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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담집(西潭集)
| 형태서지 |
| 권수제 |
서담선생문집(원집)(西潭先生文集(原集)) |
| 판심제 |
서담집(西潭集) |
| 간종 |
목판본 |
| 간행년 |
1846년 간행 |
| 권책 |
원집(原集) 4권, 부록(附錄) 상하(上下) 합 2책 |
| 행자 |
10행 20자 |
| 규격 |
22.7×16.7(cm) |
| 어미 |
上下二葉花紋魚尾 |
|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 소장도서번호 |
古3648-文93-49 |
| 총간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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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수제 |
서담선생속집(속집)(西潭先生續集(續集)) |
| 판심제 |
서담선생속집(西潭先生續集) |
| 간종 |
활자본(木活字) |
| 간행년 |
1906년 간행 |
| 권책 |
속집(續集) 3권, 부록(附錄) 합 1책 |
| 행자 |
10행 20자 |
| 규격 |
22.7×18.0(cm) |
| 어미 |
上二葉花紋魚尾 |
|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 소장도서번호 |
古3648-文93-49 |
| 총간집수 |
한국문집총간 속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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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 성명 |
홍위(洪瑋) |
| 생년 |
1559년(명종 14) |
| 몰년 |
1624년(인조 2) |
| 자 |
위부(偉夫) |
| 호 |
서담(西潭) |
| 본관 |
남양(南陽) |
| 특기사항 |
유성룡(柳成龍)의 문인.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장현광(張顯光) 등과 교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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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
기사전거 : 行狀(鄭葵陽 撰), 家狀(洪處貞 撰), 墓碣銘(李埈 撰), 墓誌銘(鄭宗魯 撰), 南陽洪氏文正公派譜 등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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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력 |
| 왕력 |
서기 |
간지 |
연호 |
연령 |
기사 |
| 명종 |
14 |
1559 |
기미 |
嘉靖 |
38 |
1 |
10월 2일, 軍威縣 外良谷里에서 태어나다. |
| 명종 |
19 |
1564 |
갑자 |
嘉靖 |
43 |
6 |
부친에게 수학하다. |
| 선조 |
10 |
1577 |
정축 |
萬曆 |
5 |
19 |
喬桐印氏 印之信의 딸과 혼인하다. |
| 선조 |
12 |
1579 |
기묘 |
萬曆 |
7 |
21 |
2월, 柳成龍의 문인이 되다. |
| 선조 |
14 |
1581 |
신사 |
萬曆 |
9 |
23 |
12월, 장남 洪宗慶이 태어나다. |
| 선조 |
18 |
1585 |
을유 |
萬曆 |
13 |
27 |
12월, 차남 洪善慶이 태어나다. |
| 선조 |
21 |
1588 |
무자 |
萬曆 |
16 |
30 |
생원시에 합격하다. ○ 성균관에서 申之悌, 崔晛 등과 교유하다. |
| 선조 |
22 |
1589 |
기축 |
萬曆 |
17 |
31 |
7월, 삼남 洪重慶이 태어나다. |
| 선조 |
25 |
1592 |
임진 |
萬曆 |
20 |
34 |
4월, 부모를 모시고 태백산으로 피란하다. |
| 선조 |
26 |
1593 |
계사 |
萬曆 |
21 |
35 |
2월, 부친상을 당하다. ○ 9월, 모친상을 당하다. |
| 선조 |
30 |
1597 |
정유 |
萬曆 |
25 |
39 |
體察使 李元翼에게 斥和攻戰을 주장하는 편지를 올리다. |
| 선조 |
32 |
1599 |
기해 |
萬曆 |
27 |
41 |
3월, 玉淵書堂에 낙향해 있던 유성룡을 찾아뵙다. ○ 7월, 이황의 사당에 참배하고 商山(尙州)의 鄭經世를 방문하다. ○ 8월, 善山의 盧景任을 방문하다. |
| 선조 |
34 |
1601 |
신축 |
萬曆 |
29 |
43 |
4월, 문과에 합격하다. ○ 7월, 성균관 부정자가 되다. ○ 의정부 사록, 성균관 정자가 되다. |
| 선조 |
35 |
1602 |
임인 |
萬曆 |
30 |
44 |
11월, 봉상시 참봉이 되다. |
| 선조 |
36 |
1603 |
계묘 |
萬曆 |
31 |
45 |
전란으로 逸失된 「南陽洪氏世譜」를 다시 만들다. |
| 선조 |
38 |
1605 |
을사 |
萬曆 |
33 |
47 |
8월, 박사가 되다. |
| 선조 |
39 |
1606 |
병오 |
萬曆 |
34 |
48 |
6월, 사헌부 감찰이 되다. ○ 12월, 공조 좌랑, 예조 좌랑이 되다. |
| 선조 |
40 |
1607 |
정미 |
萬曆 |
35 |
49 |
2월, 병조 좌랑이 되다. ○ 4월, 司果가 되다. ○ 5월, 유성룡을 곡하다. |
| 선조 |
41 |
1608 |
무신 |
萬曆 |
36 |
50 |
副司勇, 典籍, 兵曹 佐郞, 統制使 從事官이 되다. |
| 광해군 |
1 |
1609 |
기유 |
萬曆 |
37 |
51 |
1월, 司諫院 正言이 되다. ○ 이해에 正言은 3차례, 持平은 2차례 제수받다. |
| 광해군 |
2 |
1610 |
경술 |
萬曆 |
38 |
52 |
2월, 司果가 되다. ○ 4월, 掃墳차 귀향했다 돌아오던 중 尙州에서 소란을 일으킨 백성을 장살한 사건으로 興陽에 유배되다. ○ 9월, 아우 洪璞을 곡하다. ○ 10월, 放還되다. |
| 광해군 |
3 |
1611 |
신해 |
萬曆 |
39 |
53 |
낙향하여 軍威縣 慕魯洞에 望先臺를 짓고 ‘西潭’이라 自號하다. |
| 광해군 |
8 |
1616 |
병진 |
萬曆 |
44 |
58 |
가을, 장남 홍종경이 진사시에 합격하다. |
| 광해군 |
10 |
1618 |
무오 |
萬曆 |
46 |
60 |
봄, 善山 松亭에서 張顯光, 金涌, 金允安, 盧景任 등과 교유하다. |
| 광해군 |
11 |
1619 |
기미 |
萬曆 |
47 |
61 |
2월, 鄭經世, 李㙉, 李埈, 盧景任 등과 屛山書堂에서 유성룡의 문집을 纂修하다. |
| 광해군 |
14 |
1622 |
임술 |
天啓 |
2 |
64 |
봄, 南溪에 유성룡을 위한 서원 건립에 대해 의논하다. ○ 12월, 장남 홍종경이 죽다. |
| 인조 |
1 |
1623 |
계해 |
天啓 |
3 |
65 |
4월, 병조 정랑이 되다. ○ 5월, 성균관 사예, 병조 정랑이 되다. ○ 6월, 삼남 홍중경이 죽다. ○ 안동 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예천 군수가 되다. ○ 11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
| 인조 |
2 |
1624 |
갑자 |
天啓 |
4 |
66 |
2월,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播遷하자, 병사와 군량을 모집하다. ○ 8월 22일, 군위현 外良谷里 집에서 졸하다. ○ 12월, 군위현 德洞 선영에 장사 지내다. |
| 정조 |
10 |
1786 |
병오 |
乾陵 |
51 |
― |
군위현 良川書院에 봉안되다. |
| 헌종 |
12 |
1846 |
병오 |
道光 |
26 |
― |
木板으로 원집이 간행되다. |
| 고종 |
32 |
1906 |
병오 |
光武 |
10 |
― |
10세손 洪在英 등이 木活字로 속집을 인행하다. | 기사전거 : 年譜, 行狀(鄭葵陽 撰), 家狀(洪處貞 撰), 本集內容 등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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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찬 및 간행 |
저자의 시문은 병란과 화재를 거치는 동안 散佚되고 남은 약간 편이 家藏되어 있었다. 1682년에 손자 洪昇이 유고를 2책으로 收拾 淨寫하여 家藏해 두었다. 5대손 洪瀚과 洪潝, 洪
이 李象靖에게 유고의 校勘과 跋文을 부탁하였으나 이상정이 이를 마치지 못하고 졸하자, 그 아우 李光靖이 대신 유고를 교정하였다. 이때 간행을 하고자 柳
(1730~1808)에게 刊役告成文까지 받아 두었으나, 원집에 실린 〈良川社奉安文〉에 “正宗朝丙午陽坡先生幷享時”라고 註를 단 것에서 왕의 사후에나 쓸 수 있는 ‘正宗’이란 어휘가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간행은 正祖가 서거한 1800년 이후에 이루어졌고, 속집에 실린 후손 洪在謙의 발문에 “往在丙午原集鋟板之日”이라 한 것에서 1800년 이후 丙午年에 해당하는 1846년에 원집이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원집》 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93-49), 규장각(奎5937, 古3428-47), 국사편찬위원회(D3B-199), 장서각(4-6118, D3B-509),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원집을 간행한 뒤 4, 50년이 지났을 때 원집에 실리지 못했던 洪昇이 지은 年譜 및 추후에 수집된 詩文을 수습하여 1책을 만들었다. 1906년에 旁孫 洪圭燮, 洪潤燮과 10세손 洪在英 등이 속집을 인행하기로 결정하여 10세손 洪在謙에게 校正을 맡기고 방손 洪樟燮의 評訂을 받아 年譜, 詩文, 附錄 등을 포함한 1책을 木活字로 인행하였다.《속집》 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93-49), 국사편찬위원회(D3B-199), 장서각(D3B-508, D3B-509),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중 국립중앙도서관장본, 국사편찬위원회장본, 장서각장본(D3B-509),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장본,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 등은 원집과 속집이 합부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846년에 목판으로 간행된 원집과 1906년에 목활자로 인행된 속집을 합부한 것으로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본 영인 저본은 原集 卷3의 제1판은 상태가 불량하여 동일본인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811.98/홍위/서-판)으로 대체하였다.
기사전거 : 序(蔡濟恭 撰), 跋(李光靖 撰), 續集跋(柳畯睦ㆍ洪在謙 撰), 本集內容 등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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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과 내용 |
본집은 原集 4권, 附錄 上下 합 2책과 續集 3권, 附錄 합 1책이 合附되어 있다. 원집의 권두에는 1779년에 채제공이 지은 서문과 원집의 목록이 있다. 권1~2에는 詩 156제, 詞 1제가 실려 있다. 시는 詩體名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앞부분에는 오언시(53), 뒷부분에는 칠언시(70)를 실었으며, 권2 끝 부분에 輓詩 13제를 모아서 실었다. 〈留贈同學諸君〉은 1610년에 유배지인 興陽에서 돌아온 뒤 지은 것으로, 同學에게 시간을 아껴 학문을 닦아 인재를 양성할 것을 권면한 시이고, 〈憶西厓先生〉은 스승 유성룡을 그리며 1606년에 지은 오언시이다. 〈感懷視南溪同志諸君子〉는 스승 유성룡, 李軫ㆍ李輔 형제,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3수의 시를 지어 南溪에서 함께 수학했던 동지들에게 보여 준 것이다. 권3~4에는 疏(1), 書(20), 祭文(8), 墓碣(3), 雜著(8)가 실려 있다. 〈諫院疏〉는 1609년에 사간원 정언으로 재임할 때 올린 소로, 天變을 거친 뒤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풍속을 교화시키기 위해 임금이 辨邪正, 絶嗜慾, 親君子, 遠小人, 廣聖學에 힘써야 함을 건의한 내용이다. 편지는 李元翼, 南以恭, 趙慶起, 李好閔 등과 사위 朴琛(7), 아들들(2)에게 준 편지이다. 체찰사 이원익에게 올린 편지에서는 明軍이 왜적과 和議를 원한다는 소식에, 무기와 병사를 모집하고 산성을 구축하여 방어 준비를 해야 한다고 主戰論을 펼쳤다. 제문은 유성룡, 李輔, 李光俊, 趙翊 등과 아우 洪璞, 아들 洪宗慶ㆍ洪重慶 등을 애도하는 것이다. 묘갈은 先考 洪訢, 文穆, 文應麟의 것이다. 잡저 중 〈上麻提督詩歌拜〉는 명의 提督 麻貴에게 우리나라에 왜적을 막아 주러 온 것에 대해 감사하는 글과 시이고, 〈營建南溪書院議〉는 1620년에 남계에 유성룡을 위한 서원을 건립할 것을 주장한 글이다. 附錄上에는 鄭葵陽이 지은 行狀, 李埈이 지은 묘갈명, 鄭宗魯가 지은 묘지명이 있다. 附錄下에는 이준, 申之悌, 曺友仁 등이 저자에게 준 詩 12제와 柳成龍, 李好閔, 鄭經世 등이 저자에게 준 편지 22편, 曺友仁, 李民宬, 申達道 등이 저자를 애도하며 지은 輓詞 9편이 있다. 또 저자가 세운 新峯草堂을 七灘書堂으로 바꾸면서 1749년에 南泰普가 지은 〈七灘書堂上樑文〉, 1786년에 칠탄서당이 良川社로 바뀌고 그곳에 저자를 배향할 때 李光靖이 지은 〈良川社奉安文〉, 柳
(1730~1806)가 지은 〈西潭先生文集刊役告成文〉이 있다. 원집 마지막에 1785년에 이광정이 지은 발문이 있다. 속집은 권두에 속집 목록이 있다. 권1은 先系로, 唐나라에서 고구려에 文學之士를 파견할 때 온 洪天河를 1世로 하여 10세 洪夢疇까지와, 다시 20代祖 洪殷悅을 1세로 하여 저자의 부친 洪訢까지 20세의 略歷을 기술했다. 권2는 年譜로, 저자가 태어난 1559년부터 살았던 慕魯洞에 兩巖亭을 짓고 柳道奭 등이 儒稧를 맺는 1899년까지의 기록이다. 권3은 詩(14), 賦(17), 策文(1), 書(3), 祭文(1), 附錄이다. 부록에는 증손 洪處貞이 지은 家狀, 손자 洪昇이 1682년에 지은 〈敬書遺稿後〉, 趙任이 지은 輓, 9대손 洪榘燮과 후학 張錫龍이 1897년에 지은 〈兩巖亭開基祝文〉과 〈兩巖亭上樑文〉, 柳道獻ㆍ洪遠華ㆍ金奎昌이 지은 記가 있다. 마지막에 1906년에 柳畯睦이 지은 跋, 10세손 洪在謙이 지은 識가 있다.
필자 : 김진옥(金鎭玉) |
*洪瑋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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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9(명종 14)∼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 자는 위부(偉夫), 호는 서담(西潭). 군위 출생.
참봉
우식(禹軾)의 손자로, 증한성부우윤 흔(訢)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홍혼(洪渾)
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
의 문인이다.
1588년(선조 21)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부모를 정성껏 보호하였다.
이듬해 이원익(李元翼)
이 체찰사로 파견되었을 때 수천언의 척화토적책(斥和討賊策)을 진언(陳言)하여 크게 참고하게 하였다.
1601년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지평
·예조좌랑
·성균관전적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통제영종사관(統制營從事官)으로 선임되어 통제사
를 보좌하여 백성을 구휼하였으며, 전비를 강화하는 데 공이 컸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춘추관기사관·세자시강원사서·정언
·지평
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직언으로 시사를 바로잡았다.
광해군
대에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후생교육에 힘썼다.
그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에 다시 벼슬길에 나가 병조정랑
·예천군수
등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정경세(鄭經世)
·장현광(張顯光)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저서로는 《서담집》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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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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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선생 문과급제방목
| 문과] 선조(宣祖) 34년 (1601) 신축(辛丑)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6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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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적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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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력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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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 생원(生員)
관직 : 지평(持平)
타과 : 선조(宣祖) 21년(1588) 무자(戊子) 생원시(生員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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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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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성명 : 홍흔(洪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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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
성명 : 홍우식(洪禹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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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
성명 : 홍의동(洪義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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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조부]
성명 : 홍혼(洪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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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부]
성명 : 인지신(印之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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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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