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상의 전환' 이란 말이 널리 회자되고있다. 그런 사회적 욕구에서 본다면 카툰은 이 시대와 가장 부합되는 예술이란 생각이 든다.
만화, 그 충에 '카툰'은 어느 장르의 예술보다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는 창작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툰은 그 자체가 바로 아이디어의 씨앗으로 또는 모형으로 활용되고 있다.
예술비평가 'J.바아전'은 그의 저서 (예술의 효용론)에서 '예술의 발생 근원은 종교적으로 또는 의사전달의 괼요성에서 있었다' 라고 했다.
그런 뜻에 맞게 카툰의 또 다른 효용성을 우리는 많이 보고 있다. 만화영화나 팬시상품이 그런 것들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뭐 예술의 상업주의와 실용주의를 신봉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반대로 '예술을 위한 예술'을 경원하는 편도 아니다.
달리 또 '대중성'을 주장하고 있지도 않고 새삼스럽게 카툰의 효용성을 글의 주제로 삼는 이유는 보석같은 카툰의 아이디어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그 가치가 거의 사장되는 데 아쉬움이 있어서 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비단 카툰에서만 국한 되지 않는 우리 문화의 구조적 약점이기도 하다.
허위적 제스처가 판을 치고 패거리 숫자와 부피로 가치를 가늠하다보니 작은 것은 뭐가뭔지 모르게 되어 버린 것이 현실이다. 한편으로는 학습현장이 가장 부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학습이란 것이 개개인의 두뇌에 정형화된 지식을 집어넣는 것일진대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내쳐 질 수밖에 없다.
생소한 예술로 보는 카툰의 사정이 그러하다. 우리의 교육과정에서 카툰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비슷한 대목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카툰의 특징인 발상의 탄럭성을 한두 마디로는 요약해서 배울 수 없다는 것은 모르지 않지만 무시된다는 것은..........
이와 비견되는 것으로 '창의성 교육' 이 있다.
창의성을 가르칠 수 있는가?
'발상의 전환'에 도움이 되는 교육과정은 가능한가?
이런 물음에서 그 대답이 있다면 카툰을 이해할 수 있는 학습 프로그램도 꾸밀 수 있을 것이다.
카툰의 이해는 창의성 교육과 직결된다. 어쨌건, 심지어 카툰의 사촌쯤 되는 극화인들조차 카툰에 대한 해독력이 없는 경우를 보게될 때는....
어디에 책임을 돌리고 말고 할 자신이 없다.
카툰의 효응성은 카툰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카툰을 단순히 문화적 행위로 보고 재미로만 끝난다면 그런대로 작품감상은 한 것이 되고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카툰 속에는 다른 예술장르에서흔치않는 발상에 자극을 주는 갖가지 지적 유희가 들어 있다.
이것에 주목하고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논리를 뛰어 넘을 때도 있고 엄밀성을 무너뜨리는 구멍도 발견된다.
추론에서 직관으로 돌변하는가 하면 미친 생각도 있다. 실수할 수 있는 자유도 있다 바로 이런 것들이 문제점의 발상을 바꾸는 데 좋은 모형이 된다.
카툰에는 이런 모형이 가득 담겨있다. 카툰을 벗어나서 이런 자원을 구하려면 아마 여러 종류의 괴팍한 사람과 사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문화 전반에 공허한 부실 구조가 내비치는 것도 그 뿌리가 되는 이런 발상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카툰을 보고자란 서구 예술인들의 아이디어와 대비시켜 보면 당장 바탕이 보인다.
일본이 요미우리 신문을 통해 '카툰의 발상'을 하나하나 모으는 것은 결코 헛일이 아니다. 그들은 귀들의 효용성을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우리 만화계가 어정쩡한 '일제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기실 실험정신이 튀는 '카툰'의 바탕이 없기 때문이다.정말 답답한 일이다.