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3일 (월요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4
그때에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복음묵상
헌금은 정성인지라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바치는 헌금이어야 합니다.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돈을 봉헌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바칩니다.
하루를 ‘기쁨으로’ 희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정성에 감격해하십니다.
렙톤은 그리스 화폐 가운데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두 닢’의 헌금이라면 주목받을 액수가 아닙니다.
하지만 가난한 여인의 ‘마음’을 읽으셨기에 주님께서는 칭찬하십니다.
그녀의 소박한 믿음을 제자들에게 알리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다시’ 받아들여야 합니다.
봉헌은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그분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헌금을 보고 계십니다.
한 주간의 ‘아픔’도 살아가는 ‘삶’도 헌금 속에 함께 담아야 하겠지요.
「십자가의 길」은 순례자들이 예수님 수난의 길을 소중히 여기고
기억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길이라 하겠다.
초기교회 시대에 예루살렘을 순례하던 순례자들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
(빌라도 관저에서 갈바리아산 십자가가 세워진 곳까지 1317보의 거리, 약800미터)을
실제로 걸으면서 기도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며,
예수 수난과 죽음의 장면을 순례함으로써,
영신생활에 도움을 준다.
† 주 예수님,
저희를 위하여 온갖 수난을 겪으신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성모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고자 하나이다.
저희에게 죄를 뉘우치고
주님의 수난을 함께 나눌 마음을 주시어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게 하시며
성직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모든 죄인이 회개하도록 은혜를 내려주소서.
천호(天呼)성지는 이름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1백 50년간을 '하느님을 부르며' 살아온 신앙의 터전이며,
순교자의 피를 담은 거룩한 땅이다.
천호지역에는 박해시대 다리실 교우촌으로 불리던 7개의 공소가 있었으며
그 중 천호공소는 170여년이 지난 오늘날 까지도 순교자의 후손들이 신앙을 지키며
살고 있는 국내 유일의 전신자 교우촌이다.
적삼목을 반복 사용함으로써 침묵과 온화함이 공존하는 산지에 들어온 느낌을 성화시킨
천호성지의 부활성당에서 순교자의 영성을 청하는 아네스님
천호성지는 박해의 모진 회오리가 불어 닥치던 1866년 병인년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성인 중
성 이명서(베드로), 성 손선지(베드로), 성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성 한재(요셉)와
같은 해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아우구스티노),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열 분의 무명 순교자들이 묻혀 있다.
그 밖에도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많은 순교자들이
이곳 천호산에 종적을 감춘 채 묻혀 있다.
경당 앞마당의 종탑과 많은 교우들을 일깨워왔을 종이 우리를 정겹게 맞이하고 있다.
완주군 비봉면과 익산시 여산면을 잇는 문드러미재 고개이다.
아름다운 순례길 안내에선
천호공소 종탑 앞에서 마을 뒷길을 지난 산길을 택해 문드러미재를 넘어가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공소를 나서며 각자의 지향담아 묵주기도를 시작하며
길에 주의 집중하지않고천호성지 아래 4거리로 내려와 버렸기에
큰길을 통해 문드러미재를 넘게 되었다.
문드러미재를 넘어와 다시 산길을 내려와 마을가까이 가니
감나무에 홍시가 대롱대롱 메달려 있는데 우린 또다시 그 재미를 지나칠 수가 없었다.
감나무 옆에 있는 고염을 난생 처음으로 맛봐봤다.
작아서 아쉽긴 하지만 농익은 고염은 나무에서 곶감이 되어 달코름한게 아주 먹을 만 했다.
감나무와 고염옆에 장두감이 있어 지팡이를 장대삼아 또다시 장두감을 따 손에 들고 다니며
주물럭거리다 말랑해지면 오늘의 간식으로 먹곤 했다.
12시경 감과 교염을 싫컷 따먹은 후 내려온 마을길은
도로와 만나고 길게 뻗은 농로를 거쳐 고속화도로의 지하도로를 통과한다.
다리 옆의 이정표는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같이 나있어
우리는 오른쪽을 택해 농로를 타고 걷는데 한참을 지나도 이병기 생가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지하도 입구로 돌아가서
다리앞의 이정표 중 왼쪽으로 난 표식을 따라 진사동 마을 끝자락에 위치한다는
이병기 생가를 가보려 했으나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
연속되는 농로인지라 뉘한테 물을 수도 없었고, 한참 온 후의 마을어른께 여쭈니
이병기 생가를 한참 지나온 숲정이성지 가까운 곳이었다.
다시 돌아가기엔 오늘 일정이 허락지 않아
여산의 중국집 옆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소머리국밥을 주문했는데 진한국물 속의 고기도 쫀득하니 맛있다.
반찬도 맛있거니와 계란말이 하나만으로도 1인분의 후한 양을 주어 든든히 먹었다.
점심가격은 5000원.
우린 순례길에서의 후한 음식인심에 서로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진식선생님께서 전화하셔,
오늘 일정이 늦어지겠다며 어서 서둘러 출발하라신다.
여산읍내에서 점심먹은 식당과 동헌아래의 백지사터의 거리는 500m....
여산 성지는 1868년 무진박해 당시 여산군의 속읍지였던
고산, 금산, 진산 등에 숨어 살다 이곳 여산 관아로 잡혀 온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형벌과 굶주림의 고통을 당한 순교지이다.
병인박해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평화롭게 살았던 교우들을
혹독한 박해의 칼날 아래로 내몰았다.
비록 조그마한 고을이었지만 여산에는 사법권을 지닌 부사와 영장이 있었기 때문에
교우들을 마구잡이로 처형시킬 수 있었다.
여산 동헌에 잡혀 온 신자들은 참수, 교수는 물론, 백지 사형으로도 죽임을 당했다.
백지 사형이란 교우들의 손을 뒤로 결박하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사 시키는 처형 방법이었다.
지금도 동헌 앞마당에 백지사 터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처형장에서는
얼굴에 달라붙은 백지로 인해 숨을 헐떡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천국 영복을 그리며 천주 신앙을 고백한
선조들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천호산의 순교자 유해를 발굴하던 중 모든 얼굴이 땅을 향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당시 역적죄인은 죽어서도 하늘을 우러러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산 동헌에서 내려다보이던 숲정이성지는 지금은 거의가 논이지만
박해당시 숲이 우거진 곳이라 하여 숲정이라고 하였다.
옥에 갇혀있는 동안 심한 굶주림에 시달렸던 교우들이
사형집행장의 풀밭에 나오자마자 정신없이 풀을 뜯어먹었다는 목격담이 전한다.
이때 김성첨 토마스 형제는 온갖 고문과 굶주림을 시달리는 교우들에게
“우리가 이때를 기다려왔으니
천당진복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이만한 괴로움도 이겨내지 못하겠느냐?
부디 감심으로 참아 받자.” 하며
그 가족과 마을사람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여산성지를 나와 두어시간 이상 논둑 길을 걸어 두여교, 수은교, 신풍교, 선리교를 지나니
5시 30분인데 아직도 나바위 성지까지는 6km가 남았다.
또다시 염려하시는 김진식 선생님의 전화를 받으며
빠른 걸음을 걸어보려 하나 발걸음이 여간 무거운게 아니다.
관산마을 채운마을을 지날 때 6시가 되니 완전 어두워졌고,
아네스님의 발걸음은 더 바빠져 이후로는 더이상 보이질 않는다.
두 세시간 째 걸어가는 논둑너머로 해가 지는 장면이 너무도 평화롭다.
그분이 주시는 평화가
바로 내가 걸어가는 이 들판에 고요히 담겨 있음을 본다.
논둑길 따라 펼쳐진 억새들이
발걸음지친 나를 제 마음대로 환영한다 하늘거리니,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성가가 절로절로 흥얼거려 진다.
아네스님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같이 늦어지면 숙소상황이 어찌될지 염려스러워
먼저 갈테니 천천히 오라,
마을지나 큰길건너 현대오일뱅크 주유소가 나오면 그 오른쪽 길로 건너오라....
그 후 주유소 뒷마을에서 얼만큼을 가도가도 달팽이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 다시 돌아내려가 마을중간의 개가 유난히 짖었던 모퉁이 집으로 가서,
이번에는 오른쪽 길을 택해서 가는데 이제는 보여야 할 철길이 나오지 않는다.
주님의 뜻을 몰라 어둠에 잠긴 세상을 생각해 본다.
오늘 맞이하는 상황들이 풍파에 시달리는 것 마저도 하느님의 뜻하심임에 신뢰한다.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울 지라도 하느님의 계획은
늘 선해, 훨씬 좋은 것에 담겨 있음을 나는 안다.
삶마다 맞이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인간적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는
좋으신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의탁하여 모두 꼭 감당할 수 있으리라 탐해본다.
지나는 주민들께 나바위성지를 물어 어찌어찌 찾아오니 7시 30분이다.
피곤한 다리가 안걸어진다며 일몰을 즐긴 값을 톡톡히 치른 것이다.
어둡도록 나바위 성지를 못들어가는 나를 김진식 선생님은 수시로 전화해 주시며
성지앞쪽의 용궁식당에서 저녁을 하고 아침 예약을 해 두라신다.
성지에 도착하니 6시 30분에 도착한 아네스님이
피곤해 저녁먹으러 왔다갔다 하기 어렵겠다며 라면을 사다 끓여준다.
천호의 뜨신 방에서 그리 잘잤었건만 종일 들길다니며 훌쩍거리던 콧물이
아네스님 끓여준 뜨끈한 라면국물에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다.
첫댓글 아름다운 사진이 보아미님과 아녜스느미의 마음을 아름답게 전해 줍니다. 감사합니다. 성탄절과 새해를 맞아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천호에서 여산까지는 가 보았지만 나머지는 생소한 길인데도 보아미님의 글을 읽으니 지금 함께 걷는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