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 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그 목소리 그리워들려오는 총 소리를 자장가 삼아꿈길 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 정안수 떠 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아~ 쓸어안고 싶었소 전선야곡(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신세영 노래, 1951년 10월 발표).
‘불멸의 보초가’로 병영 막사에서 군가보다도 많이 불리는 ‘전선야곡’의 가수,그리고 ‘청춘을 돌려다오’의 작곡가이기도 한 신세영 선생(82). 지난 4월 18일, 대한가수협회 원로가수 회장으로 재선출되어 또다시 원로가수들의 권익과 가요계 발전을 위한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나이를 잊은 듯 완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신세영 선생의 활동을 재조명해본다. ‘신세영’이라는 예명은 당시 유명가수들이었던 申카나리아의 ‘申’, 장世정의 ‘世’, 이난影의 ‘影’자를 한 글자씩 조합해 만든 이름이다. 흔히 그를 일컬어 ‘해방 이후 현인에 이어 두 번째로 가수가 된 인물'이라 칭한다. 그도그럴것이 당시엔 음반을 찍어낼 물자와 시설이 턱없이 부족해 누구나 쉽게 음반을 낼 수 없었던 탓이다. 그만큼 가수 또한 귀했던 시절이다. 1948년, 대구 오리엔트 레코드사를 통해 데뷔곡 ‘로맨스 항로’를 발표한 데 이어 ‘병원선’, ‘무영탑 사랑’, ‘이백리 푸른 달밤’, ‘십자성’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신세영의 본명은 정정수. 그는 1925년 광산업을 하는 부친 정자경과 포목점을 운영했던 모친 김옥경 사이 3남매 중 외아들로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어릴 때 대구로 이사했다. 운동신경이 뛰어나 복싱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가수가 되기 위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콩쿠르에 참여하면서부터 점차 노래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낸다.이 무렵 이재호, 백년설, 이인권 선생 등 대가들을 만나게 되면서 가수에의 꿈을 한껏 키우던 1945년 초, 해방을 불과 얼마 앞둔 시점에 그는 일본군에 의해 강제 징집된다. 이때 평소 아껴주던 백년설씨가 역까지 마중 나와 어깨를 두드려주며 ‘외동아들인 만큼 반드시 살아 돌아오라’고 당부하던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고 회고한다.그뒤 만주 봉천을 거쳐 항구 전선에 투입되는데 이때 그는 ‘B 29’의 폭격을 받아 대부분의 전우들을 잃고 그도 역시도 피투성이가 된 채 병원으로 이송, 생사의 갈림길에서 감격적인 해방과 일본 패망 소식을 듣는다.이 무렵 그는 정신대의 참혹상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증언한다. 더구나 그 주인공 중 한 여성을 최근 서울 방송국에서 다시 재회하는 감격을 맛보기도 했다. 이역만리에서 통한의 시간을 보냈던 정신대 할머니와 징용군이었던 신세영씨, 당시 절박한 상황만큼 60년 만의 해후는 믿기 어려려우리만치 감동적이었으리라.일본 패망과 함께 중국에서 한달 반 가량 수용소 수감생활을 거친 뒤 귀국해서 본격적으로 가수활동을 전개하던 때 그의 대표곡 ‘전선야곡’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에 취입한 노래다. 그리고 이 노래는 그에게는 개인적으로 대표곡 이상으로 의미가 각별하다. 취입했던 바로 그날 어머니가 운명하셨기 때문에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항시 목이 메였다고 한다.‘전선에서 그리는 고향 어머니’에 대한 심경을 고스란히 담은 이 ‘전선야곡’은 대표적인 전쟁가요로 그 무렵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다. 길가다가도 느닷없이 징집되어 전쟁터에 나선 바람에 정작 어머니 얼굴조차 뵙지 못보고 고향을 떠난 이들도 적지 않았던 탓이다. 때문에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하는 부분에서는 특히 가슴이 북받쳐 올라 부르는 이도, 듣는 이도 함께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한다.전쟁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희생을 강요했다. 그 역시 이듬해 정훈국 공작대에 소속되어 국군들의 작전을 따라 최전방 덕천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에게 포위되었는데,이틀 만에 탈출하는 등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이때 생사를 함께 한 7사단 군예대원 중에는 가수 손인호씨도 있었다.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작곡 활동도 함께 시작하는데 대표적인 노래가 ‘청춘을 돌려다오(신행일, 현철, 나훈아 등 취입)’, 그 외에 ‘정처 없는 방랑자(최무룡)’, ‘화전민(배호)’, ‘비에 젖은 로맨스(안다성)’ 등을 작곡했다.가족은 부인 박목련 여사와 슬하에 2남 2녀가 있다. 특히 장남 정태진씨는 한때 ‘태일’이라는 예명으로 가수로 활동하며 그의 작곡인 ‘추억의 동백섬’과 ‘남포동 소야곡’과 ‘저 달이 엿볼까봐’ 등을 발표했다. 나머지 가족들은 지난 1974년 미국으로 이민하였고 이어 신세영씨도 1981년 미국으로 건너가 가족들과 합류한 이후 틈틈이 한국을 오가다가 3년 전 2004년에는 비자를 반납하고 귀국했다. ‘묻혀도 한국 땅에 묻혀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우리 가요사에 있어 6.25전쟁 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노래 중 한 곡인 <전선야곡>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립니다.때는 1951년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작곡가 박시춘이 한창 음반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박시춘은 제목을 <전선야곡>으로 하여 극작가이자 작사가인 유호(필명:호동아)에게 작사를 의뢰했고, 유호는 한 편의 시같은 가사를 지어내어 박시춘에게 보냈다.박시춘에 그에 맞는 슬픈 멜로디를 한창 붙이고 있었던 중이던 것이다.오리엔트레코드사장 이병주가 마침 그 광경을 보았다.이병주가 "박선생, 여기서 뭐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다.박시춘은 "아, 노래를 만들고 있습니다. 남인수한테 한 번 취입시켜볼려고 하는데..."이병주가 딱 악보를 보더니 노래를 읊어내려갔다.이병주가 보기에도 정말 좋은 노래였던 것이다.순간 이병주는 신세영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갔다. 자신이 '꼭 성공시켜 환고향하게 해주마'하던 신세영이 이 악보를 보자 생각이 난 것이다.이에 이병주는 신세영에게 곡을 줄 요량으로 "박선생, 꼭 이 노래를 남인수선생한테 줘야겠습니까?" 박시춘은 "아, 뭐 꼭 그럴 필요까진 없습니다만..."이병주는 잘 됐다는 듯이 "그럼, 이 노래를 신세영이한테 줘도 되겠습니까?" 박시춘은 괜찮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이병주는 악보를 받아들고 신세영에게 갔다. 신세영은 악보를 받아 노래를 불러보니 상당히 좋은 노래였던 것이다. 이렇게 노래취입에 들어가고, 음반을 만들어 시중에 판매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낙동강전선에 위문공연을 나갔다. 앞에 심연옥,남성봉,이인권의 노래가 이어지고 신세영의 차례가 되었다. 신세영은 딱히 잘 알려진 히트곡이 없던 터라 처음엔 데뷔곡인 <로맨스 항로>를 불렀다. 별 반응이 없자, 자신의 신곡이라며 <전선야곡>을 불렀다.1절을 끝내자 공연을 보고있던 군인들과 피난민들이 벌떼같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신세영은 그 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상당히 당황해했다.모두 하나같이 노래를 한 번 더 불러달라는 앙코르 요청이었다.노래를 다 부른 것도 아니고, 1절만 부른 상태였다. 이에 감격한 신세영은 더 구슬픈 목소리로 <전선야곡>을 2절까지 완창하였다. 사람들은 크기도 엄청 큰 박수와 환호성을 보내서, 뒤에 출연예정이었던 남인수와 현인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고 한다.이러한 계기로 인해 대단히 큰 성공을 거둔 <전선야곡>은 해방 후 1950년대 후반에 <청포도 사랑>으로 유명한 가수 '도미'에 의해 한 번 더 리메이크되어 한 번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이렇게 세월이 흘러도 우리의 마음을 울려주는 감동의 노래들은 천년 만년 영원한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전선야곡 - 신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