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지 말고 크게 외치며,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이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들을 보이라』(사 58:1).
이사야와 같은 구약 선지자들의 주요 사명은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여 그들을 주님께로 돌이키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 하에 말씀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육신의 죄성을 만족시키던 그들에게, 주님은 주님이 친히 부르신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주님의 엄중한 말씀을 선포하게 하신 것이다. 그 사명은 차마 눈을 뜨고는 죄를 보실 수도 없는 거룩하신 주 하나님께서 땅의 티끌로 지어진, 먼지와 같은 한 사람에게 내리시는 거룩한 하늘의 명령이었다.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는 육체인 사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뻔뻔스럽고 마음이 완악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실 때 그 선지자의 이마를 부싯돌보다도 단단한 금강석 같게 하시어, 그로 하여금 완고하기 그지없는 이스라엘과 맞서도록 하셨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지자를 그들 가운데 보내시어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게 하신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매우 큰 것이었다. 그들 가운데 있는 선지자의 존재는 그 자체가 그들에게 보내는 주 하나님의 경고였기 때문이다. 그들 배교한 이스라엘과는 믿음과 생각이 완전히 다른 한 이질적인 존재가 있음으로 인해서, 즉 그들이 행하는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정확히, 있는 그대로 전하는 한 사람이 있음으로 인해서, 그들은 비록 불쾌하기는 해도 마음 한 구석을 계속 찔러대는 죄에 대한 경고를 결코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생명을 위협하는 동족들 한가운데를 홀로 거닐지라도, 선지자의 존재는 전체 이스라엘의 더러운 걸레와 같은 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녔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선지자의 존재를 견디기 힘들어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그들의 죄를 지적했기 때문이다. 선지자의 임무는 배교자들로부터 철저히 성별하여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성별된 선지자는 배교자들에게는 늘 부정적이고 호감이 안 가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늘 옳은 소리만 외치니, 마치 맑은 물에 고기가 못 살듯, 죄를 즐기는 자들이 끼어들 틈이 없었던 것이다. 선지자가 성별되지 못하면,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이들에게는 바로 이러한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교회들의 죄를 지적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이다.”주님은 우리에게 『아끼지 말고 크게 외치며,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이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들을 보이라.』고 말씀하신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은 단호하다. 죄의 삯은 사망인 것이다. 거기에 타협점은 없다. 그래서 아끼지 말고 크게 외치되,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그렇게 해서 그들에게 그들의 허물과 죄들을 보여주라고 말씀하신다. 나무 그늘 아래서 콧노래 부르듯 흥얼거리지 말고, 다들 놀라서 깜짝 놀란 눈으로 쳐다볼 수 있도록 죄를 강력하게 지적하라는 것이다. 이 일에 있어 머뭇거리거나 꽁무니를 빼고 앉아 있다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교회들의 죄를 지적하는 우리에게 비난이 가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 대한 판단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죄를 지적하고 그 일을 위해 목청을 높이는 일은 바로 주님이 제시하신 기준이다. 죄를 지적함에 있어서 배교한 교회들의 판단에 따라 움직여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거나 입을 다물어버린다면, 우리는 주님의 선지자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들의 죄를 지적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거룩하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담기 때문이다.” 주님은 주님의 이름이 인간의 입에서 헛되이 사용되는 것을 금지하셨다. 『너는 주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지 말라. 주는 그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는 자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아니하리라』(출 20:7). 주님은 주님의 이름을 헛된 일에 사용하는 자들의 죄를 반드시 물어 징벌하실 것이다. 주님의 이름은 진리를 전하는 이름이요, 의를 세우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헛된 일들로 그 이름의 가치를 훼손하는 자들에게는 응당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이름을 사칭하여 돈을 뜯어내는 자들도 법의 적용을 받아 옥살이를 하는데, 하물며 주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사칭하여 그들의 배를 채우는 자들을 가만히 두실 리 없는 것이다.
배교한 교회들은 다른 신실한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언급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진리와 의를 위해서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오 야곱의 집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고, 유다의 물들에서 나왔으며,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언급하나 진리로도 아니요, 의로도 아니로다』(사 48:1). 하나님께는 이 일이 몹시도 가증스러운 것이다. 진리의 이름으로 비진리를 전파하고, 의의 이름으로 불의를 행하는 저들에 대해 주님은 분노하고 계시는 것이다. 성경에 없는 것들을 진리인 양 전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른 복음을 제시하는 저들을 향해 진노를 발하신다는 말이다. “그들은 허망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고 말하기를 “주께서 말씀하셨다.” 하였으나 주께서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셨다”고 겔 13:6에서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자기 이웃으로부터 내 말들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대적하노라...그들의 혀를 놀려 “그가 말씀하신다.” 하는 그 선지자들을 내가 대적하노라.』고 렘 23:30,31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다”고 하셨을 때, 그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신 구원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속 사역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으며,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구원의 영원하고 확실한 보장을 믿으며 십자가를 지고 진리를 실행하면서 주님의 보호하심 아래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으로 여의도에서는 부와 건강을 가르치고, 서울 신길동에서는 귀신과 대화하며, 모 신학대학에서는 “물”에 들어가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가르치고, 또 다른 신학교에서는 끝까지 견뎌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들에게는 주님의 은혜가 쓸모없게 여겨지는 것이다. 기독교의 보수주의를 대변한다는 한기총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한민국 종교문화축제’에 참가해 마귀의 종교들과 우의를 다졌다. 이뿐 아니다. 순수한 청년들이 신학교에 들어갈 때는 유신론자로 들어가는데, 거기서 나올 때는 담배나 뻐끔뻐끔 피워대는 무신론자가 되어 버린다. 남편이 신학교에 들어가면 주님께 잘 쓰임받을 종이 될 줄로 알았는데, 결국 무신론자가 되어 주님을 부인하는 것을 보고 애통해 하던 한 아내의 일화가 있다.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신학교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을 가르치는 것인가? 말씀은 안 가르치고 각종 철학과 신학자들의 거짓 이론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입에 담지만, 목적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진리를 위함도, 의를 위함도 아니다. 그들의 배를 위해서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인데, 그 “배”라는 이름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더러운 이익”을 위해 “양무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벧전 5:2).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그들의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으며 나를 향한 그들의 두려움도 사람들의 법규로 가르친 것이라』(사 29:13). 『그들의 종말은 파멸이며 그들의 하나님은 자기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자기들의 수치 속에 들어 있고 그들은 땅의 것들을 생각하느니라』(빌 3:19).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으며, 헛된 일에 성령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 교회들에게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보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과 우리의 관계는 아마도 복음을 전파하고 듣는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 곧 우리의 왕이자 아버지이신 주 하나님의 성호를 언급하는 이상, 그들이 그 이름을 헛되이 사용할 때에는 주님을 모독하지 말고 성경대로 행하라고 단호히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교회들의 죄를 지적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사들이기 때문이다.”고후 5:20은 우리의 신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한 대사들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신 것같이 우리도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너희에게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해하라』(고후 5:20). 대사란 자국의 대표로 다른 나라에 파견되어 타국에서 자국의 필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얼마 전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겼을 때, 주일 한국 대사가 일본 정부에 찾아가 우리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며 항의서한을 전달하기도 했다. 대사는 자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와 권한을 지닌 사람인 것이다.
성경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대사라고 말씀한다. 우리를 대사라고 칭했을 때 거기에는 근본적으로 화해의 의미가 담겨 있다. 고후 5:18은 이것을 화해의 직분이라고 말씀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수행해야 할 첫 번째 임무는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서 그들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배교한 교회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대사들에게는 이 복음의 화해 메시지 외에도 그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해야 할 임무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공식적인 입장을 배교한 교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흉내내며 온갖 거짓 교리로 진리를 가리고 있는 그들에게 참된 하나님의 나라 정부의 성경적 입장을 알려서 그들의 입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딛 1:11은 『더러운 이익 때문에 가르쳐서는 안될 것들을 가르쳐서 집들을 온통 뒤집어 놓는 그들의 입을 막아야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우리의 직분이 화해의 직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교회들에게 죄를 지적하는 목적은 그들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른 성경과 바른 진리로 돌아와 주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게 하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영과 진리로 경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주님께 그들이 영과 진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중간 역할을 하고,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갈라진 틈을 메워서 서로 화해토록 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배교한 교회들이 주님께 올바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죄를 지적해야만 한다. 이것이 화해를 위한 첫 단추이며, 이 일은 필연적인 것이다. 죄의 담을 허물지 않고는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아무런 진전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대사가 정부 방침을 전달하기를 꺼려한다면, 그는 대사 자격이 없는 고로 본국으로 소환되어야 한다. 대사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사들인 우리들의 의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학은 진화론을 말하고, 세상도 자신이 더 좋아지고 있다고 행복한 세상을 노래하지만, 그것은 퇴화하여 거의 끝부분에 다다랐다. 세상과 하나 되어 버린 교회들 역시나 자신들이 성장하고 부흥했다고 자부하지만, 우리 주님의 말씀처럼, 그들은 그들에게서 믿음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퇴화하고 말았다. 이러한 현실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죄를 지적하여 그들이 의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사탄의 종들이 의의 종으로 가장하여 교회들을 차지하고 앉아있을 때, 그들 밑에 억눌려 있는 이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어 그들이 빛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하고, 바로 그들을 통해서 교회 개혁에 불이 붙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시편 126:6은 『귀한 씨를 가지고 나가서 우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의 단들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고 말씀한다. 우리가 뿌리는 귀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이 반드시 열매를 맺고, 주님께 단으로 묶여져 드려질 날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과 능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머지않았다. 남은 시간이 짧은 만큼 더 열심을 내야할 때이다. 한국 교회의 개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한국 교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책망받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 한승용 편집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