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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5 강 - 機緣品- 9
通이 再啓曰, 四智之義를 可得聞乎이까 師曰, 旣會三身인댄 便明四智어늘 更何問耶아 若離三身하고 別談四智인댄 此名有智無身也니 卽此有智가 還成無智니라 復偈曰,
大圓鏡智性淸淨하고 平等性智心無病이며
妙觀察智見非功이오 成所作智同圓鏡이로다
五八六七果因轉이나 但用名言無實性이니
若於轉處不留情하면 繁興永處那伽定하리라
通이 頓悟性智하야 遂呈偈曰
三身이 元我體요 四智가 本心明이라
身智가 融無碍하야 應物任隨形이로다
起修皆妄動이며 守住匪眞精이라
妙智因師曉하니 終亡染汚名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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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통)이 再啓曰(재계왈)→ 지통스님이 재차 물어서 말하기를,
四智之義(사지지의)를 可得聞乎(가득문호)이까→ 네 가지 지혜에 대해서 설명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師曰(사왈) 旣會三身(기회삼신)인댄→ 이미 三身을 알았다면
便明四智(변명사지)어늘→ 곧 四智를 환히 알 텐데,
更何問耶(갱하문야)아→ 다시 또 물을 것이 뭐 있느냐? 이 설명가지고 쉽게 또 깨달아 지겠습니까?
若離三身(약리삼신)하고→ 만약 三身을 떠나고서,
別談四智(별담사지)인댄→ 따로 四智를 이야기한다면,
此名有智無身也(차명유지무신야)니→ 이것은 지혜는 있는데 몸은 없는 것이다. 몸이 있고 지혜가 있지요?
卽此有智(즉차유지)가→ 곧 이 있는 지혜. 이것이
還成無智(환성무지)니라→ 그렇게 되면 無智가 된다. 지혜 없음을 이룬다.
復偈曰(부게왈)→ 다시 게송으로서 일러주는 말이, 이것이 참 어려운 게송이면서도 아주 유명한 게송입니다.
[大圓鏡智性淸淨(대원경지성청정)하고
平等性智心無病(평등성지심무병)이며
妙觀察智(묘관찰지)는 見非功(견비공)이오
成所作智(성소작지)는 同圓鏡(동원경)이로다
五八六七果因轉(오팔육칠과인전)이나
但用名言無實性(단용명언무실성)이니
若於轉處不留情(약어전처불유정)하면
繁興永處那伽定(번흥영처나가정)하리라 이것이 여덟 句(구). 병 경 성 정. 저 앞에 첫 글자도 정 해가지고 운도 아주 딱 맞게 그렇게 했는데,
뒷사람이 손을 좀 봤는지, 시자가 손을 좀 봤는지, 상당히 글로도 수준 높은 글로 되어 있어요. 律(율)은 앞에 大圓鏡智性淸. 하고 앞에 경자하고, 그 다음에 병 경. 뒤에 끝에 賦(부). 변 경 성 정. 이것을 韻(운)으로, 押韻(압운)이라 해서 운은 그렇게 맞추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형식 관계는 안 맞는다해도 운은 맞게 그렇게... 한시를 짓는데 그러거든요.
平仄(평측)관계는 안 맞아도, 韻은 맞게 그렇게 했어요. 여기 불교의 詩(시)는, 還山詩(환산시)도 그렇지만, 본래 불교의 詩는 그런 것을 따지지는 않습니다. 뜻을 여하히 잘 전달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韻은 그렇게 치지 않지요. 그러니까 大圓鏡智(대원경지) 平等性智(평등성지) 妙觀察智(묘관찰지) 成所作智(성소작지). ←이것이 四智(사지)입니다. 三身四智(삼신사지)할 때...
그러니 지혜인데. 그냥 지혜인데, 그 지혜를 네 가지로 분리해서 네가지로 표현해 보는 겁니다.
大圓鏡智(대원경지)는 우리 본래 갖추고 있는 지혜! 원만한 거울이지요. 모양이 둥글다고 해서 꼭 그런 뜻으로 원자를 쓴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둥근 것이 원만한 의미를 나타낸다. 그렇게 보는 것이지요. 어떤 상징 적으로... 그래서 둥글게 만든 것입니다. 둥글다고 꼭 원만한 것은 아니지만요. 원만하기만 하면 모가 났든 둥글든, 그거 아무상관 없는 것이지요. 성품이 청정한 것. 성품이 텅 빈 것이고,
平等性智(평등성지). 우리 지혜 가운데, 평등한 입장이 있다. 이 성품은 누구든지 다 평등하잖아요. 어느 누구만 어떤 특별한 지혜를 갖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든지 다 평등한 그런 성품으로서의 지혜! 그것은 마음에 아무런 병이 없는 것이다. 그랬어요. 지혜가 제대로 있으면, 어리석음이 없어야지요.
지혜가 있다 하면 어리석음이 없는 것입니다. “밝다.” 하면 어두움이 없는 것입니다. “밝다.” 하면 어두움이 없는 것이지요. “어둡다.” 하면 밝음이 없다는 뜻이지요. “아이고, 여기 어둡다.” 그러면 밝지 않다는 뜻이 되지요. “구름이 가렸다.” 그러면 해가 안 나왔다는 뜻이 되고, “아이고 해가 안 보인다.” 그러면 구름이 가렸다는 뜻이 되지요. 그렇습니다.
平等性智心無病(평등성지심무병)이라→ 평등한 성품의 지혜는 마음에 아무런 병이 없다는. 어리석음이 없다는 뜻이다. 지혜의 상대는 병이라는 말을 써서 운을 맞추어서, 병 경 성 정. 이렇게 맞추었지만, 어리석음 이지요 사실은... 지혜의 상대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에, 어리석을 痴(치)자나 그렇게 썼으면 좋겠지마는, 여기에 운을 맞추는 뜻에서는 병자를 써도 뜻은 똑 같습니다.
妙觀察智(묘관찰지)는 見非功(견비공)이다 그랬어요.
묘관찰지. 우리 마음이 참 미묘하게 가만히 있지를 아니해요.
감지력이 아주 뛰어나요. 쎈서가 보통 뛰어난 쎈서가 아닙니다. 이것이... 춥고 더운 것.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아는지... 친구를 만나서 차 한 잔 하는데 친구가 오늘 기분이 나쁜지 안 나쁜지 말 아니해도 그냥 느껴버려요. 觀察. 참 묘하게 관찰해요. 그보다 더한 신통이 어디 있습니까? 사실은...
저는 세상에 그보다 더 뛰어난 신통을 본 적이 없어요. 다 그렇다고요.
사람. 사람이 다 그렇잖아요? 대단해요, 사실은... 見非功이다. 그거는 어떤 사물을 우리가 보는데 있어서 妙觀察 하는데, 見 하는데 다른 功 을 쓰지 아니해요. 수행 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수행 아니 해도 그 功 은 다 있어요. 그 능력은 다 있어요. 수행 하고 아무 관계없어요. 見非功입니다. “見에 功이 없다.” 이겁니다.
“見에 功이 없다.” 춥고 더운 거 분별하는데 누구 수행해야 그럴 줄 아나요? 염불하고 참선해서 춥고 더운 것 분별할 줄 압니까? 아 염불 아니 하고 참선 아니해도 다 알잖아요. 불교 몰라도 다 그거 알잖아요. 이런 이야기 다 된 거예요, 사실은... 불교이야기 끝난 거라고요 이쯤에서...
염불 참선하고, 불경공부 했다고, 뭐 춥고 더운 것 압니까? 안 배워도 잘만 알지요. 안 배우고도 잘만 아는 것. 그것이, 그 능력이 뛰어난 능력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지혜인줄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지혜인줄을 알아라."
妙觀察智(묘관찰지)는 見非功(견비공)이다.
참 좋은 말입니다. 묘하게 관찰하는 지혜는, 우리가 사물을 보는데 있어서 아무런 功이 필요치 않다. 도 닦을 필요도 없고 염불이나 참선이나, 무슨 불경이나 아무 그런 공을 안 들여도 된다는 것이지요. 功이 필요 없는 것이다.
成所作智(성소작지) 同圓鏡(동원경)이라. 그랬어요. 지을 바를 이루는 지혜! 所作을 成하는. 할 것을 하는 그런 지혜는, 그것은 뭐겠어요? 배고프면 밥 먹고요. 아주 기본적인 것. 피곤하면 무엇이지요? “잔다.”이겁니다. 주리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이것이 成所作智입니다. 그것도 모르는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어떤 바보도 그것은 하거든요. 그거는 同圓鏡이라. 그랬지요. 원경이 뭐지요? 大圓鏡(대원경)이지요. 본래 갖추고 있는 그것. “본래 갖추고 있는 그것과 같은 것이다.” 大圓鏡은 본래 갖추고 있는 우리 성품입니다. 그래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 이겁니다. 쉴 줄 아는 것. 그것이 成所作智입니다. 所作을 이루는, 지을 바를 성취 시키는 지혜!
그래놓고 보면요. 이 네 구절이 전부 우리 한마음의 어떤 작용이지, 다른 것 없어요. 멀리 가서 이야기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말만 바꾸어 가면서, 그저 말만 바꾸어 가면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지, 결국은 한 물건이고, 결국은 한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은 앞의 네 구절을 아주 유명하게 생각을 합니다. 우리 불교에서...
그 밑에는 역시 같이 하나의 게송이지마는, 그 밑에는 이 사람이 뭘 능가경을 공부해서 유식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이예요. 그래서 거기에 있는 용어를 이끌어다가, 또 그 사람의 근기에 맞추어서 설명한다고 한 것이
五八六七(오팔육칠)은 果因轉(과인전)이라 그랬는데 까다로운 것입니다. 五識(오식). 八識(팔식). 六識(육식). 七識(칠식). 그러니까 우리가 인식. 마음을 가지고 認識(인식) 활동을 하는 것을 크게 나누면 8가지다.
그렇게 보는데, 眼(안) 耳(이) 鼻(비) 舌(설) 身(신). 이것을 “前五識(전오식)” 그래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또 이 몸으로 촉감. 혀로 맛보고. 코로 향기 맡아서 아는 이런 것을 “전오식” 그래서 그걸 하나로 묶어요. 육식을 통해서, 이 육체를 통해서 어떤 인식 활동을 하는 것을 “전오식 이다.” 앞의 오식이다 이겁니다.
육식은 무엇인가 하니 意識(의식)이라고 하는데, 그 “前五識”의 母體(모체)가 되는 것이 의식입니다. 안 이 비 설 신 의. 지요? 모체가 되면서도 또 그 나름대로 과거의 일이나 현재의 일이나 미래의 일이나, “안이비설신”하고 관계없이 어떤 작용하는 것이 또 있어요. 어제 만났던 친구하고 약속한 것을 지금 떠올릴 수 있어요. ‘아 그 일을 내가 할 수 있을까? 가면 좋겠는데, 어쩌겠는데...’ 그런 생각을 지금 하는 그 “의식활동” 그것이 “六識(육식)”입니다.
“안이비설신”하고 관계없이 일어나는 활동작용 이지요. 그것을 “意識(의식)”이라... 그래서 이것을 독립시켜서 육식이라고 하고요. 그 다음에 칠식은 옛날 학자들 따라서 굳이 놔둬야 된다. 아니면 이것은 없어도 된다. 이렇게 말이 많은데요. 왜 그렇게 말이 많은가? 말이 많다는 것이 또 하나의 설명 이예요.
“八識(팔식)”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지요? “阿賴耶識(아뢰야식)” “제 팔 아뢰야식”이라 해서 “藏識(장식)”이라고도 하고 “無沒識(무몰식)”이라고도 해요. 없어지지 않는 인식의 주머니. 우리의 몸의 활동이나 마음의 활동이나 이런 것들이, 전부 여기 메모리에 다 저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팔식입니다. 메모리에...
예를 들어서 컴퓨터로 장난 아무리 해도, 그것이 지웠다 해도, 아무리 지워봐야 저~ 밑에 저장이 다 되거든요. 전문가는 그것 찾아낸다고요.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내요. 그것이 몰식입니다. “팔식”이것은 없어지지 않는다.= 무몰식. 또 갈무리할 藏(장)자. 창고라고 하는 장 자 써서 “藏識(장식)” 그 속에 다 가지고 있다 이겁니다.
우리는 지금 딴 생각 하면서 들어도 이것이 다 그냥 장식에 저장되어 있어요. 그래갖고 언젠가 인연을 만나면, ‘아 그때 내가 들은 기억이 있다.’고. ‘맞아, 바로 이 이야기야.’ 이렇게 딱 그냥 밖으로 툭 튀어나올 때가 있다고요. 그것이 팔식인데요. 그러면 칠식은 왜? 말이 많으냐?
육식까지는 우리가 이해하기 쉽고, 팔식도 이해하기가 쉬워요. 그 중간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이 “칠식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서 여기 창살과 이 종이와 그 두 개의 관계 속에서, 이 종이는 “육식”이라면, 저 쪽에 창살은 “팔식”이라고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에게는 창살과 종이밖에 필요 없어요. 창살이 있어야 종이를 갖다가 붙이지요. 우리한테는 종이와 창살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종이와 창살이 연결되기 까지는 “풀” 이라는 것이 필요해요.
그런데 지금 “풀”은 우리에게는 전혀 인식이 아니되어요. 전혀 인식이 안 된다고요. 그러나 연결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따로 이야기할 것이 없다. 그 “풀” 가지고 따로 이야기할 것이 있느냐? 현재 눈앞에 엄연히 존재하는 것. 종이나 아니면 창살을 이야기 하지, 무슨 “풀” 그것을 이야기할 것이 있느냐? 이런 주장을 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니다. 그래도 “풀”의 공덕이 상당히 크기 때문에 “풀”도 이야기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칠식은 원효스님이나 옛날 현수스님 같은 이들. 주장이 조금씩 다른 것이, 칠식의 역할을 그렇게 듭니다. 그래서 중간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이 “칠식이다.” 그렇게 봅니다.
그래 이 “칠식”이라고 하는 한계. 그 線(선)을 뚫고 아뢰야식 까지 우리의 좋은 기억이나 뭘 집어넣는 일. 거기서 또렷하게 하나의 씨앗으로 남아있도록 하는 그것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五. 六. 七. 八식은 설명이 다 됐는데, 그것이 果因轉(과인전)이다. 果와 因이 轉하나,
但用名言無實性(단용명언무실성)이다. 다만 名言만. 이름과 말만 사용했을 뿐이지 實性은 없다. 실다운 性은 없다. 그러는데, 우리가 5식이라 하든, 6식이라 하든, 7식이라 하든, 8식이라 하든 이것이 전부 인식을 하는 것은, 말하자면 경계를 통해서 인식하는, 과거 생각하고 어제 일을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원인 이예요. 원인이 된다고요 .
그래 원인과 결과가 그 속에서 계속 굽으는 일. 전환되는 일이다. 결과와 원인이 전환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 인식 속에서 전환되는 것이지만, 이름뿐이고 實性은 없다. 그러니까 6식이니 7식이니 이것이, 육조스님이 보기에는 너무 그렇게 우리마음. 그리고 마음의 작용. 이것만 가지고도 충분이 설명이 되는데...
설명이 되는데 거기다 쪼개서 이것은 원인이고 이것은 결과고, 안이비설신. 5식까지는 因이 되고, 그것을 통해서 8식이라는 갈무리 하는 결과가 있고, 또 그것이 因이 돼가지고, “前五識(전오식)”의 역할을 하고 하는, 因(인)과 果(과)의 관계인데요. 이러한 것들은 사실은 마음의 세계에서 이름뿐이고요. 계속 변하는 것이니까요. “實다운 性이 없다.”고 하는 말은, 고정불변 하는 실체로서의 어떤 존재는 하지 않는다. 하는 뜻입니다.
우리가 활동하는 일들이요. 우리 마음의 일들이, 훈습하고 저장하고, 훈습해서 갈무리하고, 그것이 또 밖으로 나가고, 顯行(현행). 훈습과 顯行. 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거든요. 우리 지금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훈습입니다. 익히는 것이지요. 익히고 또 그것이 우리 8식속에 갈무리 되어 있다가, 어느 날 인연이 닿으면 그것이 탁 튀어나와서, 밖으로 나타난다고요. 그것을 顯行이라고 합니다.
공부한 것. 우리가 보고 듣고 한 것. 이런 일체 것이, 전부 그것이 계속 돌아가면서, 계속 반복하는 그런 일이다. 그래서 자꾸 훈습해서 좋은 것을 자꾸 저장하라 이것이지요. 자꾸 좋은 것을 훈습하고, 좋은 것을 훈습함으로서 좋은 것이 저장 되고요. 그러면 나가는 것도 좋은 것이 나가는 겁니다. 나가는 것도 좋은 것이 나간다고요. 우리 음식물 한 가지만 먹어도, 뭘 먹었느냐에 따라서 그 배출 되는 것이 다르잖아요? 그렇듯이 우리의 마음의 세계도 좋은 것을 자꾸...
부처님 말씀. 성인의 가르침. 이런 것을 자꾸 들어서 저장해 놓으면, 그 표현도. 내 행동이라든지 말이라든지,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생활뿐 이예요. 따지고 보면 훈습과 현행. 밖으로 나타나는 것. 우리가 익히는 것. 그 생활이 모두라고요. 훈습해서 저장하고, 저장한 것 밖으로 나타나고... 그것의 연속입니다. 계속 그것의 연속일 뿐입니다.
若於轉處不留情(약어전처불유정)하면→ 만약에 정하는 곳에. 굴리는 그 곳에서 마음을 머물지 아니할 것 같으면. 그거는 마음을 두지 않는다 이것이지요. 實性이 없는 것이니까요. 名言만 사용했고 實性은 없는 것이니까요. 그것이 원인이 됐든 결과가 됐든 거기다가 너무 마음을 쓰지 않으면, 수행하는 입장에서는 선정을 닦아야 되니까요.
繁興永處那伽定(번흥영처나가정)하리라→ 아무리 우리가 활동을 번다하게 한다 하더라도, 繁興 하더라도 영원히 那伽定에 처하리라. “那伽定”이라고 하는 것은 “大定(대정)”이라 해서 “那伽大定”이라 해가지고, 가장 큰 선정. 가장 큰 선정은 큰 바위가 가만히 천년만년 있듯이 그렇게 있는 것이 제일 큰 선정이 아니고, 그렇게 된 선정은 아주 작은 선정입니다. 小乘(소승) 선정입니다.
진짜 큰 선정은. 바람직한 선정은 繁興입니다. 繁興! 아주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 부단히 활동하는 것. 자기 인생을 한껏 펼치면서 사는 것. 그러면서 자기의 어떤 안정을 잃지 않는 것. 永處那伽定. 항상 안정된 마음에서 열심히 활동 하는 것. 개인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자기의 그 어떤 소신을 잃지 않고 한다. 아니면 자기의 사상을 잃지 않고 한다. 나는 항상 자나 깨나 관세음보살을 잃지 않고 사회생활을 한다. 별별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밖에 나가서 아무리 활동을 많이 하더라도, 아무리 큰 회사를 운영하고 모임이 많더라도, 나는 가정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이것도 繁興永處那伽定(번흥영처나가정)입니다. 이것은 얼마든지 그렇게 설명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이것이 큰 선정입니다. 제대로 된 선정은 자기의 그 어떤 마음자리가 정말 한 곳에 고정되어 있으면서...
그렇다고 목석처럼 굳어져서 아무 활동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딴 사람보다 더 활동을 많이 하는 거예요. 그랬을 때 그 활동은 바람직하고, 어떤 평형을 잃지 않고 지혜로서, 예를 들어서 이 일을 이번에 다시 시작 하는데, 이 일을 시작해서 될지 안 될지를 환히 아는 것이지요. 선정을 잃지 아니하면 그런 활동이 어떤 정상궤도를 잃지 않는다. 이렇게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繁興永處那伽定. 참 좋은 표현이지요.
그래 轉處不留情해야 되요. 굴러가는데 거기에 마음을 매달지 말아야 돼요. 매달지 말고 언덕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듯이, 자기가 하고 있는 행위. 마음 씀씀이를 제삼자가 돼가지고 관조하는 것. 예의주시하는 그런 자세. 그것이 那伽定이지요. 禪定(선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자기가 물결에 의해서 부단히 정신없이 흘러가면서도 흘러가는 내 자신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를 견지하라는 것이지요. 그것을 잃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삶이 참 바람직하겠지요.]
通(통)이→ 지통이라는 스님이
頓悟性智(돈오성지)하야 遂呈偈曰(수정게왈)→ 性智. 성품의 지혜를 頓悟. 몰록 깨달아서 드디어 게송을 바쳐서 말하기를,
[三身(삼신)이 元我體(원아체)요→ 三身이 본래 내 몸이요.
四智(사지)가 本心明(본심명)이라→ 四智라는 것이 우리 본심에서 밝음을 발휘하는 것이다.
身智(신지)가 三身과 四智가 融無碍(융무애)하야→ 원융해서 걸림이 없어서
應物(응물)에 任隨形(임수형)이로다→ 사물을 만남에. 형상을 따르는 데에 맡긴다. 사물을 應함에 있어서, 그러니까 아이를 만나면 아이에게 맞추고, 어른을 만나면 어른에게 맞춘다 이겁니다. 그것이 融無碍지요. 三身四智가 원융해서 걸림이 없는 것이지요. 그것을 잘 맞출 줄 알아야 되는데, 그것을 잘 못 맞춤으로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應物(응물)에 任隨形(임수형). 형상 따름에 맡긴다. 應物하는데, 사물을 만남에 있어서 형상 따름에 맡긴다. 형상대로 따라 간다 이것이지요.
起修皆妄動(기수개망동)이며→ 수행을 일으킨다고 하는 것은 다 妄動이라.
守住(수주)는 匪眞定(비진정)이라→ 머물음을 지키는 것은 참다운 정진이 아니다.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 이것은 진짜 정진이 아니다. 저 앞에 있었지요?
繁興永處那伽定(번흥영처나가정)인데요뭘. 繁興永處那伽定 이라야지, 守住. 머물음을 딱 지키고 있는 것은 진짜 정진이 아니다. 이겁니다. 수행을 일으킨다고, 하~~ 뭐 수행한다고 그렇게 나부대는 것. 대개 그냥 밖으로 표현해서 하는 것. 그것은 妄動 이지요. 개망동 입니다. 그렇지만 초보자는 일단 그렇게 하고 봐야지요. 일단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그것이 망동이 됐든 뭐가 됐든간에, 막 그렇게 나부대다 보면 언젠가 제자리 찾을 때가 있겠지요?
妙智因師曉(묘지인사효)하니→ 이 좋은 시에 미묘한 지혜가 스승으로 인해서, 스님으로 인해서 환히 밝아졌으니, 효자를 썼어요. 새벽에 曉자.
원효 曉자. 새벽에 저 먼동이 틀때 밝아지는 그 신선함이라는 것은 참, 기가 막히지요? 여기다 그 효 자를 썼어요. 묘한 지혜가 스님으로 인해서 저 새벽에 먼동이 트듯이 그렇게 밝아졌으니,
終亡染汚名(종망염오명)이로다→ 마침내 染汚된 이름을 없애버렸다.
물든 이름을... 교에 물들어 있고, 중생에 물들어 있는... 그 染汚돼 있다고 하는 그런 이름을 다 없애게 되었다.] 하는 육조스님의 아주 유명한 게송 끝에, 자기도 또 오도송을 아주 멋지게 이렇게 한수 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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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_()_
若於轉處不留情하면 繁興永處那伽定하리라... 만약에 굴리는 그 곳에서 마음을 머물지 아니할 것 같으면, 아무리 활동을 번다 하게 한다 하더라도 영원히 那伽定에 처하리라... 제대로 된 선정은 자기의 어떤 마음자리가 정말 한 곳에 고정되어 있으면서 선정을 잃지아니하면 그런 어떤 활동이 정상궤도를 잃지 않는다.... 대원성님! 감사드립니다... _()()()_
三身이 元我體요 四智가 本心明이라...三身이 본래 내 몸이요, 四智라는 것이 우리 본심에서 밝음을 발휘하는 것이다. 守住는 匪眞定이라... 머물음을 지키는 것은 참다운 정진이 아니다...대원성님,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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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於轉處不留情(약어전처불유정)하면繁興永處那伽定(번흥영처나가정)하리라...고맙습니다.대원성님._()_
6식, 7식, 8식에 대한 설명을 참 쉽게 해 주셨습니다. 큰스님, 대원성님, 감사합니다 _()()()_
平等性智心無病(평등성지심무병)이라. 평등한 성품의 지혜는 마음에 아무런 병이 없다는. 어리석음이 없다는 뜻이다..... 대원성님. 감사드립니다._()()()_
妙觀察智는 見非功이다...묘하게 관찰하는 지혜는, 우리가 사물을 보는 데 있어서 아무런 공이 필요치 않다...(안 배우고도 잘 아는 그 능력이 뛰어난 능력이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지혜인 줄 알아야...)...대원성님 수고하셨습니다..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자기가 하고 있는 행위. 마음 씀씀이를 제삼자가 돼가지고 觀照하는 것. 예의주시하는 그런 자세. 그것이 那伽定이지요._()()()_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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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等性智心無病(평등성지심무병)이라→ 평등한 성품의 지혜는 마음에 아무런 병이 없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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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배 올립니다
若於轉處不留情 하면 繁興永處那伽定하리라 : 진짜 큰 선정은. 바람직한 선정은 繁興입니다. 繁興! 아주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 부단히 활동하는 것. 자기 인생을 한껏 펼치면서 사는 것. 그러면서 자기의 어떤 안정을 잃지 않는 것.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고맙습니다.
염불 참선하고, 불경공부 했다고, 뭐 춥고 더운 것 압니까? 안 배워도 잘만 알지요. 안 배우고도 잘만 아는 것. 그것이 뛰어난 능력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지혜인줄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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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繁興永處那伽定 ...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平等性智心無病(평등성지심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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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_()_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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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