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클래식 명곡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을 꼽는다면 아마도 비발디의 [사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휴대폰 벨소리로부터 대중가요의 전주에 이르기까지 [사계]의 멜로디는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지요. 과연 [사계]의 매력이 무엇이기에 이렇기 인기가 있는 걸까요?
음악으로 사계절의 변화를 그려낸 비발디의 탁월한 묘사력
비발디의 [사계]는 완전한 편성의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곡이 아니라 현악기를 중심으로 구성된 작은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음악지만 대편성 관현악 못지않은 풍성한 화음과 상큼한 선율로 우리의 귀를 사로잡습니다. 또 쳄발로라 부르는 옛 건반악기의 챙챙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도 이 곡을 듣는 재미 중 하나죠.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계]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사계절의 변화를 그려낸 탁월한 묘사능력이겠지요. 작곡가 비발디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를 눈에 보이지 않는 음악으로도 아주 멋지게 그려냅니다. 비발디가 [사계]에서 표현해낸 새소리와 천둥소리,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계절의 느낌을 떠올리다보면 음악을 듣는 재미가 몇 배로 늘어납니다.
비발디는 [사계]의 악보를 출판할 당시 각 계절마다 14행시로 이루어진 소네트를 붙였습니다. 이 소네트의 작가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시구에 베니스의 방언이 사용된 점이나 비발디의 편지에 자주 나타나는 베니스식 철자법이 사용된 것을 보면 비발디 자신이 이 시를 직접 지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바커스의 술”과 같이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구절로 보아 이 시를 기존의 문학작품에서 따왔을 가능성도 엿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유명한 명곡에 시를 붙인 작가가 누구인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지요.
[사계] 악보엔 이름 모를 시인의 소네트뿐 아니라 악보 군데군데에 비발디가 쓴 몇 가지 해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악보를 펼쳐놓고, 악보를 따라가며 음악을 듣다 보면 비발디의 재치있는 메모를 발견하게 되는 기쁨도 있지요. 이를테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을 묘사한 악구에 ‘주정뱅이’란 말을 적어놓는 식이지요. [사계]를 들어보면 음악으로 표현된 계절의 변화가 무척 인간 중심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작품에서 봄과 가을은 인간에게 안락함을 주는 계절로, 여름과 겨울은 인간을 위협하고 공격하는 계절로 그려집니다.
봄 (La Primavera)
1악장 : 봄이 왔다. 새들은 즐거운 노래로 인사를 한다. 그때 시냇물은 살랑거리는 미풍에 상냥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흘러가기 시작한다. 하늘은 어두워지고 천둥과 번개가 봄을 알린다. 폭풍우가 가라앉은 뒤, 새들은 다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봄’을 여는 1악장에서 경쾌한 합주가 울려 퍼지면 세 대의 바이올린으로 묘사되는 새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소리는 너무나 사실적이고 명랑해서 이 작품이 봄의 상쾌함을 나타낸 음악이란 설명을 굳이 덧붙이지 않더라도 음악 자체만으로도 봄의 활기를 전해줍니다.
겨울 동안 얼어있던 시냇물이 녹으면서 마치 중얼거리듯 졸졸 흐르는 소리도 들려옵니다. 변덕스런 봄날답게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는 소리도 들려오지요.
2악장 : 여기 꽃들이 만발한 즐거운 목장에서는 나뭇잎들이 달콤하게 속삭이고 양치기는 충실한 개를 곁에 두고 잠들어 있다.
한가로운 전원 풍경을 나타낸 2악장에선 춘곤증을 이기지 못한 양치기가 꾸벅꾸벅 졸고 있습니다. 그때 양치기의 옆을 지키고 있는 충실한 개가 ‘멍멍’하고 짖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비발디는 개 짖는 소리는 비올라의 짧고 강한 음향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 소리는 마치 타악기 소리 같기도 합니다. 비올라로 개 짖는 소리를 표현한 비발디의 재치에 새삼 감탄하게 됩니다.
1악장 : 이 무더운 계절에는 타는 태양도 사람도 가축의 무리도 활기를 잃고 있다. 들조차 덥다. 뻐꾸기가 울기 시작했다. 산비둘기와 방울새가 노래한다. 산들바람이 상냥하게 분다. 그러나 갑작스런 북풍이 싸움을 걸어온다. 양치기는 갑자기 비를 두려워하며 불운에 떨며 눈물을 흘린다.
거친 폭풍과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여름’을 들어보면 음악이 너무 거칠고 과격해서 비발디가 여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여름’은 바이올리니스트의 화려한 기교가 돋보여 연주효과가 아주 뛰어난 곡이기도 하지요.
1악장 시작 부분을 들어보면 ‘봄’과는 대조적입니다. 너무 더워서 힘이 다 빠져버린 듯 음악도 더위에 지친 것 같지요. 새 울음소리도 어쩐지 분노에 차있는 듯합니다. 뻐꾸기 울음소리는 독주 바이올린의 연주로 표현되는데, 더워서 그런지 불안한 느낌을 주는군요. 빠르게 연주되는 음 중에서 반복되는 음을 제외하고 음높이가 달라지는 부분만 잘 들어보면 ‘뻐꾹’ 소리가 들릴 겁니다.
2악장 : 번개, 격렬한 천둥소리, 그리고 큰 파리와 작은 파리. 광란하는 파리 떼의 위협을 받은 그는 피로한 몸을 쉴 수도 없다.
2악장도 역시 더위에 지친 여름을 잘 보여주는 음악입니다. 비발디는 아주 재미있게도 파리가 욍욍거리며 잠을 방해하는 부분을 아주 실감나게 묘사했어요. 독주 바이올린이 여름날 꾸벅꾸벅 조는 주인공의 모습을 가냘픈 선율로 연주하는 동안 이를 반주하는 바이올린들이 파리가 귀찮게 하는 소리를 가벼운 리듬으로 들려줍니다. 잠시 후 비올라와 첼로, 더블베이스가 멀리서 천둥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려주지요.
2악장 : 일동이 춤을 그치고 노래도 그친 뒤에는 조용한 공기가 싱그럽다. 이 계절은 달콤한 잠으로 사람에게 큰 즐거움을 준다.
2악장에 이르면 1악장에서 먹고 마시며 즐기던 주정뱅이들이 만취한 상태로 곤한 잠에 빠집니다. 비발디는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진 모습을 약음기를 낀 현악기의 꿈결 같은 소리로 표현해냈습니다. 소리를 약하고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약음기를 낀 탓인지 현악의 음색은 몽롱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쳄발로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려옵니다.
자연의 잔인성으로 일관하는 ‘여름’과는 달리 ‘겨울’에는 추운 겨울 따뜻한 방안에서 불을 쬐며 느끼는 만족감을 표현한 음악도 있습니다. ‘겨울’ 2악장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이 바로 그것이지요. 대중가요에 인용되어 더 익숙한 이 멜로디는 아주 편안하고 유쾌한 느낌을 줍니다.
3악장 : 얼음 위를 걷는다. 넘어지는 것이 두려워 느린 걸음으로 주의 깊게 발을 내딛는다. 난폭하게 걷다가 미끄러져 아래로 쓰러진다. 다시 얼음 위를 걸어, 격렬하게 달린다. 이것이 겨울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겨울은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3악장은 사람들이 조심스레 빙판길을 걷는 모습을 담은 짧은 음표들로 시작합니다. 이윽고 발을 헛디뎌 빙판 위로 미끄러지는 모습도 재미나게 표현되지요. 하지만 어디선가 불어오는 따스한 남풍의 선율이 겨울의 추위를 녹이는 듯합니다. 남풍의 주제는 [사계] 전체의 결론을 긍정적으로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합니다.
비발디는 ‘겨울’ 에 정겨운 남풍의 선율을 넣어 겨울에서 다시 봄으로 순환하는 계절의 자연스런 흐름을 표현하려 했는지도 모르지요. ‘겨울’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 사나운 겨울의 북풍으로 마무리되긴 하지만 따스한 남풍의 선율로 봄의 희망과 계절의 순환을 강하게 암시하면서 우리 마음 속에 긴 여운을 남깁니다.
글 최은규 / 음악 평론가 , [교향곡은 어떻게 클래식의 황제가 되었는가]의 저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및 동대학원 석사, 박사과정 수료하고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부수석 및 기획홍보팀장을 역임했다. 월간 [객석] 및 연합뉴스 등 여러 매체에서 음악평론가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예술의 전당, 부천필, 풍월당 등에서 클래식 음악을 강의하고 있다.
첫댓글 좋은 음악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