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2. 8. 25. 13:30
■ 이인실 묘지명(李仁實墓誌銘)
[시대] 고려
[연대] 1153년(의종7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세로 28.8cm, 가로 36.4cm, 글자크기 0.9cm
[탁본소재지] (한국)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168-6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미상/미상/미상.
[개관]
이인실『李仁實 : 1081년(문종 35)~1153년(의종 7)』의 자는 자허(子處)로 본관은 견주(見州=지금의 경기도 양주), 삼한공신(三韓功臣) 흠률(歆律)의 6세손이다. 아홉 살에 글을 짓고, 20세 이전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으며 26세에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육경(六經)과 사서(史書)에 두루 통달하였는데, 특히 『춘추(春秋)』에 밝았다.
예종(睿宗)이 국자감(國子監)에 7재(七齋)를 설치하자 학유(學諭)를 겸하였으며, 승진하여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니『춘추(春秋)』의 강의가 세상에 행하여졌다.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좌우사간(左右司諫), 중서사인 간의대부(中書舍人 諫議大夫), 어사잡단지대사(御史雜端知臺事), 어사대부(御史大夫) 등을 거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고, 다시 지추밀사 판삼사사(知樞密事 判三司事), 좌복야 참지정사 판형부 서북면행영병마사(左僕射 參知政事 判刑部西北面行營兵馬事)를 거쳐 수사도 문하평장사(守司徒 門下平章事)로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대신하였다.
성균시(成均試)와 과거를 한 차례씩 주재하였는데, 모두 선비를 얻었다는 칭송이 있었다. 1153년(의종 7) 향넌 73세로 집에서 돌아가니, 특진 검교태사 수사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 감수국사주국(特進 檢校太師 守司徒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判吏部事 監修國史 柱國)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정공(文貞公)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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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본문]
故相國李公廟誌幷銘
公姓李諱仁實字子虛本見州人三韓功臣音律六世孫也母曰大夫人金氏本」新羅王之後也九歲屬文未弱冠入成均試二十有六歲登丙科第學通六經」諸史尤善理春秋出補羅州書記有政聲始爲通義府錄事會 睿廟始立學」養賢以品兼學諭訓導諸生有功累遷國子博士兼直史舘有春秋講義行於」世出守交州行寬猛相濟之政百姓畏如神明焉善政升 聞入爲右正言知」制誥言事改授殿中内給事▨左正言歷左右司諫至中書舍人諫議大夫」又歷御史雜端知臺事至御史大夫前後出入臺省數十年間讜言高論多所」史舘有春秋講義行於」世出守交州行寬猛相濟之政百姓畏如神明焉善政升 聞入爲右正言知」制誥言事改授殿中内給事▨左正言歷左右司諫至中書舍人諫議大夫」又歷御史雜端知臺事至御史大夫前後出入臺省數十年間讜言高論多所」發藥 仁廟益思大用擢授同知樞密院事以知樞密事判三司事又遷左僕」射叅知政事判刑部西北面行營兵馬事以守司徒門下平章事代門下侍中」任公判吏部事一年尋託疾致仕▨閑四載至大金貞元元年癸酉十月二十六」日卒於私第風神不減平時焉享年七十三稔 上遣工部郎中庾祿公行吊尉」仍命考功郞中呉日就 勑許祭尊贈特進檢校太師守司徙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監修國史柱國諡曰文貞公越十一月初五日命有」司備鹵部葬送以終之爲輟朝三日公於諫議大夫時掌成均試知樞密院事」時主盟春官皆有得士之稱及捐舘之日如魯國諸儒喪孔子咸歎山頽木毁」助嚴大事以襄之益見公之用心也噫公之祖先皆享高重名而未及知命」而卒公獨位極人臣命盡天年者非隱德在人而何是以君子謂公之子孫必」有達人也銘曰 天生我公 旣明且哲 德兼豐 以垂盛烈 勒石紀」辭 以耀萬世 泰山可移此字不毁」
[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