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가까워 장백소나무 종비나무 자작나무 우거진 원시림 헤치고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순례의 한나절에 내 발길 내딛을 자리는 아예 없다 사스레나무도 바람에 넘어져 흰 살결이 시리고 자잘한 산꽃들이 하늘 가까이 기어가다 가까스로 뿌리내린다 속손톱만한 하양 물매화 나비날개인 듯 바람결에 날아가는 노랑 애기금매화 새색시의 연지빛 곤지처럼 수줍게 피어있는 두메자운이 나의 눈망울 따라 야린 볼 붉히며 눈썹 날린다 무리를 지어 하늘 위로 고사리 손길 흔드는 산미나리아재비 구름국화 산매발톱도 이제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백두산 산마루를 나 홀로 이마에 받들면서 드센 바람 속으로 죄지은 듯 숨죽이며 발걸음 옮긴다
2
솟구쳐오른 백두산 멧부리들이 온뉘 동안 감싸안은 드넓은 천지가 눈앞에 나타나는 눈깜짝할 사이 그 자리에서 나는 그냥 숨이 막힌다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백두산 그리메가 하늘보다 더 푸른 천지에 넉넉한 깃을 드리우고 메꿎은 우레소리 지나간 여름 한나절 아득한 옛 하늘이 내려와 머문 천지 앞에서 내 작은 몸뚱이는 한꺼번에 자취도 없다 내 어린 볼기에 푸른 손자국 남겨 첫 울음 울게 한 어머니의 어머니 쑥냄새 마늘냄새 삼베적삼 서늘한 손길로 손님이 든 내 뜨거운 이마 짚어주던 할머니의 할머니가 백두산 천지 앞에 무릎 꿇은 나를 하늘눈 뜨고 바라본다 백두산 멧부리가 누리의 첫 새벽 할아버지의 흰 나룻처럼 어렵고 두렵다
3
하늘과 땅 사이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천지가 그대로 하늘이 되고 구름결이 되어 백두산 산허리마다 까마득하게 푸른하늘 구름바다 거느린다 화산암 돌가루가 하늘 아래로 자꾸만 부스러져 내리는 백두산 천지의 낭떠러지 위에서 나도 자잘한 꽃잎이 되어 아스라한 하늘 속으로 흩어져 날아간다 아기집에서 갓 태어난 아기처럼 혼자 울지도 젖을 빨지도 못한다 온 가람 즈믄 뫼 비롯하는 백두산 그 하늘에 올라 마침내 바로 서지도 못하고 젖배 곯아 젖니도 제때 나지 못할 내 운명이 새삼 두려워 백두산 흰 멧부리 우러르며 얼음빛 푸른 천지 앞에 숨결도 잊은 채 무릎 꿇는다
우리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 백두산 천지는 민족의 원형적 공간이며 성지로서, 그리고 통일 염원의 상징으로서 자리잡고 있다. 이 시도 이러한 배경을 깔고 있으면서 장중하면서도 정교한 어조로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감회를 표출하고 있다. 제목의 [백두산 천지]는 그러므로 단순한 공간적 지명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작품의 전체 주제를 환기시키는 비유로 작용한다.
작품 속에서 화자는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것을 단순한 등정이 아니라 종교적인 '순례'의 여정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화자의 태도는 전체 세 개의 부분으로 나뉜 각 단락의 말미에서 각각 "죄 지은 듯 숨죽이며", "어렵고 두렵다", 그리고 "무릎 꿇는다"라는 경외의 표현이 나타나 있는 것과도 적절하게 상응한다.
아울러 작품 중에 "어머니의 어머니"나 "할머니의 할머니", 그리고 "할아버지" 같은 친족의 어휘가 나타나며, 특히 세 번째 단락에서 "아기집에서 갓 태어난 아기처럼"이라고 하여 화자가 자신의 존재를 그 후손으로 보고 있는 것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흰머리 산과 하늘 연못으로 풀이되는 백두산 천지를, 화자가 민족 탄생의 원형적 성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백두산의 부성(父性)과 천지의 모성(母性)이 결합하여 우리 민족의 탄생이 비롯되었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또한 산문시의 형태를 띠고 있으면서도 병렬적 어휘의 나열과 반복, 일정한 운을 고려한 시어의 선택과 배치, 그리고 한자어를 배제한 순수 우리말의 사용 등을 통해 유려하면서도 생동하는 내적 리듬을 보여준다. 이러한 미적 형식은 민족의 성지인 백두산 천지를 순례하는 경외의 태도나 자세와 적절하게 호응하면서 작품의 주제 의식을 한층 고양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강연호)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 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 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누구나 경험했음직한 한 시절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그 시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청파동'이라는 지명은 아마 시인의 개인적 이력과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물론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 다만 그 지명을 통해 지나간 사랑의 한 시절을 강렬하게 환기시키고 있다.
작품 속에서 화자는 겨울이었지만 따뜻하고 다정했던 시절을, 그리고 봄이었지만 마음 추웠던 이별의 순간을 돌이키고 있다. 이때 사랑은 "꽃잎처럼 포개져" 지내던 다정함으로, 그리고 이별은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와 "쇠꼬챙이처럼" 찌르는 날카로움으로 생생하게 표현된다.
화자는 지금 '청파동'의 그 시절로 다시 가고 싶어한다. 그 열망은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서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강렬하다.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이지만, 찔리고 기어서라도 돌이키고 싶다는 극단적 열망은, 화자를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헤매게 하면서 "청파동을 기억하는가"라는 물음을 되풀이하게 한다. 물론 이 때의 물음은 그 시절의 상대방에게 던지는 질문이면서 동시에 스스로에게 되새기는 자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 환기하고 있는 기억 속의 한 시절 같은 것이야말로, 일찍이 밀란 쿤데라가 얘기한 바 있는 '존재의 한 순간'이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향수'에 젖게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쿤데라에 의하면 그 기억을 붙잡는 것이 바로 '시의 천분'이라고 한다. 아마 우리들 각자에게도 이처럼 지명으로서의 '청파동'이 아니라, 존재의 한 순간에 대한 기억으로서의 '청파동'이 있을 것이다.(강연호)
자동판매기
최승호
오렌지 쥬스를 마신다는 게
커피가 쏟아지는 버튼을 눌러 버렸다
습관의 무서움이다
무서운 습관이 나를 끌고다닌다
최면술사 같은 습관이
몽유병자 같은 나를
습관 또 습관의 안개나라로 끌고다닌다
정신 좀 차려야지
고정관념으로 굳어 가는 머리의
자욱한 안개를 걷으며
자, 차린다, 이제 나는 뜻밖의 커피를 마시며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賣春婦라 불러도 되겠다
黃金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그대가 돈의 權能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그러면 賣淫의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十字架를 세운 자동판매기는
神의 오렌지 쥬스를 줄 것인가
이 작품은 도시의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자동판매기를 소재로 하여 자동화되고 습관화된 삶을 살아가는 인간 소외의 현장을 고발하고 있다. 거리 곳곳에 혹은 건물 구석마다 자리잡고 있는 자동판매기를 통해 우리는 각종 음료와 먹을거리 또는 일상 용품 등 그야말로 다양한 품목들을 구매하곤 한다. 이 작품에 나와있듯이 그것은 어쩌면 과연 돈만 넣으면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기도 하고 "신의 오렌지 쥬스"를 줄 수도 있을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 작품은 자동판매기라는 대상물을 통해 삶의 무비판적인 상황을 매매춘의 관계로 형상화하고 있다. 심지어 종교적 구원마저도 돈의 권능으로 매매된다는 비판적 인식까지 보여준다. 자본주의와 물질문명, 그리고 황금만능주의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말하자면 돈을 지불하고 육체를 사는 매매춘 행위에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 본질은 정작 이러한 상황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회의도 반성도 없이 휩쓸려 살고 있는 우리의 무비판적이고 습관화된 의식에 있다. 화자는 지금 오렌지 쥬스를 마신다는 게 그만 버튼을 잘못 눌러 커피를 마시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문득 습관의 무서움의 인식하고 "정신 좀 차려야지"라고 다짐한다.
정말 무서운 것은 과연 "최면술사 같은 습관"이 "몽유병자 같은 나"를 "습관 또 습관의 안개나라로 끌고다닌다"는 사실이다. 그 "습관의 안개나라"와 "고정관념으로 굳어가는 머리"가 바로 현대인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며, 그럼에도 우리는 습관처럼 무의식적으로 돈을 지불하고 그것을 구입하고 마시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그 보이지 않는 포주에 의해 우리는 조종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강연호)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이성복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순간순간 죄는 색깔을 바꾸었지만
우리는 알아채지 못했다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아파트의 기저귀가 壽衣처럼 바람에 날릴 때
때로 우리 머릿속에 흔들리기도 하던 그네,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아파트의 기저귀가 壽衣처럼 바람에 날릴 때
길바닥 돌 틈의 풀은 목이 마르고
풀은 草綠의 고향으로 손 흔들며 가고
먼지 바람이 길 위를 휩쓸었다 풀은 몹시 목이 마르고
먼지 바람이 길 위를 휩쓸었다 황황히,
가슴 조이며 아이들은 도시로 가고
지친 사내들은 처진 어깨로 돌아오고
지금 빛이 안 드는 골방에서 창녀들은 손금을 볼지 모른다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물 밑 송사리떼는 말이 없고,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이 작품은 첫 구절에 극명하게 드러나 있듯이 "아무도 믿지 않는", 그래서 든든하지 못하고 "허술한", 어떤 "기다림의 세월"을 노래하고 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오지 않은 어떤 대상에 대한 기다림은 우리들의 삶에서 자연스러우면서도 중요한 조건이다. 지금의 현실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것을 견디는 것은 미래에 대한 어떤 기다림이나 기대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처럼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뿐이라면 이러한 삶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믿지 않으면서도 기다리고, 혹은 기다리면서도 믿지 않는 나날에 과연 무슨 희망이 있고 무슨 의욕이 있겠는가.
'기다림'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작품의 분위기는 어둡고 부정적이다. 수의처럼 날리는 기저귀, 길바닥 돌틈의 목마른 풀들, 길 위를 휩쓰는 먼지바람, 도시로 간 아이들, 지친 사내들, 골방에서 손금 보는 창녀들 등등 희망 없는 삶의 단면들이 전체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목에 나오듯이 과연 어떤 새들이 희망도 미래도 없이 허술한 "이곳"에 집을 짓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서 '허술한 기다림'은 사실 기다림이라기보다는 아예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게 된 부정적인 삶을 의미한다.
희망 없는 삶은 달리 말하자면 삶이 아니라 차라리 죽음 같은 것이다. 이 시는 작품의 중간과 끝에 두 번 반복된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는 문장을 아예 제목으로 내세워서, 어두운 주제와 분위기를 한층 부각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유기적으로 연결될 것 같지 않은 구절이나 표현들이 서로 속도감 있게 엇갈리며 병치되는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러한 시적 형상화는 언뜻 보기에 무질서한 이미지와 연상의 자유로운 나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무질서해 보이는 각각의 구절들은 서로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놀라운 흡인력을 발휘하여, 일상적 삶의 억압과 그 속에서의 무기력한 삶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한다.(강연호)
진짜 빛은 빛나지 않는다
황지우
正覺스님은 녹차 티백을 잔에서 건져내면서, 요즘 건강 좋아요, 묻는다.
의자 밑에서 지하철 공사 굴삭기 소리가 덜덜덜 났다.
新生代에서 올라온 은행나무 밑을 나는 맹인과 함께 걸어왔었다.
가톨릭센터 유리문이 열릴 때마다 구름 위 신호등이 따라 들어온다.
큰스님 휘호라며 眞光不輝를 펼쳐 보여주는데
수족관에서 지브라들이 떼지어 정각의 옆얼굴을 지나갔다.
다방 레지가 찻쟁반을 보자기로 싸가지고 부리나케 나간다.
천하장사 씨름 선수가 천하장사 씨름 선수를 번쩍 들어올렸다.
어디선가 천장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외환은행 앞 보도에 주차된 그랜저; "내 탓이오"는 샘물체였다.
전투 경찰들이 도열하여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나는 바라나시에서 온 애인 편지를 빨리 뜯어보고 싶어 가고 있는데
맹인이 지하도 입구에 한참 동안 서 있질 않는가. 난 승려에게 말했다.
나는, 어딘가 갈 곳이 있어야 하므로 인도에는 여태껏 안 가고 있다고.
얼룩말들이 지나간 뒤 물 속의 먼지; 정각은, 빛나지 않아야 할 텐데,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씨름 선수가 씨름 선수를 아직까지 들고 있다,
나팔수처럼 얼굴을 붉히며. 나는 맹인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왔다.
사실 모든 길이 낭떠러지 아닌가.
프랑스 왕립 천문학회는 새로 발견된 별에 랭보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든가.
성기를 자른 어느 젊은 스님에 대해 정각은 얘기하기 시작한다.
번개에 의해 드러난 소나무를 본 적이 있겠죠, 내가 물었다.
지하도에는 꼭 광야의 설교자들이 있다.
나는 서울서 내려온 손님들 데리고 망월 묘역으로 갔다.
은행나무 밑에서 나는 맹인과 헤어졌다.
신호등 위 빙수처럼 쌓여지는 뭉게구름; 애완용 개가 혼자서
횡단보도를 쫄랑쫄랑 건너간다. 시청 뒷골목 카시오페아 座에 앉아
나는 또 다른 먼 별을 올려다봄시롱 밤새 술 마셨다.
요즘도 소리가 들려요, 하고 정각이 물었다.
맹인은 視覺障碍人協會가 가톨릭센터 지하에 있다고 말했었다.
나는 머리에 공기 같은 것이 빵빵하게 찬 것 같다고 말했다.
허공에 뜬 모래 무지개; 바닥에 누운 천하장사는 일어날 줄 모른다.
나는 眞光不輝를 돌돌 말았다.
이 시의 제목인 [진짜 빛은 빛나지 않는다]는, 작품 중에 나오듯이 큰스님이 써준 휘호인 진광불휘(眞光不輝)를 우리말로 풀이한 것이다. 이 작품은 화자와 스님의 대화를 드라마처럼 그대로 드러내면서, 또한 대화 도중의 곳곳에 주변의 잡다한 일상들과 단상들까지 끼워넣거나 병치시키고 있다. 그래서 얼른 보기에 대단히 복잡하거나 무질서하게 여겨지며 그 의미를 따라잡기도 쉽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의 삶은 단일하거나 통일된 사건과 잘 짜여지거나 논리화된 의식 구조 속에서 진행되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삶의 어느 단면을 절개하면, 그 절개된 부분에는 잡다하며 서로 무관하기도 한 삶의 이런저런 모습들이 파편처럼 박혀 있게 마련이다. 이 시는 이와 같은 삶의 파편들을 늘어놓듯 병치시켜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의도는 후반부에 나오는 구절처럼 "머리에 공기 같은 것이 빵빵하게 찬", 혹은 "허공에 뜬 모래 무지개" 같은, 일상의 공허하면서도 무반성적인 삶을 그려내는 데 맞춰져 있다. 이는 다시 도입부로 돌아가서 "의자 밑에서 지하철 공사 굴삭기 소리가 덜덜덜" 들리고 있다는 것이나, 번쩍 들어올려진 씨름선수의 모습 등과도 호응하면서, 마치 허공에 붕 떠있는 듯한 삶의 부박성을 새삼 드러내 준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 삶의 본질이나 가치가 있을 것만 같은데, 현실은 "모든 길은 낭떠러지 아닌가"하는 절박함으로 뒤덮여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각각 촬영한 필림을 합성 편집하는 몽타쥬 기법이나, 화폭에 종이조각, 섬유 등을 붙여 독특한 효과를 형성하는 콜라쥬의 기법을 연상시킨다. 이와 같이 전통적인 시형식을 무시하거나 전복하는 방식을 통해 시인은 당대의 체제나 세태에 대한 냉소적 저항과 비꼼의 태도를 드러낸다. 환상과 현실이 뒤틀려 교차되는 구조 역시 이러한 태도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요컨대 과시의 삶은 가짜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휘호로 쓰여진 진광불휘가 뜻하는 바도 그것이다.(강연호)
봄날
송찬호
봄날 우리는 돼지를 몰고 냇가에 가기로 했었네
아니라네 그 돼지 발병을 했다 해서
자기의 엉덩짝 살 몇 근 베어 보낸다 했네
우린 냇가에 철판을 걸고 고기를 얹어놓았네
뜨거운 철판 위에 봄볕이 지글거렸네 정말 봄이었네
내를 건너 하얀 무명 단장의 나비가 너울거리며 찾아왔네
그날따라 돼지고기 굽는 냄새 더없이 향기로웠네
이제, 우리들 나이 불혹이 됐네 젊은 시절은 갔네
눈을 씻지만 책이 어두워 보인다네
술도 탁해졌다네
이제 젊은 시절은 갔네
한때는 문자로 세상을 일으키려 한 적 있었네
아직도 마비되지 않고 있는 건 흐르는 저 냇물뿐이네
아무려면, 이 구수한 고기 냄새에 콧병이나 고치고 갔으면 좋겠네
아직 더 올 사람이 있는가, 저 나비
십 리 밖 복사꽃 마을 친구 부르러 가 아직 소식이 없네
냇물에 지는 복사꽃 사태가 그 소식이네
봄날 우린 냇가에 갔었네 그날 왁자지껄
돼지 멱따는 소린 들리지 않았네
복사꽃 흐르는 물에 술잔만 띄우고 돌아왔네
햇살 따스한 봄날 야유회의 한 장면을 포착하고 있는 작품이다. 화자인 '우리'는 어느 봄날 냇가로 소풍을 나가 돼지고기를 구워 먹는다. 겉으로 보기에 그 장면은 지극히 한가롭고 즐겁다. 봄볕은 뜨거운 철판 위에 지글거렸고, 흰 나비가 날아다녔으며, 고기 굽는 냄새는 향기로웠고, 냇물에 지는 복사꽃은 사태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둘째 연에서 화자는 "정말 봄이었네"라며 그 봄날의 풍광과 정취에 새삼 감탄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표면적인 모습과 달리 작품의 속내는 지극히 쓸쓸하고 무상한 느낌을 준다. 그 이유는 물론 이 시가 덧없는 젊음과 무상한 세월을 가는 봄의 쓸쓸한 정취에 얹어서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동서고금의 많은 사람들이 노래했듯이, 봄이라는 계절은 겨우내 움츠렸던 만물을 다시 소생하게 하고 생명감을 고양시켜주기도 하지만, 또한 그렇게 우리를 희망에 부풀게 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문득 사라져버리는 계절이기도 하다. 또한 봄은 해마다 돌아오지만 한번 지나간 세월과 젊음은 결코 다시 오거나 돌이켜지지 않는다. 이 작품의 셋째 연과 넷째 연에서 "이제 젊은 시절은 갔네"라는 탄식이 두 번이나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무상함의 직설적인 토로이다.
화자는 이제 불혹의 나이가 되었다며 눈을 씻지만 책이 어두워 보이고 술도 탁해졌다고 탄식한다. 이러한 탄식은 "한때 문자로 세상을 일으키려 한 적" 있었던 질풍노도의 시절이 이제는 가고 없다는 자각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지금은 세상의 속된 일상에 마비되고 무감각해져 대충 살고 있다는 회한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아직도 마비되지 않고 있는 건 흐르는 저 냇물뿐이네"와 "아무려면, 이 구수한 고기 냄새에 콧병이나 고치고 갔으면 좋겠네"라는 구절의 대비는 이러한 인식을 반영한다.(강연호)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박정대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나의 가슴에 성호를 긋던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
하늘의 구름을 나의 애인이라 부를 순 없어요
맥주를 마시며 고백한 사랑은
텅 빈 맥주잔 속에 갇혀 뒹굴고
깃발 속에 써놓은 사랑은
펄럭이는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복잡한 거리가 행인을 비우듯
그대는 내 가슴의 한복판을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 뿐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맥주를 마시고 잔디밭을 더럽히며
빨리 혹은 좀더 늦게 떠나갈 뿐이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이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라고 잘라 말하고 있으며, 이는 본문에서도 거듭 되풀이되고 있다. 이러한 단정은 또한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이나,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 "무례한 길손이었을 뿐", 그리고 "빨리 혹은 좀더 늦게 떠나갈 뿐" 등으로 계속 이어지는 '∼이었을 뿐'이라는 한정적인 표현들과 함께, 세상의 애인은 모두 과거형인 옛애인일 뿐 그 이상의 어떤 것은 아니었다는 식의 체념과 한탄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 마디로 화자의 태도는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라는 강력한 부정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렇지만 사랑의 완전성이나 영원성에 대한 강력한 부정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체로는 부정 그 자체에 힘이 실려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회한과 안타까움의 둘러말하기라고 보는 게 더 일반적이다. 우리는 사랑에 실패했을 때, 때로 사랑 그 자체를 강하게 부정함으로써 결말의 씁쓸함에 대해 다소나마 위안 받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이 작품에서 화자가 거듭해서 "이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라고 말하는 것도 표면적으로는 세상의 모든 애인이란 과거형일 뿐 영원한 애인은 없다는 뜻이지만, 이 강력한 부정의 단정적 어조에는 사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간절한 사무침과 그리움이 역설적으로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와 관련하여 한 러시아 시인의 작품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의 [옛애인에게 돌아가지 마세요]라는 시에는, 현재의 애인을 떠나 옛애인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충고하며 "이 세상에 옛애인은 없어요"라고 말하는 구절이 나온다. 보즈네센스키의 시와 박정대 시인의 작품에서 우리는 상호텍스트성을 엿볼 수 있다. 이 두 표현, 그러니까 "이 세상에 옛애인은 없어요"라는 구절과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라는 단정에는 어떤 미묘한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강연호)
섬 1
―편지
송재학
아우로부터 편지가 왔다
고등 2년 때 가출한 그를 찾으러
갈꽃 피는 여수 남쪽 섬을 간 적이 있었다
흙바람 가득한 섬은 아우의 행방보다 더 나를
사로잡았고
지금도 그를 보면
흙바람 같다
아우는 밤에 홀로
思考한다고 썼다
그리고 편지 끝에 원서 비용으로
6만 원의 돈이 필요하다고 부기했다
나는 시골 관청의 8급 주사보이고
점심은 사무실에서 시켜먹고 화투를 쳤고 가끔
여자들이 도시에서 찾아왔다
밤에는 그러나 혼자 잠들고팠다
안개는 무시로 깔려와,
내 기관지는 자주자주 다치더니
나는 며칠의 病暇를 내고 버스를 탔다
아우는 지방대학의
철학과와 신축도서관에 묻혀 지냈다
어느 날 그의 흙바람내나는 서랍을 뒤져보았다
스스로 고독한 짜르라 칭한 아우의 비망록,
악필이었던 글씨는 여전했고
끝없는 단상과 부호 같은 일기
반 년 전부터 복용하는
아이나와 에탐부톨이 칼로 자른 넋처럼
하얗게 빛났다
결재 과일과 대차대조표를 뒤적이다가
봉화 영양 안동 예천으로 출장을 떠나며
나는 혼자일 때는 머나먼 섬까지의 뱃시간을 베끼고
문득문득 아우가 보낸 편지가 왔다
아우는 회의주의 학파의 색인을 정리하고
나는 시를 쓰다 관두다 했다
사흘마다 숙직실에서 밤을 새웠다
유리창은 늘 두텁게 서리 끼고
연탄가스는 조금조금 스몄다
아침이면 퉁퉁 부은 얼굴로 출근도장을 찍고
1,300 원의 숙직비로 점심을 떼우거나
겨울 문예지를 샀다
아우는 19세기 러시아 지성사를 번역해갔다
나는 섬의 외로움으로 깊어진 밤에
이윽고 술을 마실 뿐
아우는 읽던 책을 건네준다
나는 사람과 싸우며 며칠을 끙끙거리고
아우는 아침마다 스터디그룹에 나갔다
아우로부터 편지가 왔다
밤에 스피노자*를 읽으면
집 근처 신기료 사내는 마치
우리들 보행의 자유를 위해 신발을 고치는
도시의 스피노자처럼 보인다고 적었다
편지 끝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를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부기했다
나는 싸늘한 숙직실 유리창에
서리 흔적으로 섬이라고 써보았다
*스피노자는 생계를 위해 렌즈를 갈았다
서사적 이야기 형식을 띠고 있는 이 작품에는 두 겹의 삶이 그려져 있다. 화자인 형과 그의 아우는 각기 나름대로 다른 삶을 영위하고 있는데, 전혀 이질적인 것 같은 이 두 겹의 삶은 실제로는 서로 교차되거나 겹쳐지면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형은 시골의 말단 공무원이고 자주 출장을 다니거나 숙직을 하며 혼자 외롭게 문학을 꿈꾸다 말다 하는 사람이다. 아우는 지방대학의 가난한 철학과 학생이고 형에게 학비를 보조받고 있으며 철학적 고뇌에 심취해 있는 사람이다. 아우가 보낸 편지의 내용과 화자인 형 자신의 언급을 보면, 형은 문학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고, 아우는 철학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고 있다. 서로 각기 다른 것 같은 이 두 겹의 삶은, 결국 거칠게 정리하자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한다는 점에서 하나로 연결된다.
이 두 겹의 삶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통로 역시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 작품의 주제목인 '섬'이고, 다른 하나는 부제로 달려있는 '편지'이다. 아우는 한때 섬으로 가출한 적이 있으며, 형은 그 이후 섬에 심취해 있다. 그리고 아우가 형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과 그 편지를 읽으며 자신의 무기력한 일상을 되새기는 형의 사유 속에는 삶에 대한 고뇌와 외로움이 짙게 배어 있다.
결국 이 작품에서 형과 아우는 모두 '섬'을 동경하며 꿈꾸는 것으로 그려져 있지만, 동시에 자신들이 각자 하나씩의 고립된 '섬'이기도 한 셈이다. 흔히 섬은 동경이자 고립이기도 한 공간을 상징한다. 이 시에서도 섬은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동경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공간으로 묘사된다. 작품의 말미에 있는 "나는 싸늘한 숙직실 유리창에 / 서리 흔적으로 섬이라고 써보았다"라는 구절은, 마치 어느 서정적인 드라마의 절제된 마지막 장면인 듯, 여운이 길고 짙다.(강연호)
이탈한 자가 문득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어찌 보면 다들 독자적이고 다양한 것 같은 인간의 삶은, 사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이 대부분 남들과 비슷비슷한 행로를 따라간다고 볼 수도 있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천체들의 운행처럼 정해진 길과 예측 가능한 미래를 따르면서, 졸업과 취직, 결혼과 가정, 승진과 출세와 안정 등으로 고만고만하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궤도 안의 삶을 사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원만하게 꾸려내는 삶도 쉽지만은 않은 일이어서 나름대로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안정된 삶의 길을 따르다 보면 그야말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지나고 나면 한때 우리가 가졌던 남다른 열망과 기대는, 혹은 불붙는 정열은, 질풍노도의 기세는 어느새 간 곳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마 사회는 질서와 제도의 유지를 위해 대체로 이러한 삶을 권장하겠지만, 그것은 때로 교묘하게 통제의 방식이나 억압의 기재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정해진 궤도를 따르는 삶과 궤도를 이탈한 삶을 대비시키고 있다. 궤도 안의 삶은 그만큼 안정적이고 미래 역시 예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삶은 평범해서 '획'을 그을 수 없다. 반면에 궤도를 이탈한 삶은 어디로 어떻게 나가떨어질지 도무지 불안하며 미래 역시 예측하기 어렵다. 거기다가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하늘의 별똥별은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찬란한 섬광의 한 순간을 갖는다. 이때의 별똥별은 궤도를 이탈했으므로 이미 별이 아니라, 작품 속의 말장난(pun)처럼 과연 "별, 그 똥"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곧 사라질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러나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고 말한다. 그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자이고, 그래서 통제나 억압에서도 벗어나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강연호)
사랑의 變奏曲
김수영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都市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三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넝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節度는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四ㆍ一九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暴風의 간악한
信念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信念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人類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美大陸에서 石油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都市의 疲勞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瞑想이 아닐 거다
이 작품은 화자가 사랑을 발견하는 과정과 사랑의 여러 가지 측면들, 그리고 그 사랑을 아들에게 전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길이도 만만치 않고 전통적인 행갈이나 연구분을 거의 무시한 듯한 시행 구조를 갖고 있으며, 난삽한 구문과 도취적인 어조로 인해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자체를 시인의 의도로 보고 직접 소리 내어 취한 듯 읽다 보면, 제목 그대로 사랑이라는 가슴 벅찬 전언을 여러 가지로 변주하여 노래하고 있으며, 그것을 미래의 어떤 약속으로 아들에게 전하고 있다는 정도는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작품의 도입부에 선언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욕망을 통한 사랑의 발견이 뜻하는 바를 살펴야 한다. 아울러 후반부에서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를 동원하여 "단단한 고요함"을 아들에게 전하고 있는, 이 시에서 가장 돌연하면서도 인상적인 비유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에서 '사랑'은 어떤 형이상학적 윤리적 차원의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욕망' 속에서 배태된 것이며,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도시의 피로"에서 일상의 삶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또한 이와 같이 '욕망' 속에서 발견하는 '사랑'의 단단함은, 뒤에 가서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 같은, 달콤한 과육에 둘러싸인 씨앗들의 단단함으로 바꾸어 표현된다.
그러므로 작품의 말미에 나와 있는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은, 말하자면 그 씨앗들이 활짝 꽃 피우고 열매를 맺는 날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복사씨와 살구씨에서 배우는 이와 같은 사랑의 비유는, 행인(杏仁)과 도인(桃仁)이라고 하여 과실의 씨로 생장의 뜻을 나타낸, 동양에서의 인(仁) 사상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 작품에서 사랑은 단단한 씨앗들이 언젠가 꽃으로 만개하고 열매로 풍성해지듯이, 그 "단단한 고요함"을 배우는 과정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강연호)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오규원
죽음은 버스를 타러가다가
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죽음은 쉽게
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
우선 한잔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한잔 하고
한잔 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죽음은 쉽게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이유를 찾았다
술을 한잔 하다가 죽음은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것도
귀찮아서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술이 약간 된 죽음은
집에 와서 TV를 켜놓고
내일은 주말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제일이지----
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그래,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
하고 중얼거렸다
제목에 미리 제시되어 있듯이 우화적인 설정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우화(Allegory)는 흔히 동식물을 의인화시켜 내세우면서 인간의 삶을 빗대어 드러내는 형식을 말한다. 그래서 대체로 표면적인 이야기와 숨겨진 이야기에 차이가 있으며 이를 통해 풍자나 비판, 교훈적인 태도를 띠게 된다.
이 작품에서 의인화된 '죽음'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합리화한다. 그는 버스를 타려다가 걷기가 귀찮아 택시를 타면서 "할 일이 많아"서라고 스스로 그 이유를 찾아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곧바로 일보다는 우선 한 잔 하기로 하면서,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변심을 합리화한다. 이런 식으로 '죽음'은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 등을 계속 귀찮아하거나 변호하면서, 결국 주말 여행이나 계획하게 된다. 심지어 그는 여행 계획에도 그럴듯한 이유를 달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건강이 제일"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건강'을 중시하는 이 전도된 희극적 태도는 곧 작품 전체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만든다. 여기서 의인화된 '죽음'은 나날의 일상에 함몰된 채 아무런 의식도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의 순응주의적 삶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죽음'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변명하고 합리화하며 정당화하려 한다.
이 시는 결국 '죽음'처럼 의식이 고갈된 삶은 진짜 삶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곧 죽음과 다름 없는 삶이라는 것을 속뜻으로 담아내고 있다. 시적 대상에 대한 전도된 언어 유희를 통해 삶의 무감각성을 경쾌하고 즐겁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지만, 그 유희 정신의 이면에는 삶의 근원적 비극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숨어 있다.(강연호)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
----욕망의 통조림 또는 묘지
유하
압구정동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이다
국화빵 기계다 지하철 자동 개찰구다 어디 한번 그 투입구에
당신을 넣어보라 당신의 와꾸를 디밀어보라 예컨대 나를 포함한 소설가 박상우나
시인 함민복 같은 와꾸로는 당장은 곤란하다 넣자마자 띠-- 소리와 함께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그 투입구에 와꾸를 맞추고 싶으면 우선 일년간 하루 십 킬로의
로드웍과 섀도우 복싱 등의 피눈물 나는 하드 트레이닝으로 실버스타 스탤론이나
리차드 기어 같은 샤프한 이미지를 만들 것 일단 기본 자세가 갖추어지면
세 겹 주름바지와, 니트, 주윤발 코트, 장군의 아들 중절모, 목걸이 등의 의류 액서서리 등을 구비할 것 그 다음
미장원과 강력 무쓰를 이용한 소방차나 맥가이버 헤어스타일로 무장할 것
그걸로 끝나냐? 천만에, 스쿠프나 엑셀 GLSi의 핸들을 잡아야 그때 화룡점정이 이루어진다
그 국화빵 통과 제의를 거쳐야만 비로소 압구정동 통조림 통 속으로 풍덩 편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곳 어디를 둘러보라 차림새의 빈부 격차가 있는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욕망의 평등 사회이다 패션의 사회주의 낙원이다
가는 곳마다 모델 탤런트 아닌 사람 없고 가는 곳마다 술과 고기가 넘쳐나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구나 미국서 똥구루마 끌다 온 놈들도 여기선 재미 많이 보는 재미 동포라 지화자, 봄날은 간다--
해서, 세속도시의 즐거움에 동참하고 싶은 자들 압구정동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힘쓰는구나
투입구의 좁은 문으로 몸을 막 우겨 넣는구나 글쟁이들과 관능적으로 쫙 빠진 무용수들과의 심리적 거리는, 인사동과 압구정동과의 실제 거리에 비례한다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오, 욕망과 유혹의 삼투압이여
자, 오관으로 느껴보라, 안락하게 푹 절여진 만화방창 각종 쾌락의 묘지, 체제의 꽁치통조림 공장, 그 거대한 피스톤이, 톱니바퀴가 검은 기름의 몸체를 번득이며 손짓하는 현장을
왕성하게 숨막히게 숨가쁘게
그러나 갈수록 쎅시하게
바람이 분다 이곳에 오라
바람이 분다 이곳에 오라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이 곳에 오라
이 작품은 어떤 결함이나 악행 비리 등에 대해 폭로하고 조롱하는 풍자(satire)나 특정 작품의 고유함을 흉내내되 그것을 비틀어 표현함으로써 희화화하는 패러디(parody)의 수법을 차용하고 있다. 시인은 당대의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과 유혹의 삼투압"에 대해, 요설이나 재치 혹은 말장난을 동원한 속도감 있는 시행 전개를 통해 신랄한 조롱과 비판을 수행한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이 작품에서 비판자의 태도는, 비판하는 세계 밖에 서서 비판의 대상을 향해 행하는 엄숙주의로서의 비판이 아니라, 그 자신도 비판할 대상 속에 깊이 함몰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을 수행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러한 비판의 방식은 일종의 누워서 침뱉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침은 그 혼자 맞는 것이 아니라, 그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맞는 어떤 것이 된다. 이 작품은 이런 점에서 타락한 사회를 타락한 방식으로 폭로하는 시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외국 시인의 유명한 시 구절을 패러디하여, 오늘날 한국 사회의 물질적 타락을 표상하는 장소인 '압구정동'을 희화화한다. 그 사회는 "안락하게 푹 절여진 만화방창 각종 쾌락의 묘지"로서 묘사된다. 그러면서도 정작 화자 자신도 "그 투입구에 와꾸를 맞추고 싶"어 안달이다. 다시 말해 세태의 허황스러운 풍속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화자 역시 그 속에 함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화자의 태도는, 그러므로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지만, 그래서 그의 태도는 경직되거나 섣부른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있다. 시인은 그러한 화자의 태도 자체까지를 풍자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물신화된 풍조와 세태에 대한 역설적 비판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강연호)
기념식수
이문재
형수가 죽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감자를 구워 소풍을 간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개구리들이 땅의 얇은
천장을 열고 작년의 땅 위를 지나고 있다
아이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
교외선 유리창에 좋아라고 매달려 있다
나무들이 가지마다 가장 넓은 나뭇잎을 준비하러
분주하게 오르내린다
영혼은 온몸을 떠나 모래내 하늘을
출렁이고 출렁거리고 그 맑은 영혼의 갈피
갈피에서 삼월의 햇빛은 굴러 떨어진다
아이들과 감자를 구워 먹으며 나는 일부러
어린왕자의 이야기며 안델센의 추운 바다며
모래사막에 사는 들개의 한살이를 말해 주었지만
너희들이 이 산자락 그 뿌리까지 뒤져본다 하여도
이 오후의 보물찾기는
또한 저문 강물을 건너야 하는 귀가길은
무슨 음악으로 어루만져 주어야 하는가
형수가 죽었다
아이들은 너무 크다고 마다 했지만
나는 너희 엄마를 닮은 은수원사시나무 한 그루를
너희들이 노래부르며
파놓은 푸른 구덩이에 묻는다
교외선의 끝 철길은 햇빛
철 철 흘러넘치는 구릉지대를 지나 노을로 이어지고
내 눈물 반대쪽으로
날개도 흔들이 않고 날아가는 것은
무한정 날아가고 있는 것은
이 작품은 형수의 죽음과, 어린 조카들을 돌봐야 하는 화자의 슬픔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삼촌인 화자는 엄마의 죽음을 아직 모르고 있는 조카들을 데리고 교외로 소풍을 나간다. 거기서 화자와 아이들은 죽은 "엄마를 닮은 은수원사시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 여기서 제목의 [기념식수]는 우선은 죽은 사람을 추모하며 기억하자는 뜻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엄마의 죽음을 조만간 알게 될 조카들의 슬픔을 달래주려는 의미도 있고, 또한 이제는 더 이상 기대일 곳 없어도 혼자 자랄 수 있는 삶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엄마 없이 자라야 하는 아이들을 향한 화자의 연민은 깊다. 작품 중에 있는 "무슨 음악으로 어루만져 주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그러므로 어떤 위안으로도 그 슬픔을 달래주지 못할 것이라는 인식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 작품에서 형수의 죽음과 부재를 가장 슬퍼할 사람은 물론 엄마를 잃은 조카들이겠지만, 그러한 조카들을 옆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화자 역시 그 슬픔의 중심에서 그리 멀지 않다. 어쩌면 눈밝은 독자라면 이 시에서 형수에 대한 화자의 은근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의 결까지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시는 여리고 상처 입기 쉬운 영혼들의 내면을 포착하고 있다. 특히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삼월의 투명한 햇빛과, 엄마의 죽음을 아직 모르는 아이들의 즐거움, 그리고 그런 아이들에 대해 깊은 연민을 보이고 있는 화자의 글썽임 등은, 서로 대비되면서 어울리고 어울리면서 대비되는 묘한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결말 부분의 "내 눈물 반대쪽으로"라는 구절 이후가 깊은 울림과 오랜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이러한 정황의 섬세한 묘사 때문이다.(강연호)
봄밤
이윤학
봄밤엔 보이지 않는 문이 너무 많다.
봄밤엔 보이지 않는 문틈이 너무 크다.
캄캄함을 흔드는 개구리 울음 속에서
코 고는 아버지, 밤새워 비탈길 오르시는 아버지,
어금닐 깨물고 계시는 아버지.
불 끄구 자라, 불
끄구 자야 한다.
오십 몇 년간, 밤새워 비탈길 오르시는 아버지.
불을 끌 수 없다, 불을 끄고
캄캄해질 자신이 없다. 혼자가 될
자신이 없다.
비탈길 위에는 밤하늘이 있고
울음과 안간힘과 끈덕짐을
먹고사는 별들이 있다.
부자가 누워 있는 작은 별의 방은
언제나 비탈길 맨 아래에 있다.
이 작품은 어느 봄밤에 아버지와 함께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화자의 정서를 포착하고 있다. 봄날이나 봄밤이면 우리는 이렇다 할 이유가 없이도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게 마련이다. 아마 꽃잎 흐드러지는 자연의 정취가 우리를 매혹시키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그와 비교하여 우리네 살림살이가 새삼 속절없어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유는 다르지만 이 작품에서 "봄밤엔 보이지 않는 문이 너무 많다"나 "봄밤엔 보이지 않는 문틈이 너무 크다"라는 구절은, 어쨌든 그렇게 마음 싱숭생숭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화자의 심사를 반영한다. 지금 아버지는 곤히 잠을 자고 있지만, 정작 화자는 이리저리 뒤척이며 온갖 상념에 잠겨 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잠자는 모습에서 "밤새워 비탈길을 오르시는 아버지", "어금닐 깨물고 계시는 아버지"를 발견한다. 이는 물론 아버지의 잠버릇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온갖 어려움과 가난 속에서도 참고 인내하며 살아온 아버지의 삶을 규정하는 표현이다.
그 아버지는 평소에 화자에게 "불끄고 자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당부하셨던 모양이다.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시절, 전기세나 수도세 등의 공과금을 한푼이라도 아껴야 했던, 과거 우리네 살림살이의 한 축도라고 할 수 있는 당부이다. 그런데 화자는 정작 "불을 끄고 캄캄해질 자신이 없다". 이는 비탈길을 오르는 것과 어금니를 깨무는 것으로 표현한 아버지의 삶과는 달리, 그렇게 혼자 힘으로 세상과 맞서야 할 자신이 없다는 화자의 태도를 반영한다.
이 작품은 이처럼 "울음과 안간힘과 끈덕짐"으로 삶을 견뎌야 한다는 절박한 인식을 담고 있다. 요란한 수사나 세련된 비유도 없이 그저 일상의 평범한 세목을 그려내고 있는 듯한 작품이지만, 이를 통해 삶에 대해 포착하고 있는 인식과 통찰은 놀라운 깊이가 있다.(강연호)
팽나무가 쓰러, 지셨다
이재무
우리 마을의 제일 오래된 어른 쓰러지셨다
고집스럽게 생가 지켜주던 이 입적하셨다
단 한 장의 수의, 만장, 서러운 哭도 없이
불로 가시고 흙으로 돌아, 가시었다
잘 늙는 일이 결국 비우는 일이라는 것을
내부의 텅 빈 몸으로 보여주시던 당신
당신의 그늘 안에서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고
이웃마을 숙이를 기다렸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아이스께끼장수가 다녀갔고
박물장수가 다녀갔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부은 발등이 들어와 오래 머물다 갔다
우리 마을의 제일 두꺼운 그늘이 사라졌다
내 생애의 한 토막이 그렇게 부러졌다
이 작품은 오랜 세월 고향 마을을 지켜주던 팽나무를 의인화하고 있다. 작품 중에 그 원인이 확연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어느 날 수명을 다하거나 벼락을 맞거나 하여 팽나무는 쓰러지고 그렇게 "입적"한다. 그 쓰러짐을 계기로 하여 화자는 자신의 삶에서 팽나무가 차지한 위상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화자에게 있어 팽나무는 이미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마을의 "제일 오래된 어른"이며 삶의 지침이자 버팀목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 그늘 안에서 놀았으며 좀더 자라서는 연애도 한다. 화자뿐만 아니라 마을을 다녀가는 아이스께끼장수나 박물장수들도 그 그늘 속에 머물다 간다.
화자는 팽나무 그늘 속으로 "부은 발등이 들어와 오래 머물다 갔다"고 회고한다. 여기서 "부은 발등"은 물론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환유한다. "우리 마을의 제일 두꺼운 그늘"이라는 팽나무는 결국 화자에게나 마을 사람들에게나 혹은 외지인에게나 위안과 휴식을 제공하는 안식처였던 것이다.
그런 팽나무가 쓰러졌다는 것은 단순하게는 고향 마을의 안식처로서의 공간이 사라졌다는 정도의 아쉬운 의미만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의 화자에게는 좀더 근원적인 차원에서의 상실감을 불러일으킨다. 팽나무는 "잘 늙는 일이 결국 비우는 일이라는" 비움의 미학을 화자에게 "내부의 텅빈 몸으로" 가르쳐준 분이다. 심지어 그 나무는 쓰러진 뒤에도 "단 한 장의 수의, 만장, 서러운 곡도 없이" 불과 흙으로 묵묵히 돌아간다. 화자가 팽나무의 쓰러짐을 "생애의 한 토막"의 부러짐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자신의 삶의 정신적 지침이자 버팀목이 사라진 것이다. 화자는 그 어른의 임종을 "쓰러, 지셨다"와 "돌아, 가시었다"로 표현하고 있다. 쉼표가 갖는 의미와 여운이 크고 깊다.(강연호)
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 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 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을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 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길고 느린 산문체의 어조로 바닷가에 위치한 우체국의 풍경과 화자의 정서를 술회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인은 특유의 천진스러운 낭만적 서정성을 빼어난 수사적 표현에 얹어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에서 시적 상상력의 중심 제재로 등장하는 우체국은, 이제는 휴대전화나 인터넷 등으로 인해 다소 퇴색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슬프고 즐겁고 그리운 사연들을 전해주던 통로로서의 상징성을 갖고 있는 공간이다. 일찍부터 많은 시인들에 의해 우체국이 시적 제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더구나 이 작품에서 우체국은 바닷가에 위치하여 그 낭만적 서정을 더해주고 있다.
이 시인의 작품들은 대부분 일체 만유가 신성을 가졌다는 범신론이나, 만물에 생명과 혼이 깃들어 있다는 물활론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 시도 여기서 벗어나 있지 않다. 가령 우체국이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거나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다는 식의 의인화된 표현은 이러한 사고에서 비롯한다.
화자는 심심해하는 우체국에서 '세월'을 발견한다. 그 세월 속에는 우체국을 '능금'이나 '도깨비' 같다고 생각한 유년부터, 사춘기 소년 시절 "부치지 못한 편지"와 "오지 않는 편지"에 애태우는 연정까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얻어진 결론에 의하면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이다.
계속해서 화자는 '삶'과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며 그 바닷가 우체국에서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고 싶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우체국은 "이 세상의 모든 길"이 모였다 흩어지는 통로이다. 화자가 그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가고 싶다는 소망을 갖는 이유는, 아마 그 우체국이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강연호)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사람들은 저마다 알게 모르게 자신과 타인의 삶을 서로 비교하곤 하는데, 그때 어쩔 수 없이 끼어드는 감정이 있다. 동경이나 선망 혹은 질투 같은 감정이 개입하는 것이다. 삶의 비중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비교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 그 비교의 기준을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비교의 과정에서 때로 우리의 내면 심리는 참 불편해지고 복잡 미묘해진다.
이 작품은 작품 전반에 걸쳐 깊은 탄식을 내뱉고 있다. 화자는 지난 시절을 돌이키며,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고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라고 단정짓기도 한다. 또한 마치 남의 삶처럼 낯설어서 스스로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기도 한다.
결국 화자는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부정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는 이 구절들을 "우선 여기에 짧은 글"로 남겨두겠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자세히 살펴보면, 이 "짧은 글"이 바로 작품의 첫 부분으로 돌아가서,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책갈피에서 떨어지는 "종이"에 쓰여진 글이 되는 셈이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순환구조를 갖는다.
이 작품에 짙게 배인 탄식과 회한의 근거를 시인은 질투라는 감정에서 찾고 있다. 질투라는 감정은 사실 참 치사한 듯하면서도 불편한 감정이다. 전적으로 시인하기도 싫고, 그렇다고 애써 부인하기도 쉽지 않은 미묘한 면이 있는 것이다. 또한 질투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신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분노나 증오로, 혹은 체념이나 무관심으로, 또 때로는 오기나 집착으로 변신을 하기도 한다. 질투란, 상대방에 비해 초라한 듯한 자아의 불안정한 내면 심리, 다시 말해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데서 나타나는 감정일 수도 있다.
질투가 과연 제목처럼 '나의 힘'인지, 아니면 '나의 어리석음과 부끄러움'인지, 근자에 개봉되었던 같은 제목의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을 이 작품과 비교해보자.(강연호)
東豆川 Ⅳ
김명인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그 아이 혼혈아인
엄마를 닮아 얼굴만 희었던
그 아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연애를 하고
퇴학을 맞아 고아원을 뛰쳐 나가더니
지금도 기억할까 그 때 교내 웅변 대회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 마디 말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
일곱 살 때 원장의 姓을 받아 비로소 李가든가 金가든가
朴가면 또 어떻고 브라운이면 또 어떻고 그 말이
아직도 늦은 밤 내 귀가 길을 때린다
기교도 없이 새소리도 없이 가라고
내 詩를 때린다 우리 모두 태어나 욕된 세상을
이 强辯의 세상 헛된 강변만이
오로지 진실이고 너의 진실은
우리들이 매길 수도 없는 어느 채점표 밖에서
얼마만큼의 거짓으로나 매겨지는지
몸을 던져 세상 끝끝까지 웅크리고 가며
외롭기야 우리 모두 마찬가지고
그래서 더욱 괴로운 너의 모습 너의 말
그래 너는 아메리카로 갔어야 했다
국어로는 아름다운 나라 미국 네 모습이 주눅들 리 없는 合衆國이고
우리들은 제 상처에도 아플 줄 모르는 단일 민족
이 피가름 억센 단군의 한 핏줄 바보같이
가시같이 어째서 너는 남아 우리들의 상처를
함부로 쑤시느냐 몸을 팔면서
침을 뱉느냐 더러운 그리움으로
배고픔 많다던 동두천 그런 둘레나 아직도 맴도느냐
혼혈아야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아이야
이 시는 한국 전쟁과 그로 인해 파생된 상처의 하나인 혼혈아의 문제를 집중 제기함으로써, 약소국의 비애와 약소 민족의 아픔을 형상화한 [동두천] 연작 중의 한 작품이다. 이때 동두천은 단순히 미군기지가 있었던 경기도 북부의 작은 도시가 아니라 그 자체로 혼혈아들의 뿌리내리지 못하는 삶을 환유하는 공간이 된다.
동두천의 국어교사인 화자는 이 작품에서 "아메리카로 갔어야 할" 혼혈아들이 왜 이 땅에 남아 "바보같이 가시같이" "우리들의 상처를 / 함부로 쑤시느냐"고 짐짓 묻고 있다. 그 물음은 물론 혼혈아들을 향한 힐난으로서의 물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혼혈아 문제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된 한국 현대사의 질곡과 분단, 그리고 전쟁 등이 낳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퇴학을 당하고 고아원을 뛰쳐나가 소식을 모르는 한 혼혈 여학생을 생각하며, 화자는 "기교도 없이 새소리도 없이 가라고 / 내 시를 때리"는 아픔을 느낀다. 혼혈아들의 상처와 아픔 앞에서 시를 쓰는 것조차, 시작품 속에 기교나 새소리를 넣는 것조차 용인될 수 없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화자가 보기에 진짜 욕된 것은 혼혈아가 아니라, 그 혼혈아들을 있게 한 현대사의 질곡이며 약소국의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 욕된 세상"인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가 "아메리카로 갔어야 했"던 그 혼혈아가 왜 남아서 "우리들의 상처를 / 함부로 쑤시느냐"고 던지는 질문은, 그러므로 상처가 계속 덧나며 아물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한 자학적 비판의 물음이다. 시인은 그것을 "더러운 그리움"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자기 모멸을 담은 표현은 얼핏 모순적이다. 그리움의 정서에 더럽다는 부정적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것이 '더러운' 이유는 아프게 우리의 상처를 들쑤시는 현대사의 질곡이기 때문이며, 그러면서 또한 그것이 '그리움'인 이유는 그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며 그래서 그들을 껴안아야 할 책임도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강연호)
얼음 목탁
이정록
산사 뒤 작은 폭포가 겨우내 얼어 있다.
그동안 내려치려고만 했다고
멀리 나가려고만 했다고, 제 몸을 둥글게 말아 안고 있다.
커다란 얼음 목탁 속으로 쏟아져 내리는 염주알들. 서로가 서로를 세수시켜 주는 저 염주알을 닮아야겠다고, 버들강아지 작은 솜털들이 부풀어오르고 있다.
네 마음도 겨울이냐?
꽝꽝 얼어붙었느냐?
안에서 두드리는 목탁이 있다. 얼음 문을 닫고 물방울에게 경을 읽히는 법당이 있다. 엿들을 것 없다. 얼음 목탁이 공양미 씻는 소리. 염주알이 목탁 함지를 깎는 소리.
언 방에서 살아가며 기도를 모르겠느냐?
나를 세수시켜 주는 쌀 씻는 소리가 있다.
이 작품은 얼어붙은 폭포에서 목탁의 이미지를 끌어들이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폭포와 목탁을 연결시킨 문학적 상상력을 일상의 논리로 다 해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선 폭포나 목탁은 둘 다 소리를 내며 내려치는 운동을 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 얼어붙기 전까지 폭포에서는 쉴새없이 물이 떨어져 내리며 요란한 소리가 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것을 "그동안 내려치려고만 했다고/ 멀리 나가려고만 했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지금 그 폭포가 얼어붙어서 "제 몸을 둥글게 말아 안고" 있다. 얼어붙은 폭포를 얼음 목탁에 비유한 상상력은 이렇게 출발한다.
목탁은 원래는 물고기 모양이었고 그래서 목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절에서 처마 밑에 매달아놓은 풍경도 물고기 모양이다. 이처럼 물고기를 본떠 만든 이유는, 밤이고 낮이고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처럼 항상 깨어 수도에 정진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그 목어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둥근 방울 모양으로 제작되어 현재 우리가 아는 목탁이 된 것이다. 얼어붙은 폭포에서 이처럼 수도에 정진하라는 뜻이 담긴 목탁을 끌어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작품에서 제 몸을 둥글게 말아 안은 폭포는, 단순히 물살이 얼어붙은 모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어떤 갈증이나 열망을 안으로 가라앉혀 다스리게 되었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얼어붙은 폭포의 내면에서 물방울이 듣는 소리를, 화자는 "물방울에게 경을 읽히는 법당"이 있다고 인식한다. 그래서 그 소리는 "염주알 소리"이기도 하고, "목탁 소리"이기도 하며, 봄이 오면 피어날 "버들강아지 작은 솜털들"을 부풀어오르게도 한다. 더 나아가 그 소리는 "공양미 씻는 소리"이기도 하고, "염주알이 목탁 함지를 깎는 소리"이기도 하며, 화자를 "시원하게 세수시켜 주는 쌀 씻는 소리"이기도 하다.
화자는 지금 폭포의 모습에서, 삶의 갈증이나 열망은 겉으로 요란하게 분출할 게 아니라 안으로 가라앉혀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내적 평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강연호)
아우슈뷔츠
김종삼
1
어린 校門이 보이고 있었다
한 기슭엔 雜草가
죽음을 털고 일어나면
어린 校門이 가까웠다.
한 기슭엔
如前 雜草가,
아침 메뉴를 들고
校門에서 뛰어나온 學童이
學父兄을 반기는 그림처럼
복실 강아지가 그 뒤에서 조그맣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우슈뷔츠 收容所 鐵條網
기슭엔
雜草가 무성해 가고 있었다
2
官廳 지붕엔 비둘기떼가 한창이다 날아다니다간 앉곤 한다
門이 열리어져 있는 敎會堂의 形式은 푸른 뜰과 넓이를 가졌다.
整然한 道론 다정하게
생긴 늙은 우체부가 지나간다 부드러운 낡은 벽돌의
골목길에선 아희들이
고분고분하게 놀고 있고.
이 무리들은 제네바로 간다 한다
어린것과 먹을거 한 조각 쥔 채
이 작품의 제목인 [아우슈뷔츠]는 이미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전쟁과 학살의 표상이며,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가장 야만스러운 행위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이 작품에서 야만의 역사가 낳은 참상과 비극성을, 아이들의 학교와 주변의 평화스러운 풍경과 대비시켜 드러내고 있다.
크게 두 개의 의미 단락으로 나뉘어져 있는 이 작품은, 각각의 의미 단락이 다시 두 가지의 대조적인 장면들을 서로 나란히 배치시키는 구조를 보여준다.
우선 첫 번째 단락에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철조망과 그 기슭에 잡초가 무성해가는 모습을, 학교 교문 앞 학동들이 뛰어나와 학부형을 반기는 장면과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이러한 대비적인 장면의 배치는 작고 연약한 것들의 평화가 세상의 폭력 앞에 얼마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가를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대조적인 장면의 나란한 배치는 두 번째 단락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즉 '비둘기떼', '교회당', '우체부' 등의 풍경과 '아희들'이 노는 모습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어 일견 평화로운 풍경처럼 보이지만, 곧바로 이어서 이들이 "어린것과 먹을거 한조각 쥔 채" "제네바로 간다"고 진술함으로써, 그 속에 드리워진 전쟁의 그늘을 환기시키고 있다. 결국 이 시에서 '아우슈뷔츠'와 '제네바'라는 지명은, 각각 전쟁과 평화를 환유하는 대위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은 이처럼 현실 세계의 폭력성과 거기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작고 연약한 것들을 대비시켜 그 실체를 부각시킨다. 아우슈뷔츠의 유태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이 시는 그 특정한 역사적 맥락보다는 전쟁과 살육 같은 현실 세계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강연호)
낡은 집
이용악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에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모도 모른다
찻길이 뇌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세째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그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고양이 울어 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옥만 눈 우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텀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이 시는 화자의 어릴적 친구(싸리말 동무)가 살던 집이 나중에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 되고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이 되어버리게 된 과정을 서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제 식민지 치하의 수탈과 궁핍, 그리고 결국에는 고향을 떠나 떠돌 수밖에 없었던 당대 한국인들의 비극적인 삶의 현장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화자의 회상에 의하면 그 털보네는 당나귀나 황소에 곡식을 싣고 다니며 장사를 하여 일곱 식솔이 연명했다고 한다. 이 집의 가난한 형편은, 화자의 친구인 셋째 아들을 낳았을 때 마을 아낙네들이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라고 수근거렸다는 데서 단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안 그래도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에 또 식구가 더 늘어나게 된 상황을 송아지보다 못한 신세로 비유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들 식구는 어느 겨울날 홀연 집을 비우고 마을을 떠나고야 만다. 그들의 뒷소식은 아무도 모르고 다만 "오랑캐령"이나 "아라사" 등 "모두 무서운 곳"을 추정할 뿐이었다고 한다. 작품의 전후 정황에 의하면 털보네는 아마 이른바 야반도주하듯 남몰래 고향을 떠나야 할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사정이 무엇이든 간에 그 근저에는 식민지 시대의 파행적 근대화와 일제의 수탈, 그리고 그로 인해 고향을 등지고 유랑의 삶을 전전해야 했던 당대 한국인의 참상이 자리잡고 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 아래 한 가족의 비극적인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이를 통해 1930년대 식민지 치하에서 겪어야 했던, 뿌리 뽑힌 유랑의 삶을 깊이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강연호)
여름 다저녁 때의 초록 호수
고재종
이제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지만
아직도 숲속 골짜기에는
산 절로 물 절로 하는 호수들이 있긴 있는
것이다. 마을 뒷산 속에 있는
그 중 하나를 나는 황혼 무렵이면 찾는데
늘 산영이 잠겨 푸르게 물들어버린
호수 위로 우선 밀잠자리며 실잠자리들
편대 지어 날아오르고
아무런 욕심이 없어야만 열릴 것 같은
깊고 그윽하고 투명한 숲속의 호수는
물 위에서 제 몸을 잽싸게 튀기는
소금쟁이로도 잔물결 가득 일으킨다.
어디 그뿐인가, 온몸이 남빛인 물총새는
쏜살같이 물 속에 뛰어들어 첨벙!
소리가 채 나기도 전에 물 밖으로 나오는데
그 긴 부리에는 이미 노란 버들치나
은빛 피라미가 물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삐르르삐르르 하고 우는
호반새들이 이따금 노래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것들이 온갖 살아 있는 움직임이라고
떠벌릴 것까지는 정말 없지만
호숫가 갈대를 헤치며 다니는 물뱀들이
스르르 옆으로 미끄러져오자
순간 푸드드득, 창공으로 차고 오르는
물오리떼의 그 찬연한 비상과
이윽고 다시 고요를 찾는 수면에
은비늘 금비늘 마구 뿌려대는 저녁 햇살은
정말 그 누구의 조화 속이 아니고서
무엇이던가. 이윽고 숲바람 일렁이면
온갖 살아 있는 것들이 진저리치도록
싱그러운 오르가슴에 떨고 마는
여름 다저녁 때, 내가 이 숲속의
산 절로 물 절로 하는 호숫가에서
이제라도 시인은 숲으로 오라고 한다면
저기 저 암수가 나란히 물을 미는
원앙처럼, 어딘가에서 우리네 연인들도
벌써 서로의 생명의 입 속으로
뜨거운 혀를 밀고 있긴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화자가 마을 뒷산 숲 속의 호숫가에서 온갖 자연의 생명 있는 것들이 약동하는 정경을 아름답게 묘파하고 있는 시편이다. 그 숲 속에는 밀잠자리며 실잠자리부터 소금쟁이, 물총새, 버들치, 피라미, 호반새, 물뱀, 물오리, 원앙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들이 "초록 호수"를 물들이는 햇살 속에서 제각기 삶의 한 순간을 한껏 고양시키고 있다.
세상의 자연이 그 생명력을 잃거나 훼손되었다고들 하지만, 이 작품에서 화자는 아직도 "산 절로 물 절로 하는 호수들이 있긴 있는" 것을 새삼 발견한다. 이때의 숲 속 호수는 온갖 생명들이 우주적인 교감을 나누고 있는 절대 자연의 공간으로 설정된다.
여기서는 "온갖 살아 있는 것들이 진저리치도록 / 싱그러운 오르가슴에 떨고" 있다는 육체적 교접의 극치감에 대한 표현이나 "서로의 생명의 입 속으로 / 뜨거운 혀를 밀고" 있다는 관능적 묘사도, 외설적인 느낌보다는 건강한 관능의 생동감 있는 장면으로 여겨진다. 이 작품에서 이처럼 성적인 묘사나 비유가 동원되고 있는 것은 자연에 대한 화자의 경외와 생명에 대한 존중의 한 표현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때 암수의 교접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자신의 생명감을 확인하는 움직임의 한 절정을 뜻한다.
이 작품은 도입부에 "이제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지만"이라는 부정적 제한의 시행으로 시작하여, "이제라도 시인은 숲으로 오라고 한다면"이라는 긍정적 가정의 시행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 시행들은 미국의 전원시인 헨리 데이빗 쏘로우(H. D. Thoreau)의 {월든(Walden)}에 나오는 "나는 신중하게 살고 싶어서 숲으로 갔다 ( I went to the woods because I wished to live deliberately)"는 구절의 변용이다. 이 구절에서 숲은 시인이 삶의 정수를 빨아들이고 싶었던 생명의 원형적 공간을 의미할 것이다. 과연 이미 많이 늦었지만 우리는 "이제" 혹은 "이제라도" 숲으로 갈 수 있을 것인가.(강연호)
샴푸의 요정
장정일
사내는 추리극장이 싫다. 국내 소식이
싫고 운동경기가 싫고 문제의 외화가
싫다. 안 본다. 그리고 방송 출연하는
많은 다른 여인들이 역겹다. 나는 그녀만을 본다.
여덟 시 반의 그녀를 기다린다. 보시겠습니까
15초 동안 그녀는 샴푸회사를 위해
광고하지요. 보시겠습니까
그녀는 인사를 잘한다, 안녕하셔요
그녀는 미소띠며 속삭인다
파란 물방울 무늬 잠옷을 입고
그녀는 머리를 감아 보인다. 무지개를 실은
동글동글한 거품이 티브이 화면을 완전히
메운다. 그러면 샴푸의 요정이 속삭이는 거지
새로 나온 샴푸, 당신이 결정한 샴푸라고
향기가 좋은 샴푸, 세계인이 함께 쓰는 샴푸
아마 당신은 사랑에 빠질 거예요
라고 속삭이는 것이지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아시아 굴지의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그리고
우리들에겐 요정이 있다. 현존하는 유일한 요정
매일 저녁 여덟 시 반, 티브이 화면을 찢으며
우리 곁에 날아오는 샴푸의 요정. 그녀는 15초 동안 지껄이고
캄캄한 화면 뒤로 사라진다. 여덟 시 반.
매일 저녁 여덟 시 반에는 그녀가
출연하는 광고가 있다. 기다려 주세요
광고가 끝나면 사내는 무기력하게
티브이를 꺼 버린다. 매일 저녁 15초가 필요할 뿐
사내는 사진을 들여다본다. 짝사랑하는
그녀 사진을 사내는 모은다. 방에 붙이기도 한다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 수영복을 입은 모습
승마복을 멋지게 입은 사진을 그는 모은다.
그리고 칼에 대어 잘라낸다. 샴푸의 요정이
어느 영화에 출연해서 보여주는
곧 입술이 닿으려는 찰나의 남자 배우 입술을
면도날로 잘라낸다.
선전문안이 들끓는 밤 열 한 시
나지막이 샴푸의 요정이 속삭이지 않는가
그녀의 노래가 귓전에 맴돌지 않는가.
쓰세요, 쓰세요, 사랑의 향기를
느껴 보세요. 그리고 그녀의 약속이
가슴 속에 고동치지 않는가, 오늘 밤
당신을 찾아가겠어요, 광고 속에서
그녀는 약속했었지. 욕망이 들끓는 사내의 머리통
옷을 벗는 요정. 담배불 자국이 송송한 소파에
비스듬이 눕는 요정. 신비스레 신비스레
가라앉은 요정. 뜨거운 입술로
이리 오세요 예쁜 아기, 속살거리는 요정
환영이 들끓는 밤 열 두 시, 이윽고 샴푸의 요정은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냄새를 맡아 본다. 제가 권한 것을 쓰셨겠지요
물론 그리하셨겠지요?
0시 삼십 분. 사내는 샴푸가 아닌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다. 무언가
시도하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실내화를 끌며
얼마나 잽싸게 달아나는가. 참 잘하셨어요
샴푸는 역시 우리 것이 최고랍니다. 계속
애용해 주세요. 분홍빛 잠옷을 끌며
샴푸의 요정은 사라진다. 아아
좀더 있어 주세요 ! 좀더 !
꿈에서 깨어나
사내는 타자기를 두드려댄다.
딱딱딱딱딱
굴지의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그리고 현존하는 유일한 요정은
샴푸요정이다.
이 작품은 TV의 상품 광고를 소재로 하고 있다. 현대 소비사회에서 상품의 광고는 상품 자체의 질적 우수성을 강조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게 아니라, 소비자들을 현혹하여 최면 상태로 상품에 끌어들이는 데 더 큰 힘을 쏟고 있다.
이 시에 나오는 샴푸 선전 역시 이러한 최면과 유혹으로 전개된다. TV 화면에 요정 같은 여자가 나와 성적 매력을 잔뜩 발산하며 온갖 미사여구와 속삭임으로 소비자를 유혹한다. 15초의 짧은 광고에 불과하지만, 그 광고는 소비자의 전체 일상을 지배한다. 작품 속의 '사내'는 오직 그 광고에, 정확히 말해 그 광고에 나오는 '요정' 같은 여자에 흠뻑 빠져 있다. 그는 모든 TV프로그램이 싫고, 오직 그 여자의 모습과 목소리에 몰입하고 있는데, 그것은 대부분 성적 환상과 연결되어 있다.
물론 이 광고에 나오는 여자의 모습은 성적 매력으로 치장된 가짜 요정이며 허상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여자 뒤에는 "굴지의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그 미용주식회사는 상품의 질적 우수성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소비자들을 현혹하여 최면상태로 만드는 데 집중한다. 말하자면 소비자들에게 '성적 자극'을 무기로 상술의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랴. 이 작품은 그것을 '현혹'이나 '사기'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아마 그랬다면 작품의 수준은 한참 떨어졌을 것이다. 현대 사회는 이미 수많은 가짜 요정들이 판을 치고 있고 그 가짜 요정 뒤에는 "미용주식회사" 같이 의식의 마비를 조장하는 체제가 있다.
이 작품은 시청각매체에 길들여진 세대에 친숙한 상상력의 기발함과 즉흥성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유희정신은 그것대로 삶의 비루한 조각들을 이리저리 끌어다 이어붙여 놓는다. 그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천박한 것인가를 알아채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강연호)
도다리를 먹으며
김광규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왔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입과 가리고 싶은 성기의
왼쪽과 오른쪽 또는 오른쪽과 왼쪽에
눈과 귀와 팔과 다리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우리는 언제나 왼쪽과 오른쪽을 견주어
저울과 바퀴를 만들고 벽을 쌓았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자유롭게 널려진 산과 들과 바다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고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모양으로
인형과 훈장과 무기를 만들고
우리의 머리를 흉내내어
교회와 관청과 학교를 세웠다
마침내는 소리와 빛과 별까지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이제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수밖에 없어
생선회를 안주삼아 술을 마신다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붙었다고 웃지만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지를
이 작품은 도다리회를 안주로 술을 먹고 있는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도다리는 눈이 한쪽으로 쏠려 있어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눌 수 없는 물고기이다. 그 도다리의 모습을 통해 시인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나눌 수 있는 것과 나눌 수 없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과연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왼쪽과 오른쪽, 안과 밖, 내 것과 네 것 등으로 나누어왔다. 아마 합리주의나 이성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신뢰와 자만이 이런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이 작품에 의하면 저울이나 바퀴, 벽, 인형, 훈장, 무기, 교회, 관청, 학교 등의 제도나 장치는 이러한 나누기와 편가름을 위해 고안된 것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나누기와 편가름이 과연 옳은 것이며 그 기준은 정당한 것인가. 시인은 여기서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 결코 나눌 수 없는 /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지를" 묻고 있다. 물론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지만, 세상에는 도다리처럼 그렇게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자꾸 나누고자 한다. 이렇게 나누다 보니 이쪽과 저쪽, 구분과 배제 등의 편가름이 있게 되고, 그 편가름의 과정이나 결과로 인해 갈등과 분란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이 결국 우리들 인간 삶의 총체적 본질을 놓치게 하고 우리의 현실을 마비시키고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질문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고도로 의미가 함축된 시어들을 잘 조직된 시행으로 배치하는 전통적인 시형식에서, 이 시는 많이 벗어나 있다. 다만 일상적인 시어와 시행들이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는 것 같아 쉽게 읽힌다. 그렇지만 곰곰 살펴보면 무감각한 일상의 허위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지적인 서정이 잘 조직되어 있는 작품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특정의 시어나 시행 구조보다는 작품 전체의 의미와 내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강연호)
月蝕
김명수
달그늘에 잠긴
비인 마을의 잠
사나이 하나가 지나갔다
붉게 물들어
발자욱 성큼
성큼
남겨 놓은 채
개는 다시 짖지 않았다
목이 쉬어 짖어대던
외로운 개
그 뒤로 누님은
말이 없었다
달이
커다랗게
불끈 솟은 달이
슬슬 마을을 가려주던 저녁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달이 지구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는 자연 현상을 소재로 하고 있다. 과학적으로 볼 때 월식은 쉽게 설명될 수 있는 자연 현상에 불과하지만, 그러면서도 옛날부터 사람들은 그것을 신비롭게 생각하거나 한편으로 두렵게 여기기도 해왔던 게 사실이다. 일식과 월식 현상으로 인해 하늘의 해와 달이 없어졌다 다시 나타나는 광경은, 아무리 과학의 해명이 이루어져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시는 월식 현상이 있던 밤 어느 마을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절제된 시어와 함축적인 시행 배치로 극도로 생략하여 그려내고 있다. 작품의 표면적인 정황만을 따라가면, 어떤 마을에 한 사나이가 지나가고 그 뒤로 누님은 말이 없게 되었다는 정도만 확실해 보일 뿐, 그 동안에 어떤 사건이 있었다는 것인지 그 전말은 어떠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 모호한 부분을 채워넣기 위해서는 독자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사나이가 지나간 뒤부터 누님이 말이 없게 되었으므로 사나이와 누님 사이에 무슨 일인가 있었다는 것을 우선 짐작할 수 있다. 둘째 연의 "발자국 성큼 / 성큼"은, 그 일이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게 아니라 가슴 두근거리고 깊이 각인될 만한 어떤 일이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리고 "달그늘에 잠긴" 월식이 있던 어두운 밤이라는 배경과 "붉게 물들어"나 "불끈 솟은" 등의 구절은 그 일을 상당히 은밀하고 에로틱한 어떤 것으로 추정하게 해준다. 셋째 연의 "외로운 개"는 누님의 심사를 대변하며, 사나이와의 사건 이후 그 외로움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된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사나이와 누님 사이에 일어났던 '어떤 일'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면서도, 월식현상이 있던 밤의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표출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의도적인 여백과 생략, 그리고 절제된 표현들은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창조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강연호)
사라진 폭포
김수복
뒷산으로 가는 산의 가슴에 작은 호수가 앉아 있습니다 호수는 마음이 뜨거워질 때마다 낮은 목소리로 가슴의 한 가닥씩 언덕 아래로 내려보내곤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뒷산으로 가는 길목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흘러내리는 노랫가락을 <작은 폭포>라고 부르며 그 아래서 파라솔을 펼치고 발을 담그고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어느 해 여름 몇몇 문인들이 그 <폭포> 아래서 멍석을 펼치고 술을 마시고, 그해 여름의 권력을 향해 소리를 지르거나, 곧은 목소리로 마음 속 뜨거운 가락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작은 폭포는 사라졌습니다
젖줄기가 마른 바위가 가슴을 드러낸 채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호수는 스스로의 몸도 야위어졌고, 비가 내리는 여름 저녁 몸을 불려 희미한 추억의 노래를 불렀지만 그 가락은 아래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몸에도 맞지 않는 회색 옷으로 갈아입게 되고, 출입 금지 철조망에 감긴 다음부터 몸은 더욱 야위어졌고 마음도 뜨거워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달빛이 흐르는 밤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되자 폭포는 곧은 소리를 거두어 하늘로 사라졌다가 새벽이면 힘이 빠진 목소리로 젖줄기 마른 바위의 가슴에 눈물을 비비다가 해가 돋으면 소리를 거두어 하늘로 올라가곤 했습니다
이 작품은 뒷산에 있던 "작은 폭포"가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가를 설화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사실 사라졌다고 하지만, 처음부터 폭포는 실제로 존재했던 폭포라고 하기 어렵다. 뒷산의 호수가 "마음이 뜨거워질 때마다" "낮은 목소리로 흘러내리는 노래가락"을 아이들이 "<작은 폭포>"라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폭포는 화자에게나 아이들에게나 혹은 그곳을 찾은 "몇몇 문인들"에게 안식과 위안을 주는 자연의 공간으로서, 그러니까 진짜 폭포로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세상의 권력을 향해 "곧은 목소리"로 분노와 질타를 던질 수 있는 곳으로도 기능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작은 폭포"는 사라진다. 그래서 호수도 몸이 야위어졌고 마음도 뜨거워지지 않았으며 노랫가락은 더 이상 아래로 흘러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사라진 폭포는 직접적으로는 훼손된 자연이거나 사라진 자연을 표상한다. 그 훼손과 사라짐에 세상의 권력과 "회색 옷"과 "출입금지의 철조망" 같은 문명이 개입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순연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완전하던 자연은, 세상과 문명의 때가 묻게 되면서, 그 완전성을 잃고 결국 훼손되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 시는 그 상실감과 안타까운 부재의 흔적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작품의 후반부에서 그 사라진 폭포 이야기가 설화성을 띠게 된다는 설정이다. 또한 그 과정에 권력과 문명 등에 의한 훼손이 개입한다는 점에서, 그 설화는 비극적인 전설이 된다. 전설이 비극적인 것은 그것이 회복 불가능한 꿈을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라진 폭포는 정말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전설처럼 다만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폭포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 연에서 보이듯이 폭포는 "달빛이 흐르는 밤"이면 "젖줄기 마른 바위의 가슴에 눈물을 비비다가", "해가 돋으면 소리를 거두어 하늘로 올라가곤"하는지도 모른다. 상실과 부재, 그리고 그 흔적에 대한 연민을 아름답게 노래한 시편이다.(강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