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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집 부록 제1권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 행 가의대부(行嘉義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 정공(鄭公) 시장(諡狀) - 조경(趙絅)
공의 휘는 온(蘊)이고, 자는 휘원(輝遠)이고, 자호(自號)는 동계(桐溪)이며, 성은 정씨(鄭氏)이고, 선계(先系)는 초계(草溪)에서 나왔다. 그 상세(上世)에 휘 배걸(倍傑)이라는 분이 있는데 고려조의 시중(侍中)으로 광유후(光儒侯)에 봉해졌다. 4, 5세(世) 뒤의,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 전(悛)은 문장과 행의(行誼)가 있어 세상에서 팔계 선생(八溪先生)이라 일컬었다.
그 뒤 휘 종아(從雅)는 목사(牧使)로 공에게 고조부가 된다. 이분이 옥견(玉堅)을 낳으니,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이며,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숙(淑)을 낳으니,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공의 고(考) 휘 유명(惟明)을 낳으니, 진사이며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3대가 증직(贈職)된 것은 공의 현귀함 때문이다. 참판의 학문은 동현(同縣)의 징사(徵士)인 판결사(判決事) 갈천(葛川) 임훈(林薰)에게서 비롯되었는데, 인조조(仁祖朝)에 효행으로 정려(旌閭)되었고, 향인(鄕人)들이 사당을 세워 제향한다. 진주(晉州) 강근우(姜謹友)의 딸에게 장가들어 융경(隆慶) 기사년(1569, 선조2)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중후(重厚)하여 어린아이 시절 놀이할 때부터 말을 하는 것이 범상하지 않으니, 마을의 부로(父老)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고, 겨우 4, 5세 때에 벌써 온정(溫凊)의 일을 행하였다. 처음 배우기 시작할 때에는 말이 어둔한 듯했으나 종일토록 글을 읽었기 때문에 외우는 것이 영리한 아이들보다 문득 나았다.
15세가 되자, 종일토록 바르게 앉아 쉬지 않고 강독(講讀)하여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문사(文詞)가 날로 향상되었다. 갈천공(葛川公)이 공의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장편(長篇)을 보고 말하기를, “훗날 공(功)을 취함이 반드시 원대(遠大)할 것이니, 단지 과거 급제일 뿐만이 아닐 것이다.” 하였다.
나이 19세에 향시(鄕試)에서 장원하였다. 만력(萬曆) 병신년(1596, 선조29)에 참판공의 상을 당하자, 예법에 지나치도록 슬퍼하여 몸이 훼상(毁傷)되었다. 당시 왜적이 남쪽 지방을 침략했는데, 공이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호남과 영남 사이에서 피난하였다.
시골 백성들이 상중(喪中)에 파리한 공의 모습을 보고서 아끼지 않고 곡식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모부인이 일찍이 아침저녁의 끼니 걱정이 없었다. 난리가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상기를 마쳤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봉양할 길이 없자, 공이 직접 농사짓고 낚시질까지 하여 부지런히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 드렸고, 밤이 되면 섶을 태워서 글자를 비추어 읽었다. 옷이 떨어지고 나물 뿌리를 먹어 처자식이 항상 굶주린 빛이 있었으나 마음은 편안하였다.
을사년(1605, 선조38)에 영남의 많은 선비들이 오현(五賢)의 종사(從祀)를 청하면서 공을 추대하여 소(疏)를 가지고 서울에 들어가게 하니, 선묘(宣廟)께서 가상히 여겨 정시(庭試)를 설행(設行)하였다. 공이 제2등을 차지하였고, 서울 사람들이 그 문장을 자자(藉藉)하게 입으로 서로 전했다.
병오년(1606)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무신년(1608)에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한 뒤, 임해군의 옥사를 다스리는 일이 다급하게 되자, 공이 정인홍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대략에, “빈전(殯殿)에서 방망이와 칼을 사용했다는 말은 모두 사실무근이니, 어찌 주상으로 하여금 까닭 없이 천현(天顯 형제)의 육친을 죽이게 할 수 있겠습니까. 포속(布粟)의 민요가 오늘날 다시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인홍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로부터 공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광릉 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으니, 일찍이 선조 말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경술년(1610) 가을에 별시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분관(分館)되었다. 이듬해에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에 제수되었다가 곧 이배(移拜)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신해년(1611) 겨울에 사서(司書)에서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이배(移拜)되었다. 이해에 창덕궁이 낙성되어 광해군이 이어(移御)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요망한 고사(瞽史)의 말에 현혹되어 정릉(貞陵)의 시어소(時御所)로 되돌아가려 하였다.
공이 독계(獨啓)하여 강력하게 간쟁하자, 광해군이 진노하여 즉시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정언 정온이 감히 이치도 없고 근거도 없는 말로 거둥하는 날에 소란을 피웠으니, 방자하고 기탄없음이 심하도다.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보임(補任)하도록 하라. 또한 어떤 사람이 이처럼 부망(浮妄)한 사람을 천거하여 조정에 분란을 일으키게 하는지 모르겠다.
해조(該曹)의 당상(堂上)은 추고(推考)하고, 색낭청(色郞廳)은 먼저 파직한 뒤 추고하라.” 하였다. 공이 서울을 떠날 때에 정승 심희수(沈喜壽)가 전송하며 공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공은 언관의 소임을 다했지만 나라는 장차 어떻게 한단 말이오.” 하였다.
공이 부임해서는 주장(主將)을 예법으로 섬기고 이민(吏民)을 은혜로써 대하였다. 이해 북로(北路)에 크게 흉년이 들었고, 경성(鏡城)이 더욱 굶주림이 심했다. 공이 방백(方伯)에게 글로 보고하여 힘을 다해 구황(救荒) 정책을 시행하였고, 또 묵은 병폐를 끊어서 백성들이 소생할 수 있게 되었다.
갑인년(1614)에 하옥되어 심문당할 때에 경성 사람들이 서울로 달려와서 묵으며 말하기를, “우리에게 은덕을 끼친 분이다.” 하였다.
임자년(1612)에 광해군이 무신년(1608, 선조41)에 상소한 사람의 공을 책훈(策勳)하라고 명하였다.
공은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즉시 사직소를 올렸다. 그 대략에, “무릇 공훈을 기록하는 법으로 말하면, 반드시 노고와 힘을 다하여 위험을 부지(扶持)한 사실이 있은 연후에야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고 후세에 할 말이 있는 것인데, 신은 곧 언어와 문자의 말단으로 감히 정훈(正勳)의 반열에 끼게 되었습니다.
비록 공훈을 탐내고 싶더라도 공론을 어찌 하겠습니까.”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공이 연이어 글을 올려 기필코 윤허를 받고자 하니, 이이첨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정모(鄭某)가 이 책훈을 사양하는 것은 나라가 오래 보존되지 못할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 아닌가.” 하였다. 이에 공이 어쩔 수 없음을 알고 묵묵히 물러났다.
계축년(1613) 여름에 무뢰배 서양갑(徐羊甲) 등이 구금당했는데, 마침내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의 옹립을 도모한다고 무고(誣告)하여 끌어들였다. 이에 자전(慈殿)을 엿보던 자들이 부채질하여 화를 빚어냈으나 공경대신(公卿大臣)은 대부분 무고인 줄 알면서도 입을 다문 채 감히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공이 하루는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이이첨을 보고 책망하기를, “여덟 살의 아이가 어찌 역모를 알겠소. 듣건대, 자전(慈殿)께서 상식(尙食)을 폐하고 대군을 어루만지며 울먹이기를, ‘네가 죽으면 나 또한 죽으련다.’ 하시니, 만일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면 누가 그 허물을 책임지겠소.” 하니, 이이첨이 발끈 소리 높여 말하기를, “대비마저 함께 폐하더라도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소.” 하였다.
공이 즉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니, 이이첨이 뼈에 사무치도록 원한을 품었다. 얼마 뒤에 공이 탄핵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인홍에게 편지를 보내어 “여덟 살의 아이를 죄주기를 청하니, 온 조정이 모두 잔인한 사람이다.”고 극언하였고, 또 정인홍에게 손을 써서 대군을 구하기를 간청하였으나 인홍은 공의 말을 채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마음속으로 노여워하였다.
겨울에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에 제수되었으나 당시의 여론과 크게 합치하지 않아 휴가를 청하여 체직되었다. 갑인년(1614) 2월에 영창대군이 배소에서 죽었으니, 강화 부사 정항(鄭沆)이 대개 조정의 의논에 부화(附和)하여 죽인 것이다. 공이 부사직으로 있으면서 봉사(封事)를 올렸다.
그 봉사에, “아, 인성(仁聖)한 덕을 지닌 전하께서 불행히도 인륜(人倫)의 변고를 당하시어 변고에 대처하는 방도를 다하고자 했으나 끝내 뜻대로 되지 않아 거칠고 사나운 무부(武夫)에게 손을 빌리고 말았으니, 그 성덕(聖德)에 누가 됨이 이미 크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의(㼁)의 죄를 논하는 자들이 첫째는 화본(禍本)이라 하고, 둘째는 기화(奇貨)라고 하니, 그 말이 진실로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 제왕(濟王) 횡(竑)의 일을 원용(援用)하여 견주어 보면 또한 할 말이 있습니다.
제왕이 처음 황자(皇子)가 되었을 때에 간신(奸臣)의 질시를 받아 번방(藩邦)으로 쫓겨 갔다가 얼마 후 적도(賊徒)의 옹호를 받게 되자 황포(黃袍)를 몸에 두르고 서약(誓約)까지 했습니다. 비록 그 일이 성공하지 못할 줄 알고서 곧바로 토평(討平)한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몸소 악명(惡名)을 얻게 된 점은 면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일로써 비추어 보면, 당시의 화본이 횡만 한 자가 없었고, 흉적의 기화로도 횡만 한 자가 없었습니다. 사미원(史彌遠)이 음모를 꾸며 그를 죽인 것은 사직을 안정시킨 충성이라 할 수 있건만 당시 사람들이 그 죽음을 원통하게 여겼고 후세 사람도 그 죽음을 심하다고 여기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진덕수(眞德秀)의 말을 살펴보니, ‘삼강오상(三綱五常)은 우주를 지탱하는 동량이며, 백성을 안정시키는 주춧돌이니, 사람에게 이것이 없다면 의관을 갖춘 짐승일 뿐이고, 나라에 이것이 없다면 중국이지만 오랑캐일 뿐이다.’ 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이처럼 통절(痛切)하였던 것은 진실로 횡의 행적이 비록 이러저러하다 하더라도 그 마음에는 본래 의심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실정을 참작하여 그 원통함을 씻어 주고, 이어서 추봉(追封)하고 입후(立後)하기를 청하였던 것입니다. 옛날의 군자가 일시(一時)의 이해(利害)를 헤아리지 않고 오직 의리의 정당함과 부당함만을 논하면서 성심을 다해 윤기(倫紀)의 문란함과 군덕(君德)의 잘못됨을 경계하고 인도했던 것이 어떠하였습니까.
지금 의는 한 사람의 왕자(王子)일 뿐이니, 심적(心迹)이 횡과는 현격하게 다릅니다. 단지 역적의 공초에서 나온 말일 뿐, 일찍이 옹립한 흔적이 없으며 어려서 아는 것이 없으니, 또한 어찌 모역(謀逆)할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만약 진덕수와 같은 사람이 본조(本朝)에 있다면 죽이기를 청하지 않았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어린아이의 무지(無知)함을 몹시 불쌍히 여기시고 선왕(先王)의 유교(遺敎)를 우러러 체득하시어, 그를 보호하여 안전하게 할 바를 생각하는 데 지극한 방도를 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관이 뜰에 가득 늘어서고 삼사(三司)가 번갈아 상소하여 논열한 것이 지난해부터 올봄까지 이어져 몇 달이 지났는데도 전하께서는 측은한 생각을 억제하기 어려워서 끝내 윤허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아, 전하께서도 의와는 끝내 서로 용납될 수 없음을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나 시일을 끌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거부하셨던 것은 어찌 ‘역적의 자식이라도 오히려 성장하기를 기다리는 일이 있는데, 하물며 어린 아우에게 어찌 갑자기 형장(刑章)을 시행할 수 있겠는가. 강도(江都)에 안치(安置)하여 나이가 찰 때를 기다렸다가 그의 뜻과 행실이 어떠한지를 보고서 서서히 처리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고 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성상의 의도가 어디 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건만 추국(推鞫)하는 신하들은 한 해가 넘게 입시(入侍)하면서 그 아름다운 뜻을 받들어 따르는 이가 하나도 없고, 삼사(三司)에 관원이 많으나 부화뇌동(附和雷同)을 잘할 뿐 임금을 덕으로 사랑하는 이가 하나도 없어서 군덕(君德)의 잘잘못을 자신과 전혀 무관한 듯이 보아 넘기니, 아, 전하의 형세는 고립되어 도움 받을 곳이 없다 할 것입니다.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전하께서 죽이지 않는 것으로 그를 대했거늘 정항이 죽이는 것으로 대했고, 조정에서 정당한 법으로써 의논했거늘 정항은 핍박하여 죽게 하여, 전하로 하여금 대순(大舜)의 상(象)에 대한 처사만 못하게 하였고, 한당(漢唐) 이하의 임금들이 다 이치에 맞지 않게 처리한 결과를 면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아,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지엄한 국법이 있습니다. 무고(無辜)한 범인(凡人)을 죽이더라도 또한 용서할 수 없는데, 하물며 우리 임금의 친동기(親同氣)를 죽임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정항을 참수하지 않으신다면 전하께서는 선왕의 묘정(廟庭)에 설 면목이 없을 듯합니다.
아, 지나가 버린 허물은 따질 수 없다지만 장래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서 서로 용납될 수 없음은 형세(形勢) 때문이고, 죽어서 증전(贈典)을 두는 것은 인정(人情) 때문일 것입니다. 옛날 송(宋)나라 태종(太宗)은 정미(廷美)에 대해 이미 죽이도록 하고서 곧바로 봉작(封爵)과 휼고(恤孤)의 은전을 내렸고, 진종(眞宗)은 원좌(元佐)에 대해 단지 수괴(首魁)만 주벌하였고 오래도록 폐한 가운데에서 봉작(封爵)을 회복시켰으니, 이는 성덕(盛德)을 지닌 사람의 처사였습니다.
어진 사람은 아우에게 노여움을 품지 않으며 원한을 묵혀 두지 않는 법입니다. 하물며 전하께서는 의에 대해 이미 품을 만한 노여움이 없거늘, 어찌 묵혀 둔 원한이 있겠습니까. 그 죽음의 원통함은 길가는 사람조차 슬퍼하거늘, 하물며 성상의 애통한 마음이야 응당 어떻겠습니까. 근일에 옥후(玉候)가 편치 못하신 것은 신의 생각에는 슬픔과 상심이 지나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영창(永昌)이란 호를 추복(追復)하여 대군(大君)의 예(禮)로 장례 지내고, 또 애통하다는 전교를 내려서 온 나라 신민(臣民)들로 하여금 전하의 우애(友愛)하는 본심을 분명히 알게 하신다면 위로는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령을 위로할 수 있고, 아래로는 만민(萬民)의 의심하는 이목(耳目)을 풀어 줄 것이며, 후세에 전하더라도 또한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맑고 밝은 조정에는 반드시 장기(章墍)처럼 조서(詔書)를 사칭할 자가 없을 텐데, 전하께서는 무엇을 꺼려서 행하지 않으십니까.
신의 사사로운 근심과 지나친 염려로는 또 이보다 심한 것이 있기에 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송나라 신하 한기(韓琦)의 말이 훌륭합니다.
한기가 말하기를, ‘부모가 자애로운데 자식이 효도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어서 말할 것이 못되고, 오직 부모가 자애롭지 못한데도 자식이 효성을 잃지 않아야 비로소 일컬을 만한 것이 된다.’ 하였습니다. 대비(大妃)가 비록 혹 전하께 자애롭지 못할지라도 전하께서 어찌 대비에게 효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의가 이미 죽었으니, 다시 무슨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진실로 바라건대, 지금부터 참소하는 말을 끊어 무함하는 길을 막으시고, 만일 간사한 무리들이 감히 좋지 않은 말로 대비에 대해 언급한다면 즉시 유사에게 넘겨 중률(重律)로 논죄하게 하소서. 전하께서도 자식 된 직분을 공손히 다하여 문안하는 예를 폐하지 마시고 반찬을 살피는 정성을 게을리하지 말아서 대비가 기뻐하도록 힘쓰시어 처음과 같은 모자 관계가 다시 된다면 어찌 이전의 잘못을 가리고 새로운 교화를 밝힐 수 있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이렇게 하는 데에는 방도가 있으니,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아, 모자와 형제 사이를 남들이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마땅히 주벌해야 할 죄가 관숙(管叔), 채숙(蔡叔)과 같은 점이 있고, 폐위할 만한 악행이 여태후(呂太后), 무측천(武則天)과 같은 점이 있더라도 언관(言官)이 된 자는 마땅히 먼저 동료와 의논하고 다음으로 타사(他司)에 통보하여 위로는 대신(大臣)에게 알리고 아래로는 재신(宰臣)들에게 물어서 논의가 귀일(歸一)되기를 기다린 연후에 계사(啓辭)나 차자(箚子)에서 말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그 일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정조(鄭造), 윤인(尹訒), 정호관(丁好寬) 등이 맨 먼저 폐비(廢妃)와 살제(殺弟)의 일을 발의했으나 동료와 의논하지도 않고, 타사(他司)에 통보하지도 않고, 대신에게 알리지도 않고, 재신들에게 묻지도 않고서 슬그머니 완석(完席)에서 발언하고 갑자기 피혐하는 가운데에 드러내어, 일찍이 일개 수령을 논죄하고 일개 관리를 탄핵해도 오히려 신중을 기하는 것만 같지 않게 하였으니, 이는 그 속마음을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대개 근년 이래로 요행의 문이 한 번 열려 훈명(勳名)이 크게 넘쳐나니, 공훈을 탐하고 재앙을 즐기는 무리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임금의 지친(至親)을 자신의 부귀(富貴)를 낚는 미끼로 여기기까지 하니, 비유하자면 짐승을 쫓는 자가 남들을 밀치고 홀로 달려가 먼저 죽인 공을 얻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아, 임금의 신하가 되어서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습니까.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만약 모자간의 은혜를 온전히 하려 하신다면, 속히 이 세 사람을 잡아 변방으로 쫓아내어 나라 안에 함께 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 뒤에야 참언(讒言)하는 자들이 일어나지 않고 삼강오상(三綱五常)이 우주에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신은 중대한 논의가 발의되었을 때에 파산(罷散) 중이거나 질병이 있어 한 번도 백관의 뒤를 따라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근래에는 사람들의 말이 망극하여 역적을 비호했다고 지목하면서 기어이 사지(死地)로 몰아넣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은 스스로 ‘언관도 아니고 노모도 집에 계시지만, 참소하는 칼날에 헛되이 죽는 것이 어찌 일언(一言)을 올리다가 성상의 진노를 사서 죽는 것만 같겠는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광해군이 크게 진노하여 즉시 정원에 내리며 이르기를, “이처럼 흉포한 상소문을 어느 승지가 봉입(捧入)했는가. 상소를 봉입한 승지를 감파(勘罷)하라.” 하였다. 이에 삼사(三司)가 모두 삭탈(削奪)한 뒤 절도(絶島)에 안치하는 것으로 논했으나 광해군이 또 처벌이 가볍다고 진노하며 삼사를 준엄하게 꾸짖으니, 이에 곧바로 나국(拿鞫)하기를 청하여 공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의금부에서 관례에 따라 여러 대신의 헌의(讞議)를 청하였다. 우의정 정창연(鄭昌衍), 원임(原任)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이 헌의(獻議)하기를, “정온은 진실로 광망(狂妄)하여 꺼릴 줄 몰랐지만 어찌 임금을 무시하거나 부도(不道)한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성덕(聖德)을 넓게 펼쳐서 특별히 너그럽게 처리하소서.” 하였고, 정승 심희수(沈喜壽)의 헌의 또한 그러하였다.
광해군이 이완평(李完平)에게 답하기를, “정온의 소는 글자마다 음흉하니, 임금을 무시하고 부도한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이때 삼사와 관학(館學)이 벌 떼처럼 일어나서 ‘무장법(無將法)’, ‘불병역(不兵逆)’ 등의 말로 소장을 올려 원한을 품었다. 6월에 광해군이 친히 국문하였다.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아뢰기를, “정온의 죄는, 광망(狂妄)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국문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여 이날은 다만 공초만 받았고, 공초를 받은 뒤에 다시 하옥시켰다. 7월에 다시 공초를 받고 이어서 대정현(大靜縣)에 안치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감옥에 갇힌 것이 모두 다섯 달이었다. 처음 감옥으로 들어갈 때 어떤 한 노파가 길에서 축원하기를, “하늘이여, 하늘이여. 원컨대 어진 분으로 하여금 감옥에서 죽게 하지 말지어다.” 하였고, 옥졸(獄卒) 또한 서로 경계하며 공경하였다. 정항(鄭沆) 또한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저는 공의 의로운 공초에 감복했습니다. 저는 결코 공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하였다.
정호관(丁好寬)이 공의 상소문을 보고 또 말하기를, “나는 천고의 죄인됨을 면하지 못하겠구나.” 하고, 드디어 날마다 술을 마시다가 병들어 죽었다. 공이 출옥했을 때 도성 사람들이 몰려와서 구경하느라 거리마다 무리를 이루었다. 압송하는 수레가 가시나무로 되어 있으므로 모두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공이 살아남을 기뻐하고 공이 귀양 감을 슬퍼하였다.
이때에 아동(兒童)과 주졸(走卒)들도 모두 공의 이름을 전송(傳誦)하였고, 부녀자들도 공의 상소문을 번역하여 집집마다 전하며 읽기까지 하였으니, 공론이 백성의 마음에 살아 있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공이 해남(海南)에 이르렀을 때 호남 유생 송흥주(宋興周) 등이 상소하여 ‘공의 상소는 충성과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고 극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언(正言) 오장(吳長), 이언영(李彦英), 강대수(姜大遂)도 공의 일을 언급하다가 혹은 찬축(竄逐)되고 혹은 파출(罷黜)되었다. 예조에서 청하여 공의 상소문을 궐문(闕門) 밖에서 불사르고, 또 공의 화상(畫像)을 불살랐다. 공이 대정(大靜)의 배소에 있으면서 하늘의 해를 보지 못한 세월이 10년이었으나 천명(天命)으로 여기며 편안히 지냈고, 오직 백운사(白雲詞)를 지어 어버이를 생각하는 뜻을 부쳤다.
계해년(1623)에 인조대왕이 반정(反正)하고 혼조(昏朝) 때 정도를 행하다가 쫓겨난 사람을 발탁하였는데, 공이 그 첫 번째에 해당하였다. 처음 헌납(獻納)으로 부름을 받았고, 제주를 떠난 뒤 며칠 되지 않아 사간(司諫)으로 승진하니, 왕명을 받들고 오는 관리가 도로에 이어졌다.
이로부터 매년 제수되고 매년 옮겨 가서 비옥(緋玉)을 입고 금대(金帶)를 차는 반열에 이르렀다. 사간원에서 헌납과 사간이 된 것이 각각 한 번, 대사간이 된 것이 일곱 번이었고, 사헌부에서 대사헌이 된 것이 네 번이었다. 네 번 부제학이 되었으며, 세 번 도승지가 되었고, 이조에서 참의와 참판이 된 것이 각각 세 번이었다.
그 외에 예조ㆍ병조ㆍ형조의 참판과 한성 좌윤(漢城左尹), 경상 감사(慶尙監司), 남원 부사(南原府使)를 지냈으니, 혹은 특은(特恩)으로, 혹은 봉양을 위해, 혹은 호종한 공로로 제수된 것이다. 그러나 공은 대부인(大夫人)이 매우 연로하였기 때문에 일찍이 서울에서 몇 달을 머물지는 않았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2)에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괄(李适)이 반역하여 상(上)이 남쪽으로 공주(公州)에 거둥하니, 공은 이조 참의로서 호종하였다. 정묘년(1627) 1월에 오랑캐가 북쪽 변방을 침범하자, 상은 강도(江都)로 거둥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분조(分朝)는 호남으로 내려갔다.
공이 당시 고향에 있다가 변란 소식을 듣고 그날로 달려가 문안하기 위해 길에 올랐다. 길에서 조사(朝士)를 만나면 모두 “오랑캐의 기마가 한창 횡행하고 있으므로 비록 가더라도 필시 행재소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하였고, 공의 맏아들도 분조로 달려가기를 고청(固請)하니, 공이 꾸짖으며 말하기를, “사세를 관망하여 편리함을 취하는 것은 신하의 의리가 아니다.” 하였다.
당시 사방에 흩어져 있던 사대부들은 모두 편리한 길로 전주(全州)로 달려갔고, 곧바로 강도로 달려간 것은 공 한 사람뿐이었으니, 온 조정이 찬탄하기를 초(楚)나라 사람이 섭공(葉公)을 볼 때처럼 하였고, 민심도 이로 인해 견고해졌다. 이에 공이 소를 올려 먼저 화의(和議)의 그릇됨과 강홍립(姜弘立)의 죄를 말하고, 끝으로 적(敵)과 우리나라의 형세를 논하면서 적을 방어할 계책을 모의하는데, 사실에 근거하여 옳은 방도를 구하였으므로 듣는 사람이 옳게 여겼다.
상이 평소에 공의 곧은 절개를 중하게 여겨 공을 예우함이 군신(羣臣) 중에 각별하였고, 조정의 사류(士類)도 모두 공을 흠모하여 신뢰하였다. 간혹 몹시 시기하는 자도 없지 않았으나 공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예전의 절조(節操)를 더욱 가다듬어 매섭고 강직하게 하였다.
어렵고 쉬운 일을 막론하고 어떤 일이든지 닥치기만 하면 반드시 간쟁하였고, 남들이 꺼리는 바를 용감하게 맞아 피하지 않았다. 사간으로 있을 때에 광해군 때의 폐세자가 땅을 파고 도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공이 삼사(三司)의 안율(按律)하려는 논의를 연달아 막았고, 대사간으로 있을 때에 인성군(仁城君)이 역적의 공초(供招)에 거론되었는데, 합사(合司)가 죄를 청했으나 공이 힘껏 전은(全恩)을 주장하였다.
공이 부제학 홍서봉(洪瑞鳳)과 성상 앞에서 쟁론할 때에 부제학이 말하기를, “정온은 초야에서 새로 올라와서 홍(珙)의 행적을 모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주장할 뿐입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설혹 역모가 이미 드러났다 할지라도 규문(閨門) 안에서는 은혜로써 의리를 가려 줌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머리를 끄덕이며, “대사간의 말이 옳다.” 하였다. 이와 같이 한 것이 세 번이다.
이튿날 피혐(避嫌)하는 계사(啓辭)를 올렸다. 그 대략에, “만약 의리의 당부(當否)와 행적의 허실(虛實)을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적(賊)의 공초대로만 한다면 역옥(逆獄)이 거의 매년 일어날 것이고, 인성이 비록 제거되더라도 어찌 인성 같은 자가 없겠습니까. 선왕(先王)의 자손이 다 죽고 말 것입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윤기(倫紀)가 밝아지지 않으면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신은 실로 삼사가 말하는 종묘사직을 위한 대계(大計)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날의 본보기가 먼 곳에 있지 않고 바로 폐조(廢朝) 때에 있으니, 폐조가 비록 혼란한 정치를 했지만 동기(同氣)를 죽이지 않고 모비(母妃)를 폐하지 않았다면 비록 전하의 지극한 인(仁)과 성대한 덕으로도 하루아침에 이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삼사의 요청은 간악한 자들의 구실거리가 될 뿐이지 종묘사직을 위한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 때문에 시의(時議)와 어긋나서 체직되어 남쪽으로 돌아갔다. 공이 처음 도승지에 제수된 때는 병인년(1626)으로, 상이 막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을 당하였다. 공이 소를 올려 “고례(古禮)를 어기고 사친(私親)을 위하여 삼년상을 단행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아뢰니,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경오년(1630) 봄에 태묘에 벼락이 쳤다. 공이 구언(求言) 중의 ‘형옥(刑獄)이 알맞지 않은 것’이라는 항목으로 인해 수백 글자를 반복하여 공족(公族) 중에 연좌되어 귀양 간 노약자를 용서하기를 청하니, 양사(兩司)가 역적을 비호한다고 탄핵하여 여러 날을 논죄했으나 단지 체직만 되었다.
가을에 모친상을 당했다. 임신년(1632) 7월에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승하하였다. 공은 담복(禫服)을 입고 국장(國葬)에 달려가 궐문 밖에서 곡한 뒤 이튿날 고향으로 돌아갔다. 계유년(1633) 봄에 공이 대사헌으로 부름을 받아 서울로 들어갔다. 이때에 무고(誣告)로 인한 옥사가 있었는데, 공이 논죄함이 긴절(緊切)하여 무고한 자는 연좌되고 체포된 자는 석방되었다.
또 “여러 궁가(宮家)를 궁핍할 때에 건립하느라 백성을 수고롭게 한다”고 논하니, 상이 즉시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얼마 뒤에 동지경연(同知經筵)에 제수되자, 공이 사직소를 올려 고향에 돌아가 부친의 묘소를 보수하기를 청하니, 상이 특별히 역마를 내려 주었고, 또 본도(本道)로 하여금 제물을 갖추어 예제(禮制)가 이루어지게 하였다.
이해 가을에 대명전(大明殿)에 벼락이 쳤다. 공이 고향에 있으면서 응지소(應旨疏)를 올려 인주(人主)의 대본(大本)에 대해 극언하였는데, 그 뜻은 오로지 임금의 마음을 먼저 바로잡으려 한 것이었다. 약석(藥石) 같은 말은 큰 띠에 새겨 잊지 않겠다는 비답이 있었다.
이듬해에 또 대사헌에 제수되었고, 올라오는 길에도 승지로 이배(移拜)되었다. 이는 당시에 전례(典禮)가 거의 결정되었으므로 조정에서 공이 언관을 담당하게 되면 반드시 이 문제를 쟁론할 것이라 염려했기 때문이다. 승정원에 들어가서 즉시 소를 올려 전례를 논하였는데, 경사(經史)에서 증거를 갖추어 언사(言辭)가 엄하고 의리가 정대하였으니, 이는 모두 예법을 논한 제유(諸儒)들도 일찍이 발명하지 못한 것이어서 여론이 훌륭하게 여겼다.
을해년(1635) 여름, 유릉(裕陵)과 목릉(穆陵)에 번개가 치고 폭우가 내리는 재해가 있었다. 상이 대신을 보내어 봉심(奉審)하게 했으나 대신의 상주(上奏)가 중론(衆論)과 달랐다. 공이 대사간으로서 휴가 중에 있으면서 봉사(封事)를 올렸다. 그 봉사에, “아, 두 능(陵)이 무너진 변고는 과연 천변(天變)으로써 경계를 보인 것입니까.
아니면 또한 인사(人事)를 삼가지 못해서입니까. 천변이라 여긴다면 두 대신(大臣)의 계사(啓辭)가 이렇듯 명백하니 의심할 바가 아니고, 인사(人事)라고 여긴다면 당초에 감독했던 관리가 봉축(封築)을 삼가지 않은 죄를 어찌 심상한 추고(推考)만 하고 말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만약 천변으로 돌린다면 오히려 자애로운 하늘이 임금에게 경계를 보여서 임금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반성하게 하여 전하를 훌륭한 임금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니, 이는 오히려 하늘에게 버림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인사로 핑계를 돌린다면 변괴(變怪)는 더욱 심할 것입니다.
지금 천변으로도 돌리지 않고 인사로도 돌리지 않으면서 한결같이 답답하게 귀결되는 곳이 없게 하시니, 어찌 전하께서 선조를 받들되 효성을 생각하는 도리라 하겠습니까. 아, 화재(火災)가 수재(水災)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능침(陵寢)에 화재가 있으면 망곡(望哭)하고 변복(變服)하는 예(禮)가 있는데, 지금 수재라는 이유로 유독 변복의 절차가 없음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이 듣건대, 옛날 송나라 진종(眞宗) 때에 영왕궁(英王宮)에 불이 나서 전전(前殿)까지 미치자, ‘천재(天災)가 아니니 옥(獄)을 설치하여 불이 난 일을 논핵하자’고 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에 왕단(王旦)이 홀로 진언하기를, ‘처음 불이 났을 때에 폐하께서 자신을 책망하는 내용으로 천하에 조서를 내렸고 신들도 모두 글을 올려 대죄(待罪)하였더니, 지금 도리어 사람에게 잘못을 돌리신다면 어떻게 신뢰를 보일 수 있겠습니까.
또 불이 비록 흔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하늘의 견책이 아닌 줄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아, 사궁(私宮)의 화재와 선릉(先陵)의 수재는 어느 것이 무겁고 어느 것이 가벼우며, 자신을 책망하는 조서와 재앙을 소홀히 하는 마음은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겠습니까.
옛날의 대신(大臣)은 대죄하는 글을 올렸건만 오늘날의 대신은 이미 대죄하였다가 곧바로 변명하였고, 옛날의 대신은 흔적이 있는 화재를 하늘의 견책으로 돌렸건만 오늘날의 대신은 흔적이 없는 수재를 심상하게 보고 있습니다. 신은 대신을 동요시키려는 데에 뜻을 둔 것이 아니고, 다만 사리에 의거하여 논할 뿐입니다.
신이 듣건대, 길사와 흉사를 섞어 거행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공자께서는 이날 조곡(弔哭)했으면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고 했으니, 이는 진실로 하루 안에 남아 있는 슬픔이 다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곡할 만한 일에 곡하지 않고 노래할 수 없는 일에 노래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선릉의 수재는 곡할 만한 흉사가 아니며, 부묘(祔廟)의 예(禮)는 노래 부를 만한 경사(慶事)가 아닙니까. 노래하고 곡할 시기가 상치(相値)되고 길사와 흉사가 서로 섞였다면 응당 곡을 먼저 하고 노래를 뒤에 하며 흉사를 먼저 치르고 길사를 뒤에 치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조가 길일을 택하는 일을 단지 며칠 늦추어서, 또 부묘하는 경사를 능을 수리하는 흉사보다 먼저 하도록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판서 홍서봉(洪瑞鳳)이 비록 온갖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선왕(先王)의 은혜를 저버리고 전하를 잘못된 거조로 빠뜨린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예조 당상과 낭청(郎廳)을 파직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아, 능상(陵上)의 흙이 무너진 것은 이 얼마나 큰 재변(災變)입니까. 사유(事由)를 고하기 전에는 마땅히 그 형적(形迹)을 보존하여 성상의 하명을 기다려야 하는데, 선공감 제조 신경진(申景禛)이 사토(莎土)를 마음대로 바꾸고 그 형적을 감추었으니, 어떤 마음에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대론(臺論)이 이미 오래되었건만 유음(兪音)은 더욱 아득하니, 이것이 뭇 의심이 뱃속에 가득하지만 감히 말을 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신경진을 국문(鞫問)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신이 듣건대, 14일에 천둥소리가 도성 안으로부터 먼 외방까지 들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마침 그날 밤 능상의 변고가 있었으니, 능관(陵官)이 사실대로 첩보(諜報)한 것이 무슨 죄줄 만한 일이라고 여러 차례 형신(刑訊)하여 죄를 주는 지경에까지 이른단 말입니까. 신은 가만히 염려하건대, 지금 이후로 불행히 장릉(長陵)의 한 줌 흙을 취하는 자가 있더라도 전하께서는 들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홍유일(洪有一)은 죄가 없다고 봅니다.”하였다.
상소문 끝에 또 말하기를, “형조 참의 나만갑(羅萬甲)이 오랫동안 폐기되었다가 출사하여 취해(吹薤)의 태도를 생각지 않고 갑자기 당직(戇直)한 소를 올려 힘껏 시정(時政)의 잘못을 진달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말이 과연 다 적중한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마음은 임금을 사랑했을 뿐이고 나라를 걱정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파척(罷斥)하라는 명이 군정(羣情)의 예상 밖에 나왔으니, 이와 같고서야 언로(言路)를 열어 직간(直諫)을 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
길(佶), 억(億), 건(健) 세 사람은 바로 선왕(先王)의 혈손(血孫)입니다. 섬으로 유배 보낸 지 지금 몇 년이 되었으니, 장성한 자는 이미 늙었고 어린 자는 이미 장년이 되었으나 남자는 장가들지 못하고 여자는 시집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 남자들은 그래도 괜찮겠지만 애닯게도 장년(壯年)이 된 여자들은 끝내 멀리 떨어진 외딴섬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위로 선왕의 지극한 뜻을 본받고 아래로 골육(骨肉)의 운명(殞命)을 불쌍히 여기시어 특명으로 풀어 줌으로써 친친(親親)의 도리를 다하신다면, 덕은 지극히 두터울 것이고 은혜는 지극히 넉넉할 것입니다.
전(前) 정언(正言) 조수익(趙壽益)이 언관(言官)의 직책에 있으면서 각각 생각한 바를 다 아뢰었던 것은 우리 임금의 아름다움을 받들어 따르려는 것이었건만, 공격하는 자가 사방에서 일어나서 첫째는 ‘역적을 옹호했다’ 하고, 둘째는 ‘절의를 세웠다’고 합니다.
신이 일찍이 이 일을 갖고서 구언(求言)하는 날에 감히 진달한 적이 있으니, 한 번 나아가서 직무를 수행하게 되면 반드시 조수익과 같이 죄를 받을 터인데 신이 어찌 헤아리지 않고 가볍게 나아가겠습니까.”하였는데, 상이 비답하기를, “상소한 말은 마땅히 유념하여 채용할 것이다.” 하였다.
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말하기를, “대사간 정온이 서울에 온 지가 오래되었지만 아직 봉록을 받지 않고 있어 혹 어려움과 군색함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쌀과 반찬을 내려서 그 급한 사정을 구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공이 글을 올려 사양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7월에 예조 참판에 제수되자, 물러나기를 청하는 소를 올리고 이어 풍재(風災)의 참상을 논하였다. 그 대략에, “며칠 전의 풍재는 근고(近古)에 없었던 일로, 지붕의 기와가 모두 날리고 아름드리 나무가 뿌리째로 뽑혔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는 쓰러지고 뽑힌 것이 더욱 많았으니, 이것이 무슨 현상이란 말입니까.
견고하게 얽혀 있는 물건조차 모두 이와 같은데, 하물며 논밭의 곡식과 부드러운 목화(木花)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기전(畿甸) 내에 곡식이 이삭이 패어 열매가 맺은 것은 남김없이 떨어졌고, 아직 패지 않은 것은 줄기가 꺾여서 말라 버렸다 하고, 목화는 열매를 맺었건 맺지 않았건 간에 거의 다 마르거나 상했다고 합니다.
과연 이와 같다면 백성은 무엇에 의지하여 먹고 입을 것이며, 국가는 무엇을 믿고서 공부(貢賦)를 독책하겠습니까. 백성이 기한(飢寒)에 시달리고 나라의 재용(財用)이 고갈된다면 눈앞에 닥칠 참담함이 어찌 다만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거나 정전(正殿)에 천둥이 치는 것일 뿐이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하늘의 경계를 깊이 두려워하여 더욱 삼가고 유념하여 대신을 소환하고 간언한 신하를 모두 석방하신다면 비록 송(宋)나라 경공(景公)의 세 가지 선한 말일지라도 어찌 이보다 낫겠습니까.”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하늘에 순응하려는 정성은 단지 전하의 마음속에 달렸을 뿐입니다.
진실로 경(敬)으로써 내면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외면을 바르게 하여 조존(操存)하는 공부가 유독(幽獨)한 가운데 어둡지 않고, 성찰(省察)하는 뜻이 수응(酬應)할 때에 태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항상 밝게 하여 사욕에 가리워짐이 없고, 이 마음을 항상 경계하여 일예(逸豫)가 싹틈이 없게 하신다면, 전하의 마음은 위로 하늘에 통하고 전하의 덕은 위로 하늘과 부합되어 이미 생긴 재앙은 상서로 바뀌고 닥쳐올 변고는 복으로 녹아날 것입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외간(外間)의 시끄럽게 전하는 말에 의하면, 금원(禁苑)에 경치 좋은 용지(龍池)가 있다 하고, 대궐 안에 유연(遊宴)의 조짐이 있다고 합니다. 과연 이런 것이 있다면 이는 실로 전에 없던 재앙(災殃)이자 막대한 변고(變故)일 것이니, 어찌 큰 바람이 나무를 뽑고 지붕을 날리기를 기다린 연후에 재앙이라 하겠습니까.
성왕(成王)은 한 생각의 잘못 때문에 바람과 천둥의 변고를 초래했으니, 오늘날의 풍재가 전하의 한 생각에서 말미암지 않았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경기(京畿)와 강원(江原)의 양전(量田)이 금년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는 비록 부득이한 거조이지만 이처럼 큰 흉년을 만나 이처럼 막중한 일을 거행하다면, 막대한 비용이 들어 시끄러운 일이 많을 것이니, 백성은 무엇을 믿고서 원망하고 흩어지지 않겠습니까. 기전(畿甸)은 근본이 되는 땅이고 관동(關東)은 거칠고 궁벽한 지역입니다.
더욱 마땅히 보살펴서 궁민(窮民)을 보호해야 하거늘, 어찌 굳이 기한에 맞추어 억지로 거행하여 원망과 비방을 초래하려 하십니까.”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충성심을 가상히 여기노라. 몸을 닦고 백성을 보호하는 약석(藥石)으로 삼겠다.” 하였다. 양도(兩道)에 양전하는 일은 또한 이로 인해 그만두고 시행하지 않았다.
얼마 있지 않아 특진관(特進官)으로 입시하여 매우 간절하게 치사(致仕)를 청하였다. 상이 온유(溫諭)하기를, “경처럼 충직한 사람이 어찌 조정을 떠날 수 있겠는가. 지금 정경세(鄭經世)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장현광(張顯光)은 매우 늙었으니, 경이 어찌 또 떠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경은 일찍이 이와 같은 참혹한 풍재를 본 적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미처 보지는 못했으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신묘년(1591, 선조24)의 풍재가 있고서 임진년의 변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하였다. 겨울에 부제학으로서 시강(侍講)하였다.
공이 진언하기를, “옛사람이 시를 해석함에 있어 굳이 장구(章句)의 주석(註釋)을 인용하지 않고 뜻으로 비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였다. 《시경》 유녀동거장(有女同車章)을 강론할 때에 말하기를, “유녀동거는 남녀가 서로 즐거워하는 지극한 정입니다.
옛말에 ‘현현역색(賢賢易色)’이라 하였으니,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을 어진 이를 좋아하는 마음과 바꾼다면 어진 이를 좋아함이 진실될 것입니다.” 하였고, 《시경》 탁혜장(籜兮章)에 이르러서는 “나무가 말라 떨어지려 할 때 바람이 불어오면 그 떨어짐이 쉬울 것이고, 나라가 망하려 할 때 또 좋지 못한 정사(政事)가 있으면 그것이 어찌 망하기를 재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고, 다른 장에서도 모두 비유를 끌어 와서 깊이 잠간(箴諫)하는 뜻을 보이니, 상이 재삼 좋다고 칭찬하였다.
진강이 끝나고 공이 또 진달하기를, “시사(時事)가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상황이 다급해지면 지존께서는 어느 곳으로 피하시겠습니까. 오직 사직과 함께 죽으려는 마음을 가진 연후에야 나라가 보존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 14) 2월에 청(淸)나라 사신이 노하여 돌아가니, 조야(朝野)의 인심이 바야흐로 흉흉하였다. 공이 옥당에 있으면서 차자(箚子)를 올려 조목별로 논한 것이 모두 세 가지였다. 첫째는, “‘쇠란(衰亂)을 흥기시키고 난리를 다스리는 군주는 영무(英武)한 이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이강(李綱)의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아직도 소선(素膳)을 행하시어 한갓 아녀자의 일을 본받고 계시니, 쇠란을 흥기시키고 난리를 다스리는 영무함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때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승하하여 산릉(山陵)의 일이 겨우 끝나 공이 깊이 성체(聖體)를 위하여 염려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둘째는, “절개를 굳게 지키고 의리를 위해 죽는 선비는 임금의 뜻을 거스르며 직간(直諫)하는 사람 중에 구해야 함은 불변의 정론(正論)입니다. 전례(典禮)할 때에 그 일에 관해 언급한 신하들이 어찌 임금의 뜻을 거스르며 직간하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무리들은 급히 감별하여 서용(敍用)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셋째는, “아문(衙門)의 군관(軍官)을 기르는 것과 포수(炮手)와 살수(鎩手)를 훈련시키는 일은 정히 급할 때의 소용이 될 것이고, 정예병을 뽑아 적을 대적하는 일은 늦추어서는 안 될 것이니, 의주(義州)에 ‘효사수성과(效死守城科)’를 설치한다면 또한 군대의 사기를 장대하게 하는 데 일조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것은 곧 상소의 대략적인 내용이지만, 그 나머지 ‘자신을 허물하는 교서를 내려라’, ‘군율을 엄하게 하라’, ‘천험(天險)에 웅거하라’, ‘제장(諸將)을 독려하라.’는 등의 계책이 수천 글자나 되었으니, 아뢰는 말마다 합당했으나 당시의 여론이 오활(迂闊)하다고 여겨 채용하지 않았다.
이해 12월에 공이 이조 참판으로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산성이 포위된 가운데 차자를 올린 것이 네 번이었다. 차자의 대요(大要)는 ‘군신과 부자가 죽을 각오로 결전을 치러야 한다’는 것으로, 굽히지 않는 주장을 견지하여 당사자(當事者)의 의논을 크게 거슬렀다.
24일에 공은 적(敵)이 척화(斥和)를 주장한 신하를 내주기를 요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을 먼저 보내 달라고 청하니, 상이 척연(惕然)하여 중지하도록 명하였다. 정축년(1637) 1월 27일에 당사자가 국서를 갖고 적의 진영에 들어갔으나 국서의 내용이 비밀에 부쳐져 세간에서는 알 수가 없었다.
공이 통분하며 말하기를, “임금의 욕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하가 감히 죽음을 아끼겠는가.” 하고, 새벽에 일어나 통곡한 다음 이불과 베개를 정돈하고 누운 채 패도(佩刀)를 뽑아 자신의 배를 찔렀다. 시자(侍者)가 이불을 걷어 보니, 칼이 뱃속 깊이 박혀 있었다.
놀라 부르짖으며 칼을 뽑아내자 선혈이 거꾸로 솟았고, 숨을 헐떡이다 숨이 끊어진 지 한참 후, 평소에 알던 대신들이 모두 달려와서 구원하였다. 상이 소식을 듣고 측은히 여겨 내의(內醫)를 보내 구제하였고, 또 하교하여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하여금 있는 힘껏 의약(醫藥)을 제공하도록 하였다.
그때 공의 상처를 살펴 본 어의가 말하기를, “지금은 비록 천행으로 회생하였지만 뒷날 반드시 혈옹(血癰)을 이루어 구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더니, 공이 세상을 떠날 때 과연 그러하였다. 공이 병 때문에 수가(隨駕)하지 못하자, 곧 사람을 시켜 붓을 잡게 하고 한 통의 차자를 입으로 불러 변란에 대처하는 방도를 진술하였는데, 의리를 위주로 하였고 이해(利害)를 섞어 말하지 않았다.
이때 공은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기력이 한 오라기 터럭 같았지만 그래도 덕으로써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은 급급하여 오히려 우리 임금의 거조(擧措)가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없을까 두려워하여 곧 피를 뿌리는 간절한 글을 올렸으니, 충성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월에 공이 편여(箯輿)에 누워 남쪽으로 돌아왔으나 집에 거처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내가 남한산성에서 죽어 국은(國恩)에 보답하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스스로 처자의 봉양을 편안히 받겠는가.” 하고, 드디어 덕유산(德裕山) 남쪽 기슭 모리(某里) 골짜기로 들어가 띳집을 짓고 기장 밭을 일구며 세월을 보냈다. 신사년(1641, 인조19) 6월 21일에 졸(卒)하여 모년 모월 모일에 모산(某山)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아, 공은 주현금시(朱絃金矢)의 곧음이 있고 벽립천인(壁立千仞)의 절개가 있었다. 앞의 계축년(1613, 광해군5)에는 간신(奸臣)들이 난동을 부려 권력을 훔치고 법망(法網)을 휘둘러서 공을 보궁(保宮)에서 곤액(困阨)을 당하게 하였다. 죄수복을 입히고 형틀을 씌운 것이 반 년 가까이나 되었고, 마침내 풍어(風魚)와 장독(瘴毒)이 가득한 제주도로 귀양 보냈으니, 죽을 길은 아홉이고 살길은 겨우 하나뿐이었지만 공의 곧음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뒤의 병자년(1636, 인조14)에는 철갑을 두른 기마병 수십만이 고립된 성 아래로 육박해 왔으나 팔도의 근왕병(勤王兵)은 혹은 패하고 혹은 달아나서 밖으로 개미 한 마리의 원군(援軍)도 없었다. 그러나 공의 절개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곧음과 이러한 절개는 양성한 뿌리가 있고 흘러나오는 근원이 있었으니, 공자가 이른바 “삼군(三軍)의 장수는 빼앗을 수 있으나 필부는 뜻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으며, 맹자가 말한바 ‘부귀로도 음란하게 할 수 없고 위무(威武)로도 꺾을 수 없는 대장부’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일개 직신(直臣)으로 공(公)을 개괄(槪括)하고 일개 절사(節士)로써만 공을 드러낸다면 이는 천장부(賤丈夫)의 식견이 아니겠는가. 공의 학문은 가정에서 감화를 받은 것이 얕지 않았지만 약관의 나이에 조월천(趙月川)과 정한강(鄭寒岡)의 문하에 두루 노닐면서 퇴도(退陶) 이 선생(李先生)의 서업(緖業)을 듣고는 기뻐하여 사숙(私淑)한 것이 또한 많았다.
그러나 독실하게 실천한 공부는 모두 자득(自得)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평생토록 ‘직방대(直方大)’ 삼자(三字)를 일신(一身)의 부절(符節)로 삼았다. 본원(本源)을 경계하고 두려워한 것은 《심경(心經)》에 근본한 것이고, 의리에 젖어든 것은 송나라 제유(諸儒)의 글에 근본한 것이며, 《성리대전(性理大全)》으로 말하면 가장 일찍이 힘을 쏟은 것이다.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고 닭이 울 때 일어나서 세수하고 빗질하며 혼정신성(昏定晨省)하는 일 외에는 털끝만큼의 생각도 밖으로 내달림이 없었고, 책상 앞에 바르게 앉아 있을 뿐 종일토록 비뚤게 서거나 기대어 앉지 않았다.
일찍이 선배들의 인품이 같지 않음을 논하면서, “사람의 성품은 두 가지가 있으니, 강(剛)과 유(柔)일 뿐이다. 그러나 강은 양(陽)에 속하고 유는 음(陰)에 속하므로, 음의 악행은 안에 감추어져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양의 과실은 밖에 드러나서 사람들이 모두 보게 되니, 학자는 강유(剛柔)의 바름을 얻지 못하기보다는 차라리 강(剛)에 치우치는 잘못이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역(易)에서 양강(陽剛)한 군자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학자는 응당 ‘마음씀은 세밀하게 하되 담력은 크게 가지도록 하는 것’으로 일신(一身)의 입각(立脚)하는 터전을 삼아야 한다. ‘마음씀은 세밀하게 한다’는 것은 항상 경외심(敬畏心)을 두는 것을 말하니, 경외하는 마음을 두면 절로 그릇되고 편벽된 마음이 싹트지 않을 것이고, 그릇되고 편벽된 마음이 싹트지 않으면 항상 태연히 위축되지 않아 담력이 이로 인해 커지므로, 어떤 일을 당해도 여유롭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담력이 크지 않은 사람은 이와 반대가 되어 비록 노예들과 말하더라도 또한 굴복할 것이다. 사마씨(司馬氏)가 ‘평생에 남을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이 없었다’는 것은 담력이 컸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공이 뒷날 수용(受用)한 것은 대부분 이 절조(節操)였다 할 것이다.
공의 사람됨은 광명준위(光明俊偉)하고 표리가 한결같았다. 남과 함께할 때에는 신실(信實)하고 화락(和樂)하여 규각(圭角)을 드러내거나 경계(境界)를 짓거나 모나게 과격한 일을 하지 않아 온통 ‘요순(堯舜)도 보통 사람과 똑같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고, 조정에 서서 시비를 다툴 때에는 거리낌 없이 바른말을 하여 태산교악(泰山喬嶽)처럼 우뚝하였으니, 비록 스스로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이라고 여기는 자라도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또 평소에 항상 하는 말은 오직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에 관한 것일 뿐이고, 심오한 이치와 은미한 말은 가볍게 말하려 하지 않았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공을 보는 사람은 모두 독실한 진유(眞儒)임을 알지 못했다. 구중설(求中說), 덕변록(德辨錄), 원조자경잠(元朝自警箴) 같은 글은 곧 공이 중년과 만년에 저술한 것이다. 원조자경잠은 다음과 같다.
어리석은 나의 인생이여 / 余生之惷
기질에 얽매이고 외물에 골몰했네 / 氣拘物汨
자신의 몸을 단속하지 못하여 / 儳焉厥躬
하루도 편안히 지내지 못했네 / 如不終日
근본을 이미 잃었는지라 / 本旣失矣
어디를 간들 막히지 않으리 / 何往不窒
어버이를 섬기매 정성이 없고 / 事親不誠
임금을 섬기매 의리가 없으니 / 事君無義
자신도 무시하고 남도 무시하여 / 自侮人侮
옷을 걸친 소와 말에 불과할 뿐 / 牛已馬已
나이가 오히려 어릴 때라 한다면 / 齒之尙少
혹시 생각지 못할 수 있겠지만 / 容或不思
내 나이 벌써 쉰 살이 되었으니 / 今焉五十
노쇠하기 시작하는 때가 아닌가 / 始衰之時
공자께서는 천명을 알았고 / 仲尼知命
백옥은 잘못됨을 알았으니 / 伯玉知非
내 비록 하품의 인물이지만 / 余雖下品
또한 하늘의 성품을 받았지 / 亦受天畀
이미 이러한 잘못 알았다면 / 旣已知之
어찌 이를 돌아보지 않으랴 / 胡不顧諟
이를 돌아보면 어떻게 할까 / 顧諟伊何
말하자면 경 공부일 뿐이네 / 曰敬而已
의관은 반드시 단정히 하고 / 衣冠必整
거처는 반드시 공손히 하며 / 居處必恭
행동은 반드시 독실히 하고 / 行必篤實
말은 반드시 미덥고 충실하며 / 言必信忠
성을 막듯이 욕심을 막아 내고 / 防慾如城
비로 쓸듯이 분노를 없애야지 / 除忿如篲
옛 훈계에 마음을 침잠하여 / 潛心古訓
상제를 대하듯이 해야 하리 / 對越上帝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에는 / 未發之前
그때의 기상을 찾을 것이고 / 求其氣象
희로애락이 발하고 난 뒤에는 / 旣發之後
사특함과 그릇됨을 경계해야지 / 戒其邪枉
동시와 정시를 서로 길러 주고 / 動靜交養
내면과 외면을 함께 다잡으면 / 內外夾持
신령한 마음이 맑고 깨끗해져 / 靈臺澄澈
방촌의 마음이 빛나고 빛나리 / 方寸光輝
진실로 이처럼 할 수 있어야 / 允若乎是
이를 두고 사람이라 말하리 / 是曰人而
이렇게 하면 환난을 만날지라도 / 以之患難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을 테고 / 不失素履
이렇게 하면 안락에 처하더라도 / 以之安樂
교만과 방자함에 이르지 않으리 / 不至驕恣
걸음을 내디딤은 늦었을지라도 / 立脚雖晩
허물을 고침이 귀한 법이라네 / 改過爲貴
성현 또한 사람일 따름이니 / 聖賢亦人
행하기만 하면 성인이 되리 / 爲之則是
봄철은 한 해의 첫머리이고 / 春惟歲首
날짜는 바로 정월 초하루라 / 日乃元始
이렇게 경계하는 글을 써서 / 書玆警詞
죽을 때까지 가슴에 간직하리 / 服之至死
여기에서 공의 일신(日新)한 덕과 견도(見道)의 명확함을 볼 수 있다. 제주도에 있는 10년 동안 경사(經史)와 백가(百家)의 글을 끊임없이 읽어 밤을 지새기까지 하였다. 《주역》은 날마다 한 괘(卦)를 외우는 것으로 상례(常例)를 삼았고, 문장은 맹자와 한유(韓愈)의 글을 가장 좋아하더니, 만년에는 구양수(歐陽脩)를 좋아하였다.
무릇 문장을 지을 때에는 구상하지 않는 듯하나 잠시 사이에 수천 글자를 이루어 내며 이치가 넉넉하고 말이 통달하니, 문장을 잘라 와서 글을 엮어 내는 자로서는 감히 그 깊이를 엿볼 수가 없었다. 효도와 우애는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었다.
나이 10세에 참판공을 여막에서 모시면서 집전(執奠)하고 배헌(拜獻)하기를 한결같이 어른처럼 하였고, 또 대상(大祥)을 마치도록 육미(肉味)를 끊은 것도 한결같이 참판공처럼 하였다. 참판공은 제사 지낼 때에 비록 혹독한 추위라도 반드시 목욕하여 정결히 하였다.
공은 곧 아이로서 감히 어른의 욕탕(浴湯)을 함께 쓸 수 없기 때문에 찬 우물에서 목욕하였는데, 결국 이로 인해 배 아래에 덩어리가 맺히는 병이 생겨서 평생의 근심이 되었으나 또한 부모로 하여금 알게 하지 않았다. 모부인이 평소에 설사를 앓은 지가 몇 해가 되었는데, 공은 반드시 설사를 맛보아서 심할지 멈출지를 점쳤다.
돌아가시던 해에 또 설사가 있었는데, 공이 맛본 뒤 울며 말하기를, “맛이 예전과 다르구나.” 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가 62세였으나 묘소 아래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마치면서 맛있는 채소도 입에 대지 않았고, 최질(衰絰)을 잠시도 푼 적이 없었고, 아침저녁의 배묘(拜墓)도 풍우(風雨)와 한서(寒暑) 때문에 그만두지 않았으나, 상기가 끝나도록 또한 몸이 훼상(毁傷)됨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이 사람은 비록 신명이 부지(扶持)하기도 하였지만 타고난 강한 기운도 참으로 보통 사람과 다르구나.” 하였다.
백형(伯兄)을 공손히 섬기고 동생을 우애로 보살폈다. 대개 공의 도는 효성이 극진했기 때문에 충성으로 옮겨 갔고, 충성이 극진했기 때문에 절의가 이에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절의는 곧 변란을 만났기 때문에 드러난 것이니, 어찌 공이 원했던 바이겠는가.
공이 인묘(仁廟)에 지우(知遇)를 받은 것은 세상에 드문 일이라 할 만하지만 그 도가 세상에 크게 시행되지 못하고 끝내 위난(危難)의 때를 만나 단지 의열(義烈)로만 세상에 이름이 났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공의 배위(配位)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니,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다. 아들 셋을 낳았는데, 장남 창시(昌詩)는 공조 정랑으로 공의 상을 겨우 치른 뒤 병으로 죽었고, 창훈(昌訓)과 창모(昌謨)는 모두 재행(才行)이 있었으나 연이어 일찍 죽었다. 측실의 아들 창근(昌謹)은 사과(司果)이다. 창시의 아들 기수(岐壽)가 공의 제사를 받든다. 창훈의 아들은 기헌(岐憲)이고, 창모의 아들은 기윤(岐胤)이다.
임진년(1652, 효종3) 겨울에 연신(筵臣)이 건의하기를, “정온이 올린 갑인봉사(甲寅封事)는 일월과 함께 빛을 다툴 만하니, 마땅히 벼슬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서 국가에서 절의를 포양(褒揚)하는 도를 빛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고 그 일을 유사에게 내려 보내서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이미 벼슬을 추증했으므로, 시호를 내리지 않을 수 없기에 지금 공의 가장(家狀)을 살펴서 그 거가(居家), 입조(立朝), 출처(出處)의 시종과 대절(大節) 중에 상고할 수 있고 속일 수 없는 것을 골라 감히 유사에게 고하여 이름을 대신할 시호를 청한다.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조경(趙絅)은 삼가 쓰다. <끝>
[註解]
[주01] 온정(溫凊)의 일 : 자식이 부모에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는 일을 말한다. 《禮記 曲禮上》
[주02] 포속(布粟)의 민요 :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지 못함을 기롱한 민요이다.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모반을 일으킨 회남왕(淮南王) 유
장(劉長)을 촉군(蜀郡)으로 유배하여 죽게 하자, “한 자의 베로도 함께 옷을 지을 수 있고 한 말의 곡식으로도 함께 밥을 먹을 수 있
거늘, 형제 두 사람이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구나.[一尺布 尙可縫 一斗粟 尙可舂 兄弟二人 不能相容]”라는 민요(民謠)가 생겼다
고 한다. 《史記 卷118 淮南列傳》
[주03] 제왕(濟王) 횡(竑)의 일 : 송나라 영종(寧宗)이 제왕 횡을 황자(皇子)로 삼아 제국공(濟國公)에 봉했는데, 승상 사미원(史彌遠)이
균(盷)을 왕으로 추대하고 횡을 예천관사(醴泉觀使)로 내보냈다. 뒤에 반임(潘壬)이 횡을 추대하여 황포(黃袍)를 입히니, 횡이 처
음에는 따르지 않다가 ‘태후를 다치게 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고 군자고(軍資庫)의 재물을 풀어 군사를 격려하였다.
그 후 횡이 모의가 성공하지 못할 줄 알고 주병(州兵)을 거느려서 그들을 토벌하였지만, 결국 사미원이 보낸 진천석(秦天錫)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宋史 卷246 鎭王竤列傳》
[주04] 대순(大舜)의 …… 처사 : 상(象)은 순(舜) 임금의 이복동생이다. 평소에 순을 죽이려 하였으나 순은 너그럽게 대하였고 나중에 유
비(有庳) 땅에 봉(封)해 주었다. 《孟子 萬章上》
[주05] 정미(廷美) : 송(宋)나라 태종의 아우이다. 무고로 인해 방주(房州)에 안치되었다가 죽음을 당했다. 《宋史 卷244 魏王廷美列傳》
[주06] 원좌(元佐) : 송나라 태종의 맏아들이다. 정미가 부릉(涪陵)으로 귀양 갈 때 홀로 구원하였고, 정미가 죽자 마침내 미치광이처럼 지
냈다. 죽은 뒤에 진종(眞宗)이 한왕(漢王)으로 봉하였다. 《宋史 卷245 漢王元佐列傳》
[주07] 관숙(管叔), 채숙(蔡叔) :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두 아우이다. 무왕이 죽고 성왕(成王)이 어려서 주공(周公)이 섭정하자, 관숙
과 채숙이 주공을 모함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뒤에 주(紂)의 아들 무경(武庚)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史記 卷35 管蔡
世家》
[주08] 여태후(呂太后) :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황후(皇后)이다. 그의 아들 혜제(惠帝)가 제위(帝位)에 오르자, 혜제의 이복동생
인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독살하고, 그의 생모 척부인(戚夫人)의 수족을 자르는 등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史記 卷9 呂太后本
紀》
[주09] 무측천(武則天) :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이다. 태종(太宗)의 재인(才人)에서 시작하여 고종(高宗)의 정궁(正宮)이 되었
고, 국정(國政)에 관여하여 중종(中宗)을 폐위하고 예종(睿宗)을 앉혔다. 귀척 대신을 무자비하게 죽였을 뿐 아니라, 예종을 폐위
한 다음 국호(國號)를 주(周)로 바꾸는 등 많은 악행을 자행하였다. 《新唐書 卷4 則天順聖武皇后本紀》
[주10] 비옥(緋玉)을 …… 반열 : 비옥은 비단옷과 옥관자(玉貫子)로, 당상관(堂上官)의 관복을 말하고, 금대(金帶)는 2품 이상의 관복에
두르는 띠를 말한다.
[주11] 초(楚)나라 …… 때 : 섭공(葉公)은 초나라 섭현(葉縣)의 현령(縣令)을 말한다. 이와 관련된 고사는 자세하지 않다.
[주12] 광해군 …… 사건 : 폐세자 이지(李祬)가 위리안치된 상황에서 땅굴을 70여 척이나 파 울타리 밖으로 통로를 낸 뒤에 밤중에 빠져
나가다가 나졸에게 붙잡힌 사건을 말한다. 《仁祖實錄 1年 5月 22日》
[주13] 취해(吹薤) : 지나치게 경계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부혁(傅弈)이 한왕(漢王) 양(諒)에게 아뢴 말 가운데, “끓는
국에 덴 자는 냉채를 불어 마시고, 화살에 상한 새는 굽은 나무를 보고도 놀란다.[懲沸羹者吹冷薤 傷弓之鳥驚曲木]”는 말이 있
다. 《新唐書 卷107 傅弈列傳》
[주14] 송(宋)나라 …… 말 : 춘추 시대 송나라 경공(景公) 때 형혹성(熒惑星)이 출현하여 송나라 분야인 심성(心星)을 침범하는 변고가
있자 경공이 몹시 우려하였다. 이에 사성(司星) 자위(子韋)가 말하기를 “재상에게 옮길 수 있다.” 하자, “재상은 나의 팔 다리이
다.” 하고, “백성에게 옮길 수 있다.” 하자, “임금은 백성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고, “해[歲]에 옮길 수 있다.” 하자, “흉년이 들
어 백성이 곤궁하면 내가 누구를 위하여 임금이 되겠는가?” 하였다.
자위가 말하기를, “임금께서 임금다운 세 가지 말을 하였으니, 형혹성이 마땅히 옮겨 갈 것이다.” 하였다. 이에 살펴보니, 과연 삼도
(三度)를 옮겨 갔다고 한다. 《史記 卷38 宋微子世家》
[주15] 성왕(成王)은 …… 초래했으니 : 주(周)나라 성왕이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의 유언비어를 듣고 주공(周公)을 의심하자, 그 해 가
을에 천둥 번개가 치고 바람이 불어 벼가 모두 쓰러지고 큰 나무까지 뽑히는 변고가 발생하였다. 《書經 金縢》
[주16] 이강(李綱) : 송나라 소무(邵武) 사람으로, 금나라가 침입해 왔을 때 주전(主戰)을 주장하다가 귀양 갔고, 고종이 남도(南渡)한 뒤
재상으로 기용하자 국력의 회복을 도모하기에 힘을 다했다. 《宋史 卷358 李綱列傳》
[주17] 주현금시(朱絃金矢) : 주현은 굳세고[勁] 맑은 소리가 나는 현악기이고, 금시는 강(剛)한 쇠와 곧은 화살이다.
[주18] 벽립천인(壁立千仞) : 암벽이 천 길이나 높이 솟은 것을 이르는 말로, 선비의 드높은 기상과 성대한 기운을 비유한다.
[주19] 직방대(直方大) : 곧고 방정하고 위대하다는 말이다. 《주역》 〈곤괘(坤卦) 육이(六二)〉에 “육이는 곧고 방정하고 위대하다. 익히
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六二 直方大 不習 无不利]” 하였다.
[주20] 사마씨(司馬氏) : 송나라 때의 학자이며 명상(名相)인 사마광(司馬光)을 말한다. 사마광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남보다 나은 것
이 없거니와 다만 평소 행한 바가 일찍이 남을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은 없다.[司馬溫公 嘗言吾無過人者 但平生所爲 未嘗有不
可對人言者耳]” 하였다. 《心經附註 卷1》
[주21] 요순(堯舜)도 …… 똑같다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저자가 말하기를 ‘왕이 사람을 시켜 부자를 엿보게 하시니, 과연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습니까?’ 하자, 맹자가 말하기를 ‘어찌 다른 사람과 다르리오? 요순도 다른 사람과 똑같다.’ 하였다.
[儲子曰 使人瞷夫子 果有以異於人乎 孟子曰 何以異於人哉 堯舜 與人同耳]” 하였다
.[주22] 자신의 …… 못했네 :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하루라도 자신을 어긋나게 함으로써 하루의 편함도 얻지 못할 듯이 하게 하지 않
는다.[君子 不以一日使其躬儳焉 如不終日]” 하였다. 《禮記 表記》
[주23] 공자께서는 천명(天命)을 알았고 : 공자는 마흔 살에 사리(事理)에 의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는 천명(天命)을 알았다고 했다.
《論語 爲政》
[주24] 백옥(伯玉)은 잘못됨을 알았으니 : 백옥은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 거원(遽瑗)의 자이다. 거백옥이 나이 쉰 살에 지난 마흔 아홉
살의 잘못을 알았다고 한다. 《淮南子 原道訓》 <끝>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역)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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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龍洲先生遺稿卷之二十二 / 諡狀
贈吏曹判書桐溪鄭蘊諡狀.
公諱蘊。字輝遠。自號桐溪。姓鄭氏。系出草溪。其上世有諱倍傑。爲麗朝侍中。封光儒侯。四五傳至寶文提學悛。有文章行誼。世稱八溪先生。其後有諱從雅。爲牧使。於公爲高祖。是生玉堅。司圃別提。贈執義。生淑。贈承政院左承旨。生公考諱惟明。進士。贈吏曹參判。三世推恩。用公貴也。參判之學。出於同縣徵士判決事林葛川薰。仁祖朝。以孝旌閭。鄕人爲立祠俎豆之。娶晉州姜謹友之女。隆慶己巳生公。公生而重厚。自爲兒嬉戲。出言不凡。里中父老咸奇之。甫四五歲。能行溫淸之事。初入學。口似吃。然伏讀終日。倍文輒勝曺耦之穎者。及舞象。終日危坐。講讀不輟。淹貫經史。文詞日進。葛川公見公荒山大捷碑長篇曰。他日收功必遠。不但科第而已。年十九。鄕解高等。萬曆丙申。丁參判公憂。毀慼踰制。時倭寇屯南。公奉母夫人避兵湖嶺間。村氓見其欒欒之容。不靳缻粟之分。母夫人以此未嘗有朝夕憂。難已。還鄕卒喪。家甚貧。無以爲養。公至以耕釣孶孶供甘旨。夜則爇薪照字。露肘腋喫菜根。妻子常有飢色。晏如也。乙巳。嶺南多士請五賢從祀。推公拜疏入京。宣廟嘉之。爲設庭試。公居第二名。京師人口相傳其文籍籍。丙午。成進士。戊申。光海嗣位。治臨海獄急。公抵仁弘書略曰。殯殿椎劍之說出於無根。豈可使主上無故戕天顯之親。布粟之謠恐再起於今日也。仁弘不聽。不悅公始此。己酉。除光陵參奉。曾於宣廟末年。有學行被薦故也。辭不就。庚戌秋。登別試第。分隷成均館。明年。除侍講院說書。卽移告還鄕。辛亥冬。由司書拜司諫院正言。是年。昌德宮成。光海移御法宮未幾。惑妖淫瞽史說。便欲還貞陵時御所。公獨啓爭之強。光海大怒。卽下備忘記曰。正言鄭蘊敢以無理不根之言。瀆擾擧動之日。其縱恣無忌憚甚矣。其令補鏡城判官。且不知何人薦如此浮妄之人。生事朝廷。該曹堂上推考。色郞廳先罷後推。公之去京也。沈相喜壽送而執公手曰。公得言矣。國將如何。公之任。事主將臨吏民以禮以恩。是歲北路大侵。鏡尤菜色。公書報方伯。殫施荒政。且爬宿瘼。民獲蘇醒。至甲寅下理。鏡人走人起居曰。於我有德。壬子。光海命策戊申上疏人功。公以掌樂僉正被召。卽陳辭疏略曰。凡紀勳之法。必須輸勞宣力扶顚持危之事。然後無愧於一心。有辭於後世。臣乃以言語文字之末。敢冒正勳之列。雖欲貪戀。奈公議何。不報。公欲連章期於得請。爾瞻揚言曰。鄭某之辭此勳。爲國之不久耶。於是公知無奈何。悶默而退。癸丑夏。無賴賊徐羊甲等被執。遂誣引延興府院君金悌男謀擁立永昌大君。於是辟倪慈殿者煽而媒孼。公鄕大臣頗知其誣。噤不敢吐一言。公一日見爾瞻於衆中責之曰。八歲童子。安知逆謀。聞慈殿廢尙食。拊大君而泣曰。汝死吾亦死。如有不諱。誰執其咎。爾瞻勃然厲聲曰。籍幷大妃而廢之。誰曰不可。公卽望望而去。瞻嗛之次骨。俄而公被劾還鄕。詒書仁弘。極言請罪八歲童子。擧朝忍人也。且懇仁弘出手救大君。仁弘不惟不用公言。反以爲慍。冬除侍講院弼善。與時議大不適。謁告遞。甲寅二月。大君死於圍籬中。江華府使鄭沆。蓋附朝意而殺之也。公以副司直上封事曰。嗚呼。以殿下仁聖之德。不幸遭人倫之變。欲盡其處之之道。而終不得自由。未免假手於麤悍武夫。其爲聖德之累不旣大矣乎。今之論㼁之罪者。一則曰禍本也。二則曰奇貨也。其言固不爲無理。而試以濟王竑之事援而比之。則亦有說焉。濟王初爲皇太子。見嫉於奸臣。退處藩邦未幾。爲賊徒所擁。黃袍加身。約誓已成。雖知其事之不濟。旋有討平之功。而身負惡名則有之矣。以今觀之。當時禍本莫竑若也。兇賊奇貨亦莫如竑也。彌遠陰謀殺之。可謂安社之忠。而時人冤其事。後世甚其殺者何歟。觀夫眞德秀之言曰。三綱五常者。扶持宇宙之棟幹。奠安生民之柱石。人而無此。冠裳而禽犢矣。國而無此。中夏而裔夷矣。其言之痛切如此者。誠以竑之迹雖或云云。而其心本無可疑。故原其情而雪其冤。仍請追封立後。古之君子不計一時之利害。惟論義理之當否。綣綣以倫紀之或紊。君德之或愆。告戒而勸導之者。爲如何哉。今㼁一王子耳。心迹與此懸殊。只出賊招。未嘗有擁立之迹。蒙無知識。亦安有謀逆之心乎。如使德秀之輩立乎本朝。則其不肯請殺也明矣。恭惟殿下深憐童子之無知。仰體先王之遺敎。思所以保護而全安之者。蓋無所不用其極。而百僚盈庭。三司交章。自去年迄今春凡幾何日月。而惻念難遏。兪音終閟。嗚呼。殿下之於㼁。豈不知終不相容也。然而留時引日。愈久愈拒者。豈不以逆賊之子猶有待年之事。況於幼稚之弟。豈合遽施刑章。安置江都。待其年滿。觀其志行之如何。而徐爲之處。亦非晩也。聖意所在。的然可知。而推鞠諸臣。經年入侍。無一言將順其美。三司多官。善爲雷同。無一人愛君以德。其視君德之得失。若越瘠之秦視。噫。殿下之勢可謂孤立而無助矣。尤可痛者。殿下待之以不死。而鄭沆待之以死。朝廷論之以其法。而鄭沆迫之使死。使殿下不能如大舜之處象。而未免漢唐以下人君處置未盡合理之歸焉。噫。殺人者死。國法甚嚴。殺凡人無辜且罔赦。況殺吾君同氣之親乎。臣愚以爲不斬鄭沆。恐殿下無面目立於先王廟庭也。嗚呼。旣往之咎。雖不可諫。將來之美。猶或可追。生不相容者勢也。死有贈典者情也。昔宋太宗之於廷美。旣致之死而旋有封爵恤孤之恩。眞宗之於元佐。只誅首謀而起封於久廢之中。此盛德事也。仁人之於弟也。不藏怒焉。不宿怨焉。況殿下之於㼁。旣無可藏之怒。焉有可宿之怨乎。其死之冤。路人猶悲。況聖上哀痛之懷當復何如。近日玉候之靡寧。臣知其出於哀傷之過也。臣愚以爲宜命有司。追復永昌之號。葬以大君之禮。又下哀痛之敎。使四方臣庶曉然知殿下友愛之本心。則上可以慰先王在天之靈。下可以解萬民視聽之惑。而傳之後世。亦將有辭矣。今日淸明之朝。必無章墍之繳詔。殿下何憚而莫之爲也。抑臣之私憂過慮。又有甚於此者。不得不盡其說焉。善乎宋臣韓琦之言曰。父母慈而子孝。此常事不足道。惟父母不慈。而子不失孝。乃爲可稱。大妃雖或不慈於殿下。殿下安得不盡孝於大妃乎。況㼁已死矣。復何疑間之有哉。誠願繼自今斥絶讒邪之言。杜塞交搆之路。如有奸細之徒敢以不好語及於大妃。卽付有司。論以重律。殿下亦恭爲子職。不廢問安之禮。無怠視膳之誠。務得大妃之懽心。重見母子之如初。則豈不足以掩前失而明新化乎。雖然。爲此有道。遠佞人而已。嗚呼。母子兄弟之間。人豈易言之哉。設有當誅之罪如管,蔡。可廢之惡如呂,武。爲言官者所當先議同僚。次通他司。上告大臣。下詢諸宰。待其論議歸一。然後發於啓箚。乃所以重其事也。頃者鄭造,尹訒,丁好寬等首發廢妃殺弟之議。而不議於同僚。不通於他司。不告於大臣。不詢於諸宰。而竊發於完席之上。遽暴於避嫌之中。曾不若論一守令劾一庶官之猶或持難。此其心不難知矣。蓋自近年以來。倖門一開。勳名大濫。貪功樂禍之徒接迹而起。至以吾君之至親。爲自己富貴之餌。比如逐獸者擠人獨走。冀得先殺之功。噫。爲人臣子而是可忍耶。臣愚以爲殿下欲全母子之恩。亟取此三者。投諸四裔。不與同中國。然後讒說者不得作。而三綱五常昭揭於宇宙矣。臣當大論之發。或在罷散。或以疾病。一未隨參於百僚之後。日者人言罔極。目以護逆。必欲置之死地。臣自念職非言責。堂有老母。與其徒死於讒鋒。曷若一言而死於雷霆之下哉。疏入。光海大憑震電。卽下政院曰。如此兇疏。何承旨捧入乎。勘罷捧疏承旨。於是三司竝論以削奪絶島安置。光海又怒其罰輕。誚責三司峻。於是直請拿鞫。公就獄。禁府例請議諸大臣斷讞。右議政鄭昌衍,元任文忠公李元翼獻議曰。鄭某誠狂妄不知忌諱。夫豈有無君不道之心哉。願恢廓德意。特從寬典焉。沈相喜壽之議亦然。光海答李完平曰。鄭蘊之疏。字字陰兇。非無君不道而何。是時三司館學鵲起。以無將法不兵逆等語章疏相銜。夏六月。光海親鞫。領議政奇自獻啓曰。鄭某之罪。以狂妄非之則可也。而鞫問則不當矣。是日只捧招。招畢還下獄。七月再招。仍命安置大靜。公在圄者凡五閱月。初就獄時有一老嫗當路祝曰。天乎天乎。願使賢人無死於獄。獄卒亦相戒加敬。鄭沆亦送人言曰。沆服公義。招絶不及公。丁好寬見公疏。亦曰。吾不免千古罪人。遂日飮病死。及公出獄。都人聚觀。街巷成群。車爲枳。咸咨齎涕洟。喜公生而悲公謫也。當是時。兒童走卒無不誦公名。婦孺至繙公疏。家傳誦之。公論之在人心。誰能禦之。公到海南。湖南儒生宋興周等上疏極言公忠愛所發。不報。正言吳長,李彥英,姜大遂亦坐言公事。或竄或黜。禮曹請焚公疏於闕門外。又焚公畫像。公居大靜栫棘中。不見天日者十年。安之若命。唯作白雲詞以寓思親意。癸亥。仁祖大王反正。拔擢昏朝時直道見逐者。則公其首也。始以獻納徵。離濟未數日。陞司諫。將命之吏相望於途。自是年除歲遷。以至衣緋帶金。於諫院爲獻納,司諫者一。大司諫者七。於憲府爲大司憲者四。四爲副提學。三爲都承旨。吏曹則參議而參判者三。其他禮,兵,刑三曹參判。漢城左尹,慶尙監司南原府使。或以特恩。或以便養。或用扈從勞也。然公以大夫人甚老故。未嘗居京數月淹。天啓甲子。平安兵使适反。上南幸公山。公以吏曹參議從。丁卯正月西聳。上幸江都。昭顯世子分朝下湖南。公方家居。聞變卽日發奔問行。遇朝士於途。皆言虜騎方橫。雖行必不達行在。公胤子亦固請赴分朝。公叱曰。觀望就便利。非臣子義。時大夫士在散者。率皆便道趨全州。直赴江都。唯公一人。擧朝贊歎。若楚人之見葉公。人心亦以坐牢。於是公上疏。首言和議之非及弘立之罪。末論敵與我國形勢。因劈畫御敵之策。無非實事求是。聞者偉之。上雅重公以直節。禮待公異於群臣。朝之士亦皆靡然慕用公矣。間有堅忮者則不能無也。而公則夷然不屑也。益勵舊操。棘棘亢亢。事無難易。遇則必爭。人所憚爲。勇往不避。其爲司諫也。光海世子跳出事發。公連拄三司按律之論。爲大司諫也。仁城君珙出逆招。合司請罪。公力主全恩。公與副提學洪瑞鳳爭論於上前。副學曰。鄭蘊新從草野來。未知珙蹤迹故如是耳。公曰。設或逆謀已著。閨門之內。以恩掩義可也。上頷之曰。大司諫之言是也。如是者三。明日避嫌略曰。不問義理之當否。形跡之虛實。而一以賊招而已乎。則逆獄之起。殆無虛歲。仁城雖除。豈無仁城。先王之子。噫盡之矣。又曰。倫紀明則宗社安。君德得則宗社安。不然而敗倫失德。則宗社危亡。可立而待也。臣實未知三司所謂爲宗社大計者何謂也。殷鑑不遠。只在廢朝。若使廢朝雖有昏亂之政。而不殺同氣。不廢母妃。則雖以殿下之至仁盛德。不能一朝居此位也。以此觀之。三司之請。適足爲奸人籍口之資。非宗社長遠之計也。以此左於時議。遞職南歸。公始拜都承旨也。其年爲丙寅。上方遭仁獻王后喪。公上疏言違古禮爲私親斷行三年喪不宜。上嘉納之。庚午春。太廟震。公因求言中刑獄失中者。反復累百言。請宥公族之坐遷者老弱。兩司劾以庇逆。論屢日只遞職。秋丁外艱。壬申七月。仁穆王后昇遐。公以禫服赴國葬。哭臨闕門外。翌日還鄕。癸酉春。公以大司憲承召入京。時有誣告獄。公論之切。誣者坐。逮者釋。又論諸宮家於時詘營造勞民。上卽命停。俄拜同知經筵。公上章乞免歸修父墳。上特給傳。且令本道備物禮祭。是年秋。仁政殿震。公在鄕應旨。極言人主大本上。意竱先格君心也。 有藥石書紳之批。明年。又拜大憲。在途移拜知申。蓋時典禮垂定。朝廷慮公當言責則必爭故爾。入政院。卽疏論典禮。備證經史。辭嚴義正。皆議禮諸儒所未嘗發者。物論多之。乙亥夏。穆,裕兩陵有雷雨災。上遣大臣奉審所奏與衆議之異。公以大司諫方在告。上封事曰。嗚呼。兩陵頹虧之變。其果天變之示警耶。抑亦人事之不謹耶。以爲天變也。則兩大臣啓辭若是其明白。非所疑也。以爲人事也。則當初監董之官不謹封築之罪。豈可尋常推考而止哉。雖然。若歸之天變。則猶有仁愛之天示警於人君。而使之恐懼修省。爲殿下玉成之地。此則猶不見絶於天也。若諉之於人事。則變怪尤甚焉。今也不歸之天變。不歸之人事。而一向沓沓。無所歸宿。則豈殿下奉先思孝之道哉。嗚呼。火災與水災何異。陵寢有火災。則有望哭變服之禮。今以水災之故。獨無變節者何也。臣聞昔宋眞宗時。榮王宮災。火延前殿。有言非天災。請置獄劾火事。王朝獨曰。始失火時陛下以罪己詔天下。而臣等皆上章待罪。今反歸咎於人。何以示信。且火雖有迹。寧知非天譴也。噫。私宮之火與先陵之水。孰重孰輕。罪己之詔與忽災之意。孰是孰非。古之大臣有待罪之章。而今之大臣旣已待罪。旋卽爲之辭。古之大臣以有迹之火而歸於天譴。今之大臣以無迹之水而視之尋常。臣非有意於動搖大臣。直據事理而論之耳。臣聞。吉凶不可以相雜。聖人於是日哭則不歌。誠以一日之內餘哀未盡故也。況可哭而不哭。不可歌而歌者乎。先陵之災。非可哭之凶乎。祔廟之禮。非可歌之慶乎。歌哭相値。吉凶相雜。則當先哭而後歌。先凶而後吉。可也。禮曹涓吉。只退數日。又使祔廟之慶先於修陵之凶者。何謂也。判書洪瑞鳳雖自列百端。終爲負先王之恩。而陷殿下於過擧也。臣愚以爲禮曹堂上郞廳不可不罷。噫。陵土之虧損。是何等災異。未告事由之前。當存其迹以待上命可也。繕工提調申景禛。擅改莎土以掩其迹。其心所在。有不可測。臺論已久。而兪音愈邈。此所以群疑滿腹而不敢言者也。臣愚以爲景禛不可不鞫問也。臣聞十四日雷震之聲。內自都城。外至遠方。無不聞之。而適於其夜陵上有變。則陵官之擧實牒報。有何可罪之事。至於屢次刑訊。以爲歸罪之地乎。臣竊恐自此以後。不幸而雖有取長陵一抔之土者。殿下無自而聞之也。臣愚以爲洪有一無可罪也。疏末又曰。刑曹參議羅萬甲。起於久廢之中。不思吹虀之態。遽抗戇直之章。歷陳時政之疵。雖未知其言之果皆適中。而其心則愛君而已。憂國而已。罷斥之命。出於群情之外。如是而可以開言路來直諫乎。佶,億,健三人。乃先王血孫也。流放海島今幾年矣。壯者已衰。幼者已壯。男而未娶。女而未嫁。噫。哿矣其男。哀此年壯之女。其終閉死於鮫人龍戶之鄕乎。殿下仰體先王之至意。俯憐骨肉之殞命。特命放赦。以盡親親之道。德至厚也。恩至渥也。前正言趙壽益身居言責。各盡所懷。蓋欲將順吾君之美也。攻之者四面而起。一則曰護逆。二則曰立節。臣曾以此事冒陳於求言之日矣。一出供職。必與壽益同罪。臣豈不量而輕出哉。上答疏曰。疏辭當留念而採用焉。又下備忘記曰。大司諫鄭蘊來京旣久。趁未受祿。或不無艱窘之理。令該曹特賜米饌以周其急。公上章辭。不許。七月。拜禮曹參判。乃上乞退疏。仍論風災之慘。略曰。頃日風災。近古所無。屋瓦皆飛。拱木拔根。至於宗廟之內社稷之中。顚拔者尤多。此何等影象也。堅重盤錯之物。尙皆如此。況田疇之禾穀。耎脆之木花乎。臣聞畿甸之內。禾穀之秀而實者落盡無餘。未秀者莖節摧折乾枯。木花之實與不實。幾盡凋傷。若果如是。民何所賴而衣食之。國何所恃而責貢賦乎。民而飢寒。國而虛竭。則其爲目前之慘。豈特白虹之貫日。正殿之雷震而已乎。願殿下深畏天警。益加惕念。召還大臣。盡釋言事之臣。雖宋景三言之善。何以加此。又曰。應天之誠。只在殿下方寸之中。誠能敬以直之於內。義以方之於外。操存之功不昧於幽獨之中。省察之意無怠於酬應之際。使此心常明。無私慾之蔽。此心常警。無逸豫之萌。則殿下之心。上與天通。殿下之德。上與天合。已生之災轉而爲祥。將來之變銷而爲福矣。又曰。外間喧傳禁苑有龍池之勝。闕內有游宴之漸。若果有之。此實無前之災。莫大之變也。豈待大風之拔木飄屋。然後謂之災也。成王一念之非。而致風雷之變。則安知今日之風災不由於殿下之一念乎。又曰。臣聞京畿,江原量田。始於今年。此雖不得已之擧。逢茲大無之年。擧此莫重之役。糜費不貲。騷擾多端。民安所恃而不至於怨且散也。畿甸根本之地。關東荒僻之鄕。尤當存恤以保窮民。何必趁期擧贏以速怨謗哉。答批曰。愛君憂國之忠。修身保民之藥石。兩道量田之役。亦因是罷不行。居無何。以特進官入侍。請老甚懇。上溫諭曰。如卿忠直。豈宜去朝。今鄭經世已死。張顯光甚老。卿豈可又去。仍問卿曾見風災之酷如此否。對曰。臣未之見也。人皆言辛卯有風災。壬辰亂作。冬。以副提學侍講。公進曰。古人於詩。不必引章句註釋。以義喩之者多。至講有女同車曰。有女同車。乃男女相悅之至情。古語曰。賢賢易色。以好色之心移於好賢。則好賢誠矣。至籜兮章曰。木枯將落。有風吹之。則其落也易。國將亡。又有政事之不善。豈非促之亡乎。其他章皆有引喩。深得箴諫之義。上稱善再三。講畢。公又進曰。時事甚可慮也。事若急。至尊避之何處。唯以同死社稷爲心。然後國可保矣。丙子二月。敵使怒逸。朝野方洶。公在玉堂。上箚條論凡三。一曰。興衰撥亂之主。非英武不足以當之。李綱之言也。殿下猶行素膳。徒效兒女子事。其可謂興衰撥亂之英乎。時仁烈王后新陟。山陵才畢。公深爲聖躬慮故云然。二曰。伏節死義之士。求之於犯顏中。不易之論也。典禮時言事之臣。庸非犯顏者乎。如此等輩。宜急甄敍。三曰。畜衙門軍官及訓鍊炮鎩者。正爲緩急用。抽精銳當敵不可遲也。於義州設效死科。亦壯軍聲之一助。此卽疏之大略。而其他下罪已敎。嚴軍律。據天險。勵諸將等策數千言。言言中端。而時議以爲迂。不能用。是歲十二月。公以吏曹參判。扈駕入南漢城。圍中上箚者四。大要君臣父子背城借一死。執不撓。大拂當事者議。二十四日。公聞敵求斥和臣。請以身先之。上惕然命止之。丁丑正月二十七日。當事者持書往敵營。書辭祕。世莫得以聞。公憤曰。主辱至此。臣敢愛死。晨起痛哭。正其衾枕而臥。拔佩刀刺其腹。侍者開衾視之則刃沒腹矣。驚號而拔刀。鮮血逬出。氣咯咯絶者良久。朝紳相識者咸來救。上聞而斯惻。遣內醫救藥。又下敎令廣州牧使專意供醫藥。其時御醫之視公創者曰。今雖天幸回生。後必成血癰難救。公之歿果然。公旣病不能從駕出。乃使人執筆。口號一箚以陳處變之道。義理爲主。不雜利害。當是時。公不死而殊。氣如一髮。而尙不忘愛君以德之心。急急然猶恐吾君之擧不得有辭於天下後世。乃上瀝血之章。可不謂忠乎。二月。公臥箯輿而南。不處其家曰。吾不死於南漢以答國恩。何面目自安妻子之奉。遂入德裕山之南麓某里谷。結茅舍易秫田以度朝夕。辛巳六月二十一日卒。某年某月日。葬某山之原。嗚呼。公有朱絃金矢之直。有壁立千仞之節。前之癸丑。群奸內奰。竊太阿而擧文網。阨公于保宮。服囚服關木索半載有幾。竟投之風魚瘴毒之聚。其死九而生堇一也。然不能奪公之直也。後之丙子。浴鐵之騎數十萬。肉薄孤城之下。八路勤王師或衄或遁。外無蟻子之援。然不能撓公之節也。之直之節。其養有根。其出有源。夫子所稱三軍可奪帥也。匹夫不可奪志者非耶。孟軻氏所言富貴不能淫。威武不能屈。大丈夫者非耶。然以一直臣槪公。以一節士颺公。是淺之爲丈夫哉。公之學。耳目擩染於家庭者旣不淺淺。及其弱冠。徧遊趙月川,鄭寒岡之門。聞退陶李先生之緖悅而淑之者亦多。然其踐履篤實之功。則皆自於自得。平生以直方大三字爲一身之符。警惕于本源則本之心經。浸灌乎義理則本之洛建諸老書。於性理大全。着力最早。夜深而寢。鷄鳴而窹。盥櫛定省之外。無毫髮念走外。對案危坐。終日不跛不倚。嘗論先輩人品之不同曰。人性有二。剛與柔尒。剛屬陽。柔屬陰。與其不得剛柔之正。寧失於剛。故易貴乎陽剛君子。又曰。學者當以心小膽大。爲一身立脚之地。涑水氏平生無不可對人言者。以膽大也。故公后日受用處多是一節云。公爲人光明後偉。表襮如一。與人恂恂愷悌。不爲牙角。不爲畦畛。不爲斬截矯激。全有堯舜與人同底意思。至其立朝廷爭是非。謇謇諤諤。屹如喬嶽。雖自謂奮,育不能奪。且所雅言。惟在孝悌忠信中而已。奧理微言。不肯輕說。由是世之見公者。皆不知篤實眞儒也。若求中說。若德辨錄。若元朝自警箴。卽公中晩後所著也。其自警箴曰。余生之憃。氣拘物汩。儳焉厥躬。如不終日。本旣失矣。何往不窒。事親不誠。事君無義。自侮人侮。牛已馬已。齒之尙少。容或不思。今焉五十。始衰之時。仲尼知命。伯玉知非。余雖下品。亦受天畀。旣已知之。胡不顧諟。顧諟伊何。曰敬而已。衣冠必整。居處必恭。行必篤實。言必信忠。防欲如城。除忿如篲。潛心古訓。對越上帝。未發之前。求其氣像。旣發之後。戒其邪枉。動靜交養。內外夾持。靈臺澄澈。方寸光輝。允若乎是。是曰人而。以之患難。不失所履。以之安樂。不至驕恣。立脚雖晩。改過爲貴。聖賢亦人。爲之則是。春惟歲首。日乃元始。書茲警詞。服之至死。於此可見公日新之德而見道之明且確也。居濟十年。經史百家。伊吾不輟。至焚膏繼晷。大易則日誦一卦以爲常。於文章。最喜孟,韓。晩好歐陽。凡爲文辭。渙若不思。頃刻就數千言。理勝辭達。割裂點綴者。不敢窺其際。孝友天植也。年十歲。侍參判公于廬所。執奠拜獻。一如成人。又絶肉以終再朞。一如參判公爲。母夫人勸之肉。不可。參判公於終身之喪。雖隆寒。必沐浴澡潔。公則以兒子不敢同長者浴湯。浴氷井。遂媒疾。塊結腹下。爲平生患。亦不使父母知。母夫人素患泄。積有年。公必嘗泄以驗劇歇。及歿之年又泄。公嘗而泣曰。味與疇昔異。是時公年六十二。廬墓下終三年。菜之美者亦不近口。衰絰未嘗暫釋。朝夕拜墓。不以風雨寒暑或廢。服闋。亦無演門之毀。人以爲夫夫也雖神明所扶持。稟賦之遒。固異夫人云。事伯兄畜其弟。能敬而友。蓋公之道孝之盡。故移於忠。忠之盡。故節義乃著。然節義卽變之遭也。豈公之所願哉。公之受知於仁廟。可謂不世遇。而其道不能大行於世。終値危難之秋。只以義烈鳴。豈非天哉。公配坡平尹氏。封貞夫人。生三子。長曰昌詩。工曹正郞。纔畢公葬而病死。曰昌訓。曰昌謨。咸有才行。相繼早歿。側室子曰昌謹。司果。昌詩有子曰岐壽。奉公祀。昌訓子曰岐憲。昌謨子曰岐胤。前年壬辰冬。筵臣建言鄭某甲寅封事可與日月爭光。今宜贈爵賜諡。以彰國家褒美節義之道。上允之。按公家狀。采居家立朝出處終始之大節可考不可誣者。敢告有司。以請所以易其名者。正憲大夫知中樞府事趙絅。謹狀。<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