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9. 2. 25. 22:40
■ 검천(儉川)의 지명 유래.
머내(遠川)는 머헌내(儉川. 또는 검천(險川)
2007년 01월 26일(금) 용인시민신문
머내는 수지구 동천동의 일부가 되어버린 마을이다. 본래 수지읍 동천리에 딸린 자연마을로 원천(遠川)이라고 쓴다. 본래 이 마을은 고기동 상류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탄천과 합류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성남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하천양쪽에 마을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같은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광주딴미와 용인딴미, 용인능꼴과 광주능꼴과 같은 형태의 지명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동막골이나 머내와 같은 자연마을의 경우 지금은 모두 용인시 수지구와 성남시 분당구에 딸린 동(洞)의 일부가 되어 통·반으로 구분짓고 있으나 이전에는 용인군 수지면 동천리(東川里)와 광주군 낙생면 동원리(東遠里)에 속했던 마을이다.
용인동막골과 광주동막골, 용인머내와 광주머내로 불렀던 것 또한 앞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동천리는 동막(東幕)마을과 원천(遠川)마을을 합쳐 동(東)+천(川)을 따서 동천리라 하였고 광주의 동원리는 같은 동막(東幕)과 원천(遠川)에서 동(東)+원(遠)을 취해 동원리라고 한 것이다.
즉 한곳은 동천리가 되고 또 한곳은 동원리가 되었는데 결국 같은 뿌리를 갖는 다른 이름인 것이다. 1987년에 간행된 1:50,000지도를 보면 용인쪽에는 ‘먼내’라고 표기되어 있고 광주쪽에는 ‘머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표기는 이전의 지도와 이후의 지도에도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머내는 ‘머흔내’의 변음이다. 머흐다라는 말은 고어(古語)로 험하고 사납다는 뜻을 가지는 말이다. 조선시대의 중국어 학습서인 『노걸대언해』를 보면 ‘머흐다’라고 하는 표현이 있고 역시 조선시대의 일본어교재인 『첩해신어』에는 ‘머흐더니’라고 하는 표현이 있으며 『신증유합』에는 험(險)자를 ‘머흘 험’으로 표기하고 있다.
머내는 머흔내 → 머흐내 → 머내의 순서나 머흔내 → 먼내 → 머내의 순서로 변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용인현읍지』에 머내에 있던 점막(店幕)조에 험천점(險川店)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머내주막의 한자표기가 된다. 즉 험(險)의 옛말인 ‘머흘다, 머흐다’라고 하는 말을 따라 옮긴 표기인 것이다.
또 구한국시대의 『지명지』에는 원천계(遠川溪)나 원천리(遠川里) 등의 표기가 나오는데 이는 먼내의 먼을 거리가 멀다고 하는 뜻의 멀 원(遠)자를 따라 원천으로 쓴 것이다. 또한 주막의 이름으로 원천주막(遠川酒幕)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또한 머내주막의 한자표기인 것이다.
이와 같이 험천(險川)과 원천(遠川)으로 한자표기된 머내의 지명을 그대로 한자풀이 해본다면 ‘험한+내’라는 뜻과 ‘먼+내’라는 두 가지로 풀이할 수 있다. 위의 두 표기방법은 모두 뜻을 따라 옮긴 표기(訓借)인데 이때 어느 표기가 본래의 이름과 가까운지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멀리 있는 내’라고 하는 것 은 마을이 바로 옆에 있으니 사리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오히려 시대적으로 앞서 나타나는 험천, 즉 머흔내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지금은 도시화되어 시내(市內)한 복판을 흐르는 개울처럼 되어버렸지만 옛날에는 험하고 거치른 골짜기를 흐르는 하천이었을 것이고 이러한 연유로 ‘머흐내’라고하는 이름이 생겨났을 것이다.
언제나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이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옮기는 이에 따라 험천이 되기도 하고 원천으로 쓰기도 했던 것이다. 머내를 표기한 다른 한차표기를 보면 원우천(遠于川)이라고 쓴것도 있고 마희천(麻戱川)이라고 쓴 것도 있는데 가만히 주의를 기울여 들어보면 머내나 머흐내를 뜻이나 소리를 취해 표기한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머내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다양한 표기라고 할 수 있고 머내가 본래부터 한자지명이 아니라 우리말 땅이름임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정양화 용인문화원 부설 용인향토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