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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개척1주년 주일메시지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 1:28)
오늘은 감사주일이면서 경기대 개척1주년 되는 날입니다. 우리는 각자 감사제목을 3가지씩 찾아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감사제목을 따로 발표하는 대신 창세기 1:28 말씀을 메시지로 준비했습니다. 이 말씀은 지난해 개척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제게 주셨던 말씀이고 이 말씀 속에 저와 우리 모두의 세 가지 감사제목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28a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합니다. 여기서 ‘그들’이란 하나님이 ‘자기 형상 대로’ 만든 사람이고 남자와 여자 ‘두 사람’입니다(27). 우리가 알다시피 그들은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셨는데 그 복은 무엇을 주겠다거나 어떤 일을 보장해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명령’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태초에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복이 ‘명령’이란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명령’이 복이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는게 복이고 많은 소유가 자신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 없는 소유는 반드시 인간을 얽어매고 파괴시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명령이야 말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축복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태초에 인간에게 복으로 주신 명령이 무엇입니까?
첫째, 땅에 충만하라(28a).
28a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은 태초에 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하십니다. ‘생육’이란 자녀를 낳아서 기르라는 말이고 ‘번성하라’는 말은 그렇게 낳고 기르는 일을 계속 함으로써 숫자를 늘이라는 말인데 목표를 어디까지 두셨느냐하면 ‘땅에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즉, 지구를 가득 채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온 땅을 사람들로 충만하게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 명령을 ‘딱 한 가정’에게 맡기셨습니다. 최소한 각 나라별로 한 가정을 두시던가, 좀 더 신경을 쓰셔서 도시나 마을마다 한 가정씩을 만들어 두셨다면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좀 더 빨리 그리고 안전하게 성취되었을 것이었습니다. 한 가정이 타락할 경우에는 그 가정을 심판하고 다른 여러 가정들을 잘 살려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효율적이거나 안전한 방법을 택하지 않으시고 오직 한 가정을 만드시고 그 가정에게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말2:15)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을 만드셨고 ‘한 아내’를 사랑하도록 하셨고 그로부터 ‘한 자녀’를 낳아서 기르도록 하셨습니다. 경건함은 어디서 비롯됩니까?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데서 시작하고 ‘한 사람’의 아내를 사랑하는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자녀를 낳아 정성스럽게 키우는데서 시작합니다. 대량 생산하려는 마음속에 욕심이 틈타기 쉽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사랑하려 할 때에 사람이 경건하고 순수해 집니다. 대박 내려는 사람은 종종 욕심 부리고 편법을 쓰지만 이삭을 한 알씩 주워 모으던 룻이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한 사람의 자녀를 얻기 위해 얼마나 애가 탔습니까? 그러나 그 때문에 또 그는 얼마나 경건해졌습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한 사람을 통해서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여행하실 때 한 사마리아 여인을 힘을 다해 도우셨습니다. 한 사람이 적은 것 같았지만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온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한 사람의 가능성을 보셨고 세상만민을 구원하려는 큰 비전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을 돕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한4:35b) 한 사람을 통한 세계비전, 이것은 창세기 1:28절로부터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오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비전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한 사람 아담에게서 시작하셨고 믿음의 역사를 한 사람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만민 구원역사를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셨습니다.
우리가 ‘온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한 사람의 소중함과 가능성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먼저 주시는 신령한 복입니다. 우리는 지난 1년간 한 사람을 세우려 씨름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한 사람도 제대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사람 세우는 일이 어렵다는 것과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가를 배웠습니다. 어떤 개척목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3년 반 동안 개척역사 섬기면서 한 가지 배운 것은 한 사람을 세우는 일의 중요성이다” 또 다른 개척목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척을 나와보니 정말 한 사람의 중요성이 몸소 느껴진다” 이 두 분은 참으로 귀한 진리를 배웠고 그래서 개척역사의 기초가 든든하리라 믿습니다.
저는 소위 UBF의 부흥기에 센타에 나왔습니다. 제가 센타에 나왔을 때 동기가 열 명 넘었고 인턴생활할 때는 저를 돕는 풀타임 목자가 열 명이 넘었습니다. 저는 사람귀한 줄 몰랐고 사람을 함부로 대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개척을 나온 후 한 사람이 귀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 마음이 전보다 더 간절해지고 경건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는 얼마나 신령한 복인지요? 저에게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과 한 사람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땅을 정복하라(28b).
28b절을 봅시다. “땅을 정복하라” 하나님이 주신 두 번째 명령, 즉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생육하고 번성하여 늘어난 사람들이 현재의 터전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계속 한 곳에 머물러 살고자 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땅을 정복할 수 없습니다. 이동하려면 먼저 안정된 터전을 버리고 떠나는 아픔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낯선 곳에 가서 그곳에 정을 붙이고 살아야 하고 또 그곳을 개척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노동을 감당해야 합니다. 정든 사람들을 떠나는 아픔과 정든 고향을 떠나는 아픔이 얼마나 크고, 또 새로운 곳을 개척하는 수고는 얼마나 큽니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라별로 또는 도시별로 미리 한 가정씩을 고루 세워두었다면 떠나는 아픔이 적고 또 개척하는 수고도 훨씬 줄었을 터인데 한 지역에서 한 가정을 기초로 인류의 역사가 출발했기 때문에 인류역사는 끊임없는 개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개척을 시작한 가정은 가까운 곳으로 가면 되지만 나중에 개척을 시작한 가정은 더 멀리, 더 높이 가야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은 범죄 이전부터 이미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이동하고 새로운 정착지를 찾도록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역사가 개척정신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 생각하셨고 개척정신을 통해 당신의 창조역사를 성취하려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개척할 때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능력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형상이란 다른 말로 ‘창조주의 형상’이고 창조주의 형상이란 한마디로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창조하는 능력이 이미 만들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발휘될 수 없습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데 창조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 데서라야만 비로소 인간의 창조성이 발휘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기초도 없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일 - ‘맨 땅에 헤딩하는 일’이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이를 ‘창조적 고통’이라 합니다. 창조적 고통에는 먼저 시행착오가 있습니다. 시행착오란 쉽게 말하면 ‘끊없는 실패’를 맛본다는 뜻입니다. 요즘 김태헌 목자는 새로운 무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는 제대로된 회로판을 하나 만들기 위해 회로를 설계한 후 납땜을 하고 점검하고 다시 수정하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런 시를 노래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하나의 회로판을 만들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창조를 위한 또 하나의 고통은 ‘막막함’입니다. 창조란 없는데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뭘 어찌해야 할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머리를 쥐어뜯습니다. 그런 시간을 보내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시인들이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 밤새 아파하듯 창조하는 사람들은 막막한 시간을 보내며 아파합니다. 그러나 그 아픔 속에서 창조성이 싹을 틔웁니다. 그 아픔 속에서 줄기와 가지가 뻗어나고 모든 가능성이 꽃을 피웁니다. 그렇게 인간에게 주신 가능성을 꽃피우는 일이야 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행복입니다. 창조의 고통 속에 큰 일을 하고 나서 사람들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이게 제가 한 일이 맞습니까?”
우리 삶에서 가장 큰 고통은 단순하고 일상적인 일들 속에 가능성을 썩히는 것입니다. 가장 큰 행복은 아픔 속에 성장하여 가능성을 꽃피우는 일입니다. 사람이 하루 하루 일상적인 삶을 사는 일은 얼마나 무료합니까? 그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인간은 육체적이고 말초적인 향락을 좇고 그러다가 쓸모없는 존재가 되버립니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위대했던 로마가 타락의 극치를 달리며 망했던 이유가 바로 로마 특유의 개방성과 창조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라 지적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볼 때, 사람들이 추구하는 안정이나 편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무서운 독소입니다. 반면 이별의 아픔이나 개척의 수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신령한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00년대를 넘어서며 우리는 전혀 새로운 세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전에 선배들이 돕던 방법으로는, 또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는 양들을 제대로 도울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익숙하던 캠퍼스를 떠나 전혀 새로운 캠퍼스로 와서 고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민하고 고전할 수 있다는게 복입니다. 하지 못하던 일을 해내야 하고 우리 안에 잠재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어설프게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는 일이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게 축복입니다. 지난 1년간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습니다. 양들을 위한 문제지도 만들어 보고, 핏싱도 좀 달리해보고, 창조특강도 해보고, 성경통독도 했습니다. 지금은 독서법을 연구하고 코칭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영어공부에 대해서도 새롭게 접근하려 합니다. 모든게 어설프기 짝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어보입니다. 그러나 새롭게 연구하고 도전할 수 있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가 창조적 고통을 사랑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언젠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이 역사가 우리가 한 일이 맞습니까?”이렇게 감격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28c).
28c절을 읽어봅시다. “바다의 고기와 하늘에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생물들은 바다의 고기, 하늘의 새,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입니다. 하나님이 생물을 만드실 때 ‘각기 종류대로’ 다양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식물 하나만 해도 35만 종, 그 형태는 수백만 가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모양과 크기, 색깔, 향기, 용도가 각양각색으로 다릅니다. 어떤 것은 열대성 기후에 맞게 설계되었는가 하면, 어떤 것은 고지대에, 어떤 것은 저지대에 맞게 설계되었습니다. 같은 정원 내에서도 분꽃은 오후 4시에 피는가 하면 선인장은 한밤중에 피어납니다. 어떤 넝쿨은 시계방향으로, 어떤 넝쿨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감으며 기어 오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생물을 다스리려면 먼저 생물들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각자에게 맞게 잘 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개척을 시작할 때, 우리는 몇 그루의 화초를 선물 받았습니다. 그중에는 한 달에 물 한번만 주고 내버려두어도 잘 자라는 고무나무가 있는가 하면 추위에 약한 금전수도 있고 습도에 민감한 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화초를 고무나무 다스리듯 했습니다. 그러자 금전수가 얼어 죽고 난은 말라 죽었습니다. 우리가 한 두 그루 화초 가꾸는 일도 이렇게 귀찮을진데 35만 종이나 되는 식물뿐 아니라 수백만종에 이르는 동물들을 모두 다스리자면 어떠하겠습니까?
이번 주 <이기는 습관>의 저자 전옥표씨가 경기대에서 특강을 했습니다. 그는 필승 마케팅의 비결이 3권의 두꺼운 대학 노트에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노트는 전공노트요 둘째 노트는 Presentation 노트, 그리고 세 번째 노트는 품격 노트라 했습니다. 이 3권의 노트 속에 고객에 관한 모든 정보, 자기 상품에 대한 모든 정보가 있고 고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3권의 노트를 통해 고객들을 잘 다스렸습니다. 우리가 모든 생물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배우고 정리하여 기록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캠퍼스 양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떤 노트가 필요할까요? 66권의 성경 말씀을 잘 정리하고 기록한 일대일 노트가 필요하고 또 양들의 형편이나 기도제목을 정확하게 정리한 기도노트가 필요할 것입니다. 또한 시간과 사명 관리를 위한 노트 - Flanklin Planer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리만 잘 한다고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는 수준-지식의 수준-을 넘어서 몸에 익숙해지는 단계로 나아가고 더 나아가서는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다스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숙력된 조련사들을 보면 아주 사나운 짐승들도 잘 다스립니다. 그렇게 잘 다스리는 사람은 그 짐승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또 사랑합니다. 그와 함께 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화초를 잘 가꾸는 분들은 화초에 대해 잘 알고 또 화초 돌보는 일을 아주 즐거워합니다. 그들에게는 화초에 대해 알아가고 보살피고 사랑하는 일이 기쁨이고 보람입니다. ‘살며 배우며 사랑하는 일’, 이는 다스리라는 명령의 핵심입니다. 한 사람을 낳고 기르기 위해서도 배워야 할 일이 많습니다. 새로운 땅에 가서 정착하기 위해서도 배워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배우고 끝내 사랑하는 일이 다스리는 일이고 거기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배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남편이라고 잘 알고, 아내라고 잘 아는게 아닙니다. 내 뱃속에서 난 자식이라고 금방 사랑스럽고 금방 잘 키우는게 아닙니다. 갖 태어난 아기는 얼마나 낯설고 또 신기한지 모릅니다. 아기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많이 배우고 24시간 내내 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견고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잘 알고 이해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중 한 사람이라도 ‘난 저런 스타일은 밥맛이야!’라고 말한다면 우리 모임에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라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다스리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도 ‘난 요리는 못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음식도 알아야 하고 요리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생물에 대해 배우고 잘 알고 그래서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생물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는데 하물며 하나님 형상의 사람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다스려야 하고 모든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사람답지 못합니다.
우리가 개척나와서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합니다. 저는 컴퓨터는 정말 싫어했는데 경기센타에 와서 정통부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매주 유아부 메시지를 쓰는 분도 있고 글자를 출력하여 써 붙이는 분도 있습니다. 지난주에 구제부활동의 일환으로 장애인 복지시설인 <사랑의 집>을 다녀왔는데 그곳에 다녀온 후 우리는 장애인들을 대하는 일에 매우 서툴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그의 공생애 기간 중에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을 사랑하고 보살피셨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장애인도 이해하고 보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대학생들에게 복음전할 줄도 알아야 하지만 부모님에게도 복음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원수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일 저일 하는 것이 수고스럽고 귀찮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배우고 모든 것을 알아가고 사랑하는 일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요 축복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그 자신감에 넘치는 고백을 기억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우리가 이일 저일 못한다며 짜증내는 비참한 삶이 아니라 바울과 같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고백하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무슨 특별한 선물을 받는게 복인 줄 알았습니다. 열매를 맺어야 복이 있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 그가 주신 사명과 계명이 축복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젊은 시절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개척하라는 사명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알아가고 배워가고 그래서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경기대의 지성인들을 알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더 나아가 세상 만민을 품고 사랑하고 또 구원하는 일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2041년까지 10만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