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반세기
육군 보병장교로 최전방에 배치
1967년 졸업식 날과 소위 장교 임명장을 받던 날은 잊을 수가 없다. 어찌 어찌 해서 근근이 대학교 공부를 마치고 졸업을 한다는 것은 하늘이 돕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임명장:
성명 김 양 래
군번 67-00670
육군 예비역 소 위에 임함.
서기 1967년 3월
대통령 명에 의하여
국방부장관
대학교 동창과 학훈단 동료들의 축하 속에 대학을 졸업을 하고 소위 임관식을 마치고 군에 바로 입대하게 되었다. 집에서는 큰 아들이 다 커서 장교로 군대 간다고 야단이다. 축하---축하의 성원과 부푼 기대와 장래 희망이 싹트는 청년을 바라보고 기뻐했다.
졸업식 날은 흥사단 아카데미 친구들이 대거 참석해서 축하해주었고, 장충체육관의 임관식에는 가족과 친지가 참석해서 축하해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특히 작은 고모님은 리라초등학교 다니는 아들 둘(용범, 용수)을 데리고 와서 격려해주고 부모님 보다 더 좋아하셨다. 그러나 강릉김씨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을 졸업하던 기쁜 날에도 가족들은 돈이 없어서 생활이 어려운 시기라 근심이 가득 찬 얼굴로 덤덤하게 지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군대생활을 최전방인 철원--화천--금화지구 철의 삼각지대 15사단에서 근무했다. 처음에는 후방 예비사단에 배속된 훈련부대였으나 1년 후에 전방 DMG 경계부대로 이동하여 GP와 GOP를 담당하는 경계 임무룰 맡았다.
나의 선택으로 자청한 것이지만 38선 넘어 최전방 근무를 하면서 지낸 3년 동안의 보병 병과생활은 고된 병영 내무반 훈련생활과 열악한 보급과 철저한 보안과 휴가, 외출이 금지되는 1000m가 넘는 대성산과 적근산 GOP 산속의 외로운 투쟁이었다. 머리도 못 깎고 수염을 길러 마치 산 도적 같은 모습이었다.
155마일(247Km) 남방한계선에 쳐져있던 목책을 모두 철거하고 새로 콘크리트와 철책으로 바꾸는 토목공사를 하면서 많은 희생자를 낳았고 지뢰 매설이나 제거작업 중 폭발사고가 발생하거나 총기 오발사고로 수많은 장교와 병사가 사망하는 안전사고가 발생했다.
나는 <2 0 7 GP>를 지키는 지하 벙커에서 매일 밤을 새며 근무하였고, 낮에는 병사를 재우고 저녁에 점호를 취한 후에 수류탄과 실탄을 지급하고 철책선에 수색대를 투입하였다.
1968년은 북괴군 <김신조>청와대 폭파간첩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침투사건이 일어나서 군 복무기간이 연장되는 바람에 애를 많이 먹었다.
병사들은 병장이 되면 이미 제대일이 지났다고 말을 안 듣는 것이다. 부대 지휘가 어려운 견디기 힘든 장교 생활이었다. 병사들 사기가 떨어지고 군기가 문란해지더니 우리 부대에서 부비트럽을 건드리는 폭발사고가 발생하여 부하 1명이 수류탄 파편을 맞고 병원으로 후송되는 안전사고를 겪었다.
이 때 인명사고로 인해 군법에 회부되어 소위에서 중위로 진급되는 심사에서 탈락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대장과 연대장이 지휘능력과 성실성을 인정해주었고 연대에서 가장 선임부대인 1중대 부중대장의 주요한 직책을 맡는 영광을 얻었다.
제대 말년에는 연대장이 나를 월남전에 파견시키려고 장기복무 신청을 하라고 강요했지만 부모님의 병환, 가족의 궁핍한 사정과 장남이라는 이유로 단호하게 거절했다. 당시 한참 월남전은 미군과 게릴라가 가장 치열하던 전투가 있었고 수천 명이 맹호부대. 비둘기부대, 백골부대로 속속들이 참전하였다.
이런 와중에 나는 집으로 멧돼지 고기를 보내는 행운도 있었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다. 대성산에 눈이 쌓여 사격훈련 중 부대원들이 돌아오다가 산 속에서 멧돼지 일가족을 발견하고 뒤좇아 가서 사격하여 어미 apt돼지 200근 짜리와 새끼 50근 짜리 3마리를 잡아 온 것이다.
나는 군대라는 사회에서 이 일로 큰 곤욕을 치렀다. 상사에게, 상급부대로 신고하고 잡은 멧돼지를 모두 바치라는 것이다. 나는 평소에 병사들의 열악한 부식과 보급을 생각해서 부하에게 먹여주기로 마음먹었다. 2군사령부에서 트럭이 와서 실어가려는 데 대대장이 제발 차에 실으라고 설득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고 중대 취사반에 명령하여 커다란 가마솥에 넣고 끓여서 고기를 썰어 1인당 한점씩 고기를 나누어 주도록 했다
.
그런데 이 사건이 있은 후 1달 안에 직속상관인 대대장(윤순오 중령)이 후방으로 좌천되었다. 군대의 오랜 상명하복의 관습이 나 때문에 깨진 것이었다. 내 책임이 그만큼 크다는 걸 다시 절감했다.
그 때 집 생각이 간절해서 멧돼지를 잡은 행운을 서울에 사는 가족에게 전하려고 돼지 족발을 포장해서 집으로 부쳤다. 평소에 고기를 먹지 못하던 가족은 돼지고기 다리 사골 맛을 처음 본 것이었다.
제대해서 알고 보니까 내가 매달 부쳐준 월급으로 9가족이 먹고 사는 수입의 전부였다. 청운의 꿈과 희망을 품고 제대를 해서 집에 돌아와 보니 장교 월급을 매달 꼬박꼬박 집으로 부쳐주었는데 통장에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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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해서 찢어지게 가난해진 가정형편
우리 집의 풍비박산 난 변화를 여기서 안 쓸 수가 없다. 사실대로 써야 하기 때문이지만 처음에 내가 자서전 형식의 이 글(내 인생 반세기)을 안 쓰려고 했던 이유다.
인생 전반기 20여 년간 화목했던 우리 가정은 하루아침에 환난과 궁핍으로 풍비박산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이별의 고통과 슬픔과 좌절과 죽음 이라는 인생역경에 처하게 되었다.
한 집안의 가장이 수입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내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근래>는 나이 20살에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배달하고 동생들이 학교에 갈 때 차비를 챙겨 주는 등 가장 노릇을 하였다.
산꼭대기에 있는 불광동 집에는 수돗물이 잘 안 나오는 바람에 매일 아래 동네 샘터에 가서 물을 길어 와야 했고 밥 대신 수제비나 칼국수로 배를 채우는 나날이 지속되었다. 하루 두 끼를 먹는 날이 많아지고 도시락은 쌀 형편이 못 되어 점심시간에 물만 먹고 학교를 다니고 반찬은 간장 종지만 놓고 밥을 먹곤 했다. 여동생은 어느 날 학교에서 가정방문이 있어서 선생님이 오셨는데 반찬이 없어서 간장만 놓고 대접을 해서 창피해서 혼이 났다고 한다.
휴가를 나와서 보니 사촌형제(영래, 말래, 국래, 현래)들이 덩치가 다 커서 서울 회사에 취직 시켜달라고 우리 집에 와서 기대고 살았다. 부모님은 큰집 식구라 딱한 사정이라고 다 받아주었지만 나는 작은 집에 와서 너무 의지한다는 생각이 들어 의협심에 사촌동생을 “왜 우리 집에 와서 먹고 노느냐”고 군대식으로 기합을 주며 주먹으로 때린 기억이 난다. 얼굴과 눈을 두들겨 맞고 며칠 동안 멍이 들어 파랗게 부으면서도 막무가내로 우리집 밥만 축내고 있었다.
나는 제대를 하고 보니 하루아침에 집안의 가장이 된 나는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돈을 벌어야 산다. 동생들은 아직 어린 나이인 초등학교 학생이 2명, 중학생 1명, 고등학생 1명이 모두 학비를 내야 하는데... 막막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순간이 매일 나의 머리와 어깨를 짓누른다. 부모님은 쌀이 없어서 이집 저집을 찾아다니며 끼니를 때우는 비참한 생활이 지속되었고 <근래>은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없었고 부모님은 어떻게 해서라도 대학을 보내려고 안 간 힘을 썼지만 워낙 딸린 식구가 많아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뒤주(쌀 독)에 쌀이 떨어져 밥을 못 먹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나는 군대에서 근무 중 월남에 가서 돈을 벌어올 수도 있었지만 나만 혼자 멀리 이국땅에 가서 잘 먹고 산다는 게 자식 된 도리 상 있을 수 없었다. 빨리 제대를 해서 취직을 해야 하는데 급기야 부모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어머님, 왜 나를 나셨나요?” “책임도 못 지면서 자식을 왜 그리 많이 두었나요?” “왜 사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고민에 고민을 하던 나날...
부모님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좌절하고 의기소침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극도의 가난을 누구에게 하소연 할 것인가.....
하루하루 사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눈앞이 캄캄하고 어두운 암담한 현실 앞에서 누구를 원망한다고 해결 될 리가 없었다.
무조건 취직이다. 3개월 동안 취직 공부한다고 도서관에 나가보지만 책과 공부가 제대로 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1967년 11월 취직 시험을 본다고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와 시중 은행과 신문사에 입사원서를 넣어보았다. 모두 시험을 치러야 한다. 군대 3년간 전방에서 총과 수류탄과 고된 훈련과 산적생활을 하는 동안 시험공부와 영어, 전공인 독일어를 다 까먹은 나는 합격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중 1969년 12월 <동아일보사>에 입사시험을 보고 기다리는 데 라디오 <동아방송>에서 최종합격자 발표를 들어보니 내 이름(김양래) 석자가 들리는 게 아닌가. 내 귀를 의심하면서 광화문의 동아일보 본사 벽보에 가서 보니 진짜 합격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한줄기 희망으로 나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내려 눈앞이 안 보였다. 아--이제 살 길이 보인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어머님은 중풍(中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