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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을 향한 행군에 있어 목회자의 위치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하여 한 발 두발씩 전진하기를 40년이 소요되었다. 이때에 행군 대형은 벱궤를 중심으로 사방에 3지파씩 배열되어 움직였는데, 선두 지파는 유다 지파가 중심을 이루었다(민2장). 광야교회 40년의 42번에 걸친 장막 생활은 고난 속에도 말씀(법궤) 중심의 삶을 통해 거듭나는 것을 보여주는 모형이다.
이 지난한 과정 속에서 옛 사람은 죽고, 거듭난 새사람만이 요단강의 창일한 물을 통과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요단강의 도하할 때부터는 행군 대형이 제사장들이 멘 법궤를 앞세우는 것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진리)가 내재되어 있지 않다면 옛 사람인 자아가 두려워서 요단을 건너지 못하는 것을 암시한다.
요단강은 할례의 상징이다. 첫 아담 성분이 죽고 성령으로 다시 부활한 것이다. 거기가 길갈이다. 모세가 베푼 유월절 양식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베푼 유월절 양식을 먹기 시작하는 때이다. 이 때 부터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어야 한다. 가나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동시에 전투 대형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여리고성과 아이성과 가나안 일곱 족속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 전투 대형을 살펴보고자 한다.
<수6:8~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진행하며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
그림으로 표시하면(언약궤 중심으로)...
백성들 =>(후군)무장한 자들 =>언약궤 =>양각나팔가진 7제사장=>(선군)무장한 자들
* 해석
행군 대형은 거듭난 자들의 모임인 교회생활의 모형이다.
-맨 앞장에서 무장한 자들은 선봉장이다.
삶과 신앙이 일치된 자들이다. 대부분은 목회자들일 수가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직분과 상관없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여주는 성도를 말한다. 산제사를 드리는 자들이다.
-양각나팔 가진 일곱 제사장
양각나팔은 예수그리스도가 이루신 십자가의 복음을 말한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대속되어 하나님과 화목된 자들의 삶과 말이 나팔이다. 일곱은 완전수이다.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완전함이란 일곱째 날에 속한 추수꾼들을 말한다. 십자가를 통과하여 주님과 한 영이 된 자들이요, 안식과 평강의 존재가 된 자들이다.
- 후군에 속한 무장한 자들
벱궤를 중심으로 한 행군 대형이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바로 제사장의 뒤를 붙쫓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이다. 수많은 무리의 백성들은 이와 같이 앞서가는 선진들을 보고 따라간다. 그 길은 아무나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육신의 관점에서는 정말 내키지 않는 좁고 협착한 길이 아닌가? 가시밭길이요, 지뢰 밭 같은 곳이다. 그러므로 담대히 앞장서서 가는 자들의 본이 있어야 그나마 간신히 따라갈 수 있는 길이다.
양들은 목자만 따라간다. 거친 사막 가운데서 꼴을 얻고 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몇 시간씩 걸리는 험한 거리를 가야한다. 가다가 지친다고 멈춘다면 낙오하여 죽는다. 그래서 양들은 살기 위해 목자만, 목자만 따라간다. 목자를 따름이 사는 길이요, 아니면 죽음이다. 여기에서 목자의 사명이 크다. 그는 혼자만의 목숨이 아니다. 온 무리의 생명을 책임진 자인 것이다.
주님은 목자장이시다. 목자 중의 참 목자라는 말이며, 진정한 목자의 모범이라는 말이다. 목자는 맨 앞장서서 본을 보이는 자여야 한다. 그래야 양들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주님은 그 본을 보여주셨다.
<벧전2: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히5:8~9>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본)이 되시고
그러므로 목회자는 고난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이어야 한다. 먼저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으로 다룸을 받은 체험이 있어야 한다. 인생을 체휼하신 주님이시기에 고난 가운데 있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 처지를 익히 아셔서 궁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십자가를 모르는 목회자가 어떻게 죄를 알아서 싸우라고 말하겠는가? 십자가는 죽음에서 살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필수 코스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가 아니면 부활도 없다.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된 자만이 주님과 함께 부활한다. 거듭난 자에게 오는 고난은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자신이 지은 부지불식간의 죄 때문이다. 공의의 하나님은 자녀의 죄를 절대로 묵과치 아니하신다. 그래서 징계가 따른다. 만일 죄를 지었는데, 아무 일이 없으면 사생자이다.
다음은 범과한 일이 없음에도 고난이 온다. 애매한 고난이다. 이것은 잠재된 마귀적 속성인 죄성, 악성, 독성을 처리시키기 위해 허락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이다.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고 연단하여 온전함을 이루기 위함이다. 장성한 자란 이러한 고난에 대해 대처하는 능력을 말한다. 다른 말로는 십자가 지는 능력이라고 한다. 인내를 말한다.
앞선 자라면 능히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담대하고 굳센 믿음을 보일 것이다. 그것이 양 앞에서 사는 목자의 자세이다. 바울 사도는 날마다 십자가에 자신을 내주었다. 고난이 끊이지 않는 삶의 연속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렇게 자신을 죽음에 넘기우면서도, 심령의 평강을 결코 잃지 않는 모습을 통해 뒤 따르는 성도들에게 생명을 전이시켰다. 이것을 자신에게는 사망이 역사하나, 양들에게는 생명이 된다고 표현했다.
<고후4:11~12>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만일, 고난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면 그는 목자가 아닌 것이다. 혹은 물질의 어려움 때문에 세상과 타협하여 하나님을 등지는 자들도 목자가 아니다. 거듭난 자는 목자가 아니더라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자이다. 그의 관심사는 이 땅의 어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보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엊그제 형제 한 분으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일년 전, 서머나 교회 故 김00 목사의 사인이 사실은 자살이라는 말이었다(심장마비가 아니고?). 너무도 믿기지 않는 말이라서 그 말을 듣는 내내 한 손으로는 내 볼을 꼬집었다. 이것이 혹시 꿈인지 현실인지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황당스러웠다. 나중에 인터넷을 통해 알아보니까 이미 모두 다 알고 있었던 사실(fact)이였다.
자살의 원인은 몇 가지 있었다. 극심한 공황 장애, 우울증, 부부 갈등...etc.
나는 고인이 된 분에 대해 무엇이라고 폄하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다만, 이글을 쓰는 이유는 진리적 판단에 약간의 도움을 주고 싶어서이다. 이 부분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그 분이 지옥 갔냐? 천국 갔냐?는 등... 그러나 그 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성경적 판단을 못하고 동정심을 곁들어 자살을 미화시키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문제는 그 분이 목회자의 직분을 갖고 살아왔다는 것에 있다. 열매가 그 분의 신앙의 어떠함을 대변한다. 열매는 속일 수가 없다. 심은 대로 맺혀지는 원리 때문이다.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끔 지적하는 말이지만, 그 분의 장황한 설교 속에는 기조가 없다. 시시때때로 갈팡질망이다. 은혜를 말하는 것 같은데, 은혜를 모른다. 가장 큰 모순은 예정론적 사상이다. 그래서 죄와 싸울 수도 없고 싸우지 않아도 천국 갈 자는 가게 되어 있단다.
자신의 성경 해석대로, 자아를 십자가에 내어주는 일에 실패하고 그만, 가롯 유다처럼 스스로 목메어 죽은 자가 되었다. 불같은 고난 속에서 이기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외면한 채, 인생의 무거운 짐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가 목자인가? 뒤 따르는 양들은 무엇을 볼 것인가? 저렇게 기라성 같았던 목사도 자살한다면, 고난 앞에서 누가 이기는 자가 될 것인가? 아주 안 좋은 선례를 남겼다. 혹간 어려움에 처한 자들의 모방심리가 염려된다.
허운석 선교사와 너무도 대조되는 모습이다. 수십 년 죽기까지 충성 봉사한 결과가 암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다 부르심을 받은 그 삶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열매는 증거요 증명이다. 앞서간 모든 믿음의 선진들의 길이 이와 같았다. 압박과 시련과 고통 속에서의 찬양이야말로 아무도 따라 부르지 못하는 거문고 타는 찬양이 아닌가? 그들이 바로 시온산에 우뚝 선 십사만 사천이다.
그런데 예정론적 은혜를 강조하며 성화(거룩해지라는 하나님의 뜻)를 부인하던 한 진보적이며 이단성적인 목회자는 이렇게 잠시잠깐 사이에 막을 내렸다. 그의 화려한 미사여구를 동원한 설교에 많은 사람이 매료되어 쫓아갔지만, 스스로의 십자가도 감당치 못하는 연약한 자였다. 그가 참 목자였던가? (답은 각자가 해보세요...) 참 목자는 아비의 마음을 가진 자이다. 본은 보이며 자신을 본받아 따라오라고 하는 자이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을 높이며 자살한 목사를 우상시하는 무리들을 보면서, 이 시대의 영적인 무지함과 무식함이 보여져서 마음이 아프다. 남을 죽이면 살상이요, 살인죄이다. 그런데 자신이 스스로 죽으면 무죄인가? 아니다. 타살보다 더 죄짐이 무거울 것이다. 생명에 대한 경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우회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과 이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시대에 수많은 교인들은 물론, 아직도 많은 목회자들조차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에 대한 정의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재삼 확인하게 되어 씁쓸하다. 교인들이 생각하는 구원이란 고작해야 죽어서 천국 가는 것으로 오해한다는 것이다. 지금 천국을 자신 안에 모셔 들이지 못한 자가 어찌 육신이 죽는다고 해서 그 영혼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방신관의 일종일 뿐이다.
구원을 모르면, 왜 하나님은 성도에게 고난을 주시는지, 십자가는 무엇을 말하는지, 거룩한 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임마누엘이 무엇인지? 부활도, 재림도, 하나됨의 혼인 잔치도, 왕노릇도 모른다. 그래서 구원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현 주소다. 이름하여 큰 성 바벨론이다. 혼잡한 영으로 가득찬 귀신의 처소이다.
그러나 참된 구원이란 자기 안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위해 간구하라고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의 내용이며 목적이다.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는 임마누엘의 역사가 실현된 자는, 우주가 쪼개져도 평강을 누리며 산다. 이것이 부활생명이다.
이 부활생명이 없는 자는 결정적일 때에 이방인처럼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을 것이다. 자아가 여전히 자신의 주인이기 때문이리라.
첫댓글 샬롬!!! 겹겹히 쌓여진 고귀한 진리여 하늘의 문이 열리고 땅의 문이 열리니 화사한 봄날이 우리를 쉬게 하노니 풍족한 하늘의 양식과 음료를 먹고 마시고 하늘의 즐거움에 춤을 추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