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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남아 있는 로마 시대의 웅장한 석조 건물만으로 고대 로마 제국을 상상하면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로마 제국의 모습
은 하나의 사건 이전과 이후로 확연하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예수가 탄생한 뒤 64년 여름, 제국의 심장 로마에서 큰 불이 났다. 인구 100만이 넘는 도시의 절반 이상이 완전히 파괴될 만큼의 대화재였다. 당시 통치자는 네로 황제였다.
네로는 도시의 재건을 위해 황제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화재 진압을 진두지휘하고 이재민 대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 결과 로마는 세계의 수도에 걸맞은 위용을 갖추며 새롭게 태어났다.
그렇지만 당시 로마 시민들은 황제의 이런 노력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황제가 일부러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왜 네로는 그런 의심을 샀을까? 의심이 그치지 않자 네로는 말했다. “방화는 미신을 믿는 자들의 소행이다.” ‘미신을 믿는 자’는 다름 아닌 기독교인들이었다.
사방으로 격렬히 타오르던 불꽃은 처음에는 도시의 낮은 지역을 공격한 뒤 높은 곳으로 번져갔다. 그러나 다시 낮은 지역을 삼키면서 불은 인간의 진화 노력을 좌절시켰다. 불길이 번지는 속도가 너무나 빠른 데다가 로마의 골목들이 좁고 복잡하고 불규칙해서 대화재에 취약했다.
공포에 질려 울부짖는 여자들과 허약해 움직이지도 못하는 노인들,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는 아이들,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고 우왕좌왕하는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 애쓰는 사람, 연약한 사람들을 끌고 가는 사람, 힘없는 사람들이 따라오길 기다리는 사람,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 모두 서로를 방해했다. 어딜 가나 혼란과 좌절뿐이었다.막 빠져나온 위험을 뒤돌아보며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그 불길이 자신들의 앞과 옆에서 날름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만약 사람들이 바로 옆으로 도망쳤다면, 아마 혀를 날름거리는 화마에 이미 먹혔을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화재로부터 안전할 것 같았던 곳까지도 금방 같은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도로에 밀치락달치락하다가 땅 위에 구르고 쓰러졌다. 어떤 사람은 전 재산을 잃어 하루분의 식량도 없었다. 구해줄 수 없었던 가족을 가엾게 여겨, 피할 수 있는데도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었다.
로마의 역사가이자 정치가인 코넬리우스 타키투스는 저서 《연대기》에서 64년 7월 18일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를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묘사했다. 제국의 심장에 대화재가 발생한 것은 타키투스가 아홉 살 때, 네로 황제가 즉위한 지 10년째 되는 해였다. 전차 경기와 검투사들의 피 튀기는 대결이 펼쳐지던 막시무스 대경기장 아래에 있는 한 가게의 기름 창고에서 불이 났다. 방화인지 실수인지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다. 로마는 여름에 주로 서풍이 불어 서늘한 편이지만, 주기적으로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남서풍이 지중해 너머 반도에 닿으면 바람은 거세지고 기온은 급격히 올라간다. 이 바람이 며칠 동안 계속해서 부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그해 여름은 달랐다. 불은 바람을 타고 인근 지역을 삽시간에 삼켰고, 태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태우며 퍼져나갔다.
불은 열흘 남짓 타올랐다. 당시 로마에는 소방대원이 7000명이나 있었지만, 테베레 강물을 담은 양동이를 일렬로 날라 옮기는 진화 방식으로는 불의 속도를 따라잡기에 역부족이었다. 불을 끄는 것은 포기하고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온전한 건물들을 부수었다. 하지만 이 작업은 나중에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나돌게 만든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6일이 지난 즈음에 불길이 잡혔다. 그러나 이도 잠시, 이번에는 동풍이 불어 불길은 방향을 틀었다. 사나흘 동안 로마는 다시 불길에 휩싸였다.
불은 철저하게 로마를 유린했다. 1차 화재로 14개 행정구역 가운데 도시의 중심지인 3개 구가 전소했고, 4개 구가 반소했다. 북서쪽에 있는 2개 구는 2차 화재로 반소되었다. 포로 로마노와 신전이 밀집한 카피톨리노 언덕은 중심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리석으로 지은 덕분에 그나마 화를 적게 입었다. 무사했던 구는 겨우 4개 구에 불과했다. 모두 로마 외곽이었고, 기독교인들이 유독 많이 모여 살던 곳도 그중 하나였다.
로마는 자연발생도시로, 건물이 매우 밀집된 데다 목재를 많이 사용한 탓에 불이 나면 걷잡을 수 없었다. 열흘 남짓 계속된 화재는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의 절반 이상을 완전히 파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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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기능이 마비될 정도의 대화재 소식을 들은 식민지 시민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로마군은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면서 동시에 도로와 도시를 건설했다. 파리, 런던, 바르셀로나, 쾰른 등 유서 깊은 유럽의 대도시 대부분을 로마군이 설계했으며 이들은 특히 뛰어난 석조 건축술로 유명했다. 그런데 제국의 심장에서 어떻게 그렇게 큰불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로마인들은 식민지나 속주의 도시 건설에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계획도시가 아닌 자연발생도시인 고향에서는 이를 발휘하지 못했다. 제국의 영토가 확장될수록 로마를 종착지로 하는 도로가 유럽 곳곳에 퍼졌고, 이는 로마의 인구 유입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대화재 시기에 로마는 100만 명이 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집권자들은 ‘인술라’라는 5~6층짜리 공동주택을 건립했다. 벽은 석조였으나 바닥과 천장은 목재를 사용했고, 도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빈틈없이 다닥다닥 붙여놓았다. 이 주택 사이를 가로지르는 도로는 좁고 구불구불했다. 귀족들이 사는 집 역시 대리석으로 지었지만 기둥과 기둥 사이를 잇는 들보는 나무였고, 문이나 창틀도 마찬가지였다. 불길이 번지면 막을 방법이 없었고, 지붕이 내려앉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대경기장, 신전, 황궁 등 웅장한 석조 건물과는 다른 이면이었다. 이전에도 로마의 골목에서는 붕괴 사고와 화재가 하루가 멀다 할 만큼 자주 발생했다.
네로 황제는 화재 진압과 이재민 대책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런데도 시민들은 그를 좋게 보지 않았다. 심지어 황제가 직접 불을 질렀으며 타오르는 로마를 보고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로마 시민들은 왜 네로를 의심했을까?
네로는 황제로 즉위하기 이전부터 장안의 화제였다.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로마 역사상 가장 야망이 큰 여자였다. 그녀는 제국 제일의 명문 카이사르 집안을 배경으로, 홀몸이 된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재혼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는 이미 아들이 있었지만 아그리피나는 네로를 황제의 양아들로 들인 후 황제의 딸 옥타비아와 결혼시키는 등 자신의 아들을 황제에 앉히기 위한 계략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54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독버섯 중독으로 죽었다. 사람들은 아그리피나를 의심했지만 증거가 없었다. 제일 먼저 근위대장이 네로를 ‘황제’라 불렀고, 이어서 세네카를 위시한 원로원도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 모든 것이 아그리피나가 짜놓은 각본대로였다. 원로원이 선대 황제의 아들을 제쳐둔 것은 근위대와의 싸움을 피하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원로원을 무시하고 측근 중심으로 로마를 다스렸기 때문이었다.
야심이 컸던 그녀는 황제와 결혼하여 아들을 황제 자리에 앉히는 데 성공했지만, 아들에게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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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네로의 나이는 17세, 나라를 다스리기에는 아직 어려 아그리피나의 섭정을 받았다. 황태후의 권력은 어린 황제를 능가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내 덕분에 네가 황제가 되었다.”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강조했다. 황제보다는 시인과 배우,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감수성 깊은 소년 네로는 많은 군중이 보는 앞에서 어머니에게 꾸중을 듣기 일쑤였다. 네로는 그런 어머니를 향해 반항심을 키워나갔다.
네로는 황제로서 자기 위치를 확인하고 싶었다. 먼저 어머니의 심복을 상의 없이 황제의 직권으로 해임했다. 생애 첫 패배를 아들에게서 맛본 아그리피나는 하늘을 찌를 듯 분노하여 그를 향해 온갖 저주의 말을 쏟았다. 그러고는 전대 황제의 아들 브리타니쿠스를 황제 자리에 앉히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네로는 사람을 보내 브리타니쿠스를 암살하고, 아그리피나를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쫓아냈다. 즉위한 지 1년 만에 네로는 어머니의 손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결혼 생활이 시들시들하던 황제는 스무 살 때 어릴 적 친구의 아내 포파이아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네로는 친구를 속주 총독으로 보내고 그녀를 차지했다. 그러나 포파이아는 네로에게 공식적인 황제의 아내, 즉 황후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네로는 골머리를 앓았고, 이 소식이 어머니에게 들어갔다. 당연히 아그리피나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포파이아는 아직도 어머니의 품에서 놀아난다며 네로를 조롱했다. 그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나폴리에서 열린 미네르바(아테나) 여신의 축제에 네로는 어머니를 초대했다. 이제 22세가 되어 황제의 위용을 갖춘 그는 어머니의 손을 부축하며 공손하게 대접했다. 축제가 끝나고 바닷가 별장으로 돌아가는 선착장에서 모자는 마지막이 될 포옹을 나누었다. 얼마 후 아그리피나를 태운 배는 네로의 계획대로 구멍이 나 침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영 실력이 뛰어난 아그리피나는 모든 계획을 다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자신은 무사하다고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학수고대하던 네로는 이 편지를 보고 공포에 떨었다. 암살 시도라는 것을 눈치채고 어머니가 자신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생각한 네로는 서둘렀다. 동이 트자 황제의 심복들은 아그리파나의 별장으로 말을 몰았다. 침상을 에워싼 그들을 본 아그리파나는 체념하고 “네로가 들어 있던 여기를 찔러라!”라며 아랫배를 가리켰다. 그날 오후 네로의 정치 멘토인 세네카는 황태후가 반역죄로 처형당했다고 발표했으나, 그 말을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네로는 안 좋은 여론과 죄책감으로 밤마다 어머니의 망령에 시달려 주술사를 부를 정도로 괴로워했다. 그러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그리스 문화에 위로를 받고 더욱 심취했다. 그리스인처럼 턱수염을 기르고, ‘로마 올림픽’을 성대하게 열었다. 이 기간 동안 목욕탕, 극장 등 로마의 모든 공공시설이 공짜로 개방되었다. 대중은 환호했고 이를 ‘네로의 제전’이라고 불렀다. 자신감이 붙은 네로는 아내이자 의붓동생인 옥타비아를 누명 씌워 처형하고, 임신한 포파이아와 결혼했다. 이로써 네로는 자신의 의붓동생이기도 했던 전대 황제의 아들과 딸, 그리고 자기 어머니까지 죽인 패륜의 주인공이 되었다.
64년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기 전 네로는 나폴리에 있었다. 나폴리는 그리스인이 세운 도시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그리스 문화가 가장 융성한 곳이어서 네로는 가슴이 설렜다. 그리스 시를 낭송하길 좋아하던 황제는 이곳에서 가식적인 박수와 환호가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 기량을 진정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네로는 황제의 ‘계급장’인 보랏빛 옷과 황금 월계관을 떼고 무대에 올랐다. 극장은 황제의 신기한 모습을 보려는 관중으로 들어설 곳이 없었다. 수수한 옷차림에 현악기 리라를 든 네로가 등장하자 대중은 환호했고, 시 낭송이 끝나자 더욱 큰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예술가로서 성공적으로 데뷔한 네로는 자신이 다음에 설 무대는 로마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급보가 날아왔다.
로마에 큰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네로는 직접 전차를 몰아 로마로 달려갔다. 젊은 황제는 이재민 대책을 진두지휘했다. 모든 공공건물을 수용소로 개방하고 근위병들에게 임시 천막을 치게 했다. 동원 가능한 식량을 신속하게 모아 무료로 배급하고,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식료품 가격을 3분의 1 수준으로 내렸다.
신속하고 원만하게 상황을 수습하면서 네로는 도시 재건에 돌입했다. 이를 위해 속주와 식민지에 의연금을 요청했고 화폐개혁도 단행했다. 네로는 백지 위에 로마를 새로 그릴 수 있는 기회가 자신에게 온 것을 신성하게 생각했다. 그는 도로를 직선화하고 폭을 넓게 만들도록 했다. 또한 주거용 건물의 높이를 제한하고, 건물 사이에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도록 했으며, 외벽 공유를 금지했다. 들보에는 석재를 사용하고, 인술라에는 저수조를 설치한 안뜰을 배치하는 등의 규정을 세웠다. 지정된 기간 내에 규정에 맞는 저택을 짓는 조건으로 장려금 제도를 창설했으며, 주택에 방화 처리를 하는 비용은 국고에서 부담하기로 했다. 도시 건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로마의 기술자들은 황제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빠른 공정을 보여, 도시는 신속하게 재탄생하고 있었다. 네로에게 비판적이던 타키투스도 “이러한 조치들은 실용적인 견지에서 취해졌지만 새로운 수도의 미관에도 공헌했다.”라고 칭찬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고대 로마의 수도 시설, 건물, 도로 등 유적과 흔적은 상당수 네로의 작품이다.
네로의 이재민 대책과 도시 재건은 일반 로마 시민도 기꺼이 동참할 만큼 환영을 받았다. 그렇지만 네로는 한 가지 매우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단순히 도시 기능을 재편하고, 제국의 심장부를 화재에 강한 곳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로마 대화재 이전부터 짓고 있었던 궁전이 대화재로 그 일부가 소실되었는데, 이참에 아예 새롭게 설계하고 건설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그리스인들이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아르카디아’를 로마에 세우고자 했다. 푸른 초원과 잔잔한 호수 위에 동물과 인간이 어우러지는 세상, 네로는 궁전의 이름을 황금 궁전이라는 뜻의 ‘도무스 아우레아’라 붙였다.
도무스 아우레아는 로마 중심부 50만 제곱미터 대지에 들어설 예정이었다. 낮은 곳에는 인공 호수를 배치하고, 궁전의 정면은 이를 향하게 하며, 궁전 한가운데에는 네로의 황금 동상을 세우기로 했다. 회랑의 길이는 모두 1.5킬로미터이며, 로마의 첨단 건축 기술이 총동원된 본관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방이 150개 들어서고, 그 중심에 있는 팔각형 홀의 10미터 높이 천장은 회전하면서 사람들의 머리 위에 꽃잎을 뿌리도록 설계했다. 본관 배후에는 동물들이 뛰어노는 초원과, 포도 같은 과실수를 비롯한 온갖 진귀한 식물이 자라는 식물원을 건설할 예정이었다. 비록 황제가 거처하는 궁전(도무스)이었지만 네로는 이곳에서 로마 시민들이 여유를 누리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울타리도 벽도 없앴다.
도무스 아우레아 건설이 실수였던 것은 그 용도가 아니라 시기였다. 대화재 직후 화려한 궁전을 짓는 데 주력하는 황제를 너그러이 받아줄 시민은 별로 없었다. 더욱이 황금 궁전이 들어설 자리는 대부분 전소한 지역과 맞붙어 있어서, 황제가 재건 작업을 빌미로 집을 부수고 궁전 터를 확보하려 한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 딱 좋았다.
이러한 우려는 네로가 자신의 궁전을 짓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소문을 낳았다. 그리고 화재 당시 황제가 언덕 위의 별궁에서 리라 소리에 맞춰 호메로스의 작품 《일리아드》의 트로이 함락 장면을 읊었다는 구체적인 증언도 나왔다. 목마에 숨어 있던 그리스 군이 야밤에 트로이를 불바다로 만든 것처럼, 그리스 예술을 동경하는 네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시민들은 생각했다. 게다가 어머니까지 죽인 패륜아 이미지가 더해져 소문은 급속히 로마 전역에 번졌다.
‘네로 황제가 로마를 불태우고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그 헛소문은 네로가 자초한 것이었다. 대화재 이후 전소된 지역 바로 옆에 화려한 ‘황금 궁전’ 건립을 추진한 것이 화근이었다. 물론 후대의 이야기꾼들에게는 그 헛소문이 훨씬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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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는 황제로 즉위한 이래 처음으로 시민들의 반감을 피부로 느꼈다. 비록 패륜과 기행을 일삼았지만 황제 역할은 훌륭하게 수행했던 그였다. 잠재적 적국이었던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 문제를 해결하여 로마의 평화를 한동안 보장했고, 올림픽과 검투사 경기를 자주 열어 시민들에게 오락거리도 충분히 제공했으며, 살육적인 검투사 경기를 없애고 시와 연극을 장려했다. 스스로 배우가 되어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주기까지 했다. 세금도 감면했으며, 심지어 노예가 부당한 주인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법률도 시행했다.
네로는 시민들이 자신을 존경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돌다니? 당황한 네로는 이 소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멘토 세네카는 이미 은퇴해 그의 곁에 없었다. 네로는 이번에도 암수를 썼다. 방화범이 기독교인이라고 누명을 씌운 것이다. 그는 왜 기독교인을 지목했을까?
로마는 다신교를 믿는 사회여서 제국의 통치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지만 않는다면 각 지역 고유의 종교를 인정해주었다. 켈트, 유대 같은 여러 민족들은 로마의 신들이 아닌 자신들만의 신을 믿을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 황제 때 유대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를 처형한 것도 종교적 이유가 아닌 속주의 질서를 위한 방편이었다.
신 앞에 누구나 평등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예수의 메시지는 피지배계층에게 매우 호소력이 있었다. 팔레스타인에서 탄생된 이 새로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졌고, 예수가 죽은 후 30여 년 만에 로마의 황제까지 그 이름을 알 정도로 팽창했다. 종교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 로마 통치자들이었지만, 평범한 로마인이 보기에 이들이 눈에 거슬린 것은 사실이었다. 다른 신들을 부정하고 자신들의 신을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인의 배타적 신앙관은 로마와 어울리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의 일상생활도 로마인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로마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았던 곳은 극장, 경기장 등이었다. 신전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유피테르(제우스), 아폴로(아폴론), 미네르바 등 신들을 찬양하는 행사가 의례적으로 열렸다. 물론 로마인들이 그 신들을 기독교의 신처럼 전지전능한 존재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행사였다. 검소를 강조하는 그들이 볼 때 로마는 쾌락과 사치로 물든 곳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그들끼리의 생활공간을 유지하며 따로 살았다.
신흥종교 대부분이 그렇듯 기독교에는 교리 외에도 이상해 보이는 구석이 많았다. 밤에 비밀리에 모여 예배를 하고, 노예와 여성도 존중하는 종교적 태도는 숱한 억측을 낳았다. 인육을 섭취한다는 소문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빵은 나의 몸이요, 포도주는 나의 피요.”라는 만찬 기도는 처음 듣는 사람들이 충분히 경악할 만했다. 세례는 “갓 태어난 아이의 온몸에 밀가루를 바른 뒤 신비한 입회의 상징으로 입교한 자의 칼에 맡긴다.”라는 왜곡된 소문으로 퍼졌다. 한밤중에 예배가 끝나면 “어둠 속에서 형제와 자매, 아들과 어머니 사이에 근친상간 난교가 이루어진다.”라는 소문은 제3자를 형제 자매라고 부르거나 가족끼리 평화의 입맞춤을 나누는 행위에서 나왔다. 기독교인에 대한 이러한 편견은 로마의 지식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타키투스는 기독교인을 두고 “해롭기 짝이 없는 미신을 믿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로마에 들어온 기독교인들은 로마 시민들을 끊임없이 간섭했다. 마침 네로가 통치하던 시기에 베드로를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로마에서 왕성한 선교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눈에 띌 수밖에 없었고 회자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소수였고 외톨이였으며, 불행하게도 소문은 좋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그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는 제12구가 화재 피해를 입지 않았다. 불이 났을 때 그들이 불렀던 찬송가는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기쁨의 노래로 들릴 수 있었다. 그렇게 네로는 “방탕하고 버림받은 비천한 무리를 발견했다.” 황제는 방화죄뿐만 아니라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근거하여 ‘인류 전체를 증오한 죄’로 기독교인들을 직접 고발했다.
황제의 고발장을 집행하기 위해 병사들은 제12구로 출격해 기독교인들을 차례차례 체포했다. 군사작전을 펼쳐 한꺼번에 일망타진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독실한 신자들은 30여 년 전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한 전철을 밟지 않고자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 형제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원래 로마에서는 혐의자를 심문할 때 고문하거나 채찍질할 수 없었다. 반역죄가 아닌 이상 사형 선고는 금지되며, 사형 선고를 내렸더라도 십자가형 형벌은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방화죄 외에 ‘인류를 증오한 죄’ 혐의까지 받은 데다, 그것도 황제가 직접 고발했으니 정상적인 사법절차는 무시되었다. 잇따른 고문으로 인해, 잡아당기면 나오는 고구마 덩굴처럼 숨어 있던 기독교인들이 차례차례 검거되었다.
한편 너무나 큰 재난을 당한 로마 시민들은 그것이 우연히 발생한 재앙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반드시 방화범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줄줄이 끌려가는 기독교인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반응은 매우 차가웠다. 안 좋은 소문의 주인공인 기독교인들은 그런 대재앙을 충분히 일으킬 만하다는 생각이 퍼졌고, 황제의 혐의는 흐려져갔다. 로마 시민이 자발적으로 기독교인을 고발하는 횟수도 많아졌다. 이렇듯 네로의 계획은 처음에는 성공적이었다.
네로는 한발 더 나아갔다. 사실 그는 향락과 쾌락을 즐기지만 피는 싫어했다. 그렇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기독교인들의 처형 장면을 로마 시민들에게 인상 깊은 구경거리로 제공하기 위해 많은 연출을 시도했다. 검투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에서 처형이 실시되었는데, 방화범이자 인류 전체를 증오한 죄인들의 처형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로마 시민이 경기장에 운집했다. 물론 입장료는 받지 않았다. 로마가 처형 장면을 공개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100명이 넘는 사람을 로마 한복판에서 한꺼번에 처형하는 것은 평소에 볼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이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는지 역사가들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처형 장면은 상세하게 묘사했다. ‘범인’들은 결박된 후 짐승의 모피를 뒤집어쓴 채 경기장에 입장했다.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사납고 굶주린 개였다. 기독교인들은 물리고 찢겨 죽었다.
일부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네로는 십자가에 박힌 사람들에게 초로 만든 옷을 입혔다. 그 이유는 밤이 돼서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어두운 경기장을 밝히는 인간 등불이 되었다. 네로는 십자가에 매달린 이들이 산 채로 불타는 장면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경기장에 전차를 이끌고 들어갔다.
이렇게 잔혹한 처형 방식은 적어도 로마에서는 예전에 볼 수 없었다. 네로는 로마 시민들이 불타는 방화범을 보고 복수하는 쾌감을 느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대화재로 추락한 자신의 인기가 더 높아지고, 로마 재건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렇지만 이런 장면을 목격한 로마인들은 타키투스의 표현에 의하면 “연민의 감정을 품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토록 잔혹한 운명을 내린 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의 잔인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임을 알았다.
로마 시민들은 그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더욱이 기독교인들은 죽어가면서도 찬송가를 불렀고, 화형당하면서도 살려달라고 몸부림치기는커녕 의연했다. 죽어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것이라는 순교적 태도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는 네로의 의도에 어긋난 것이었다. 다시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돌았고, 수백 년이 지난 뒤에도 논쟁거리로 남았다. 기독교에서는 이 사건을 로마 황제가 저지른 최초의 박해로 규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방화죄를 전가하려는 속셈이지 종교적 탄압은 아니었다. 대화재 이후 네로가 기독교를 박해한 기록은 없다.
이때 처형당한 기독교인의 수는 얼마나 될까? 기독교 최고(最古)의 저작인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서는 “네로의 비이성적 광기 때문에 수천 명이 죽었으며, 이때 바울이 로마에서 참수되고 베드로도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고 전해진다.”라고 기록했다.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베드로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릴 수 없으니 거꾸로 매달려 죽게 해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교회사》가 최초 출판된 시기는 대화재가 일어난 지 한참 뒤인 312년으로, 대화재 당시 로마에 그렇게 많은 기독교인이 살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이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 로마 외의 지역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의 규모 등을 고려하여 현대의 연구자들이 계산한 결과, 당시 로마에는 기독교인이 3000여 명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그 10분의 1인 200~300명이 희생당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붙잡혔다. 그들은 불을 지른 죄만이 아니라 인류를 증오한 죄로 기소되었다. 그들은 짐승의 가죽을 쓰고 개들에게 찢겨 죽었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불태워져서 낮이 지나 어두워졌을 때 등불이 되었다.타키투스의 《연대기》에서
대화재 이후 네로는 인기가 전보다 많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지지자가 많았다. 그러나 소심한 황제는 떨어진 인기를 만회하려 했다. 예정되었던 제2회 로마 올림픽을 더욱 성대하게 개최했고, 노래 경연 대회에 자신도 참여하겠다고 선언했다. 나폴리에서의 박수갈채를 기억하는 황제는 우승할 자신이 있었다. 원로원은 황제의 권위가 실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네로를 우승자로 결정해버렸다. 그러나 네로는 이를 거부하고, 다른 출전자들과 대등하게 겨루어 오로지 실력으로 월계관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폼페이우스 극장은 황제의 참가 소식으로 만원을 이루었다. 황제로서의 모든 특권을 버리고 오직 실력으로 승부하겠다는 네로의 모습에 관객은 큰 박수를 보냈다. 성적은? 역사는 이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지만, ‘가수’ 네로는 “제멋에 겨운 풋내기” 또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지만 성량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실력을 떠나 네로의 인기가 누구보다도 높았을 것이라는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28세의 네로는 이번 무대에 대단히 만족했다.
비록 평민이나 서민에게는 인기 있었지만 상류층에게 네로는 황제로서의 자질을 의심받기에 충분했다. 마침 로마 제전이 열리던 해에 황제 암살 음모가 발각되었다. 주동자는 귀족과 원로원 의원 20여 명이었다. “폐하를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폐하가 황제답고 존경할 만한 분이었을 무렵에는 저희만큼 폐하에게 충성스런 부하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폐하가 어머니를 죽이고 운동경기와 가수 노릇에 열중하고 심지어 방화까지 저지른 뒤로는 폐하에게 증오를 느꼈습니다.” 반란자들은 암살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놀랍게도 세네카도 연루되었는데 네로는 그래도 예를 갖추어 스승에게 자결을 명령했다.
65년에 네로에게 또 하나의 불행이 닥친다. 아내 포파이아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짧은 간격을 두고 스승과 아내를 잃은 네로는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렸다. 극단적인 탐미적 취향은 더 심해졌고, 그럴수록 네로는 로마가 싫어졌다. 그는 평소 동경하던 그리스로 여행을 떠났다. 황제의 순시가 아니라, 노래하는 가수로서 예술의 본토에서 인정받고 싶은 불같은 욕망에 떠난 길이었다. 응원단을 데리고 가서 원래 올림피아 제전에는 없던 음악 경연 종목을 황제의 이름으로 추가하고, 이 종목에 출전하여 황금 월계관을 썼다. 이를 기념해 그리스 각지의 도시에 ‘자유 도시’의 특전을 주었다. 내정의 자치를 인정하고, 속주세를 면제해준 것이다. 한편 네로는 그리스에 머무는 동안 라인 강 8개 군단의 사령관 두 사람과 시리아 속주의 총독을 불렀다. 그리고 아무런 설명 없이 그 세 사람에게 자결을 명령했다. 암살 음모에 그들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네로는 1년 반 만에 귀국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개선식은 전쟁에서 이긴 자만이 할 수 있었으나 그에게는 대신 음악 경연 대회의 우승이 있었다. 로마 시민에게 자신의 귀향을 알리면서 또 하나의 구경거리를 제공하고자 한 것이었다. 개선식 하이라이트는 황금 월계관 1808개를 받쳐 든 사람들의 행렬이었다. 이 진귀한 구경거리로 로마는 또 한 번 떠들썩했다. 네로는 개선식을 마치자마자 다시 나폴리로 갔는데,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반란의 주인공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라는 갈리아 속주의 총독이었다. 빈덱스는 “네로는 어머니를 죽이고 제국의 유능한 인재까지도 국가 반역죄로 죽였다. 게다가 가수로 분장하여 연주와 노래 실력을 뽐내고 있다. 로마 제국의 지도자로는 어울리지 않는 이런 인물은 한시라도 빨리 퇴위시켜야 한다.”라는 격문을 썼다. 휘하에 병사 10만 명이 삽시간에 운집했다. 빈덱스는 에스파냐 동북부 속주의 총독 갈바에게 서한을 보내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갈바가 답장을 하기도 전에 반란군은 로마 정규군에게 허망할 정도로 빠르게 진압되었고, 빈덱스는 자결했다. 비록 진압은 했지만 반란의 여파는 컸다. 네로에게는 더 이상 제국의 통치자 자격이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갈바는 빈덱스가 자결하자 “속주 총독은 황제가 아니라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충성한다.”라고 선언했다. 이에 몇몇 총독들이 동조했다. 빈덱스와는 달리 갈바는 로마의 정통 귀족 출신이고, 휘하의 병력도 정예군이었다. 상황이 급변하자 네로는 더 이상 나폴리에 머물 수 없었다.
원로원은 갈바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로마 시민들은 다른 사건으로 네로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해 흉작으로 밀 값이 치솟자 시민들은 대화재 때 베풀었던 황제의 선정을 기대했다. 그러던 중 항구의 한 배에서 많은 양의 포대가 하적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기대와 달리, 그 속은 밀이 아닌 네로의 경기장에 쓰일 모래로 가득 차 있었다. 분개한 시민들은 네로의 동상에 낙서를 하고 그를 조롱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원로원은 갈바와 비밀리에 연락을 취했고, 갈바는 병력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이윽고 1만 병력을 지휘하는 근위병 사령관도 네로 곁을 떠났다. 결정타는 원로원이었다. 그들이 이번에는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시민과 원로원이 네로에게 등을 돌렸고 그를 지켜줄 군대도 없었다. 네로의 신변을 지켜준 사람은 하인 네 명이 전부였다. 네로는 로마에서 북쪽으로 6킬로미터 떨어진 해방노예의 집으로 긴급히 피신했지만, 그곳에서 “이로써 한 예술가가 죽는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칼로 자신을 찔렀다.
네로의 죽음으로 도무스 아우레아도 완공되지 못했다. 인공 호수의 예정지에는 콜로세움이 들어서고, 네로의 황금상 머리는 태양신으로 교체되었다. 정원 자리에는 목욕탕이, 본관 자리에는 대목욕탕과 신전이 들어섰다. 그리스 전역의 자유 도시 지정도 폐지되었다.
대화재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기독교의 교세 확장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방화범이라는 누명을 벗자 기독교인들은 로마 시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잔인한 처형에서 비롯된 동정심으로 로마 시민들은 벽을 허물었다. 좋지 않은 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네로 황제 역시 대화재 이후로는 기독교인들에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 후 기독교는 몇몇 황제에게 박해를 받았지만, 306년 콘스탄티누스가 황제에 오름으로써 결국 박해는 끝이 났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서민 출신으로, 오래전부터 기독교인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아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다른 황제보다 훨씬 적었다. 서부 로마 제국의 패자에 오른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모든 로마인은 원하는 방식으로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다.”라는 밀라노 칙령을 313년에 발표했다. 형식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을 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친기독교 칙령이었다. 몰수했던 교회 재산을 돌려주고 황제의 사비를 털어 교회를 지었으며, 기독교 지도자들의 조언에 따라 노예 및 죄수 학대 금지법을 제정했다. 또한 황제는 예수를 신과 동일하게 간주하는 아타나시우스파의 주장을 정통으로, 신에 가까운 인간으로 보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인정한 배경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를 믿었거나, 분열된 로마의 통합을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기독교인 수가 로마 제국 인구의 10분의 1을 차지했을 만큼 기독교의 영향력은 커져 있었다. 황제는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아 공식적인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380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함으로써 로마 사회에서 다른 신들은 배척되었다. 이후 다신교적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로마의 종교관과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했고, 그 자리를 기독교가 대체했다.
로마의 국교가 되자 기독교는 점점 권위의 외피를 쓰기 시작했다. 황제가 교리와 교회의 내정에 간섭하면서 기독교 내의 자유는 이전보다 축소되었으며, 순교자적인 신앙심도 자취를 감추었다. 또한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다른 언어로 해석하는 것은 금지했다. 당시 라틴어를 쓰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권력자나 학자 등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는 많은 사람이 《성경》에서 멀어지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윽고 황제나 왕이 아닌 교황이 세속을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하자, 기독교인은 그들의 선조가 맞았던 채찍을 자기 손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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