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까지 단 1실점의 3:1의 2점차 리드를 미주리 주의 소나기구름이 그대로 집어 삼켜버렸다. 그러나 그 비도 어쩌면 단비였을지 모른다.」
공식적으로 인정될 수 없었던 박찬호의 오늘 경기를 보고 나서 할 수 있는 함축적인 표현이다.
'에이스(Ace) 다움' 에이스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분명 그것은 단순히 팀의 1선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에 분명하다. 그렇다고 딱히 무엇이라 하는 정의도 없다. 그러나 메이저리그의 그 어느 팀이나 하나같이 에이스라는 투수를 가지길 원했고, 텍사스 레인저스도 거금을 들여 박찬호를 영입하면서 박찬호가 그들의 에이스가 되어주길 간절히 바래왔다.
그러나 박찬호는 아쉽게도 지금까지의 3번의 등판에서 단 한번의 승리와 6점대 중반의 극도 부진의 성적을 남겼으며, 특히나 단 한경기에서 5이닝 6실점의 부진을 보인 이후 부상을 당하며 한달 반 가까이를 마운드에 오르지 못하는 등, 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텍사스의 지역 언론들은 당연히 그를 좋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팀이 이번 시즌 후 그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지적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오늘 경기에서 약체 캔자스시티를 상대로 밀어내기 실점을 허용하고, 팀이 점수를 뽑아낸 바로 다음의 수비에서 실점을 허용하고, 비로 경기가 중단된 3회까지 62개, 즉 이닝 당 20개 이상의 투구수를 기록하며 분명 내용면에서 아직 만족스럽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승리를 날려버린 빗방울도 그에게 나빠보이지 않을 만큼 오늘의 활약은 가뭄의 단비와 같은 모습이었다.
살아나는 컨디션. 3이닝 1실점 + a
수많은 경기에서 이미 여러차례 접해봤듯이 야구라는 종목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그 결과를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종목이다. 그렇기에 오늘 경기에서도 만일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계속 좋은 피칭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를 결코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3이닝만을 지켜봤을 때, 박찬호의 피칭 모습은 지금까지의 4경기 중에 가히 최상이라 논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90마일 중반대를 넘나드는 폭발적인 강속구를 뽑아내던 초창기 시절, 그리고 낙차 큰 커브로 상대타선을 연신 헛방망이 부대로 만들었던 지난해까지의 모습. 두 모습 모두 박찬호를 지금의 정상급 투수로 만들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피칭 스타일이고, 또한 분명 각각의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빠른 공만을 찔러 넣었을 때는 제구가 되지 않아 애를 먹었고, 변화구 위주로 공을 뿌렸을 때에는 피해가는 피칭을 반복한다는 지적을 들었다.
하지만 최소한 오늘 경기에서만큼은 두 가지 모습의 장점만을 옮겨놓은 듯한 착각에 빠질 수 있었다. 경기 초반에는 힘들이지 않은 간단한 피칭으로 상대 타선을 비교적 쉽게 공략했고, 3회 위기에 빠졌을 때는 두뇌피칭을 선보였다. 한 마디로 주자가 없을 경우에는 맞춰잡는 피칭을, 위기의 상황에서는 삼진을 목표로 할 줄 아는 모습을 보였다는 뜻이다.
비록 볼로 판정받기는 했지만, 카를로스 벨트란에게 던졌던 최종 6구째의 공과 마이크 스위니를 삼진으로 잡아내던 그 모습은 박찬호가 한층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보여질 것이다. 밀어내기 볼넷을 내준 것이 아쉽긴 하겠지만, 스트라이크와 볼의 판정은 심판의 고유권한이기에 뭐라 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고, 박찬호가 던진 그 공은 제 아무리 볼로 선언했다 하더라도 박찬호가 오늘 던진 62개의 피칭 가운데 가장 뛰어난 볼이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투수가 공을 던지기 전에 심판이 저 코스를 스트라이크로 선언할지, 볼로 선언할지는 알 수 없는 법. 즉 박찬호 자신은 분명 스트라이크라 선언될 수 있다고 생각한 공을 던졌고, 그 공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밀어내기'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름에도 분명하고 그 위력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채로 포수미트에 정확히 꽂혀버렸기 때문이다. 오늘 경기 최고, 아니 최근 봐왔던 공 가운데 최고였다고 내기를 걸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의 피칭이었다.
산전수전 속에 베테랑 난다.
옛말에 사람들은 베테랑들을 일컬어 간단히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라고 말한다. 이런저런 경험을 다 겪어봐야 진정한 전문가가 된다는 소리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날씨 좋고 온화한 LA지역에만 있었던 박찬호로서는 많은 경험을 쌓아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는 기상이변이라는 현대과학으로도 잘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 때문에 LA지역에도 비가 오는 날이 많다고는 하나, 어쨌든 그 지방은 웬만해서 굳은 날이 없으니 LA출신(?)의 박찬호로서는 최소한 날씨 때문에 속을 썩이는 일이 적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간혹 역효과를 내기도 했다. 그 중 2시간의 우천 연기를 무릎쓰고 등판을 감행했다가 만루홈런을 내주는 등 3.2이닝 8안타 7실점이라는 최악의 피칭을 기록했던 지난해의 세인트루이스 원정경기는 가장 결정적인 예이고, 그것뿐만이 아니더라도 박찬호는 차가운 날씨와 비에 늘 약한 모습을 벗어나질 못했다.
이번 시즌에도 불운적으로 박찬호는 좋은 날씨와 그리 인연을 맺지 못했다. 개막 경기가 펼쳐졌던 오클랜드 원정경기에서도 쌀쌀한 날씨로 고생을 했고, 지난 디트로이트 원정경기에 이어 이번 캔자스시티 원정에서도 굵은 빗발이 그를 괴롭혔다.
결국 오클랜드에서도, 디트로이트에서도 그는 부진한 피칭을 거듭하고야 말았고, 그 나름대로는 부진의 원인을 기상 악조건 때문으로 보고 싶었겠지만, 팀 내 에이스가 되어버린 그의 입지에서 더 이상 그런 것들은 핑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이번 경기에서도 빗발은 경기 시작 전부터 내리기 시작하여 경기가 거듭되면서도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으며, 보는 이의 입장에서는 또다시 박찬호가 날씨의 벽을 넘지 못하고 무너질 것 같다는 불안한 마음을 은연중에라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해냈다. 비록 3회에 밀어내기 볼넷으로 실점을 허용하며(특히 자신은 분명 스트라이크라고 생각했기에) 크게 흔들릴 수도 있었지만, 빨리 마음을 가다듬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찬스에 강하다고 해도 무방할 마이크 스위니를 범타, 그것도 삼진으로 잡아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장면은 4회초 1아웃까지밖에 진행되지 않았던 오늘 경기에서 가장 주요한 포인트로 꼽혔다.
단 한번에 스타 플레이어가 되는 선수들도 있지만, 이렇게 몇 번의 실패를 이겨내고 자신의 한 단계 도약을 이끌어내는 선수들이 결국에는, 더욱 뛰어난 선수가 되는 법이다. 팀의 1선발에서 메이저리그 에이스로 또 한번의 큰 발을 내딛는 오늘 경기였다.
살아나는 레인저스?
올 시즌 레인저스의 모습을 보면서 가장 알 수 없는 부분은, 과연 레인저스의 본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지난해 그들은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영입하면서 일약 정상권에 오를 수도 있는 전력을 가졌다는 평을 들었으나 팀은 최하위를 하고야 말았고, 올해에도 연승과 연패를 거듭하는 상당히 기복있는 플레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즌 초반의 부진을 면치 못할 때에는 주전 선수들의 부상이 큰 걸림돌이라 보여졌고, 잘 나갔을 때에는 기존의 기대하지 못한 선수들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에 그 모습이 지속될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으며, 주전들이 돌아온 지금 그들이 부진한 것은 또 부상을 턴 선수들이 아직 정상적인 컨디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아직 레인저스의 본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가진 전력을 최대화 했을 때 정상권에 도전할 수 있는 팀이 메이저리그 전체 30개 팀들 중 적어도 20개팀은 되며, 레인저스도 최소한 그 20팀 안에는 들어간다는 것이다. 물론 단 한번의 경기로, 그것도 하위권의 팀을 상대로 한 경기에서 그들의 살아나는 조짐을 발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 분명하나, 톱타자가 출루하고 2번 타자가 진루를 시키고 알렉스 로드리게스, 후안 곤잘레스, 라파엘 팔메이로로 이어지는 중심타선이 주자를 불러들인다는 시즌 초반의 전략이 눈에 띄도록 자리잡아가고 있다. 팔메이로도, 로드리게스도 득점권의 주자를 각각 홈런과 안타로 불러들였고, 아직 단 한 개의 타점도 올리지 못했던 곤잘레스 역시 지난번과는 달라진 집중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박찬호가 돌아오고, 기존의 선발진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데다가 몇몇 젊은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마무리 이라부가 갈수록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나아지기 시작한 마운드에 이어 이렇게 타선까지 제 모습을 찾아간다면 머지 않은 시간에 다시 정상권으로 몰아칠 수 있는 기대를 부풀게도 할 것이다.
다음 등판 일정은?
비로 인해 등판 자체가 무효가 되었지만, 기록이 무효가 됐을 뿐 피로한 몸까지도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에 어쩔 수 없이 이번 등판을 무위로 돌릴 수밖에 없게됐다. 한마디로 그냥 버리는 등판이 되었다는 뜻이다.
만일 예정대로 등판이 종료됐다면 다음 경기는 앞으로 5일 뒤인 30일 미네소타 홈 경기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현 상태라면 그것보다는 하루정도 앞당겨질 가능성이 높다. 상대 캔자스시티는 변동없는 로테이션을 가져가는 대신 오늘 선발로 나왔던 제레미 아펠트를 27일 경기에서 중간계투로 투입하기로 했지만, 텍사스가 에이스인 박찬호를 중간계투로 밀어넣을 수는 없다.
어제 경기도 비로 순연되어 27일(한국시간)에 더블해더로 치룰 예정인 텍사스는 앞으로 이틀동안 3경기를 치룬 뒤, 바로 이동일도 없이 미네소타 3연전을 갖게된다. 그리고 5명의 선발진을 가지고 있는 텍사스가 26일에 데이브 버바를, 27일에 덕 데이비스와 이스마엘 발데스 투입한 뒤, 28일에 케니 로저스를 출전시키면 마땅히 29일에 등판시킬 투수가 마땅히 없다. 결국 박찬호가 이 날의 선발을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경우 박찬호는 3일의 휴식을 가진 후 등판하게 되는 셈이다. 물론 약간의 신체리듬 극복이 필요하겠지만, 캔자스시티 경기에서 투구수를 62개밖에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체적인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만일 박찬호가 예정대로 등판한다면 미네소타의 5선발인 카일 로스와 선발대결을 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 23일 텍사스와의 경기에 등판했던 로스는 마이클 램에게 3점 홈런을 허용하는 등 6이닝 4실점하며 패전투수가 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