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론 페레이라 신부)
예전에 바오로 6세 교황은 “대화는 그리스도인 되f기의 새로운 길”이라고 선언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과 만날 수 있는 네 가지 방법을 설명했다. 그것은 생활에 관한 대화, 일에 관한 대화, 공부에 관한 대화, 그리고 각자의 종교 경험의 대화다.
그럼에도 우리 대부분은 대화는 학자들끼리 모여 심오한 신학문제를 토론하거나, 서로의 종교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부분적으로만 맞다. 사실은 현대사회에서는 그리스도인과 “다른 이들”은 이미 함께 살고 일하고 있으며, 서로를 당연시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 말하는 “다른 이들”이란 이슬람인, 불교인, 배화교인, 시크교인, 자이나교인 등이다. 그러나 불가지론자, 아무 신앙이 없는 ‘세속주의자’도 여기 “다른 이들”에 포함된다.
우리는 또한 과학과 기술에 관해서도 대화가 필요하다. 과학과 기술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을 모양 지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모든 도시 사회는, 전 세계가 아예 하나의 커다란 도시 연접지대로 변하고 있는 가운데, 어쩔 수 없이 다원적 사회일 수밖에 없다. 이는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다수의 사람들이 각자 공간을 가져야 한다는 뜻인데, 이들은 다수 집단과 다른 의견과 가치관을 갖고 있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사람들이 이주하기 때문이다. 더 나은 일자리, 더 좋은 생활조건을 찾아 가는 것이다. 외국으로 이민가고, 시골을 떠나 대도시로 간다. 민족간 갈등, 종교 박해를 피해 달아나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한 곳으로 가면 정착하고, 되돌아가는 경우는 드물다.
현대의 모든 거대 국가에는 소수집단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공개적 신앙고백을존중해 줄 것을 요구하는 소수 종교는 가장 시끄러운 집단들 가운데 하나다.
종교는 개인주의적이라기보다는 집단적인 면이 강하다. 예배의 자유, 국가 문제에 대한 공개적 참여는 공공질서의 일부다. 불행히도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나라들이 있다.
예를 들어 여러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슬람이 아닌 경우) 개인적으로는 신앙을 가질 수 있으나 공개적으로 표시해서는 안 된다. 공법이 종교 율법에서 비롯한 경우가 많으며, 다른 세속 국가처럼 이성과 인권의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교 국가들을 포함한 대다수 나라에서는 한때 신정 정치 형태를 갖다가 세속화가 일어났다. 이것은 인도에서도 뚜렷이 보이는데, 인도는 세속주의 헌법을 갖고 있음에도 카스트의 규정과 종교적 판결(이 경우 힌두교)이 혼인과 상속, 공공질서를 관장한다.
그렇다면, 삶과 일의 대화는 무슨 뜻인가? “비 그리스도교” 이웃과 알고 지내고 존경과 공정함으로 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각자 집안에 내려오는 편견을 이어받아 “타자”를 의심스러워하고 “더럽다”고 여기며, 교양이 없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지금은 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간주한다. 일의 대화는 어떤 특정한 사업이나 직장에서의 공동 과제를 함께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삶의 대화는 같이 기뻐하고 어려울 때는 돕는 것을 지향한다. 이렇게 섞이면 종교가 다른 이들 사이의 혼종혼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물론 가능성이 있다. 많은 이들이 이것을 계속해서 두려워하고 있다. 모든 전통 사회들은 격렬히 그러한 혼인을 반대하지만, 그러한 관계망을 통해서만 새로운 공동체들이 시작되고 다원주의는 의미를 얻게 된다.
오늘날, 초점은 종교에서 영성으로, 외형적 규율과 관습에서 기도 속에서의 하느님 체험으로 천천히 옮겨가고 있다.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힘을 주고, 의사 결정의 규범을 알려 주는 것이 성령님이라면, 하느님의 정신은 우리가 어떤 종교 전통을 공개 고백하는지에 상관 없이 우리들 사회에 화합을 주실 것이다.
(미론 페레이라 신부는 예수회 소속이며, 인도 뭄바이에서 미디어 자문을 하고 있다.)
기사 원문: It& #39;s good to tal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