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문학평론, 2001년 봄호에 기고했던 정채봉 추모특집 추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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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의 모든 것을 사랑하였네
-정채봉 선생님을 추모하며-
선안나
1.
1월 9일 이른 아침.
선생님께서 일곱 시 십 분에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정말 애쓰셨어요, 선생님. 이제 편안히 쉬세요.’
내 마음도 편안했다.
선생님은 이승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신 것이다.
창밖에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바다보다 넓게 내리고 있었다.
정채봉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88년 봄이었다. 선생님이 뜻한 바가 있어 문학 사숙을 시작하였는데, 첫 제자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13년 동안 선생님과 변함 없는 신뢰를 주고받으며 기탄없는 대화를 나눠올 수 있었던 것은 내 삶의 큰 은사였다.
눈에 띄는 경력도 변변한 학력도 그럴듯한 배경도 없는 시골 출신의 평범한 주부가 당시의 내 정체성이었는데, 선생님은 외적인 것 너머 내 영혼을 읽고 서슴없이 기대와 믿음을 주셨다. 그러니 내가 선생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야 마땅하고도 옳은 일일 것이다.
사람은 타인을 통해서만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크리스테바는 말한다. 자신이 모르고 있던 자신의 힘과 아름다움을 누가 발견해준다면, 기꺼이 자신의 일부로 믿고 수용할 일이다.
정채봉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아셨다. 움츠린 자아를 펴고 푸른 기상을 회복하여, 세상 속에서 당당히 홀로 서기를 다그치셨다. 당당함, 그것은 선생님이 평소 가장 좋아하던 단어이자, 우리들 귀와 가슴에 각인이 된 단어이다.
선생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비굴함이었으며, 진실하지 못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도 유난히 강하였다. 십여 년 시간과 개인적인 고통들이 나중에는 선생님을 비바람에 닳은 돌부처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켰지만, 너무 젊었을 때는 호오(好惡)의 분명함이 타자의 반감도 종종 불렀으리라.
사람에게는 수많은 면모가 있고, 그 모든 면이 나름의 진실을 반영한다.
내가 본 정채봉 선생님은 대단히 솔직한 분이었다. 묻지 않으니 대답하지 않을 뿐이지, 눈을 보고 무언가를 여쭤보면 결코 거짓 대답은 못했다. 입을 열기도 전에 눈빛과 표정이 먼저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당신이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선생님은 변함없이 진실하고 정겨우셨다. 사람과의 만남에 자신을 전적으로 투여할 줄 알았고,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수록 오히려 충만한 교감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이틀 동안 선생님의 빈소를 지키면서, 끝없이 몰려오는 사람들의 행렬과 그 성격의 다양함에 거듭 놀랐다. 저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고 가셨구나 싶어 마음이 따뜻했다. 눈이 쏟아지고 추위까지 겹쳐 길이 여간 나쁘지 않은데도, 불편한 몸으로 찾아와 고인의 영전에 꽃읖 바치는 장애인 형제 자매들을 볼 때 특히 눈시울이 뜨거웠다.
다른 분들은 눈여겨 보지 못했지만, 내가 아는 많은 아동문학인들이 두 번 세 번씩들 고인의 빈소를 다녀갔다. 유경환 시인은 당신 건강도 좋은 편이 아닌데 이틀 내내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빈소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계셨고, 이재철 박사님도 연 이틀 빈소를 찾아와 고인이 한국 동화의 지평을 어떻게 확대하였는가를 문상객들과 논하며 너무 짧은 생을 안타까워하셨다. 선생님을 마음으로 좋아했던 다른 시인과 동화작가들도 갑작스런 이별이 믿기지 않는 듯, 자리에 앉지 못하고 빈소 주위를 계속 서성이며 애틋한 마음을 애써 삭이는 모습이었다.
모두의 기억 속에 정채봉 선생님은 어떤 분으로 남아 있을까.
내 기억 속 마지막 선생님의 모습은 영락없는 아기를 닮았다.
제자들의 모임인 <동화세상>의 회장을 맡은 관계로, 선생님이 편찮으셨던 지난 2년 동안 가까이 찾아뵐 일이 특히 많았고, 재입원하여 세상을 떠나시기까지 석 달 동안은 수시로 병원에 들렀다. 그러면서 선생님이 이승에서의 삶을 정리하며 떠날 준비를 하시는 과정을 비교적 가까이 지켜보았다.
선생님은 의연하셨다. 최후의 통고를 받는 순간까지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 강인함을 보여주었고, 복수가 차고 하체가 퉁퉁 부어 오른 상태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잘 유지하였다. 고통이 심하다보면 짜증도 내고 곁에 있는 사람을 괴롭힐 법도 하련만, 늘 “괜찮아”하는 말만 되풀이하며 담담함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선생님을 환자로 대하지 않았다. 어둡고 근심스런 표정을 짓지 않았고, 눈물은 더욱 보이지 않았다. 서로 다른 세계에 있다는 느낌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이 외롭고 두려운 순간을 잘 견디고 계셨기 때문에, 격려를 해드리고 싶었다. 물론 그런 말을 입밖에 내어본 적은 없지만, 마음으로 응원하고 싶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운명은 인간 능력 바깥의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끝까지 생에의 의지를 잃지를 잃지 않는 것이며, 그것이 불가능해졌을 때는 용기있고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 일이었다.
선생님이 더 이상 회복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나는 기적을 바라기보다 선생님께서 죽음을 잘 이루기를 바랐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도, “아파도 잘 참으세요, 선생님. 잘 견디셔야 해요.” 미소 띤 얼굴로 그렇게 말씀드렸다. 내 말의 여백을 헤아리셨으리라. “그래.”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선생님의 눈가에 또 맑은 이슬이 고여 올랐다.
이승을 떠날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선생님은 정말이지 아기와 비슷해졌다. 세파에 부대낀 흔적은 지워지고, 천연한 눈빛과 웃음이 시리도록 맑아졌다. 걸핏하면 눈가에 고이던 눈물도 그만큼 맑았다.
순천은 한겨울에도 이름만큼이나 순후하고 안온한 느낌을 주었다.
선생님은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엄마 곁에 묻히셨다. 아버지와 할머니, 할아버지 묘가 가까이 모여 있어 산 사람들 보기에 위안이 되었다. 저만치 정겨운 고향 땅이 두루 내려다 보이고, 햇살이 넉넉하여 봄이 되면 주위에 들꽃이 오불오불 많이도 피겠다 싶었다.
살아서 있었던 모든 사연들은 육신과 함께 이승에 벗어놓고, 지금쯤 선생님은 더없이 가볍고 자유롭고 편안하시겠지.
사람들도 부질없는 이야기들은 다 묻어두고, 한 동화작가가 이승의 모든 것을 사무치게 사랑하고 떠났다는 것만 기억했으면 좋겠다.
이따금 선생님의 동화를 읽으며, 향기로 남은 그 분의 영혼을 느껴주었으면 좋겠다.
2.
앞의 글은 선생님이 돌아가신 직후에 썼던 것이다.
그로부터 석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때는 치유의 가능성이 없는 고통의 지속을 지켜보는 일이 오히려 힘겨워, 차라리 선생님이 어서 해방되시기를 내심 기원했던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통도 생의 일부였던 것을, 아무 것도 함부로 기원하지 말 일임을 이제 알겠다.
진정한 ‘만남’은 회수나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단 한 번을 만나도 전 생애를 꿰뚫는 만남이 있고, 천만번을 만나도 의미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선생님과 말이 필요하지 않는 참 만남을 가진 것은 오히려 돌아가실 무렵의 마지막 두 달이 아니었던가 싶고, 그래서 문학의 스승으로서 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의 스승으로서의 가르침이 가슴에 더욱 숙연히 남아 있다.
사람의 생은 자연과 같아, 봄날처럼 화창히 눈부신 때도 있고 여름날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날도 있으리라. 가을처럼 풍성히 거두는 날 또한 있겠으나, 마침내 가졌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빈 몸이 되어야 하는 이치. 그리고 알 수 없는 곳으로 홀로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그 철저한 고독의 시간이라니.
선생님은 마지막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셨다. 사람의 나약함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두루 다.
떠남이 가까워질수록 병실에 찾아뵈면 사람이 처음인 듯 반가워하고, 움직임이 힘든 데도 휠체어를 타고 복도 끝 창가로 나가 바깥 풍경을 보며 대화하기를 좋아하셨다. 참으로 간곡히 하시던 말씀, “문학과 삶의 정도(正道)를 걸어라”던 그 말씀이, 내게 주신 유언이 되었다. 어떠한 길이 정도일 것인가. 우둔하여 얼마나 그 말씀의 뜻을 깊이 알아들어 제대로 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생애를 먼저 살고 난 스승이 체득하여 주신 말씀이니, 가슴 한가운데 두고 거울로 삼으려 한다.
마지막으로 병실에 찾아갔던 날, 선생님은 혼수상태였다. 두 시간만에 잠시 눈을 뜨고 저승 사람인 듯 낯설게 쳐다보시기에, “저 선안나예요, 선생님.”하며 손을 잡아드렸더니, 이승 사람을 만나 크게 반가운 듯 활짝 웃으셨다. 그 날 마침 어효선 선생님 모시고 선배들과 점심을 같이 하였기에, “어 선생님 뵙고 오는 길이에요. 선생님께서 제 아이들 주라고 햄버거를 두 개나 사주셨어요.” 말씀드리자, 그 와중에도 파안대소를 하고 활짝 웃는 표정 그대로 십 여분 또 정신을 놓으셨다.
잠깐 깨었다 다시 정신을 잃으시기를 수 차례.
“또 올게요, 선생님.”하고 일어섰지만, 이승에서 영원한 작별이 될 것임을 예감하였고, 선생님도 그러셨으리라. “그래, 잘 가.”하고 고요히 바라보시던 선생님의 눈빛이 선명한 사진으로 뇌리에 떠오른다. 이승의 것에 대한 서러움도 애틋함도 이제 다 놓아버린 듯, 고적하나 담담하던 그 눈빛.
시간은 참으로 잘 흘러 변함없이 봄은 돌아왔다. 천지자연은 저마다 제 할 일을 하느라 고요히 소란스럽고, 목숨마다 피어나는 일에 전력을 다한다.
선생님도 이미 아마 자연의 일에 참여하고 계실 터.
섣불리 아무 것도 예단하지 말아야 함을 알겠다. 삶에 대해서도, 죽음에 대해서도, 그 무엇에 대해서도....(*)
첫댓글 감동적이네요, 안나씨~!! 선생님이 나만 미워하셨나~ 내가 전화하면 화를 내며 오지 말라고 하셔서 못갔는데~~돌아가시기 한달 전쯤 이영희씨인가 누군가가 전화해서 가보라고, 선생님이 내 소식을 물어본다고~ 나중에 한 남기지 말고 가보라고 해서 가뵈었던 기억이 나네요~아픈 기억 ㅋ
당시 나는 동화세상 동문 전체를 대표했기 때문에 언제라도 만나주신 것. 병세가 워낙 위중하셔서 다른 방문자는 거의 제한했던 걸로 알아요. 섭섭해 하지 마시길~
선생님께서 9기에게 겨우 시간을 내 주셔서, 저도 딱 한 번 병원으로 찾아 뵈었습니다.
문학의 스승으로서 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의 스승을 가르치는 스승을 만나고,
사람의 나약함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두루 다 지켜보시다니...누구보다 더 정채봉 선생님이 그립겠어요.
그때로부터 또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정채봉 선생님이 새삼 더 보고 싶네요...
부스터샷을 맞고 몹시 아팠는데, 비몽사몽간에 정채봉 선생님이 아주 생생하게 나타나셔서 환히 웃어주시더라구요. 그러곤 그쪽 세상의 제자인 듯 싶은 아주 맑아 보이는 이들을 데리고 뭔가를 설명해주시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잠이 깼어요. 기일이 다가와서 그런 꿈을 꿨던가 봐요.
정채봉 선생님께서 떠나실 때 외롭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이 계셔서요.
많이 외롭고 힘드셨을 거예요. 이런저런 상황이... 그렇지만 동화세상이 이리 좋은 숲을 이룬 걸 알면 몹시 기뻐하실 겁니다.
선생님께서 뿌려 놓으신 동심의 씨앗들이 동화세상에서 34년의 세월을 지나 이렇게 아름드리 나무들로 자라고
그 나무들이 아름다운 숲을 이룬 것을 보시면 얼마나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실까요.
정채봉 선생님과 김병규 선생님, 1기 선배님들로부터 34기 후배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새로 입학하는 35기, 36기......
정채봉 선생님께서 동화세상에 주고 가신 순수한 동심은 아름다운 메아리가 되어 계속 퍼져 나갈 것입니다.
은별 선생님도 늘 건강 건필하세요.
@1기 선안나 감사합니다.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