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조회시간에 나와서 책소개 발표를 하는 사람에게는 치킨 한 마리 쿠폰을 주겠습니다." 장교장이 편찮은 이후로, 교장권한대행까지 하느라 어깨가 무거운 교감이 저렇게 아이들을 독려했지만, 어느 누구도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새로 우리반에 전학 온 아이가 제법 똘똘하고 야망(!)이 있어 보여 슬쩍 슬쩍, 혹은 노골적으로 옆구리를 쑤셔서 발표를 하게 하였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던 놈이 지난 주말까지도 이렇다할 준비를 하지 않고 있어 내심, '물 건너 갔구나....' 여겼는데, 일요일 기숙사에 입실한 아이에게 다짜고짜 물으니 "어제 2시간 동안 PPT준비했어요" 하였다. 대답을 듣는 순간, '이 맛에 아이들을 만나는구나......' 싶었다.
점점 더 '교사'가 되어 가고 있다. 주말에도 재워달라는 놈이 있으면 재워주고, 먹여주며, 짬이 나면 책을 읽기 보다 아이들을 더 챙기게 된다. 잠은 잘 잤는지, 밥은 잘 먹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자주 들여다 보게 된다. 글을 쓰지 못하고 책을 읽지 못해 우울하던 마음조차 요즘엔 슬그머니(드디어?) 사라지는 기분이다. 나는 조금씩 더 교사다워지고 있는데, 정작 아이들을 만날 기회는 더 줄어 드는 이 어긋남!
신입생정시모집을 하면서 학교는 비상이 되었다. 전국에서도 표나게 인구가 줄고 있는 전남 지역이 아닌가. 해당 지역출신의 중학생이 고등학교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하는 사태가 이미 일어나고 있다. '이 아이에게 우리 학교가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까....다른 곳에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가끔 의혹이 생겼던 아이들도 속깊이 만나보면 하나 같이 속이 문드러져 있거나 심하게 일그러진 곳이 있었다. 24시간을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제 민낯을, 존재의 밑바닥을 오래 숨길 수가 없다. 속깊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 전국에서 유일한 '사제동숙' 고등학교.
교사된 처지로 보면 엄청난 노동강도임에도 쉽게 바꿀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조건 때문에 비로소'교육'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정도의 조건을 감당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좀체 속을 열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따스한 손길이 필요한 많은 아이들이 이 곳을 알지 못한다. 열악한 재정지원문제까지 얽혀, 이대로 손놓고 있으면 존폐위기가 머지 않아 보인다.
'전무출신이니, 어디든 일하게 될 거니까 너무 불안해 하지 말고.....' 일년에 한 번 뵐까 말까한 L교무님은 언제나 등이 따숩게 나를 챙겨주시지만, 장교장이 퇴임하고, 육타원님마저 성래원 문을 닫고 안식년을 가지신다니, 그렇잖아도 유배생활 같이 느껴지던 이 곳에서 실제로 내가 기대고, 손내밀고, 함께 일어서는 동지는 아이들이다. 내가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덕분에 내가 자란다.
이번에 전시한 젠탱글(Zentangle)작품만 해도 그렇다. 나는, '과연 이 놈들이 시간 내에 완성을 해줄까.....'하는 절반의 불안과 의혹을 안고 밑그림만 그려줬을 뿐인데 며칠 동안 공들여 4절 크기의 대작(!)을 건네 주었다. 물론 마무리가 거친 놈도 있었지만, 그건 또 내 몫의 일이다. 매일 아이들의 그림을 손봐주면서 잊었던 즐거움을 다시 맛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