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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다 우연히 마치 고목 둥치처럼 옹이진 발을 소개하는 면을 본적이 있습니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이었습니다. 그때의 충격이란 정말 대단했습니다. 나중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그녀가 세계 최고의 발레리나가 되기까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게 되었을 땐 정말 아름다운 발을 가진 여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52:7절은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합니다. 진짜 아름다운 발은 따로 있는데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표준 새 번역은 이를 “놀랍고도 반가워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를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하는구나”라고 번역함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발이기에 가장 아름다운 발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을 가진 하나님의 사자는 예루살렘 남쪽에서 올라오는 길이 아니라 북쪽 산등성이들을 넘는 지름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산등성이 하나를 넘을 때마다 “평화다!, 좋은 소식이다!, 구원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성문 앞에 나타난 사자는 “네 하나님이 왕이 되셨다”는 결정적인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아닌 적이 있으셨습니까? 그랬던 적이 있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의 왕이셨습니다. 그런데 겔11:24절은 “주의 신이 나를 들어 하나님의 신의 이상 중에 데리고 갈대아에 있는 사로잡힌 자 중에 이르시더니 내가 보는 이상이 나를 떠난 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은 이방인의 땅에 포로로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의 멸망을 지켜보기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이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가 있는 동안에는, 마치 그들의 왕이 아닌 것처럼 아주 오랫동안 그것도 철저히 침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어느 곳에서도 희망을 찾지 못한 채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오랫동안의 침묵을 깨신 하나님께서 팔을 걷어붙이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역사 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은 너무도 반갑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소식을 전해들은 파수꾼들은 환호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셨대”라고 반복해서 외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외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당신의 귀환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성전과 성벽 재건을 통해 예루살렘을 회복시켜 주셨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위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약 500여 년 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완전히 실현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침묵을 깨고 회복시켜주시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해 있었던 상황은 오늘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상황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에 탄 예루살렘은 폐허와 다름없었습니다. 간음하듯 우상과 재물을 섬기던 그들의 영적 상태 역시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기서 나오려고 몸부림쳤습니다.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적인 혼란은 마치 영적인 폐허를 연상시킵니다. 특히 음란과 폭력으로 얼룩진 문화는 현대인들의 영혼을 더욱 원초적인 범죄의 현장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 속에 갇혀 절망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의 전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육신마저 영적인 폐허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또 건강하지 않은 상태, 도무지 그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운 각종 문제로 인해 낙심하는 상태, 온갖 더러운 욕심과 각종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는 것 역시 바벨론 포로생활과 다르지 않습니다.
언론매체의 음란성과 폭력성과 하나님 없음을 알면서도 단순히 재미있다는 이유로 거기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애굽의 종살이와 다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 곧 영적인 폐허와 절망의 현장”에서 탈출하기를 간절히 소원했듯이, 현대인들 역시 거기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더럽고 추한 아집과 어두운 절망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 신앙에서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구원은 타락한 인간 안에서 시작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을 포기할 정도로, 생명을 포기할 정도로 절망적이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인류를 택하셔서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신부 삼기로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인류의 죄와 허물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주와 그리스도로 모셔들이는 자들은 누구든지 출신성분과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모두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놀랍고 복된 소식은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전해져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이 놀라운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은 어떤 발을 가지고 있습니까? 지금도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영혼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목이 터지라고 외치고 또 외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저와 여러분을 향해 참되고 복된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복음에 대한 열정 하나만 가지고 56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았던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는 좀 쉬면서 하라는 사람들의 말에 “녹이 슬어서 없어지느니 차라리 닳아서 없어지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이 으스러지기까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을 가진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입술로 시인하는 것은 구원의 필수조건입니다. 9-11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우리는 지난 시간 참된 열정은 구원에 대한 참된 지식을 전제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관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고 해서 다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에 관한 지식은 반드시 가져야하는 것이지만, 그 사실을 마음에 믿고 입술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지식은 아무런 의미나 가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약2:19절은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한다는 것은 확실한 기본적인 교리에 속합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6:4)라는 말씀은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통적으로 믿고 따라온 중요한 교리였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리 자체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귀신들도 그 정도까지는 알고 있고, 또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떠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리힛소”(fris'so)는 “곤두서다, 오싹하다, 몸서리치다, 극도의 두려움에 압도되다, 공포에 휩싸이다”등의 뜻으로, 귀신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영적으로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느끼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신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와 허물을 지시고 죽으셨다 부활하신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 이상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알고 있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만큼 알고 있든지, 그 지식을 마음에 믿고 입술로 고백할 때 비로소 주어집니다.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부유하게 사는 한 그리스도인의 운전 기사였습니다. 그는 가끔 주인과 하나님을 닮은 영혼을 가진 인간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하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한다는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습니다.
그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주인은 예수께서 오시면 자기 차를 청년에게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청년은 기뻐하며 정중하게 감사의 뜻을 표했습니다. 주인은 또 그땐 청년의 부인과 함께 넓고 좋은 자신의 집에 와서 살라고 말했습니다. 아울러 자신이 소유한 모든 재산이며 토지까지 다 가져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주인의 말에 흥분한 청년은 큰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를 연발했습니다. 부인에게도 즉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는 주인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곤 자신은 편하고 안락한 자동차와 넓은 저택과 많은 돈과 넓은 땅도 다 싫다고 외쳤습니다. 갑작스러운 청년의 방문과 외침에 놀란 주인은, 청년을 진정시키며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청년은 눈물을 글썽이며 “저는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저도 당신처럼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 동안 주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영원한 천국에 대한 지식과 소원을 갖게 되었던 청년은, 자신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열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구원에 대한 참된 지식을 전제로 합니다. 그만큼 구원에 대한 지식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믿어야 합니다. 입술로 고백해야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마음을 단순히 애정이나 감정의 근원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와 생명, 곧 지정의(知情意)의 근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인간 자체라는 것입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根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고 강조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입술의 고백은 마음속에 있는 바로 그 믿음을 근거로 해야합니다. 또 시인은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시107:2)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입술의 고백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믿음이 참된 것이라면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20)고 고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속에 감추어진 믿음은 반드시 입술로 고백되어야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와 허물을 지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이심을 믿고 고백해야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알고 믿고 입술로 고백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입술로 고백한 사람들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① 차별 없는 구원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2a절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여기서 우리는 “정말로 큰 특권을 누렸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그들이, 하나님보시기에 헬라인이나 이방인보다 전혀 나은 점이 없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한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은 여전히 하나님의 특별한 기쁨의 대상이며, 또 영광스러운 미래가 그들을 위하여 예비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을 너무도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1:16)라고 고백했습니다.
복음은 유대인과 헬라인에 상관없이 믿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불공평한 일도 행하지 않으십니다. 누구도 편애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편파적(偏頗的)이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특권이나 지위가 아니라 행한 일들의 성격에 따라 판단하십니다. 누구도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이의를 제기 할 수 없습니다. 편견과 편애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특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라는 하나님의 지적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먼저 주어졌던 이유는 다른 민족을 차별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經綸 : 일정한 포부를 가지고 일을 조직적으로 계획)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a)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제사장 국가로 사용하셔서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경륜을 통해 제시하신 구원의 방법을 믿고 신뢰하며 입술로 고백하는 자들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차별 없는 구원과 은혜와 축복을 부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결코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형편과 사정과 환경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지 말아야합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어야합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결코 부끄럽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주(主)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12b절입니다.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헬라인의 하나님이십니다. 거기다 하나님의 부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라”(학2:8a),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千山)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다”(시50:10-12)라고 선포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롬2:4)라고 말씀합니다.
또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롬9:23)라고 말씀할 뿐만 아니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2:7)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부요 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소유한 모든 것들과 함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과 영광과 긍휼까지도 풍성하게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바다의 파도가 끊임없이 해변에 부딪히며 밀려오듯이, 당신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끝없이 부어주시기 원하십니다. 주시고, 주시고, 또 주시기 원하십니다.
부요 하신 하나님께서 가난하게 되신 유일한 이유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구별 없이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부요케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주시고 싶은 것은 물질적인 부요 보다는 영적인 부요 입니다. 영적인 부요는 하나님과 세상과 환난과 시험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경우와 상황을 허락하시더라도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찾고 추구하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어떤 경우에도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③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누구나 죄와 저주와 죽음의 자리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13절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에 대한 구약의 특징적 표현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셋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과 영적 전투를 벌였던 엘리야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시인은 수없이 많은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신약 시대 성도들의 특징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시대를 통틀어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한결같이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부끄러움을 당치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까? 그 사실을 입술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당당히 외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이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으로 믿어야합니다. 그 믿음을 입술로 고백해야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뿐만 아니라 입술로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책임은 직결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함께 공존해야 합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입술로 고백해야합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뜻이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책임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14-15절입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우리는 도무지 자격 없고,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거듭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와 여러분의 생애에 일어난, 도무지 잊어버릴 수 없는 가장 크고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만 생각하면 마음이 들뜨고 기쁘고 즐겁습니다. 무엇인가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1787년 어느 날 이름 없는 한 청년이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했습니다. 감격에 사로잡힌 그는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한가지 생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성경 각 페이지마다 선교에 대한 책임을 다하라고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외침에 순종하기로 결심한 청년은 하나님께 그때까지 한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지역들을 찾아 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이 너무나 뜨거워 도무지 견딜 수 없었던 그는 한 목회자들만의 모임에 찾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에 대해서 의논했습니다. 그때 유명한 신학자 한 사람은 “젊은이 앉게.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면 자네 없이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네. 그러니 그렇게 광신자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게”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래서 청년은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기를 살펴보면 당시 청년은 자신을 향해 호통치는 교수를 향해 “박사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나 제가 없어도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믿기에는 하나님은 당신이나 저를 통해서 그 일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라고 대답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극소수의 지지를 받은 그는 인도를 향한 배를 탔습니다. 그가 바로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입니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누가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우리가 전하지 않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듣지 않는다면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는 사람이 없다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구원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합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해야합니다. 반드시 복음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외쳐야합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책임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삶을 통해서 세상을 뜨겁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 받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은 이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결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은 좋은 냄새가 나는 발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사람들의 발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신 예수께서 땀과 모래와 먼지에 절어있는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가슴에 안으셨습니다. 친히 떠오신 물로 깨끗이 씻겨주셨습니다. 잠시 후면 당신을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당장에는 도망치는 데 빠른 발을 가진 그들이지만, 성령이 임하시면 당신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까지도 마다하지 않을 아름다운 발을 가진 사람들로 거듭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종족이든 복음화되기 위해서는 그 종족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죤 헤론(John W. Heron)은 테네시 종합 의과 대학에서 개교 이래로 가장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였습니다. 그가 졸업한 대학은 그를 교수요원 일순위로 지명했습니다. 그에게는 의사와 교수로서 가치 있고 보람있는 일과 안정되고 탄탄한 미래가 보장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는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을 위해 의사와 선교사로 헌신할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를 본 그는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학교와 약혼자의 반대가 있었지만 그는 굽히지 않았습니다.
설득하고 또 설득했습니다. 결국 약혼자를 설득하는 일에 성공한 그는 결혼과 함께 첫 번째 조선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가장 먼저 조선에 발을 들여놓은 첫 번째 선교사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1884년 4월 5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인해 조선의 정세가 위험해지자 선교부는 그에게 일본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가 선교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선교사가 먼저 조선에 입국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조선을 위해 첫 번째로 파송 선교사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가장 먼저 반응했고, 가장 먼저 파송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조선에 들어온 그는 혹서기를 맞아 거의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피서를 떠난 상황에서 남아 환자들을 돌보다, 이질에 걸려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조선을 위한 아름다운 마음과 발을 가졌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발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합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합니다. 또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사명이요. 책임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을 가진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