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연가(扶餘戀歌)
좋은 수필(隨筆) /조성호
부여는 나의 첫사랑이다. 내가 학업을 마치고 사회로 나와 1년을 보낸
정이 깃든 곳이다. 엄마와 할머니가 해 주시는 밥만 먹다가 낯선 객지에서
처음 남의 집 생활을 했다. 내가 머물던 집이며
약국이며 길거리 등 추억거리가 즐비한 곳이다.
이곳을 떠나고서도 못잊어 몇 번이나 찾아왔다. 약혼여행 삼아 같은
무렵에 약혼한 친구네와 택시를 대절하여 왔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도 왔다 가서는 ‘부여 변주곡’이란 글을 썼다.
이번에는 처음 부여 갔을 때로부터 한 사십여 년만에 대 가족이 두 대의
차로 갔다. 우리 남매 아이들 때보다는 조금 어린 외손자 둘을 거느린
사위와 딸, 아들과 약혼자, 우리 내외 등이었다. 처음 나 혼자 왔는데,
다음에는 2명이, 다음에는 4명이, 이제는 8명으로 올 때마다 인원이
곱으로 늘었고 부여를 오가는 동안 3대에 걸칠 만큼 세월이 많이 흘렀다.
부여에 오면 당연히 고적 답사로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먼저 들르고 부소산,
낙화암, 고란사쪽을 가야 하는데 공주에서 가다보니 깃발이 가로수처럼
줄선 길이 규암의 ‘백제대전’ 행사장으로 향하도록 되어 있었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이 축제행사의 마지막 날이었다.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고 떠들썩한 행사치고 별 볼일 없고 여기도 사람만
가득 모이도록 너무 홍보를 열심히 하였지 싶다.
나는 백제의 유적지를 보고 신동엽 시인의 시비와 생가,
옮겨온 묘소, 짓기로 한 그의 문학관은 어찌 되었나 둘러볼 참이었는데
이 행사에 너무 시간을 낭비했다.
규암에 새로 올해 백제문화단지에 ‘사비궁’을 비롯한 왕궁을 거창하게
지으며 백제시대 재현이 마무리되었다. 한국전통문화학교, 백제역사문화관,
생활문화마을, 절, 고분들을 만들며 1400년 전 백제시대를 되살린다고 한다.
부여의 백제는 패망한 나라여서 정림사지 5층 석탑 정도만 남아 있지
유적지가 거의 망가졌다. 와당만 발굴되지 그 찬란했던 문화 유산은
모두 파괴되었다. 계백 장군이 끝까지 항전하다 처절하게 전사하듯 저항하는
몸짓이 백제의 정신이다. 후백제를 세우려고
전투하던 유민들의 저항정신을 잘 살려야 한다.
부여는 역사의 땅이다. 문화를 꽃 피웠지만 군사적으로는 패망한 나라다.
부여가 역사의 땅임을 증거한 이가 신동엽 시인이다. 그는 나라는 망했어도
그 정신은 살아 있다고 외친다. 백제의 정신은 동학혁명과 3·1운동,
4·19혁명으로 이어져 내려온다고 믿는다. ‘금강’이 흘러 흘러 1400년 흐르고 있는
역사를 노래하고 진달래 산천을 노래한다. 혁명을
해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외친다.
시인은 대학에서 역사학을 하여 역사의식이 강했다. 그의 이름 앞에는 ‘
민족시인’이란 호칭이 붙는다. 민족의 비극에 민감했고 불의를 못 참았다.
김수영이 지적했던 대로 ‘소월의 민요조에 육사의 절규를 삽입한 것 같은’
시편들이 매력적이다. 서정적인 감각으로 긴 서사시를 이끌고 있다.
부여는 사랑이 넘치는 땅이다. 백제의 서동과 신라의 선화공주가 사랑을
이룬 곳이다. 신동엽 시인도 사랑의 시인이다. 시의 기저에는 짙은 사랑이
깔려 있다. 실제 그의 사랑은 아주 로맨틱하다. 고전적인
사랑이다. 연애편지를 주고 받으며 열매 맺어 결혼을 했다.
그는 비록 우리나이로 마흔 밖에 살지 못했지만 부인 인병선 시인은 남편의
문학정신을 살리는 데 열심이어서 그 사랑은 계속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생가도 살리고, 유택도 능산리로 옮겨오고, 서울에는 ‘금강회관’이란
문화공간을 마련하여 운영하고 있다. ‘신동엽문학관’이 완공되면
두 분의 러브 스토리가 젊은이들에게도 귀감이 될 것이다.
나도 사실은 이런 사랑의 표본을 은연 중에 보여주기 위해 아들과
약혼자를 이리로 오도록 했던 것이다. 곧 결혼할 이들에게 진정한 사랑의
자세를 배우도록 했으면 한다. 타산적이지 않고 득실을 따지지
않고 순수한 사랑만을 위한 결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새로 문을 연 롯데부여리조트에서 점심을 먹었음에도 행사장을
뛰어다닌 아이들은 내가 자랑한 부여 장어를 먹자고 조른다. 우선
수북정에 오르자는 나의 안내로 전망 좋은 정자로 오른다. 내가 여기
약국에서 근무할 때는 매일 이곳을 올랐다. 부소산에서 백마강이 흘러내리고
대백제교가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었다. 팔백여 미터나 되는
큰 다리였는데 이젠 더 크고 튼튼한 다리를 옆에 덧붙여 건설했다.
이 다리가 완공되기 전에는 모든 차량이 배로 건너다니고
사람은 배다리라는 강물 위에 떠 있는 다리로 다녔다.
정자 앞에는 자온대自溫臺가 있는데 지금은 철망으로 막혀 있어 오르기
어렵게 되었다. 이 일대는 배롱나무가 무성하여 한여름에도 분홍꽃이 보기 좋았다.
수북정에서 내려가는 길에 있던 산다방은 없어지고 대신 식당이
들어서 있다. 이 강가에는 장어가 유명했다. 강에서 직접 잡는 전문
어부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모양이다. 둑방에 식당에서 운영하는
장어구이 간이식당이 있어 강물을 내려다 보며 식사를 한다. 일곱살배기
민성이는 장어 한 마리 반인 일인분을 먹고도 더 시킨다.
맛있다면서. 왕궁 놀이터에서 많이 뛴 효과다.
주변에 사십여 년 전의 일을 이야기 해 보았자 알 만한 사람이 없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호젓하게 다시 방문해야겠다.
강 건너 강변 굿뜨레에 대규모 코스모스꽃밭을 만들어 놓아 사진
찍기에 좋다. 분홍, 하양, 검붉은 꽃들이 어울려 사진 배경으로는
그만이다. 전통 축제에 웬 멕시코산 코스모스냐고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 추억 만들기로는 적격이니. 문화재는 못 보였지만 해질녘에
가족사진 만들기만으로도 부여는 사랑스럽다. 부여에 머물 때 즐겨
부르던 이흥렬 작곡의 ‘코스모스를 노래함’을 흥얼거리며 나만의 추억에
젖는다. 이 노래를 가르쳐주던 여고생이던 춘강이는 결혼하여 카나다에
이민 간 지 스무 해도 넘었다. 부여에는
잃어버린 시간이며 잊고 있던 추억거리가 수두룩하다.
충청남도 부여군을 지나는 금강 하류를 일컫는 강.
사자하(四泚河)· 백강(白江)·마강(馬江)이라고도 한다.
그 범위는 정확하지 않지만 청양군 장평면과 부여군 규암면
경계를 따라 흐르는 금강천(錦江川:또는 金剛川)이
금강에 합류하는 지점에서부터 부여군 석성면 위쪽까지를
백마강이라 부른다. 부소산(扶蘇山)을 끼고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심하게 곡류하는 사행하천이다. 부소산의
북쪽 사면을 침식하여 절벽을 이루고 부여읍
남부 일대에 넓은 퇴적사면을 발달시켰다.공격사면인
부소산에는 낙화암이라 하는 높이 약 10m 가량의
침식애(浸蝕崖)가 있으며, 낙화암 상류 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강 가운데 (釣龍臺)라 하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이 적을 쫓아 금강을 건너려
할 때 강물 속에 교룡(蛟龍)이 방해하므로 교룡이
좋아하는 흰 말을 미끼로 조룡대 바위 위에서 잡아올렸다고
하여 강 이름을 백마강, 낚시했던 바위를 조룡대라 했다고 한다.
663년(문무왕 3)에 백제와 나당연합군과 일본의 수군이
격전을 벌였던 백촌강(白村江)의 싸움터가 백마강이라는
설이 있다. 백마강의 남부에는 넓은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으나 하상이 높아 범람이 잦은 홍수 상습지역이다. 따라서
홍수피해를 막고 경지의 효율성을 증대시켜야 하며, 백마강의
자연경관은 백제권의 문화관광자원과 함께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