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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상옥프로폴리스 원문보기 글쓴이: 유랑아제
조선 제6대왕. 이름은 홍위. 아버지는 문종(文宗), 어머니는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 비는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이다.
1448년(세종 30) 8세 때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정치하는 일에 어두우니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서로 의논하여 시행할 것과, 승정원은 왕명출납을 맡고 있으므로 신하들의 사삿일은 보고하지 말도록 교서를 내렸다. 문종의 고명을 받은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이 측근에서 보좌하고, 집현전학사 출신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신숙주(申叔舟) 등도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1453년(단종 1) 4월 경회루에 나가서 유생들을 친히 시험 보이고, 온성(穩城)과 함흥 두 고을에 성을 쌓았으며 나난(羅暖)·무산(茂山)의 두 성보(城堡)를 설치하였다.
이해 10월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정권을 빼앗고자 자기 측근인 권람·한명회의 계책에 따라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추대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다는 죄명으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판서 민신(閔伸)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수양대군을 영의정으로 삼고, 거사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의 칭호를 주었다. 그리고 안평대군은 사사되었고, 그 아들 우직(友直)은 진도에 유배되었다.
1454년 정월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왕비로 삼았으며, 이 달에 양성지(梁誠之)가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를 찬진(撰進)하고, 3월 춘추관에서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1455년 윤 6월 수양대군이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이하 여러 종친·신하들을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켰다. 급박한 주변 정세에 단종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겼다.
1456년(세조 2) 6월 집현전학사 출신인 성삼문·박팽년 등과 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 등에 의하여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으나 계획이 실행되기도 전에 김질의 고발로 실패하였다. 이로 인하여 단종은 1457년 6월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 이해 9월 경상도 순흥(順興)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다시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10월 죽음을 당하였다.
1681년(숙종 7)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복위되었다.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정조 15년(1791)에 건립된 곳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받친 충신위(忠臣位) 32인, 조사위(朝士位) 198인, 환관군노위(宦官軍奴位) 28인, 여인위(女人位) 6인을 합하여 264인의 위패(位牌)를 모셔놓은 곳이다. 매년 한식날 단종제향후 제사를 지낸다.
정조때 박팽년의 후손인 영월 부사 박기정이 수축한 우물로, 단종제를 올리는 한식때 제정(祭井)으로 사용했다. 일설에 의하면 보통때는 조금씩 샘이 솟았으나 매년 한식날 제사 지낼 때에는 물이 많이 솟아 올랐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정려각은 1726년(영조 2년)에 어명으로 세운 비각으로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여문이다. 비석은 1833년(순조 33년)에 가필하여 같은 해에 또 다시 증축하였으며, 1876년 (고종 13년)에 고종이 증시하기를 '충의'라 하여 1879년 (고종 16년) 비석에 있는 것을 다시 고쳤다.
한식날인 단종제향때 제물을 올리는 곳으로 정자각 또는 배위청(拜位廳)이라 한다.
1698(숙종24년)노산묘를 장릉으로 추봉하고 영조 9년에 비각과 수복실, 정자각을 세웠다. 비석전면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이라 쓰여있다.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장릉에 있는 이 배견정은 장릉(裝陵)에서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남하하던 거북이가 머리를 번쩍 들고 맑은 하늘을 바라 보는 것 같은 형상을 한 언덕 위에 네모진 아담한 정자가 있으니 배견정이라 한다. 단종묘소를 찾아와 죽어서 두견이 되었다는 단종대왕 영혼 앞에서 울며 절하던 곳이라 하여 배견정이라 이름 지은 것으로서 이 정자는 1792년 사육신의 유일한 혈손인 박팽년의 현손인 박기정 부사(朴基正 府使)가 창건하였다. 그 신하인 "요령"에게 임금의 자리를 빼앗기고 궁궐을 쫓겨나서 서선에 숨어 살면서 복권되기를 기원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객사하였다. 그 원귀가 새가 되어 "촉혼귀" "촉혼귀"하며 울었으므로 그 새를 두견새라 하였다고 한다. 이 새의 이름은 여러 가지로 불리워지는데 두우, 두혼, 촉혼, 촉백, 자규 등이다. 왕위를 빼앗기고 객지에서 죽은 왕의 영혼을 비유하는 말이다.
영월 장릉 경내 입구에 낙촌기적비각이 있으니 영월군수이던 낙촌 박충원이 노산묘를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기적비각이다. 1973년 성균관장 창산 성낙서가 쓴 비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구신 등 삼족멸문의 화가 계속되니 세정은 극도로 음험할 때 단종마저 사사당하시니 엄흥도는 충성으로써 단종시신을 업어다가 황량한 산골에 암장하였다. 어제의 군왕이 오늘과 같이 참변을 당하셨으니 어찌 천도가 무심하며 금지옥엽의 영혼인들 어찌 철천의 한이 없겠느냐. 엄호장 마저 세상을 떠나니 그 묘소조차 알길이 없어 풍설속에 버려지게 되었다.
군리(郡吏)가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박충원은 죽는 것은 명이라 하 고 의관을 정제하고 등촉을 밝히고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온 세사람에게 끌려가 본 즉 숲속에 어린 임금을 여섯신하가 둘러서 모시고 있었다. 세 번째 있던 이가 살려두자고 임금께 아뢰어서 처형을 모면하였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단종묘소를 수소문함에 엄호장의 후손의 안내로 찾아가 보니 꿈 속에서 본 바와 같으므로 묘소를 수축하고 정중하게 제사를 올리니 그 후부터는 군수가 부임초에 죽어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단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단종역사관. 단종의 즉위식에서부터 사약을 받는 모습 등 단종의 일대기를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연대기식으로 모형전시되어 있다. 영월군 (寧越郡)은 대한민국 강원도 남부에 있는 군이다. 조선 단종(端宗)의 능인 장릉(莊陵)이 있으며 김삿갓면에 김삿갓(김병연)의 묘가 있다. 영화 《라디오 스타》의 배경이기도 하다. 또한 드라마 《선덕여왕》의 배경이기도 하다.
역사및 연혁 수주면의 월현리, 부곡리, 강림리를 횡성군에 편입 상동면을 상동읍으로 승격(2읍6면) 서면을 한반도면으로 명칭변경
영월군 김삿갓면 진별리에 소재하고 있는 석회동굴 주굴(主窟)의 길이 1,800m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동굴의 하나로 1969년 6월 4일 천연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되어있다. 동남쪽으로 6km떨어진 남한강 상류 하식단애(河蝕斷崖)에 위치하고 있다. 그 밖에도 이곳은 수도장 등으로도 이용되어 왔다고 전한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후 건국대학의 홍시환(洪始煥) 교수팀의 본격적인 개발조사와 당시 유은재(兪銀在)군수, 박영국(朴泳國) 관광협회장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서 관광동굴로 개발 공개되었다.
고생대(古生代)의 대석회암통(大石灰岩統)에 속하는 지층으로 약 4~5억년전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발고도 210m의 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고씨굴의 기상환경에 대한 학계보고에 따르면 동굴내부의 기온은 연교차는 비교적 적은 편이며, 일교차는 약 10도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보다 약간 낮은 3.2℃였다. 동굴내의 기온은 입구에서 멀어짐에 따라 점차 상승하여 중간지점인 구름다리 앞에서는 10.2℃였고, 가장 안쪽인 광장의 기온은 16.2℃였다. 즉 외부보다 13℃정도 높다. 깊어짐에 따라 습도는 높아지고 특히 주변에 물이 있는 곳에서는 60%를 상회하였다.
계절적 변화는 0.6℃ 내외이며 외기변화의 영향은 적은 편으로 나타나 있다. 지표에서의 침투 수량 미치 기간, 집중도 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종유석(鐘乳石)과 석순(石筍), 석주(石柱), 유석(流石), 석회화단구(石灰華段丘)등의 석순경관(石筍景觀)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현수상 종유석군(懸垂狀 鐘乳石群), 석회화폭(石灰華瀑), 석막석순(石幕石筍) 그 밖에 섬세한 형성물체들이 있으며,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절묘한 형상을 하고 있다.
거대한 종유석군, 석주열(石柱列), 천궁(天宮) 일대의 대형 선순군 등을 들 수 있고, 신농지(神農池), 꿈의 궁전, 천불대(天佛臺)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보존가치가 높은 것으로 주목되고 있다. 백색의 엽새우를 비롯한 20종의 동굴생물이 보고된 바 있고, 1971년도 조사에서는 소과 2종, 게새우 5종, 지네 4종, 곤충류 17종, 포유동물 3종, 거미 10종 등 41종을 확인하였다. 호동굴성(好洞屈性)이 35%, 외래동굴성(外來洞窟成) 50%로 나타나 있다. 갈로와 충(蟲)이 서식하고 있음이 밝혀져 학술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관광용 동굴로 개발 공개되고 있어 훼손 또는 오염의 우려가 있다. 세심한 주의가 요망되고 있다.
방랑시인 김삿갓유적지
이곳에는 시비와 문학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으며, 김삿갓의 묘와 생가가 있다.
난고 김삿갓의 문학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평생 방랑 시인을 지낸 방랑시인 김삿갓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문학적 위상을 재조명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이곳에는 시비와 문학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으며, 김삿갓의 묘와 생가가 있다. 이 곳은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준령의 북단과 남단에 위치하며, 경북 영주시와 충북 단양군과 경계를 이루는 3도 접경지역으로 산맥의 형상이 노루가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노루목이라 불려오고 있다. 또한 김삿갓 유적지내에 흐르는 '곡동천'은 여름철에는 유리알처럼 맑고 풍부한 수량이 기암괴석 사이로 넘쳐 흐르고 가을에는 형언각색 단풍으로 인하여 보는 이의 가슴을 평온하게 만들어 주는 신비로운 곳이다. 해학과 재치와 풍류로 한 세상을 살다간 조선 후기 방랑시인이자 천재시인인 김삿갓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난고 김병연 묘소와 주거지가 있다. 아버지를 찾아 전국을 떠돌던 둘째 아들 익균이 주거지인 김삿갓면 노루목 바로 이 곳 골짜기에 묻어 주었으며, 그의 묘소는 1982년 영월의 향토사학자 정암 박영국선생의 노력으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김삿갓 계곡을 자연문화의 중심지, 문예인의 순례지, 김삿갓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하는 시선(時仙)으로 승화시켜 문화관광자원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 `98년도부터 매년 10월초에는 "난고 김삿갓문화큰잔치"가 개최된다. 유적지내 조경 및 도로포장 등 기반시설이 조성되어 쾌적한 관광지로 탈바꿈 하였으며 특히, 2003년 10월 "난고 김삿갓 문학관"이 개관되어 선생의 문학세계를 한 곳에 연구적으로 전시해 관광객들에게 교육 효과를 거양하고 있다.
[ 난고김삿갓] 선생은 안동김씨의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선평의 후예로 조는 선천부사 익순이고 부 안근과 모 함평이씨 사이의 이남이다. 순조 7년 정묘(1807년) 3월 3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출생하였고 휘(諱)는 병연 자는 성심 호는 난고(蘭皐)이다. 순조 12년 임신(1812)선생 육세때 조부 익순이 홍경래란에 관련되어 3월 9일 복주(覆誅)되자 연루(連累)를 피하여 황해도 곡산에서 숨어 자랐다. (익순은 고종 정유년에 신원(伸寃)되고 순종 무신에 복작(復爵)되다) 그후 익순에 대한 문죄는 본인에 국한하기로한 조정 결정이 알려져서 선생은 모친과 함께 곡산을 떠나 광주, 이천, 가평을 전전하다가 평창을 거쳐 영월 삼옥에 정착하였다.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자랐던 선생은 20세때 영월도호부 동헌 백일장에서 조부를 지탄한 죄책으로 번민끝에 궁벽(窮僻)한 산협(山峽)인 이곳 어둔으로 이주하였다. 선생은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 못하여 22세에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으며 김삿갓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선생은 57세로 운명할 때까지 전국을 두루 유랑하였으며 인간사 모든 것을 시제로 락운성시(落韻成詩)하였다. 또한 선생의 과시는 후세 과거 지망자들의 교범으로 쓰여졌을 뿐더러 특히 평민들의 생활상을 시로 읊어 빛나는 서민문학을 남기었다. 철종 14년 계해(1863) 3월 29일 전라도 동복에서 작고한 것을 3년후 둘째 아들 익균이 현재의 묘소로 이장하였다. 1982년 10월 17일 세상에서 잊혀졌던 선생의 묘소를 박영국은 김영배, 이상기등의 증언으로 이곳에서 찾아 내었다.
※ 자료 『김삿갓의 유산』중 시선 난고선생사적 기
[ 난고 김삿갓 문학관 ]
난고 김삿갓 문학관에서는 난고 김병연의 생애와 발자취를 쫓아 일생을 바친 정암 박영국선생의 김삿갓 연구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다양한 김삿갓 관련 자료를 상영하고 있다. 난고김삿갓문학관은 강원도 시책 사업인 "강원의 얼 선양사업"의 하나로 2003년 10월 개관했다. 김삿갓 선생의 생애와 문학 세게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선암마을 한반도지형
선암마을의 한반도지형은 삼면이 바다인 우리땅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풍경으로 서강변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맑고 청명한 서강의 물줄기는 한반도면 선암마을변에 우리땅을 그대로 복원하듯 한반도 지형을 만들어 놓았다. 마을 사람들이 옛날부터 한반도를 닮았다 하여 찾아간 선암마을의 한반도지형은 삼면이 바다인 우리땅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풍경으로 서강변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아담한 선암마을에 모여든게 신기하다. 하루빨리 통일이되어 아름다운 금수 강산 곳곳을 자유롭게 구경할 날을 기대해 본다. 이 곳을 찾는 관광객이 해마다 늘고 있다. 똑같다는 평을 받고 있다
동강의 백미 어라연
동강의 많은 비경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곳으로 , "고기가 비단결 같이 떠오르는 연못"이라는 뜻 선인들이 전하기를 "사람은 절경에 흘리고 비경에 몸을 던진다. "고 하듯이, 천하절경을 본 사람은 많아도 천하비경을 본 사람은 많지 않다. 비경은 숨어 있어 속세인에게는 그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라연은 동강의 상류인 거운리에 위치하고 있다. 어라연은 일명 삼선암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선인들이 내려와 놀던 곳이라 하여 정자암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강의 상부, 중부, 하부에 3개의 소가 형성되어 있고 그 소의 중앙에 암반이 물속으로부터 솟아있고 옥순봉과 기암괴석들이 총총히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사람같기도 하고 또 불상같기도 하며 또 짐승같기도 하여 볼 때마다 그 모양들이 천태만상으로 보인다. 금강산의 일부를 가져다 놓은 듯 하기도 하다. 그 길이가 수십척이며 비늘은 동전만 하고 머리에는 두귀가 나 있고 복부에는 발이 네 개 있었다고 한다. 파도가 험악하여 지더니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지금은 그 사지(寺址)만 남아있다.
신선이 노닐던 요선암·요선정
강기슭 반석 위에는 요선암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곳을 요선암이라 부르고 있다. 평창군수 시절 선녀들과 함께 이곳에와 일대의 경관을 즐기다가 새겨놓은 글씨라 전해오고 있다. 주민들이 힘을 모아 숙종, 영조, 정조 세 임금이 써준 御製詩(어제시)를 봉안하기 위하여 1913년에 세운 정자이다. 숙종 말년인 17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대왕을 단종으로 복위하고 종묘에 모시는 한편 노산묘를 장능으로 추봉하는 등 조선초기의 왕조애사를 바로 잡기 위해 힘쓰신 분으로, 영월 유배길의 소상한 일들을 물어 살피시다가 1698년(숙종24) 정월에 憑虛,晴虛兩樓詩(빙허,청허양루시) 한수를 써서 당시 강원감사 심정보에게 내리니 어제어필 시문이 주천현루인 청허루에 간직되었다. 그러나 청허루에 화재가 있어 어제시는 누대와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선왕의 시문을 먼저와 같이 그 자리에 보존하기 위해 숙종대왕의 어제시를 손수 쓰고, 그 뒤에 다시 시 한편을 더 보태어 당시의 강원감사인 林鏶(임집)에게 내리니 새로 중건된 청허루에는 두 임금의 어제시를 봉안하게 되었고, 그 후 다시 정조대왕께서는 청허루에 봉안된 두 분 선왕의 어제시를 소중히 간직할 수 있도록 "敬吹酒泉縣樓所奉 序"(경취주천현루소봉 서)를 지어 두분 선왕의 어제시옆에 걸게 하니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옛날 심정보목사가 있던 고을이다. 무인년 고을을 지키던 신하가 중건하였음을 영조대왕께서 들으시고 原篇(원편)을 찾아 손수 쓰시고 서문을 지으시여 근신에게 명하여 달게하니 한 누각이 이루어지고 훼손되는데 따라 무겁고 가벼움이 있는게 아니라. 좋은 글과 글씨가 황홀하기만 하니 이 누는 이것으로 빛나고 그 고을의 산천 또한 이 누로 인해 빛나니 이누각이 이 고을의 자랑이 아니겠는가. 대략을 적어 그 곁에 달게 하노라 어제시 한편을 내려주셨다. 세 임금의 寶墨(보묵)은 민가에서 보존되니 이를 봉안하고자 무룽리에 요선정을 짓고 어제어필시문을 봉안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에는 '숙종대왕어제시'와 '영조대왕어제어필시'를 담았고, 다른 한쪽에는 정조대왕의 친필서문과 어제시를 담고 있다.
요선정은 수주면 무릉리에 위치하고 있는 정자로, 앞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고, 강 기슭 큰 반석 위에는 요선암이라 새긴 刻字(각자)가 있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4호로지정 되어 있다. 이 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사자산 기슭에 흥령선원을 개원하고 자주 이 곳에 와서 포교를 하던 곳으로 그 당시 작은 암자가 있던 곳이라 한다. 불교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맑은 계곡을 형성하고, 깊은 물이 흐르는 강바닥에는 물에 씻긴 큰 바위들이 넓게 깔려있어 아름다운 계곡을 이루고 있다. 무릉리 마애불좌상
요선정 옆 바위 한면에 음각으로 새겨 놓은 마애불좌상은 1982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었다. 왼손은 오른 손에 평행이 되게 들고 있다. 광배는 두신광을 표현하였으며, 그 중 두광은 연꽃무늬를 돋을 새김하였고, 신광은 두줄로 선각해 놓았다. 청석탑과 함께 고려 시대에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하누촌과 느림길 다하누촌은 산지직거래를 통해 신선한 한우를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산지 신선한 맛을 느낄 수 있는 육회, 육사시미는 최고의 인기 메뉴이다.
매월 다양한 축제를 개최하여 방문객을 위해 먹거리, 볼거리, 즐길거리를 제공하며 가족, 연인은 물론 단체 방문객도 전국에서 관광버스를 이용 연일 방문하고 있다.
한우 햄버거 축제, 한우 칼라 막걸리 축제, 쌍섶다리 문화 축제 등을 비롯하여 한우1000원 경매, 사골무게 맞추면 사골이 공짜 등 방문고객이 직접 참여하고 체험하는 행사가 있어 언제나 활력이 넘치는 곳이다 주말마다 배부를 때까지 먹을 수 있도록 무한제공하고 있다.
금강정(錦江亭)영월읍 영흥리 남한강의 상류 연안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시대에 세운 정자로 강원도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리로 정자를 짓고 금강정이라는 이름을 달았다고도 한다. 1684년(숙종10)에 우암 송시렬이 그 절경을 바라보며 금강정기를 썼다고 전해온다. 처마는 겯처마에 팔작지붕이고 모로단청을 하였다.
낙화암(落花巖)금강정 윗쪽 동강의 높은 절벽위에 있는데 1457년 10월 24일 단종이 관풍헌에서 승하하자 단종을 모시던 1궁노 10궁녀 그리고 시종들이 모두 이 곳 절벽에서 투신 순사하였다.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으며 낙화암비 바로 옆에는 "순절비"라 새겨진 비석(약 2m)이 서 있어 그 당시의 슬픈일들을 말해주고 있다. 이곳에서 투신 순절한 시종들에 대해서는 후일 민충사를 세우고 그 영혼을 제사하고 있다. 부여의 백마강에 있고, 나머지 하나가 이곳 영월의 낙화암입니다. 마지막 절벽이 바로 낙화암입니다.
민충사(愍忠祠)
금강공원내에 위치하고 있는 사당으로 단종 승하후 낙화암에서 강물에 몸을 던져 단종의 뒤를 따른 시녀와 시종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낙화암에서 몸을 강물에 던져 순절하니 당시 순절한 사람이 10인 또는 99인이라 전하기도 하고, 또는 현 장릉 경내 배식단에 모신 위패가 6위인 점으로 보아 낙화암에서 순절한 시종은 6인으로 보기도 한다. 1791년에 영월부사 박기정이 개축하였다. 사당내에 "英廟 壬戌命建詞 戊寅特賜額重修令 上十五年 辛亥改建 觀察使尹師國 " (영묘 임술명건사 무인특사액중수령 상십오년 신해개건 관찰사윤사국)이란 기록으로 보아 이 사당은 조정의 명을 받아 건축하고 사액을 받은 사당임을 알 수 있다. 각 간마다 2분합 띠살문을 달았다. 기둥은 자연석 주초위에 둥근 원주를 세웠다. 건물구조는 익공 계통의 양식을 따랐으며 지붕은 흩처마 맛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월기경춘순절비(越妓 瓊春殉節碑)
금강공원내에 "월기 경춘순절지처"라고 쓰여진 비석이 있는 바, 이 비는 강원도 순찰사 巽菴(손암) 李公이 비용을 내고 평창군수 南羲老(남희로)가 비문을 짓고, 영월부사 한정운이 글씨를 써서 세운 것으로 경춘이 죽은지 24년만인 을묘(1795) 8월이었다. 후임관원이 온 뒤 자주 불러 볼기를 때리니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욕정을 들어 주겠노라고 하고 그 이튼날 아침 부친산소를 성묘하직하고 돌아와 동생의 머리를 최후로 빗겨준 다음 바로 금강 벼랑에 앉아 몇가락의 노래를 부르니 눈물은 옷 자락을 적시었고 비통함은 참기 어려웠다. 물에 빠져 죽으니 때는 임진년(1772)10월이었고 그 때 나이 16세였다. 이시랑의 필적이었다. 오호라 그의 죽음이여, 의로움을 좇음이 아니리오. 이 이야기를 듣고 말하기를 "미천한 신분인데도 이는 진실된 열녀라 할 것이니 옳은 풍속을 세우는데 도리가 아니겠는가" 하고 봉급을 내어 영월부사에게 비석을 세워 주도록 이르니 나 또한 그 전말을 적게 되었는지라 생각컨대 경춘이 죽은지 24년이라 우리 이공이 이를 처음 표창함이니 경춘의 절개는 장차 지워지지 않으리라」
금강공원수림지 이 수림은 수십년에서 수백년생의 거송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다. |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