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가 없어 몸을 악기 삼아 상상으로 연주하던 소년
아코디언 연주자 심성락. 1936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해방 이후 귀국해 부산에서 자란 그는 경남고 재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위해
들어간 부산의 한 악기상에서 아코디언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제대로 건반악기 한번 배워본 적이 없었고, 초등학교 때 선생님
몰래 연주하던 풍금이 연주 경험의 전부였지만 독학으로 실력을 키웠다. 악기가 없어 몸을 악기삼아 상상으로 연주하던 소년은
엄청난 양의 가요, 클래식, 재즈 LP들을 외울 때까지 듣고 또 들으며 음악에 대한 목마름을 채워나갔고, 우연히 방송국 노래자랑의
세션으로 대선배들을 제치고 뽑히게 되면서 그의 바람같은 음악인생이 시작되었다. 그 뒤 논산 제2훈련소 군 예대 악장과
부산 KBS, MBC, TBC 등 각 방송국 경음악단의 멤버를 거쳐 1965년 장충동 스튜디오 멤버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대통령의 악사, 그리고 최고의 가수와 함께 하던 그의 전성기
흔히들 말하는 대한민국 대중가요의 황금기인 6,70년대, 아코디언 연주자 심성락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여러 유명 가수들의
악단이나 세션 참여를 비롯, 당시로선 생소한 우리가요 올겐 연주곡집, 경음악 연주곡집 등을 발매하여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하기도
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좋아하는 노래들을 녹음한 인연으로 노태우 정부때까지 대통령의 악사로 지냈다.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라 할 수 있는 남진, 나훈아, 최백호, 심수봉에서부터 조덕배, 신승훈, 김건모, 장윤정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대중음악사를 논함에 있어 반드시 거론되어지는 뮤지션들의 뒤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그들이 붙여준 별명은 '노래하는 아코디언'
손가락, 한쪽 귀... 연주자로서의 장애를 안고 보낸 50년의 연주 인생
잘려진 한쪽 새끼 손가락과 들리지 않는 한쪽 귀. 연주자로서는 치명적인 핸디캡을 안고 있는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를
극복해 낸다. "나는 내 연주가 내가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해요. 벨로우즈(아코디언의 주름진 공기주머니)에 바람을 담아서
내가 부르는 노래... 악보에 '필'(Feel)이 적혀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음악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그 음악들을 바탕으로 전혀
다른 '필'을 내니까 그게 사람들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요. 노래하듯이 연주를 하니까 그게 새로웠던 거죠. 그러다 보니 녹음할 일
있으면 나만 부르게 되고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오게 됐네요" 바람 같았던 그의 50년 연주 인생에는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