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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개요
- 산행일시(시간) : 2010년 11월 27일 05:40~21:40(16시간), 28일 07:48~17:45(9시간 58분)
- 산행코스
․ 첫날 : 신의터재-무지개산-윤지미산-화령재-산불감시초소-봉황산-비재-강령삼거리-형제봉-피앗재-(만수동 피앗재 산장)
․ 둘째날 : 피앗재-천왕봉-신선대-문장대-밤티재
- 산행거리 : 전체 41.8km(첫날 25.5km, 둘째날 13.9km, 접속거리 2.4km), 누적거리 280.7km/734.6km
○ 기록들
<첫날>
경부고속버스터미널에서 19시 40분에 출발하는 마지막 상주행 고속버스는 예약을 하지 않아도 승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이미 몇시간 전에 예약이 종료된 상태였다.
할 수 없이 동서울터미널의 20시 30분 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렀지만, 이 역시 2시간 전에 예약이 끝났고 23시 넘어 출발하는 심야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심야버스표를 구입한 후 일단 20시 30분 버스 대기선에 기다리고 있다 보니, 다행히 20시 30분 예비버스에 마지막 두자리가 비면서 터미널에서 기다리지 않고 상주에 갈 수 있었다.
상주버스터미널에 도착한 후에는 가장 가까운 천지연찜질방으로 자리를 옮겨 잠을 청해 보지만 바닥이 너무 뜨거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무 곳에서나 잠을 잘 자는 아들도 역시 계속하여 뒤척댔다. 모닝콜 소리에 눈을 떴지만 몸은 찌뿌드드했다.
직장동료가 신의터재까지 태워주기 위해 새벽녘 우리 부자를 찾아왔다.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다. 오후에 비가 올지 모른다고 하여 상주의 24시간 영업하는 마트를 다 뒤져봤지만 비옷을 팔지 않았다. 할 수 없이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를 비옷 대용으로 쓰기로 하고 구입하였다.
<신의터재>
5시 40분에 도착한 신의터재에는 황량한 찬기운만 감돌았다. 잠이 덜깬 아들이 오돌오돌 떨고 있기에 어깨를 감싸 안아 주었다. 화동면 선교리 인근마을의 개짓는 소리가 정적을 깨우고 있었다.
몸을 데우기 위해 부지런히 서두르자 20분이 채 소요되지 않아 삼각점이 있는 329.6m봉에 이를 수 있었고, 여명이 비칠 때까지는 편안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무지개산 갈림길을 지나 아침식사를 마치고 화령재를 4km정도 남긴 지점에서 특이하게 생긴 바윗돌을 만났다. 오랜 시간동안 모래가 퇴적되어 형성된 사암으로 속리산 인근이 수백만년전 아니면 그 보다 훨씬 이전에 강이나 호수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들도 책에서 본 적이 있는 듯 여기저기 만져 보았다.
<사암>
9시 45분 윤지미산에서 과일을 먹으며 아들을 쉬게 했다. 오늘 피앗재까지 진행하여야 하는 녹녹치 않은 일정 때문에 서둘러야 했지만, 아들의 컨디션도 중요했다.
가파른 내리막을 휘어져 내려와 인삼밭 가장자리를 지나 잠시 임도에 내려섰다 당주-상주간 고속도로에서 별 구경거리가 아님에도 고속으로 질주하는 차량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비의 욕심대로 질주하는 차량처럼 빨리 움직이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가득한 느낌일 것 같았다.
<당주-상주간 고속도로>
윤지미산에서 봤을 땐 아주 가깝게 느껴졌지만, 화령재에 도착하기까지는 1시간 20분이 소요되었다.
금세 도로에 나오지만 최대한 숲길을 고집하며 봉황산 들머리에 들어섰다. 화서면 신봉리는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큰 아이와 함께 백두대간 종주할 때 물을 얻었던 할아버지 혼자 기거하던 집은 폐가가 되어 을씨년스러웠다.
<화서면 신봉리>
봉황산에 이르기 전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지점까지는 계속하여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아들이 힘에 부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계속하여 뒤처지며 비재에서 피앗재까지의 난코스를 어떻게 넘어가야 할지 걱정스럽게 했다.
먼저 앞서가며 아들에게 산불감시초소에서 점심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산불감시초소를 얼마 남기지 않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서 강수량이 기껏해야 5mm정도라고 했으니 우비가 필요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게 했다. 강한 바람과 함께 흩뿌리는 비는 자켓을 젓게 하였고, 몸이 젖은 상태에서 기온이 급강하되는 경우에는 무척 심각한 상황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산불감시초소에는 감시원이 있었다. 양해를 구하여 초소 밑에서 화기사용을 허락받았다. 비가 오는데 초소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지만 아들이 있기 때문에 비좁아서 곤란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라면을 끓이고 짜장밥을 데우고 있을 때 아들이 올라왔다. 힘든 와중에도 배낭커버를 씌우고 올라 온 것을 보니 지금까지 허투루 산행을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바람 때문에 비가 초소 밑에도 흩뿌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새벽에 구입한 쓰레기 봉투에 구멍을 내어 자켓 위에다 걸쳐 입었다. 팔과 다리는 어쩔 수 없지만 방한효과도 있고, 몸뚱아리에는 우비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내리는 봉황산 - 우비를 준비하지 않아 쓰레기 봉지를 대용으로 했다>
14시 12분에 도착한 봉황산에도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만약 계속하여 비가 내린다면 비재에서 포기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15시가 지나며 비가 개었다. 그러나 여전히 흐린 날씨였고 사위는 밝지 않았다.
16시 3분 비재에 도착했다. 지금부터가 문제였다. 큰 아이와 몹시 힘들게 형제봉을 올랐던 기억 때문에 아들이 힘들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훨씬 더 힘이 부치는 모양이었다. 특히 가파른 능선과 암릉구간이 젬병인 아들에게 어떻게 하면 시간을 단축하여 피앗재까지 갈 지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6.4km 이상 남아있는 피앗재까지 1시간에 1km도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18시 3분 못재에 이르자 사위는 완전히 암흑으로 변했다. 강한 바람이 불어 제끼며 잠시라도 지체할 양이면 몸뚱아리에 남아있는 온기마저 빼앗아 버렸다.
<일몰>
<못재>
19시 13분 갈령삼거리에 이르렀지만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피앗재산장의 다정님께 전화를 했다. 도착예정시간을 한참 뒤로 미룰 수밖에 없다고...
가파르게 능선을 오르 내릴 때 아들은 울먹이며 처음으로 아빠가 싫다고 했다. 백두대간 종주도 하기 싫다고 했다. 자칫 아들에게 이 백두대간 종주가 큰 고통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미치자 과연 백두대간 종주가 순전히 아비를 위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과연 교훈, 선물, 재산.. 뭐 이따위 것들을 얻을 수 있을 지 의문이 생겼다. 아비가 어린 아들을 정말 고생 시킨다는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아파왔다. “미안하다. 아들아!” 속으로 여러번 되뇌었다.
20시 2분 형제봉을 넘어서 피앗재까지 가는 길도 여의치 않았다. 느낌으로 이제 피앗재에 다 왔다고 생각되는 순간 다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러번 지나친 길인데도 거리감각이 밤이라 그런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곳에서 봉우리 하나를 더 넘어야 했다. 그때 만수계곡 인근에서 누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게 다정님이 나를 찾는 소리인 줄은 피앗재에 도착하고서야 알 수 있었다.
21시 6분 바람에 몸뚱아리가 날아갈 것 같은 피앗재에 도착했다. 한숨을 돌린 다음 오늘 밤을 보낼 피앗재산장으로 향했다. 만수동에 가까이 다가 갈 수록 바람이 잦아들었다. 아들의 얼굴에 비로소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21시 40분 피앗재 산장에 도착했고, 황토방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각종 버섯요리를 안주삼아 막걸리 한잔과 함께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둘째날>
어제 힘든 산행이었던만큼 아들을 충분하게 재웠다. 평소 산행할 때와 달리 6시경에 아들을 깨웠다. 아들이 버섯요리에 익숙치 않았지만 아침식사는 그럭저럭 하고 나선 길이었다. 언발이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고, 계속하여 오르막 길임에도 몸에 열기가 나지 않았다.
<피앗재 산장>
7시 48분 피앗재에 도착하여 밤티재까지의 여정에 들어갔다. 영하의 한기와 더불어 바람이 여전히 강하게 불었지만 날씨가 청명하여 그럭저럭 진행하기는 수월하였다. 오늘 다음 구간(대야산)의 상태와 거리를 감안하여 가능하다면 늘재까지 진행해 줬으면 하는 것이 아비의 욕심이었다.
<피앗재>
가까이 천왕봉과 문수봉까지 이어지는 대간마루금을 보며 저곳만 넘어서면 된다고 아들을 다독였다. 9시 30분 헬기장에서 잠시 쉼을 가지며 발맛사지를 해 줬다. 그리고 10시 5분, 전망대 바위에서는 멋진 배경을 사진에 담았다. 대목리 갈림길에서도 잠시 쉬기는 했지만, 이곳에서부터 천왕봉까지는 가파르게 올라가야 했기에 많은 시간이 지체되는 구간이기도 했다.
아들이 스스로 아비에게 앞서 가라고 했다. 그러나 바닥이 얼어 자칫 미끄러질 수도 있기 때문에 위험한 지점이 나타나면 아들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전망대 바위>
11시 40분 소망하던 천왕봉에 도착했다. 아들에게 이 봉우리에서 산줄기로만 걸어서 우리 집까지 갈 수 있다고 하자 그 방법을 궁금해 했다. 천왕봉에서 한남금북정맥이 분기되기 때문에 한남금북정맥을 거쳐 한남정맥을 잇고, 다시 한남정맥 백운산에서 모락산으로 방향을 바꿔 집으로 가면 된다고 하자 이해하는 것인지 그렇지 못한 것인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천황봉은 불교의 사대천황(천왕)에서 온 불교용어임에도 일제의 잔재라 하여 천왕봉으로 개칭하였다>
아들의 발목이 아파 오는지 자꾸 멈춰 섰다. 얼어버린 등로는 미끄웠고, 점점 등산객들이 많아지며 시간도 지체되고 있었다. 슬슬 문장대에서 밤티재 내려서는 길이 걱정되었다.
천왕석문을 지나 비로봉과 입석대 그리고 북적거리는 신선대 휴게소를 뒤로 하고 14시 정각 문장대에 도착했다. 국립공단관리공단 직원은 단체 산행객 계도와 질서를 유지하느라 분주하였다. 밤티재로 내려가는 등산객을 발견하면 제지할 지라도 일부터 그 앞에서 통제하고 있지는 않았다. 실제 적발되어 과태료를 부과받은 사례가 거의 없는 것을 보더라도 적극적인 단속은 하고 있지 않았다.
어쨌든 우리는 변명의 여지없이 자연공원법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고 있었다. 백두대간 종주를 함에 있어서 마루금을 정확하게 밟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아들이 위법행위를 왜 하느냐고 따져 물으면 대답하기가 난감할 일이었다.
<문장대>
완전하게 감시원의 가시권에서 멀어지자 주변의 풍광이 아름답게 눈에 들어왔다. 여러번 개구멍 바위와 직벽을 넘어서야 했지만 오히려 아들은 밋밋하게 오르 내리는 능선보다 더 스릴 있고 재미있어 했다.
<암릉구간>
참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구간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 구간이 무척 위험하여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아비의 기우였다.
운동장 같이 넓은 바위에서 바라 보는 천길 낭떠리지와 기암괴석은 아들에게도 감흥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모양이었다.
4시 32분 입석바위에 이를 수 있었다. 아직 장애물 통과가 모두 끝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가장 어려운 장애물을 넘은 것에 대해 스스로 자랑스러워 했다. 594m봉 견훤성 가는 갈림길에서 더 이상 늘재까지 진행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문자로 우리를 태워 줄 보은의 지인께 늘재가 아닌 밤티재로 와 줄 것을 부탁했다.
<견훤성으로 갈래치는 능선>
<Last Spurt>
17시 45분, 철조망 밑으로 기어 나와 밤티재에 터치다운했다. 해가 지기 전에 암릉구간을 빠져 나와야 하겠기에 점심식사도 하지 않은 채였다. 아들도 굳이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 하여 떡과 과일로 허기를 대충 때우면서 제때 내려올 수 있었다.
도로를 따라 감시초소가 있는 지점에 이르자 우리를 싣고 갈 차가 오며, 미원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5년전 홀로 한남금북정맥 종주할 때 구치재에서 나를 태워 준 인연으로 결혼을 하고서도 우리 부자에게 도움을 주는 은인이다.
미원에서 청주로 갔다가 평촌까지 쉽게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마지막 버스가 오래 전에 떠났고 수원행으로 갈아타서 다시 집으로 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럭저럭 제때 버스편을 연결하기는 했지만 고속도로가 정체되면서 23시 가까이 되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날 새벽 해외출장 때문에 인천공항으로 일찍 나가야 했기에 짐을 챙기느라 그날 밤은 꼬박 샐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