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의 사자성어(50)>
초지일관(初志一貫)
처음 초(初), 뜻 지(志), ‘초지’라함은 ‘처음 먹은 마음’을 뜻하고, 한 일(一), 꿰뚫 관(貫), ‘일관’이라함은 ‘한결 같이 관철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초지일관 이라함은 “처음 먹은 마음을 끝까지 관철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번 카타르 월드컵 본선에서 대한민국의 축구팀이 보여준 자세가 초지일관의 자세였다. 강팀과 만나도 주눅들지 않고 끝까지 그라운드를 누벼서 소망했던 16강을 쟁취했다. 강호 우르과이와 대결할 때도 대등한 경기를 벌이는 투혼을 발휘했다. 가나에게 전반전에 2:0으로 지고 있는 스코어에서도 후반전에 두 골을 만회하는 등 경기를 포기하지 않고 잘 싸웠다. 포르투갈을 2:1로 꺾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 것도 초지일관하여 16강에 오르고자하는 신념이 철석같았기 때문이다. 한결같은 정신력이 얼마나 큰 힘을 내는 가를 여실히 증명했다. 브라질과의 대전에서도 현격(懸隔)한 실력차이 임에도 경기를 포기하지 않고 선전분투한 것은 한국팀의 정신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국팀에 있어 ‘포기(抛棄)’라는 단어는 ‘김치 한 포기’ 배추 ‘한 포기’하는 단순한 숫자로 여겨졌는 지도 모른다. 지난 주 수요일, 인천공항에 귀국한 선수들의 인터뷰에서도 “16강에 오르려고 시종일관 경기를 포기하지 않고 뛰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선수들의 초지일관의 자세가 철저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무엇이든지 한번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얼마 못가서 그만 두기 일쑤이다. 그래서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생겨 나기도 했다. 마음 먹은 일을 얼마 못가서 그만둔다는 것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목숨을 걸고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인물들은 적지 않다. 고려말의 정몽주 선생이 그러했고, 세조의 찬탈에 항거하여 단종의 복위를 시도했던 사육신이 그러했다. 성삼문등 사육신은 세조의 혹독한 고문에도 세조를 ‘나으리’라고 호칭하면서 뜻을 굽히지 않는 절개를 보였다. 처형을 앞두고 읊은 성삼문의 시조가 심금(心琴)을 울린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정하리라.
[내가 죽은 뒤에 무엇이 되느냐하면,
봉래산에서도 제일 높은 봉우리의 큰 소나무가 되어,
흰 눈이 온 천지를 덮을 때 홀로 푸르리라.]
중국에서 뜻을 굽히지 않았던 인물로 예양(豫讓)을 꼽을 수 있다. 예양은 춘추전국시대에 진나라 사람이었다. 자기가 섬기던 군주가 조나라 왕에게 죽고 멸망당하자, 예양은 조나라 왕(양자:襄子)을 살해해서 원수를 갚고자 결심한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고 일부러 죄인이 되어 남성의 성기를 거세하는 형벌인 궁형을 받고 조나라의 궁궐 안으로 들어가 변소의 벽을 바르고 있었다. 가슴속에 단도를 숨긴 채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화장실로 들어오는 양자를 살해하려고 했으나 발각되고 말았다.
양자는 예양이 주군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 했다는 말을 듣고 그 행위를 의롭게 여겨 풀어주었다.
그러나 예양은 다시 복수하기로 결심하고, 이번에는 몸에 칠을 하고 나병환자행세를 하고 숯을 먹고 벙어리가 되어 그 모습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다리 밑에 몸을 숨긴 채 양자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날 양자가 다리를 건너려고 했을 때 갑자기 말이 놀라자 조사하니 예양이 다리 밑에 숨어있음이 발견되었다.
거듭해서 조나라 왕을 살해하려는 예양을 용서할 수가 없어 처형하기로 했다.
예양은 처형당하기 앞서 말했다.
“나는 물론 죄인으로서 죽겠소. 그러나 원수인 조나라 왕의 의복을 빌려서 그 의복을 찔러서 원수를 갚았다는 마음을 다하고 싶소.”
양자는 예양의 소원대로 자신이 입은 옷을 벗어 주었다. 그러자 예양이 칼을 뽑아서 세 번 그 옷을 찌르고 나서 말했다.
“이것으로 나는 죽어서 지하에서 주군에게 보고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난후,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서 죽었다.
죽을 때 까지 초지(初志)를 굽히지 않았던 예양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라는 책에 나오는 역사적 기록이다.
논어에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말이 나온다. 공자는 일생동안 충(忠)과 서(恕)로서 일관 했다. 여기서 충(忠)이라는 개념은 ‘자기 자신을 다하는 진기(盡己)’를 의미하며, 서(恕)라는 개념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공자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타인에게 시키지 말라”라고 강조했다. 이를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慾 勿施於人)이라고 한다.
일이관지(一以貫之)나 초지일관(初志一貫)이나 시종일관(始終一貫) 모두 그 뜻이 비슷하다. 한 번 뜻을 세웠으면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이를 밀고 나가야 성공할 수가 있다. 중도에 그만두면 애시당초 시작 아니함만 같지 못하다. 숙종때 김천택(金天澤)님이 시조가 이를 잘 가르쳐 주고 있다.
잘 가노라 닫지 말고 못 가노라 쉬지마라.
부디 긋지 말고 촌음을 아껴 써라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감만 못하니라.
[잘 간다고 달리지 말고 못 간다고 쉬지도 말라.
부디 그치지 말고 짧은 시간이라도 아껴써라.
가다가 중도에서 멈추어 버린다면 애초에 아니 감만도 못하느니라.]
오늘이 12월 13일, 임인년(壬寅年)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토끼띠인 계묘년(癸卯年) 새해가 밝아오고 있다.
누구나 새해를 맞이하면서 크고 작은 소망과 계획을 세우기 마련이다. 계획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중단함이 없이 실천해 나가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도달하기 어려운 거창한 목표보다 실천 가능한 생활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어느덧 <이번 주의 사자성어>도 50회에 이르고 있다. 필자는 사자성어를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 그리고 필자가 실제 살아오면서 겪었던 인생사(人生事)와 연관지어서 풀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대신가족에게 작은 보탬이라도 되기를 바랄 뿐이다. (2022.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