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재원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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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잠시 친구와 분재원을 다녀왔다. 지난 해 동문들과 등산을 다녀오다 근처에 분재원이 있어 나 홀로 잠시 들렀었는데 다시 그곳을 가보고 싶어서였다.
지난번엔 그곳에서 분재공부를 하던 사람들도 많이 드나들고 하였었는데 오늘은 썰렁한 기분이 들었다. 농장입구를 들어서며 주인 내외에게 지나다 구경을 왔다며 인사를 하였다.
온실 바깥에는 크고 작은 분재들이 많았는데 커다란 나무들은 수령이 수백 년이 되는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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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실 안을 둘러보니 소나무, 소사나무, 모과나무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나같이 어떻게 저렇게 잘 키워냈을까 하고 생각이 드는 탐나는 물건들이다.
조금 있으니 바깥에서 나무를 다듬던 주인아저씨가 음료수를 들고 들어왔다. 순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다른 집 같았으면 출입 하는 것도 불편하게 여길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저씨에게 ‘정말 나무를 잘 키웠다’며 분재에 대한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그는 분재를 키우려면 그저 좋다는 ‘기분만 가지고서는 안 되고, 하루 두 번씩 물을 줄 정도의 정성이 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무형태를 잡아주고, 분갈이를 하는 등 많은 손질이 간다’고 하였다.
나는 ‘그렇다면 평소 여행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하였더니, ‘그럴 경우 반드시 관리인을 따로 두고 가야 한다’나. 하여간 눈으로 보기는 좋아도 제대로 관리를 하려면 많은 정성과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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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 언제 달려왔는지 강아지 한 마리가 나의 바지 가량이 사이를 오가며 치근대자 주인아저씨는 강아지를 나에게서 떼어 놓으려 하였지만 강아지는 여전히 나에게 관심이 많았다. 나는 녀석이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론 피곤하기도 하여 밀어 내엇지만 여전히 좋아 죽는 시늉을 해대었다.
아저씨에게 ‘그래도 생업인데 어느 정도 물량이동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1년에 5000만 원 가량의 수익만 발생시키고 지속적으로 키워 나간다’고 하였다. 분재란 연륜이 높을수록 가격이 오르기 때문이다.
하우스를 나오며 바깥에 서있는 향나무를 가리키며 ‘예술작품에 가격을 논한다는 것이 조금 뭣한 애기지만 그래도 가격을 매기자면 얼마정도를 이야기 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1억이란다. 그럼 이집에 있는 분재들을 모두 가격 매기면 수십억 원은 족히 되겠다.
강아지가 출입문 입구까지 따라 왔었지만 나는 야멸차게 녀석을 떼어내고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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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지인으로부터 분재 대여섯 그루를 받아서 키워 보았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었다. 정말 모양이 잘 잡힌 소사나무 두 그루를 포함한 몇 그루는 고사해 버리고, 소나무와 동백 한그루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해마다 분갈이며 수형을 잡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해 보았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요즘에는 건강하고 몸매를 잘 가꾸려면 음식을 가려먹고 성형을 하듯 식물도 마찬가지다. 보기 좋다는 것만 생각하고 공들여 가꾸지 않으면 언젠가는 사람들의 눈에서 멀어진다는 진리를 알고 살아 가야겠다.


<!--[if !supportEmptyParas]--><!--[endif]-->분재는 정원의 발달과 함께 발전되어 왔는데 중국의 문화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정원의 역사도 동양삼국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최근 분재문화사를 추론하여 보면 각종 문헌이 후한시대( 서기 25-220)의 벽화 고분에서 발견된 일이 있는데, 그 벽화 속에 盆에 심은 초목이 그려져 있다고 하여 중국에서는 기원전 또는 기원 경에 초목을 盆에 심어 즐겼다고 추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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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72년 중국 협서성에서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의 무덤이 발굴 되었는데, 그 무덤에서도 두 명의 시녀가 분재를 받들고 서있는 모습이 벽화에 그려져 있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화 모두에 있어 분재의 기원이 중국이라고 추론할 수 있는 기록들이다. 이현은 서기 71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정설은 이현이 생존하였던 서기 600년대에 이미 중국에서는 분재를 즐겼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첫댓글 캬
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