아가씨의 말이 땡그르르 하고 굴렀다.
“아니, 그 곧이 언제라는 말이오?”
아가씨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무어라고 하는 말이 스쳐갔다.
“아니, 이 손님이 앞 좀 보시소. 어서 표만 사면 되는 게 아닙니까.”
별 싱거운 손님도 다 보겠다는 투의 말이다. 매표구의 창에 분명히 출발 시간이 게시되어 있는데도 자꾸만 물어보니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으리라.
창구를 다시 봤다. 분명히 9시 00분이라고 붙어 있지 않는가. 그것도 하얀 바탕에 붉은 색으로 숫자가 돋보이게 말이다. 아크릴로 된 숫자가 비웃기라도 하듯이 다가왔다.
“아니, 뭣하구 있는 거요, 표는 안 사구……”
등뒤에서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에 땡 하고 울렸다. 어느 새 십여 명이 줄을 지어 서 있지 않은가. 급히 돈을 꺼내서 창구에 밀었다.
아가씨가 그것 보라는 듯이 빙긋이 웃으며 거스름돈과 표를 내주었다.
“이거 미안합니다.”
누구에게 하는지 모르게 한마디 던지고는 발을 떼었다.
대합실은 어느새 꽤 많은 사람이 서성거리고 있다. 모두가 바쁜 표정들이다. 등을 댈 데가 없고 겨우 엉덩이가 닿을 정도의 의자에 앉아 출발 시간을 기다리거나, 약속된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매표구 앞에 줄을 지어 늘어서 있는 사람, 연방 시계를 보면서 초침을 응시하고 있는 사람 등 남녀노소를 가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목적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그 중에는 별다른 볼일 없이 나들이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겠지만 급하고 중요한 일로 할 수 없이 시간을 쪼개어 내는 사람이 대부분이리라.
아직도 20분이나 남았다. 서울행을 타라는 안내 방송은 아직 없다. 좀 미리 차에 타게 해서 딱딱한 의자보다는 부드러운 좌석에 앉아 쉬게 하면 편할 텐데, 꼭 출발시간이 거의 돼서야 승객을 태운다고 야단법석을 피우니 알고도 모를 일이다. 그럴 만한 이유야 없지도 않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비좁은 대합실이 더 옹색해지고 승객들이 차문이 열리기를 눈이 까맣게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어디라도 가서 앉아야겠지. 이대로 서서 20분을 기다릴 수는 없지 않은가. 5분 전에 문을 연다고 해도 15분이 남아 있다. 사실 십여 분 동안은 잠깐이기도 하지만 담배 한 가치를 제대로 피우려고 해도 십여 분이 걸리는 것이 아닌가.
사방을 둘러봤다. 가운데에 빈자리가 보였다. 그쪽으로 서서히 다가섰다. 누가 먼저 그 자리에 앉으려는 것을 얼른 가서 앉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 자리에 지그시 눈을 부으면서 발을 옮겼다. 주저앉듯이 걸터앉았다. 엉덩이가 오목한 자리에 폭 안긴다. 딱딱한 촉감이 싫지 않게 받쳐왔다.
한산도를 꺼냈다. 두어 모금 가볍게 빨고는 깊이 들이마셨다. 시원하다. 온몸에 사르르 번져 갔다. 사지(四肢)가 나른해지고 눈이 감기는 것만 같다. 눈을 감으면, 포근하게 깊은 잠에 빠져들어가겠지. 먼 꿈속의 나라를 헤매면서 마음껏 노닐 수도 있고, 5월의 시원한 훈풍을 볼에 느끼면서 단잠에 포근히 잠길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한가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 어서 서울에 달려가서 형을 만나 봐야 한다.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도 서로 생사조차도 몰랐던 형 서태규(徐台圭)를 만나봐야 하는 것이다. 정말 그것은 형임에 틀림이 없다. 아무리 희미한 기억이라고는 해도 그 모든 것은 형의 그것에 틀림이 없다. 틀림이 없는 거야.
“여보, 당신 고향이 어디랬어요?”
그날은 좀 늦게 집에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려는데 아내가 호들갑스럽게 말하면서 빤히 쳐다봤다.
“고향이라니?”
재규(再圭)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아내를 쳐다봤다. 아니 난데없이 고향은 왜 찾는 거야. 고향?
“아니, 무어겠어요. 당신의 고향 말예요.”
“갑자기 고향은? 그것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글쎄 당신의 고향이 어디냐고 묻고 있잖아요.”
아내는 자못 긴장된 표정으로 앞으로 다가왔다.
“내 고향이라고? 그건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소.”
“아니, 누가 사리원(沙理院)이라는 것을 몰라서 물어 보는 줄 아세요? 사리원의 어디냔 말예요.”
“건 또 왜?”
“글쎄, 말이나 해봐요.”
“새삼 그걸 알아서 무얼 하겠다는 거요? 아닌 밤중의 홍두깨 모양으로.”
“다 필요해서 물어 보는 게 아닌가요. 마을 이름 대기가 무얼 그리 어렵다고 이렇게 방패를 대는 거예요?”
재규는 좀 쑥스러워졌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물어 보는 것은 뻔한 이친데, 이리저리 피하는 격이 되고 말았으니, 아내가 핀잔을 주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됐다.
“사리원 참 좋은 곳이지, 우리 마음은 바로 용수리라오.”
“용수리요? 됐어요.”
좀 신파조(新派調)가 되어 버렸다고 여겨지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내가 재규의 손을 잡으면서 외치듯 말했다.
“되다니, 무어가 됐다는 거요? 밑도 끝도 없이……”
재규는 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몰라요. 꿈에 그리던 형님을 만날 수 있을지 몰라요.”
“뭐 형님을? 여보, 말 좀 자세히 해봐요. 형님을 만날 수 있다니, 아니, 삼십 년 가까이 만날 수 없었던 태규 형님을 만날 수 있다니, 속 시원하게 말이나 해봐요.”
이번에는 재규가 더 흥분해서 아내의 손을 잡아당겼다.
“우선 앉아요. 내 차근차근하게 얘기할 테니 말예요.”
좀 상기된 아내도 재규의 손을 끌었다.
“오늘 낮에 누가 다녀갔는지 알아요?”
“알기는? 밖에 나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걸 아누?”
“가만있어요. 누가 그걸 물어 봤나요. 당신은 가만히 듣기나 해요, 오빠가 다녀갔어요. 마산에 좀 볼일이 있다면서 잠시 앉았다가 떠나셨는데요. 글쎄 오빠가 그러잖아요.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안 들었냐고요. 왜 당신이 허구한날 듣던 그 방송 말예요. 그게 지금도 있느냐고요. 그러믄요. 지금도 꼬박 방송하고 있다잖아요. 그런데 그 방송에서요, 당신이 찾던 형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거예요. 글쎄, 저녁에 좀 늦게 들어와서 말예요. 오빠는 왜 술을 좋아하잖아요. 그 술 때문에 가끔 올케가 바가지를 긁기도 하지만요. 옷을 갈아입고 무심히 라디오를 켰더니 사리원 어쩌구 얘기를 해서 귀를 기울여 보았다는 거예요. 당신이 하도 사리원 얘기를 해서 사리원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한 모양이죠. 어머님만 집에 남겨 두고, 피난했다는 말이며 대전 근방에서 폭격을 피하다가 헤어졌다는 말, 용수리에 있는 기와집에서 살았다는 말은 물론이고 서재규라는 당신의 이름도 같잖아요. 그러면서 형님이란 분이 직접 말하더라면서 형님의 이름은 서태규라고 하잖아요. 왜 당신의 태규 형님은 아마 폭격에서 희생된지도 모르겠다고, 절망 비슷하게 말한 그분이 틀림이 없대요. 이분의 친척이나 또는 그런 분을 아는 사람은 방송국으로 연락해 달라고 했다잖아요. 왜 그 전에도 끝에 가서 아나운서가 하던 말 말예요. 그러니 어서 방송국으로 연락을 해봐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이런 일도 세상에 다 있네요.”
아내는 차근차근히 말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고 보니 태규 형님 같은데.”
형님이 살아 있다는 말에 흥분되기는 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일같이 느껴졌다.
“같은 데가 뭐예요. 주소며 기와집, 그리고 어머님이나 헤어진 경위가 분명히 맞잖아요. 그리고 재규는 사십 안팎이라고 하더래요. 당신이 올해 사십이 아니에요? 모든 것이 다 맞는데 틀릴 게 어딨어요.”
십여 년을 같이 살아온 아내는 재규보다 더 흥분했다.
“그래도 만나 보러 갔다가 허탕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잖아.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
오히려 재규는 처음과는 달리 좀 냉정해졌다. 그래도 생활이 안정되고 결혼한 뒤에 방송도 많이 하고 신문에 내봤어도 전혀 소식이 없던 형님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이 도시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든 게 꼭 맞잖아요. 이제는 망향 동산에 갈 필요가 없게 됐네요. 큰집이 생겼으니 말예요.”
아내는 직접 만나기라도 한 듯이 기뻐했으나, 재규는 도시 꿈만 같아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직접 들은 것도 아니고, 당신의 오빠가 술김에 내가 늘 하던 말을 연상해서 잘못 들었을지도 모르지 않소. 이제 갑자기 형님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이상한 일이 될지도 모르잖은가.”
아내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재규를 쳐다보았다.
“사실 월남하다가 헤어져 서로 생사를 모르고 살아가는 실향민이 어디 당신 하나냐고 위로해 주신 말을 나는 잘 기억하고 있고, 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형님을 만나기만 하면야 얼마나 기쁜 일이겠소.”
“당신이 하도 애타게 만나고 싶어하기에 그러는 게 아니에요? 아무리 방송을 하고 신문에 냈어도 누가 그걸 일일이 보고 듣나요.”
아내는 희망적으로만 생각하면서 이번은 하늘에서 주신 기회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뜬눈으로 날을 새우고,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편지를 보내고 그 답신이 올 때까지 멍하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담당자가 적십자에 있다고 해서 연락이 되지 않았으나 11시쯤 해서 거는 게 좋겠다고 해서 다시 걸었다.
담당자의 말은 아내가 처남에게서 들은 말과 일치했다. 먼저 건강과 몰골을 물었으나 담당자는 지금 그런 것이 문제냐고 말하면서 그분에게 연락을 해서 만나는 시간을 알려 주겠다고 말했다. 재규는 태규 형님의 주소가 어디냐고 다그쳐 물었다. 그쪽에 연락을 하고 뭐해서 시간이 걸리는 것보다 직접 가보는 것이 빠르지 않겠느냐는 말에 담당자는 삼십 년 가까이 헤어져 있었는데 하루 이틀이 문제겠느냐고 농담 비슷하게 말하면서 오히려 이쪽 사정을 자세히 물었다. 아무리 이산가족이라도 만나게 하는 절차가 있고, 또 이쪽의 사정을 얘기해서 그쪽에 전달하여 만나겠다는 의사 표시가 있어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모양이다.
기다리는 시간은 하루가 여삼추(如三秋)하고 뱀과 같다더니 하루하루가 정말 견디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하루 이틀이 지난 다음에는 우체국에 가서 부탁까지 해놓았다.
아내는 꼼짝도 않고 전화 앞에 앉아 있었다.
일도 별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조그마한 공장이기는 해도 일은 손이 딸리게 밀렸다.
담당자가 하는 말을 듣고 내 동생 같지 않다고 만나기를 거부한 것일까. 그렇지 않고야 이렇게 까마귀고기를 먹은 듯이 소식이 없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경박스럽게 담당자에게 전화를 또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니 답답하기만 했다.
사실 집에 들어가면 아내가 더 조급해하고 있기도 하고 애들이 있고 해서 억지로 태연할 수밖에 없어서 더욱 가슴만 태울 뿐이다.
그러니까 어제 저녁때였다. 오늘도 무료히 지나가려니 하고, 창 밖의 먼 산을 바라보며 이번도 허탕인가 하고 담배만 피우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집이라고 했다.
“왔어요.”
아내의 호들갑스러운 말에 재규는 어리벙벙했다.
“뭐라고?……”
“서울에 와서 형님을 만나 보라고 통지가 왔어요.”
“뭐 통지가 와? 그게 사실이오?”
“아니, 당신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예요? 사실이 아니면 왜 전화하겠어요.”
아내의 좀 토라진 듯한 음성에 곧 들어간다고 말하고는 수화기를 놓았다. 몸이 좀 떨린다고 생각되었다. 도시 흥분이 가라앉지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내일 4시에 적십자 이산가족실에 와서 서태규씨를 만나 보라는 등기 편지를 보고도 흥분은 진정되지 않았다. ‘당신도 참 꿈에도 그리던 형을 만나 소원을 풀면 됐지 왜 그렇게 어린애같이 흥분만 하고 있느냐’는 아내의 말을 들으면서도 거의 뜬눈으로 밤을 세우고 말았다. 종잡아 말할 수 없는 단편적인 꿈속을 헤매다가 새벽에 집을 나섰다. 만나는 대로 연락해 달라는 아내의 말을 뒤로 하고 서울행 직행 버스를 탔다.
버스는 아직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육중한 몸으로 승객만 삼키고 눈 한 번 꿈쩍거리지 않는다.
쫓기어 타느라고 서성거리던 승객들이 시계를 보면서 초조하게 앉아 있다.
안내양이 무슨 통을 들고 올라오더니, 차내를 한 바퀴 돌아보고는 앞자리에 가서 앉아서는 무엇인가 만지고 있다. 구급약과 물통인 모양이다.
운전사는 아직 보이질 않는다.
재규도 시계를 보았다. 한 이삼 분 전이다.
잘도 지키는군, 좌석이 다 찼으면 떠날 만도 한 일인데. 시간 전에 떠날 수 없음을 모를 리는 없다. 그러면서도 재규는 조바심이 더했다. 어서 떠나야 되는 것같이 자꾸만 초침에 눈이 갔다.
아까 산 신문을 펴들었다. 굵직한 활자가 여기저기 번져 있을 뿐,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운전사가 들어왔다. 하얀 커버를 한 모자에 단정한 옷차림이다.
승객들의 눈이 활짝 피었다. 이제 떠난다는 기분이 감돌아 안도감이 스쳐가서인지 좌석을 바로잡는 사람이 많았다.
운전수가 핸들을 몇 번 잡으며 자세를 바로 하고 나서 발동을 걸었다. 발동이 순조로운 것을 듣고는 시계를 보았다.
가벼운 긴장감이 차내에 흐를 뿐 고요했다. 발동 소리만이 가볍게 울릴 뿐이다.
운전사가 초침을 응시했다.
서울행 버스가 떠난다는 안내양의 맑은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 왔다.
운전사가 기어를 넣고 서서히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차가 미끄러지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규는 아무래도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몸을 닦고 세수라도 하려면 좀 이르기는 해도 일어나야 될 것 같다.
“아버지, 일어서면 안 됩니다. 가만히 누워 계세요.”
제대하여 봄부터 직장을 잡은 기현(基鉉)이 만류를 했다. 오늘은 며칠 전에 처음 얘기를 들은, 이미 작은아버지가 되어 있을 삼촌을 만나러 아버지를 모시고 가려고 하루 휴가를 맡아 집에 있었다.
태규는 아무래도 생전에 재규를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방송국을 찾아갔었다.
사실은 금방 고향의 부모와 친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 속에 떠들썩하던 남북대화가 있기 조금 전에, 재규가 형을 찾는 방송도 듣고 신문도 난 것도 보았으나 이를 꾹 참고 만나지 않았다. 집도 없이 남의 집에서 허덕거리는 꼴을 보여 주어 재규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들이 어렸을 때 월남 얘기가 나와서 삼촌과 같이 나오기는 했어도 폭격을 맞아 혼자 넘어오게 되었다고 말은 했지만, 그 재규가 살아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 재규가 이산가족찾기 시간에 형 서태규를 간절히 만나기를 절규하는 소리를 못 들은 체하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잘 살고 못 사는 법도 있는 것이 예사인데, 동생을 만나지 않고 못 들은 척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라고 스스로 타일러 보았으나 아무래도 용납되지 않았다. 사업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고 해도, 하던 일이 몇 번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전셋집에서 살아가는 처지에 무슨 동생을 만나 보느냐고 자위를 하면서 다시 일어서면 이쪽에서 찾아야겠다고 다짐까지 했다.
젊어서 정신 못 차리더니 꼴이 좋다고 소리 지르는 아내에게 동생이 살아 있으니 만나야겠다는 말이 나올 수도 없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게 마련이다. 결국 사업도 여의치 않아 술에서나 위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기현은 겨우 고등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하고 입대하고 중학교를 다니는 기숙(基淑)과 셋이었으나, 어떻게 되어 가는지 기숙의 뒤를 대기도 가빴다.
술을 끊지 않으면 제 명대로도 살지 못하고, 망향의 제사 한 번 못 지낼 것이라고 퍼붓는 아내의 말도 아랑곳없이 술을 떠나지 못했다. 그것도 옛날 사업이랍시고 할 때와는 달리 깍두기에 깡소주를 마시니 더욱 몸이 축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같이 월남한 친지 중에는 소문나게 돈을 벌어 사는 자도 없지 않으나 태규는 월남한 그때부터 벗어 부치고 나서지 못한 그 하나 외에는 자기 생활을 별로 후회해 본 적은 없었다. 몸이 점점 쇠약해져 작년 가을부터는 일터에 나가지 못하는 날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겨우내 기침을 하면서 겨우 넘긴 태규는 봄부터 일제 술을 끊고 집에 있었다.
작년에는 아내가 어떻게 행상을 해서 겨우 연명하다가 봄에 기현이가 그런 대로 취직을 하여 먹고 사는 시름을 놓게 되었다. 기숙은 억지 춘향으로 여고에 다니기는 해도 별로 얼굴을 펼 날이 없었다.
기현이 취직이 되자 넌 대학에 보낸다고 큰소리를 하고 있으나 기현의 월급으로는 택도 없는 일이다.
여름에 접어들면서 몰골이 눈에 띄게 달라져 갔다. 기현의 월급을 떼어 약값까지 쓰고 봐도 별 신통한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없는 사람은 여름이 낫다더니 별로 장마철도 없고 해서 아내의 행상이 수월찮게 태규의 약값을 메꾸어 나갔다.
사실 술을 끊었다고는 해도 이미 술로 망가진 뒤고 보면, 술을 끊은 것이 큰 효험을 볼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러기에 망가지기 전에 몸은 아껴야 한다고 말해지지 않는가.
찬바람이 일면서 건강이 더 좋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모처럼 가끔 가던 산마루에 올랐다. 초가을답지 않게 따가운 햇볕을 받으면서 서쪽 산을 바라봤다. 수리산이다. 별로 높지 않은 것 같으면서 묘미가 있어 보였다. 멀어서 알 수는 없으나 나무가 좀 많은 것같이 보였다.
태규는 문득 그 자리에 눕고 싶어졌다. 풀을 헤치고 반듯이 누웠다.
하늘이 파랗다. 벌써 여름보다는 꽤 짙게 보였다.
푸른 하늘! 금시 파란 물이 떨어질 것 같다. 하늘은 여전히 푸른데, 이 서태규는 어떻게 되는 건가. 삼십 년에 가까운 월남 뒤의 생활이 화면같이 스쳐갔다.
태규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너무도 보잘것없는 삶의 도정에 대한 애달픈 후회가 서리는 것일까. 아니면 자조에 겨운 허탈의 웃음소리인가. 문득 사리원 용수리의 기와집이 눈앞을 스쳤다. 탱자나무로 둘러싸여 있고, 대문을 들어서면 널따란 마당에 감나무가 서 있으며, 가을 꽃이 피기 시작하고, 중문을 나서면 바깥마당이고 사랑방의 마루가 나오고…… 그래 그래, 마당의 동쪽에 방앗간이 있고, 뒤쪽은 산의 낭떠러지고 그 낭떠러지 위엔 잡목이 우거져 울타리를 만들어 주는 산, 아냐 아냐, 저건 문전옥답이 아닌가. 포근히 안아주는 집은 여기뿐이던가.
태규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아아, 고향 사리원에 날아가 집안 식구들이나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라도 하는지 가끔 입가에 미소가 스치곤 했다.
얼마 지나 태규는 소스라쳐 눈을 떴다. 사리원 옛집의 대문이 열리지 않아 실랑이를 하다가 못해 몸으로 부딪치는 순간 잠이 깬 것이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몸을 가누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고향이야, 고향. 불현듯 가보고 싶은 충동이 용솟음쳤다. 매년 추석 때 실향민들의 합동 성묘가 있을 때도 그렇게 간절하게 고향이 그립지는 않았다.
그 뒤에 한두어 번 더 산마루에 올라가서는 두서너 시간씩 있다가 내려왔다. 그때마다 열 세 살의 재규의 모습이 가슴을 눌렀다.
며칠을 더 참아 봤다. 이 꼴을 하고 만날 수야 없지 않은가. 차라리 보이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그런 생각은 잠시 동안 스칠 뿐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가슴을 메웠다. 같이 만나서 같이 북쪽을 바라보면서 옛날 얘기라도 나누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제는 더 망설일 것이 없었다. 재규는 만나야 한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방에 다 들어오라고 했다. 방이라야 아래채에 있는 두 개뿐이었다.
자리에 앉아 모두가 의아스러운 눈으로 태규를 바라봤다. 눈이 들어간 몰골이 더욱 수척해 보였다.
“기현아! 추석이 며칠이나 남았니?”
태규의 말에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추석은 또 왜요? 저기 달력이 있잖아요.”
아내가 먼저 태규의 옆으로 다가왔다.
“누가 그걸 모르나, 한 보름 남았지.”
숨을 쉬고 나서 태규는 아내, 기현, 기숙의 얼굴을 둘러봤다.
“올해는 기쁜 추석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너희들이 나를 도와주어야겠다.”
“아니, 무슨 일인데요, 아빠?”
기숙이가 먼저 앞으로 다가섰다. 기현의 눈빛이 자못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건 나 혼자 간직하고 가려던 일이다만……”
엄숙한 음성이 방안을 누볐다.
“아니, 당신 무슨 말을 하려는 거예요, 여보?”
아내가 놀란 빛으로 태규의 손을 꼭 잡았다.
“놀랄 것은 없다. 사실은 내가 죄를 짓고 있다. 일이 있어서 말이다. 어디 세상에 죄를 안 짓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만, 이것만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기현이도 앞으로 다가서며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봤다.
“자, 가만히 듣고만 있어라.”
태규는 자세를 가다듬고나서, 재규의 일을 소상하게 얘기했다.
“그때 만나지 못한 것이 철천지한이다. 쉽게 사업이 복구될 줄 알았던 것이 이렇게 세월만 흐르고 말았다. 엄마에게나 너희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은 죄를 용서해라. 하지만 사실은 나이 많은 형으로서 떳떳하게 아우를 만나고 싶었고, 너희들에게 뵈고 싶었던 것이다.”
라고 말하는 태규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제는 병들어, 더 이상 참고 견딜 수가 없어서 말하는 것이니, 너희들이 좀 도와서 삼촌을 찾게 해달라는 말과 지금쯤 자리를 더 확고하게 잡고 있을 터이니 이산가족찾기 시간에 부탁하면 이번 추석 때는 만날 수 있으리라는 얘기를 했다.
“아빠도 바보야. 아니, 월남할 때 헤어진 동생을 피하다니요.”
먼저 기숙이가 입을 열었다.
“아니, 그걸 여태 숨겨오다니요. 그래도 형의 체면은 지키고 싶었던 모양이지?”
아내는 섭섭한 표정으로 한마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미안하다. 그래두 사람구실을 하려던 아버지가 그런 것이니, 날 좀 도와다오.”
기현이가 앞으로 다가서며 아버지 손을 꼭 붙잡았다.
결국 이산가족찾기 시간에 방송이 나갔다.
사나흘이 지나자 태규는 초조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소식이 오면 다행으로 알고요, 몸이나 조심하세요.”
라고 말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다시 산마루에 올라가서 허전한 심정으로 수리산을 보면서 회오어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니까 바로 나흘 전, 동생의 소식이 왔다고 적십자사에서 통지가 오던 날이었다.
그날도 낮에 산마루에 올라 멍하니 먼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송만 나가면 금세 소식이 올 줄 알았던 기대가 산산조각이 나는 듯하자, 그때 만나지 않은 것이 가슴에 사무쳐왔다. 벌을 받아야 돼. 받아도 싸지. 재규가 어머니를 모시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때 혼자 남아 있었지만, 또 모를 일이다. 난 휴전선보다 더 두터운 장벽을 마음속에 쌓아놓고 있었다는 말인가. 재규야! 말 좀 해봐라. 어딘가에 있으면 대답을 좀 해보란 말이다.
몸이 오싹했다. 또 오한이 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다가 더 견딜 수가 없어서 산을 내려왔다.
집이 가까워지자, 좀 어지럽다고 생각되었다. 발을 멈추고 몸을 가다듬었다.
“아빠…… 소식이 왔어요.”
누가 달려오면서 말했다.
“뭐, 소식이라니?”
제일 먼저 집에 오는 기숙이다.
“삼촌 소식이 왔어요, 삼촌요.”
“뭐? 재규가 살아 있다고? 그게 정말이야, 응?”
말을 마치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동네사람에게 업혀왔다. 얼마 뒤에 정신이 들었으나 그대로 눕고 말았다.
“당신은 그대로 누워 있어요. 기현이와 내가 다녀올께요.”
아내가 기현이와 같이 그대로 누워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무슨 소리…… 그 애 얼굴은 나만 아는데 누가 간다는 거요.”
사실은 그래도 저런 몸으로 일어선다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버스를 타고 갈 기력도 없거니와 저런 가쁜 숨으로 어떻게 사람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안 된다. 내가…… 가야 한다. 어서 채비를 차려라.”
일어서려다가 주저앉았다. 아내가 부축하여 겨우 몸을 일으켰다.
“고집 좀 부리지 말고 제발 누워 있어요. 무엇하면 그 사람을 집에 오게 해서 보면 될 게 아뇨.”
“염려 없어요. 내 이래도 아직 자신이 있다고.”
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았다. 아내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제법 화기가 돋아 오를 것 같이 보였다.
옷을 다 입고 일어나려다가 옆으로 쓰러졌다.
“여보! 기현아버지!”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기현은 얼굴이 하얘진 태규를 안아다 뉘었다.
고속버스는 산간을 누비면서 멋있게 달려갔다.
재규는 가벼운 기분으로 창 밖을 응시했다.
햇빛이 따끈하게 결실의 가을을 어루만지고 있다. 그 빛에 산야가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모양이다. 하얀 고속도로가에 펼쳐지는 들은 결실의 황금빛이요, 산과 마을도 온통 노란빛이다. 벌써 벼를 베는 모습도 보인다. 통일벼나 유신벼인가 보다. 어렵게 개발한 다수확의 품종이다. 벼이삭이 잘 떨어지고 밥을 지으면 좀 차지지 못한 것이 흠이기는 해도 재래종보다 훨씬 많은 수확고를 올리고 있어 장려되고 있는 품종이다.
재규는 한산도를 꺼내 물었다. 깊이 들이마셔본다. 구수하고도 시원했다. 온몸이 나른해지는 것 같다. 그 기분을 따라 무엇인가 바시시 솟구쳐 가슴에 다가왔다.
“자, 아무 염려 말고 떠나가거라.”
형은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태규야, 재규를 부탁한다.”
“안 됩니다. 어머니도 같이 가야 합니다.”
“무슨 말이 이렇게 많으냐. 어서 가지 않으면 우리 집안은 대가 끊기고 만다. 어서 가는 것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효도다.”
“하지만……”
“내 걱정은 마라. 난 우리 대대로 선조가 살던 마을과 집을 봐야 한다.”
멀리서 포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아마 전선이 가까워지는 모양이다.
“사리원은 우리 가문의 고장이다. 그걸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
“어머니, 그럼 부디 안녕히 계셔요.”
“오냐! 잘 가거라.”
형이 어머니의 손을 한참 만지면서 그대로 서 있었다.
“뭣하느냐, 속히 가지 못하고……”
그제서야 형이 재규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머니께 인사해라. 그리고 어서 가자.”
얼른 등뒤에 숨었다.
“엄마! 난 안 갈래요, 엄마하고 같이 있을래요.”
“재규야, 이러면 엄마가 화내신다. 어서 형과 같이 가는 거야.”
형이 부드럽게 말했으나 엄마 손을 꼭 잡았다.
“엄마! 안 가도 되지? 난 엄마하고 있을래요.”
그때 엄마가 무섭게 눈을 뜨고는,
“어서 형과 같이 가라. 안 가면 때려주겠다. 태규야! 어서 데리고 가거라.”
라고 매섭게 말했다.
“어서 가자, 재규야……”
엄마를 살금살금 보면서 형의 손에 끌려갔다.
“태규야, 재규 부탁한다……”
엄마가 획 돌아서며 얼굴을 가렸다.
대포소리가 또 요란하게 들려왔다.
“엄마, 가고 싶지 않아!”
한 번 크게 외치면서도 형의 옆에 바싹 다가서서 따라갔다.
다시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자연紫煙이 공중에서 맴돌았다.
어머니의 그 돌아서서 울던 모습이 또 한 번 눈앞을 스쳐갔다.
어머니! 가만히 불러봤다. 오래간만에 불러보는 말이다. 어머니!
수없이 불러본 말이건만,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건 아주 먼 나라의 말인지도 모른다.
그 기와집은 어떻게 되었을까. 대추는 지금쯤 붉게 익어가겠지. 그런데 태규형은 얼마나 변했을까. 눈썹이 유난히 많고, 주먹코가 아니었던가. 아니지, 삼십 년 가까이 되었으니 봐도 알아볼 수가 없지 않을까. 하나도 분명한 기억이 없지 않은가. 고스란히 남아 있을 수가 없지. 그 이십 몇 년은 그대로 지나간 세월이 아니다. 아니고말고, 하루가 십 년같이 보낸 나날이 아니었던가.
태규형은 이 재규를 알아볼까. 열서너 살의 소년이 사십이 넘었으니, 그새 변해도 몇 번 변한 것이 아닌가. 사십이 된 얼굴에 열 몇 살의 인상이 남아 있을까. 없을 거야.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옛날같이 미군의 하우스 보이로 같은 부대에 있었던 애들도 서로 몰라보는데, 기와집 도령의 옛모습이 남아 있을 턱이 없다.
또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들과 산의 노랑색이 그저 눈앞에 어른거려 지나갔다.
그럼 어떻게 서로 알 수 있을까. 태규형은 그때 벌써 어른이니까, 옛날 모습을 지니고 있겠지. 있을 거야. 하지만 누구나 고생을 한 때니 만큼 아주 몰라보게 변해 있을지도 모르지. 말을 해보면 알 수 있을까. 음성은 기억이 없다. 아참 태규형은 웃을 때 이가 많이 나오는 편이었던가. 뉘 귀가 크냐고 서로 자랑도 했으니, 아마 귀도 클 거야.
사르르 눈이 감겼다.
“재규야, 어서 와! 어서……”
수원을 지났다고 했다. 발이 부르터서 걸을 수 없다고 떼를 쓰는데 태규형이 갑자기 일어났다.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 모양이다.
사실 눈으로 뒤덮인 산을 바라보며, 어딘지도 모르고 형을 따라가는데 죽을 것만 같았다. 수많은 피난민이 질서 없이 남쪽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자, 어서 저길 가보자.”
태규형은 어서 일어나라고 했지만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때 비행기 소리와 함께 콩 튀기는 소리가 났다. 기총소사였다. 어떻게 달아나서 엎드렸는지 몰랐다. 잠시 후 저쪽 언덕 위에서 태규형이 손짓을 하면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태규형 쪽으로 가겠다는 순간 또 비행기 소리가 났다. 마구 아무렇게나 달렸다.
이번은 한두 대가 아니었다. 사방에서 거미알 떼같이 달려들어 퍼부어댔다. 어디를 보고 피할 틈도 없었다. 태규형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언덕 밑을 타고 마구 달려갔다. 숨이 가빠졌다. 얼마 가다가 무엇이 발에 부딪쳤다. 그 자리에 쓰러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몰랐다. 눈을 뜨고 보니 사방이 조용했다. 겁이 났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봤다. 달이 비치고 있었다. 고개를 움츠렸다. 다시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달빛이 눈을 비치고 있을 뿐 사람은 그림자도 없었다. 풀썩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났다. 태규형을 찾아야 한다. 어서 태규형을 찾아야 되는 거야.
“태규형! 태규형!”
목이 터지게 부르면서 도로를 찾아 걸어갔다. 이리 가면 태규형이 있을 거야.
“태규형! 태규형!”
뒤에서 트럭이 멎었다. 미군이었다. 그 트럭 위에 실렸다.
트럭 위에서도 도로변을 두리번거렸다. 영 태규형은 보이지 않았다.
태규는 눈 속을 헤맸다.
비행기가 사라지자, 피난대열은 또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저만치에 엎드리고 있는 줄 알았다. 그 사이 갈 만한 거리를 두고 다 찾아봤으나 보이지 않았다.
“재규야! 재규야……”
아무리 불러봐도 소용이 없었다. 사상자를 정리한 피난대열이 마지막 떠나고 있었다.
“재규야! 재규야!”
태규는 목이 터지게 부르며 헤매었으나 재규는 나타나지 않고 피난대열의 인영이 멀어졌다. 할 수 없이 그 뒤를 따라 뛰어갔다.
“재규야!”
태규가 신음 비슷하게 외쳤다.
“아버지! 정신차리세요.”
“여보! 기운을 내요.”
기현이와 어머니가 태규의 숨소리를 지켜봤다.
3시가 좀 지나서 강남터미널에 내렸다.
도시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별로 와보지 않은 서울이기는 해도, 이렇게 생판 모르게 변할 수가 없다.
수많은 고속버스가 넓은 광장에 정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끝없이 들어오고 새로 나갔다.
잠시 서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방향이 어디고, 어떻게 변했느냐보다 적십자사로 찾아가는 일이 급했다.
“택시는 어디서 타는가요?”
옆을 지나는 젊은이에게 물었다.
“택시요? 따라오세요.”
그 젊은이의 뒤를 따라갔다. 한참 걸어가더니, 사람들이 서 있는 대열에 이어서 섰다. 재규도 그 뒤에 섰다. 철책이 쳐 있었다.
“줄을 따라가자면 한 시간 이상 걸릴 거예요. 적당히 합승을 해서 가세요.”
청년은 말을 던지고는 철책을 넘어 서서히 가는 택시에 무어라고 하고는 그 차를 타고 가버렸다.
실로 잠시 동안이다. 몸에 밴 익숙한 행동이다.
대열이 조금씩 앞으로 밀려갔다. 좀 가다가는 멈추고 또 있다가 조금 가곤 했다.
가끔 철책을 넘어가는 사람이 보였다. 그것을 보면서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공중도덕은 그만두고라도 여러 사람 앞에서 태연히 철책을 넘어갈 수도 없고 또 서서히 가는 택시에 어디 간다고 사정하다시피 하여 탈 수도 없는 일이다.
시계를 굽어보았다. 벌써 30분이 지났다. 앞은 아직도 멀리 보였다. 이럴 수가 없는데, 이렇게 승객이 빠져나가지 못할 수가 없는데, 버스로 가겠다고 줄에서 빠져나가는 사람도 있다. 몇 번이고 철책을 뛰어넘으려다가 그만두었다. 그까짓 것 철책을 뛰어넘는 것은 식은 죽을 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태규 형님! 조금만 기다려요.
입속으로 말하면서 서서히 움직이는 줄을 따라갔다. 겨우 차례가 되어 바삐 탔다.
“적십자사요? 제2한강교로밖에 못 가는데요.”
운전사의 퉁명스러운 말에,
“아무튼 빨리만 갑시다.”
라고 말하고는 시계를 보았다. 벌써 15분이 아닌가.
-태규 형님! 조금만 더 기다려요.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면서 차창을 바라봤다.
택시는 달려 제2한강교를 건너더니 곧장 나가다가 남산을 감돌아갔다.
태규형을 만나면 무어라고 할까. 머리가 멍할 뿐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한강과 시가가 한눈에 보였다. 특히 굽어보이는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남산을 감돌더니 다시 굽이쳐 내려갔다. 태종대에 비길 바는 못 되어도 굽이쳐 돌아가는 길이 꽤 멋이 있다. 그 길가 남산이 곱게 단풍져 가고 있다.
흰 건물 앞에 차가 멎었다.
택시에서 내리자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수위의 말이 끝나자 바삐 층계를 밟았다.
층계를 오를수록 가슴이 마구 뛰었다. 숨을 모두면서 마구 층계를 밟았다.
도어 앞에 섰다. 형과 담당자가 눈이 까맣게 기다리고 있겠지 노크를 하자 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머뭇했다. 심호흡을 하고는 도어를 밀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서재규씨죠?”
의자에 앉아 있던 조그마한 담장자인 듯한 사람이 권과장이라고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재규는 발을 멈칫했다. 실내에는 권과장 외에는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아, 형님이 왜 없느냐는 표정이군요. 우선 이리 와 앉으세요.”
재규는 권과장을 보면서 의자에 앉았다.
“사실은 태규씨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개 미리 와서 기다리는 것이 상롄데……”
말끝을 맺지 않는 것이 좀 이상하다는 표정이다.
“무슨 연락도 없었나요.”
재규가 다급하게 묻자 권과장은 고개만 끄덕이면서 말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재규씨도 삼십 분 이상 늦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먼데서 오는 사람과 같습니까. 서울이라면 아무리 늑장을 부려도 이렇게 늦을 수가 있습니까.”
권과장의 침착한 모습에 좀 마음이 가라앉기는 했으나, 왠지 불안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자, 커피나 드시면서, 옛날 일이나 회상해 보세요. 그러면 별로 지루한 줄을 모를 겁니다.”
따끈한 커피를 마시니 한결 안정되는 듯했다. 그래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자, 인제 곧 형 되시는 태규씨가 나오실 것입니다. 아침부터 와서 기다리는 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섯 시가 지나자, 재규는 초조가 더해졌다.
“혹시 그 사이에 무슨 연락이 있는지 알아봐 주실 수는……”
“아, 염려 마십시오. 연락이 오면 다 이쪽으로 소식이 오게 돼 있습니다.”
“권선생님……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겠습니까. 직접 찾아가는 것이 어떨까요?”
재규는 권과장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염려 마십시오. 조금 기다리다가 소식이 없으면 같이 가보시죠.”
침묵이 흘렀다. 재규는 연방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시간은 마구 흘러갔다.
“할 수 없군요. 일어서서 가보실까요?”
권과장의 말에 일어서 몇 발자국 떼어놓는데 문이 열렸다.
“권과장님! 오셨습니다.”
직원이 들어와서 머리를 굽혔다.
두 사람의 눈이 빛났다.
“어서 들어오시라고 해요.”
재규의 가슴은 또 뛰기 시작했다. 태규 형님을 보고 무슨 말을 하지? 무어라고 해야지?
직원이 나가자 다시 문이 열렸다.
재규는 두어 발자국 앞으로 다가섰다. 태규 형님, 옛날 그대로일까.
문을 밀면서 기현이 들어왔다. 가슴에 무엇을 안고 있다.
“아니, 이건……”
재규는 우뚝 그 자리에 멈추었다.
기현이 조용히 앞으로 걸어왔다. 재규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아버님이십니다.”
재규를 바라보면서 기현이가 나직이 말했다.
재규는 눈앞이 캄캄하고 정신이 아찔했다. 몸을 바로 가누고 눈을 다시 떴다. 영정(影幀)이 번히 떠 보였다. 망연히 바라보았다. 주먹코며 이마며 얼굴 모습이 태규 형님이 틀림없다.
“오늘 정오에 가셨습니다. 제 손을 잡으시고 ‘재규야’라고 부르면서 운명하셨습니다.”
기현의 말이 떨어지자 재규가 무릎을 꾸부리고 영정을 응시하다가는,
“형님! 태규 형님! 재규가 왔습니다. 재규가요!”
채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영정을 안고 뒹굴었다.
“태규 형님! 재규예요, 재규…… 말 좀 해봐요, 재규를 불러봐요, 네? 형님!”
“작은아버지!”
망연히 서있던 기현이도 영정을 안고 뒹구는 재규를 부여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작은아버지! 왜 일찍 오지 않았어요, 네?”
“형님! 굽어보지만 말고 말씀 좀 해봐요. 말씀을요, 형님……”
“아버지! 작은아버지예요.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작은아버지예요.”
재규와 기현이 영정을 부여잡고 뒹굴며 울부짖는 소리가 실내를 메아리쳐 창 너머로 번져갔다.
첫댓글 교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